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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55 : 조선의 역사 97 (제10대 연산군일기 5) 본문
한국의 역사 555 : 조선의 역사 97 (제10대 연산군일기 5)
제10대 연산군 일기(1476~1506년, 재위: 1494년 12월~1506년 9월, 11년 9개월)
2. 연산군의 등극과 광적인 폭정
어린 시절을 고독하게 보낸 세자 융은 왕으로 등극하면서 자신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광폭한 성격을 어김없이 표출하기 시작하엿다. 12년 집권기 중 두 번에 걸친 사화를 통해 엄청난 인명을 죽이는가 하면, 자신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던 무리는 단 한 사람도 곁에 두지 않는 전형적인 독재 군주로 군림했다.
게다가 여염집 아낙을 겁탈하고 자신의 사냥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민가를 철거하는 등 극악무도하고 패륜적인 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이런 폭정의 결과로 그는 백성들의 저항을 받는 희대의 폭군으로 인식되었고 마침내 박원종 등의 반란으로 폐출되기에 이른다.
연산군은 성종 즉위 후 7년이 지난 1476년 성종과 숙의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같은 해 왕비였던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가 병으로 죽자 윤씨가 왕비에 책봉되었고 그녀의 아들 융은 연산군에 책봉되었으며, 3년 후인 1479년 윤씨가 폐출되었고 그 후 5년 만인 1483년 8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세자 책봉 후 11년 후인 1494년 성종이 죽자 조선의 10대 왕으로 등극했다. 그때 그의 나이가 19세였고 윤씨가 폐출된 후 왕비에 책봉된 정현왕후의 아들인 진성대군은 태어나서 6살이었다.
그는 19세에 등극했지만 섭정은 받지 않았다. 그가 왕위에 오를 때가 12월이었던 만큼 며칠만 지나면 성년이 되는 나이였기 때문이었다.
1494년 12월 왕위를 이어받은 연산군은 적어도 무오사화를 겪기 전까지는 폭군의 모습은 아니었다. 즉위 초에 그래도 성종조의 평화로운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졌고, 인재가 많았던 덕분에 조정과 민간은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연산군은 이 4년 동안의 치세는 오히려 성종 말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퇴폐풍조와 부패상을 일소하는 기간이었다. 그래서 등극 6개월 후에는 전국 모든 도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민간의 동정을 살피고 관료들의 기강을 바로잡는 등 내치에도 힘썼다. 또한 인재를 확충하기 위하여 별시문과를 실시하여 33인을 급제시키고, 변경 지방에 여진족의 침입이 계속되자 귀화한 여진인으로 하여금 그들을 회유케 하여 변방 지역의 안정을 꾀하기도 하였다.
문화 정책에서도 유능한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케하는 제도였던 '사가독서'를 실시하여 학문의 질을 높이고 조정의 학문 풍토를 새롭게 하였으며, 세조 이래 3종의 <국조보감>을 편찬해 후대 왕들의 제왕 수업에 귀감이 되도록 했다.
하지만 이 4년 동안 연산군은 누차에 걸쳐 사림파 관료들과 신경전을 벌이게 된다. 명분과 도의를 중시하는 사림들은 사사건건 간언을 하는가 하면 학문을 싫어하던 연산군에게 학문을 강요했다. 원래 학문에 뜻이 없었고 학자와 문인들을 경원시하던 연산군은 그 때문에 사림들을 귀찮게 여겼다.
이때 때마침 일어난 것이 무오년 이른바 '무오사화'이다. 사림파의 거두 김종직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이 극에 달해 있던 유자광, 이극돈의 상소로 시작된 이 사건은 그렇지 않아도 사림 세력을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던 연산군에게 사림 세력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였다. 이에 이미 죽은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하고 김일손 등은 능지처참에 처하여지고 다수의 사림 세력들이 귀양을 가기에 이르렀다.
연산군은 무오사화를 통해 집요한 간언으로 자신과 대립했던 사림 세력을 축출하는 한편 일부 훈신 세력까지 제거하게 되었고 왕권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연산은 급속도로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조정을 장악한 연산군은 매일같이 향연을 베풀고 기생을 궁으로 끌여들였으며 심지어는 여염집 아낙까지 겁탈하거나 자신의 친족과 상간하는 등 폐륜적인 행동을 끓임없이 자행했다. 이때 궁중으로 들어온 기생들을 '흥청'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마음껏 떠들고 논다는 뜻인'흥청거리다' 라는 말이 생겨났다.
