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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45 : 조선의 역사 87 (성종실록 15) 본문
한국의 역사 545 : 조선의 역사 87 (성종실록 15)
제9대 성종실록(1457~1494년, 재위 1469년 11월 ~ 1494년 12월, 25년 1개월)
9. 성종시대의 역사적인 평가 1
최근 '인수대비'라는 드라마가 케이블 방송에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어 관심깊게 보게 되었다. 마침 성종 대 역사실록을 블로그에 올리는 중이었기에 실록에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내용을 드라마를 통해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되어 나름대로 가치있는 드라마로 생각되고 있다.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 황보인 등 조정 대신들을 모두 죽이고 권력을 잡은 다음 안평과 금성대군, 사육신 등 수많은 신하들의 목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어린 조카 단종도 교살하였다. 세조 대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공포정치가 지속되었으며 측근정치로 정난 공신들의 세상이 되었다.
소위 말하여 세조는 '대의'를 위해서 그리고 '왕권의 안정'을 위해서 계유정난을 도모하여 성공하여 권력을 쟁취하였다. 그리고 그를 반대하던 수많은 충신 열사를 죽이고 또 정통성을 가진 어린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귀양을 보내 죽여야 했던 당시 세조의 참담한 심정를 누가 알겠느냐마는 그의 뒤에서 한명회, 신숙주를 위시하여 공신들의 탐욕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정난 성공 후 그들은 무소불위의 권력과 부귀영화는 누리면서 세종, 태종대의 찬란하게 꽃피기 시작했던 문화통치와 부국강병책을 중단내지 퇴보시킴으로써 조선의 역사 발전 원동력은 갑자기 멈춰지고 후퇴하는 변곡점이 되었으며, 유교의 통치이념을 추구하던 조선 사회에 부도덕과 비윤리가 힘에 의해서 정의로 정당화 될 수 있다는 이중성의 허울과 가식의 이념과 사상을 당연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성종 시대는 이러한 세조 시대의 상처를 어느정도 치유하는 업적을 남기기는 하였으나 뿌리깊은 망국의 암초는 서서히 자라나고 있었다. 정희왕후의 7년 수렴청정에 이어 인수대비의 철저한 궁중 장악은 성종의 언행에 많은 제약을 가져다 주었고 후궁들과 인수대비의 성화에 결국 성종은 폐비 윤씨를 사사함으로써 다음 왕인 연산군 대에 피비린내나는 사화를 초래하게 됨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앞으로 백년간 폐비 윤씨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도록 하였지만 이미 연산군은 자신이 폐비 윤씨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고 한다. 연산군은 세자 시절 이미 학문에 뜻이 없었고 언행이 방자하고 무절제하여 성종의 노여움을 받기도 했으나 성종이 죽자 정비를 통해 낳은 아들은 연산군 융 뿐이었기에 다음 왕위는 자연적으로 폐비 윤씨의 아들 융이 이을 수밖에 없었다.
연산군의 패악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일 정도로 폐비 윤씨에 대한 복수의 일념에 가득찬 상태에서 갑자사화와 무오사화가 일어나 폐비 윤씨 사건에 관련된 성종의 후궁, 신하는 물론 관련된자는 대부분 유배 내지는 죽임을 당하였다. 폐비 윤씨 사건에 연루된 성종의 후궁 두 여인은 연산군이 직접 매질을 하여 즉사시켰으며 그녀들의 아들은 모두 유배보내 사사시켰다. 또 할머니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 혼절한 인수대비가 며칠 후 사망하는 패륜도 저질렀다.
