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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52 : 조선의 역사 94 (제10대 연산군일기 2) 본문
한국의 역사 552 : 조선의 역사 94 (제10대 연산군일기 2)
제 10대 연산군(계속)
학문과 민중에의 인권 탄압
원각사를 폐하고 장악원을 원각사로 옮겼으며, 기생을 양성케 했다. 각 도에 채청사와 채홍사를 파견하여 소녀들과 말들을 징발하게 하고, 성균관의 학생들을 쫓고 그곳을 유흥장으로 만들고 경연(經筵)을 폐지한 후 사간원도 없애 버렸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유흥을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과 사냥터를 조성할 목적으로 민가를 부수고 사람들을 멀리 쫓아내어 철거민들이 발생하였다.살던 집이 철거되어 생존권을 침해당한 민중들은 당연히 철거에 항의했고, 대신들도 연산군에게 민중들의 원성이 자자하다고 비판하였다.
그해 음력 7월 20일에는 연산군을 비방하는 언문 투서가 발견된 것을 계기로 언문을 아는 자를 모조리 잡아들이고 언문 서적을 모두 태워 버리는 등 언문 사용을 금한다. 그에 대해서는 연산군의 문화적 잘못이라는 평이 있다.
더욱이 서총대(瑞蔥臺)라는 유흥장을 만들면서 민중을 강제로 동원하고, 베를 무더기로 바치게 하여 즉 민중들의 노동력과 재산을 수탈하여 민심도 돌아서게 되었다. 또한 자신을 비방하는 한글투서가 발견되었다 하여 한글의 사용을 금지하기도 했다.
1505년(연산군 11년) 음력 6월 9일 신료들이 처음으로 헌천 홍도 경문 위무(憲天弘道經文緯武)라는 존호를 올렸으나 자신에게는 과분하다고 물리친다. 그러나 마지못해 받는 듯 하면서 존호를 받아들인다.
음란 행위
채청사 와 채홍사 를 파견하여 흥청 소녀들과 말들을 징발한 것으로 부족한 연산군은 종친, 빈객 및 문신의 처첩을 빼앗아 간통을 즐기기도 했다. 이에 좌절한 일부 관료들은 사직하거나 낙향하였고, 아내와 딸, 첩을 빼앗기고 사직하거나 숨어버리는 관료들도 있었으며 이는 조혼을 부추겼다. 성균관과 홍문관, 예문관을 유흥장으로 만들고 술과 기생을 자주 불러들여 연회와 만찬을 하였으므로 시중에는 '흥청망국'이라는 유행어가 나타났는데, 여기에서 흥청망청이라는 단어가 파생되기도 하였다. 큰어머니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를 어머니와 같이 생각하고 가까이 하다가 범하였는데, 수치심을 느낀 박씨는 자결하였다.
복수
연산군은 폐비 윤씨를 모함하여 사사하게 만든 성종의 두 후궁인 귀인 정씨과 귀인 엄씨에게 곤장형을 내렸으며 그 집행을 그들의 소생인 안양군과 봉안군에게 담당시켰다. 하지만 안양군과 봉안군은 정귀인과 엄귀인이 자신의 모친이라는 이유로 곤장을 때림에 있어서 사정을 봐주면서 때렸다. 이에 머리끝까지 화가난 연산군은 안양군과 봉안군에게서 몽둥이를 빼앗아서 정귀인과 엄귀인을 마구 폭행해서 숨을 끊어놓았다. 연산군은 그것도 모자라서 정귀인과 엄귀인이 사망한지 한참이 지나고 나서도 매질을 멈추지 않았다. 연산군은 두 귀인에게 각각 1천번 이상의 몽둥이질을 하고 나서야 매질을 그쳤다. 그리고 정귀인과 엄귀인의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서 젓갈로 담근 뒤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뿌렸다. 이후 안양군과 봉안군은 귀향을 보낸뒤 사사시켰다.
폐위
1506년 음력 9월 2일 성희안, 박원종 등이 거병하여, 정치에 별로 관심도 없던 성종의 둘째아들 진성대군(중종)을 왕으로 추대하였고 연산군은 폐위되어 민가에 숨어있다가 체포되어 경기도 김포군 교동(喬桐)에 추방되었다. 이때 장녹수 등 그의 후궁들은 한성부 종로, 남대문 등에서 투석사형당하였으며 연산군의 어린 아들들도 반정군에 의해 살해 당했다. 연산군이 강화도로 유배되자 그를 독살하려는 시도들이 있었으나 한때 그를 동정했던 당시 강화 부사의 노력으로 독살 위기를 모면하였다. 강화도에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숨을 거두기 직전 폐비 신씨가 보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죽자 시중에서는 독살설이 유행하기도 했다.