이러한 패악을 보다못한 신하들이 결국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등극하였으나 반정공신들에 의해 왕권은 신권에 의해 허수아비 같은 역활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리고 세조 이후 왕권과 신권을 둘러싼 왕족들과 신하들의 줄기찬 왕위 찬탈 음모와 신하들의 반정과 사화는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 허약한 왕권을 우롱하며 신권우위 조정은 권신들 끼리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에만 급급하여 백성을 위한 정치보다 당을 위한 정치, 권력쟁취를 위한 정치,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한 탐욕 등이 어울려 백성들은 토탄에 빠져 반란과 역모를 포함한 민란이 사방에서 일어났고 백성들은 수탈에 고향을 등지고 대부분 유랑민이 되어 떠돌이 신세가 되었으며 그러한 가운데 조선은 시간의 갈수록 무능과 부패가 더욱 심해져 마지막 장을 향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허약한 인종,명종,선조를 잇는 동안 조선은 피폐해졌고 당쟁은 심화되었으며 국가의 안위보다 당론이 앞서는 파당싸움에 세월을 보내다가 임진왜란을 맞게 되었고 조선군은 파죽지세로 올라오는 일본군을 어디에서도 감당할 수도 없었지만 이순신이라는 한 장수에 의해 해전에서 23전 23승의 전승 기록을 세우면서 왜군의 서해 진출을 차단함으로써 기울어져가던 조선을 구명하였다.
그후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비교적 성공을 거두었으나 내부적으로 거센 신하들의 성화에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의 살해로 이어지는 실정, 그로인한 인조반정을 거쳐 왕으로 옹립된 무능한 인조는 병자호란을 맞아 청나라 침공을 막지 못하고 남한산성에서 40일간 항쟁하다가 결국은 송파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치욕적인 항복을 하게 되었고 이후 조선은 망할때까지 청의 지배하에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외척들이 세력을 장악하면서 신하들은 하수아비 왕만 골라 세우고 그들 끼리는 권력을 독식하며 서로 파당을 이루어 그들 세력들 간의 세력 경쟁과 권력쟁취를 위한 반복된 사화로 인해 조선을 나락으로 빠트린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래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조정과 지방은 사림 세력과 관리들의 부패와 수탈이 극심하였고, 풍양 조씨, 안동 김씨 등 강력한 외척들의 등장하여 유약한 왕만 골라 옹립함으로써 왕권은 사라지고 신권만이 저정을 움직이는 상태가 되자 조정과 지방 탐관들의 비리와 수탈은 극에 달하였으며 백성들은 토탄에 빠지는 등 조선은 망국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래는 전주 이씨 가문에서 작성한 성종시대에 대한 치세 요약 및 평가 기록이다. 내용은 부분적으로 부풀리고 첨가한 듯하나 대체로 정확성이 있어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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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대왕(이하 성종이라 함)의 유년기 시절에 관련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때문에 그의 성장과 학문에 대해 접근하기란 상당히 어렵다. 다만 단편적으로 그의 인물됨이 뛰어나 세조에 의해 태조와 비교되기도 한 것으로 보아 제왕지재(帝王之才)가 있었던 것 만큼은 틀림없는 것 같다. 어릴 때의 총명함과 재기(才氣) 및 용기 등이 서술되는 것은 모든 영웅들에게 공통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둘째 손주인 이 아이는 5살 되던 해(1461)의 정월에 자산군(者山君)으로 봉해지게 된다. 봉군되는 명칭이 매우 특이함이 느껴지는데 왜 이렇게 봉군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이는 왕의 형인 월산군(月山君)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는 1468년(예종 즉위)에 현록대부(顯祿大夫) 자을산군(者乙山君)으로 올려졌다고 했는데 현록대부는 종친의 정1품에 해당한다. 여기서는 다만 그 품계만 현록대부로 올려진 것으로 보이며 적어도 1464년(세조 10) 이전에 잘산군(?山君)으로 개봉되었던 것이다. 이 후 성종이 세조조에 등장하는 것은 몇 차례 되지 않고 또 그 내용도 사냥에 동행하거나(세조 10년 8월 8일) 하사품을 내리거나, 농장 혹은 노비들을 내릴 때(13년 11월 · 14년 3월 · 4월)와 길례(吉禮)를 올릴 때(12년 8월 · 13년 1월), 사신을 접대할 때(14년 7월), 세조가 불예(不豫)하여 그의 집으로 왔을 때(14년 8월) 등이다.