평가
2차례에 걸친 사화로 연산군에 대한 반감은 사림파뿐만 아니라 훈구세력들간에도 커지게 되었다. 대체로 즉위 초의 일부 업적을 제외하고는 연산군에 대해서는 좋지 않은 평가뿐이다.
다만 연산군은 본래가 학문을 싫어하는지라 신하들은 이를 이용하여 반대파를 사초(史草) 문제로 모함하여 무오사화를 일으켜 사림(士林)을 살해하였고 윤씨 사사문제(賜死問題)에 관련된 선비들을 대량 학살하였다는 평가도 있다.
또한 시정을 공박하는 한글 투서를 이유로 한글 사용을 금한 일은 연산군의 결정적인 문화적 잘못이라는 평이 있다.
홍문관과 사간원을 없애고 경연(經筵)과 상소제도를 중단시키는 등 왕을 견제할 수 있는 여론제도를 크게 위축시킨데다가, 갑자사화를 계기로 훈구파도 심한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사후 연산군은 일방적인 악인으로 규탄받아왔으나, 1990년대 이후 연산군에 대한 재평가 시도가 일각에서 나타나고 있기는 하다. 정치학자 신동준 선생님의 역작 명저 '연산군을 위한 변명'은 연산군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이다.
그의 치세는 개국 100년의 조선왕조에 한 시대의 획을 그었으며, 이후 50여 년간 사화(士禍)라는 유혈극이 잇따라 일어나 그것은 선조 이후 다시 붕당(朋黨) 및 붕당정치로 확대 및 악화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은 이후 신하들로 하여금 임금을 몰아내고 그것을 합리화할 수 있다는 방자한 자신감을 심어 준 불행한 사건이었다.
가족 관계
- 부 : 제9대 성종
- 모 : 폐비 윤씨
- 왕비 : 거창군부인 신씨(居昌郡夫人 愼氏)(임영대군의 외손녀, 단경왕후의 고모)
- 원손(元孫) - (요절)
- 휘신공주(徽愼公主):이수억(李壽億) - 구문경에게 출가
- 폐세자 황(廢世子 皇) - 연산군 폐위 후 유배지 정선에서 사사 됨 (10세)
- 창녕대군 성(昌寧大君 誠) - 연산군 폐위 후 유배지 황해도 수안에서 사사 됨 (5세)
- 이복억(李福億 公主)
- 인수대군(麟壽大君) - 창녕대군과 동일인물 가능성이 있음
- 영수(榮壽) - (요절)
- 총수(聰壽) - (요절)
- 후궁 : 숙의 이씨(淑儀 李氏)
- 양평군 인(陽平君 仁) - 연산군 폐위 후 제천에서 사사 됨
- 이돈수(李敦壽 王子) - 연산군 폐위 날 사약먹고 사사 됨
- 후궁 : 숙의 윤씨(淑儀 尹氏)
- 후궁 : 숙의 곽씨(淑儀 郭氏)
- 후궁 : 숙의 권씨(淑儀 權氏)
- 후궁 : 숙의 민씨(淑儀 閔氏)
- 후궁 : 숙용 장씨 장녹수(淑容 張氏) - 장녹수(張綠水)
- 이영수(李寧壽 翁主)
- 후궁 : 숙용 전씨(淑容 田氏)(전전비(田田非) - 중종 반정 후 장녹수와 함께 참수됨
- 후궁 : 숙원 최씨(淑媛 崔氏)
- 후궁 : 숙원 장씨(淑媛 張氏)
- 후궁 : 숙원 이씨(淑媛 李氏)
- 후궁 : 숙원 김씨(淑媛 金氏)(김귀비(金貴非) - 중종 반정 후 장녹수와 함께 참수됨
- 후궁 : 숙용 우씨(淑容 牛氏): 우부리(牛夫里)의 딸
- 후궁 : 내인 정금(內人 鄭今)
- 이함금(李咸今 翁主)
- 후궁 : 궁인 김씨(宮人 金氏): 김숙화(金淑華), 나주의 기생출신
- 후궁 : 궁인 안씨(宮人 安氏): 후에 麗媛 安氏(여원 안씨)로 추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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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복합(李福合 王女) - 생모미상
- 이정수(李貞壽 王女) - 생모미상
- 옹주 - 생모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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