공식적인 승계 절차인 적장자 상속이라는 왕위 계승 절차를 밟지 않고 왕위에 오르게 되는 경우를 살펴보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번째는 왕실에 적장자가 없고 차자가 있을 경우, 둘째는 왕실의 혈통이 끊어져 지자(支子)들이 있을 경우, 셋째는 적장자는 있더라도 순서를 뛰어넘어 권도(權道)로서 시국에 따라 왕위에 오르는 경우 등이다. 성종의 즉위는 바로 세번째에 해당한다. 그 의미는 바로 제왕지기(帝王之氣) 혹은 천명(天命)이 그에게 내렸음을 나타내며 당시의 상황은 왕의 형인 월산군의 잦은 병치레 등은 왕에게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여 주었다. 더구나 조부인 세조의 총애와 정희왕후의 기호(嗜好), 장인인 한명회와의 관계 등은 왕의 위치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이 시점에서 성종의 혼인 문제가 어떻게 맺어지고 행해졌으며 그 자손으로는 누가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한명회의 딸로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가 세상을 떠난 뒤 이어서 계비가 된 윤씨가 폐비되는 과정과, 다시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尹氏)를 맞이하는 것은 성종조 최대의 왕실 사건으로 기록되었고, 이는 강력한 왕권의 행사에 있어서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한 사건이기도 하다. 즉 연산군의 실정이 그의 친모인 폐비 윤씨로 인한 것이라는 지적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어지는 중종반정은 정치권의 또다른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먼저 성종이 처음으로 맞이한 배필은 당대 최대의 권력가인 영의정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의 둘째 딸이었다. 한명회의 첫째 딸은 예종의 비인 장순왕후(章順王后)였지만 5세로 일찍 죽은 인성대군(仁城大君) 분(糞)을 낳고 열 아홉의 나이로 죽었다. 둘째 딸인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와 장순왕후와는 11살의 차이가 있으며, 성종은 장순왕후의 작은 조카였다. 그러나 공혜왕후는 성종보다 한 살 위여서 배분상의 문제가 있을 뿐 연령상으로는 적합했다. 그리하여 1466년(세조 12) 8월에 잘산군의 나이 10살, 공혜왕후는 11살로 배필이 정해진 뒤 이듬해 1월 12일에 영응대군(永膺大君) 염(琰)의 집에서 친영(親迎)하였다. 성종이 1469년 11월 30일에 즉위하자 그녀 역시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성종 5년(1474) 4월에 소생없이 열 아홉 꽃다운 나이로 인생을 마감하였다.
이즈음의 자을산군(者乙山君) 즉 성종의 근황은 점차 궁궐내의 사람들 뿐만 아니라 모든 정치 세력들로부터 그 능력과 품성이 뛰어남을 인정받고 있었다.
당시에는 세자로서 예종이 그 역할을 충실히 하면서 왕위 계승 수업을 순조롭게 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1468년 9월에 세조가 서거한 뒤 예종이 왕위에 올라 세조의 죽음 뒤의 정치질서를 다시금 바로 잡았다. 그러나 한가지 아쉬운 것은 예종에게 왕자가 태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장순왕후의 죽음과 인성대군의 조졸은 일차적으로 후계가 끊어짐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이를 다시금 잇기 위해 안순왕후(安順王后)를 계비로 맞아들여 일찍 죽은 이들을 포함하여 2남 2녀를 두었다. 1남은 제안대군(齊安大君)이고 1녀는 현숙공주(顯肅公主)였다. 제안대군이 태어났고 또 예종의 춘추가 한창 왕성한 때인 스물 전후의 나이인지라 누구도 예종의 혈통에서 왕실을 계승하리라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만큼 즉위할 때의 예종은 건강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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