연산군의 이 같은 사치와 폐륜 행각은 결국 국고를 거들내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국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고 공신들에게 지급한 공신전을 강제로 몰수하려 했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은 이에 반발하여 왕과 대립하며 연회를 줄이고 국고를 아낄 것을 간청했다. 이때 정권을 장악하려던 임사홍은 폐비 윤씨 사건을 연산군에게 밀고하게 된다. 연산군은 자신의 친모가 폐비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 자세한 내막은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임사홍의 밀고로 그 자세한 내막을 알게 되자 관련자들을 모두 죽이는 대살상극을 자행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갑자사화'이다.
연산군 시대 폐비 윤씨 사건을 밀고하여 갑자사화를 일으키게 만든 조선의 대표적인 간신으로 평가받고 있는 임사홍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임사홍
임사홍(任士洪, 1445년 ~ 1506년 음력 9월 2일)은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이자 외척, 사상가,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풍천, 초명은 사의(士毅), 자는 이의(而毅)이다. 신수근 등과 함께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을 연산군 에게 알려 갑자사화의 빌미를 제공한다. 음서로 출사한 뒤 사재감사정과 사직을 거쳐 1465년(세조 11년)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은 숭록대부 지중추부사(崇祿大夫 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작위는 풍성군(豊城君)이다.
조선 왕실의 인척이자 겹사돈으로 효령대군의 손녀이며 보성군의 딸인 전주 이씨와 결혼하여 왕실의 인척이 되었으며, 그 아들 임광재는 예종의 딸 현숙공주(顯肅公主)와 혼인하고, 다른 아들 임숭재는 성종의 딸 휘숙옹주(徽淑翁主)와 혼인하여 두 임금의 사돈이기도 했다. 다른 아들 임희재는 사림파 정치인이었다. 관료생활 초반 한명회를 규탄하는 등 소신으로 활동하다가 1478년의 흙비 문제를 놓고 금주와 근신을 주장하는 대간에 대해 대단하지 않은 변고에 술을 금지할 필요가 있느냐고 비판했다가 언관들과 갈등하다 12년간 유배상활을 했다.
이후 사역원과 승문원에서 한어를 가르치다가 이조판서(吏曺判書), 병조판서, 숭정대부 이조판서가 되었다가 1504년 풍성군에 봉해지고, 우참찬, 좌참찬을 거쳐 숭록대부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그러나 중종반정 직후 살해된 뒤 20일만에 부관참시당했다. 글재주에 능하여 많은 신도비와 묘비명을 썼고, 저서와 작품을 남겼으나 묘비명을 제외한 작품들은 대거 실전되었다.
그뒤 아들 임숭재가 연산군의 총애를 얻어 정계에 복귀했다. 이후 폐비 윤씨 추숭 문제를 놓고 사림파(士林派)와 갈등하던 연산군에게 유자광, 신수근 등과 함께 장흥군부인 신씨와의 상봉을 주선한다. 사림파를 해치기 위해 갑자사화를 일으켰다는 설이 통설로 제기되어 왔으나 갑자사화 때는 그를 변호하던 훈구파 인사들이 대거 희생되었고, 직접적인 원한관계에 있는 인물은 처조카 이심원만이 유일했으므로 1970년대 이후 궁중파대 부중파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시각이 대두되었다. 셋째 아들 임희재는 김종직의 제자였고, 연산군과 중종 때의 사림파 정치인 남곤(南袞)은 그의 외사촌 동생이었다.
생애
출생과 초기 활동
임사홍은 1445년 의정부좌찬성 임원준과 남규(南珪)의 딸인 정경부인 의령 남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남규(南珪)는 개국 공신 남재의 후손이며, 연산군과 중종 때의 사림파 정치인인 지정 남곤의 친할아버지로, 그는 남곤의 외사촌 형이기도 했다.
처음 이름은 사의(士毅)였으나 뒤에 사홍(士洪)으로 개명하였다. 효령대군의 손녀딸이자 보성군(寶城君) 이합(李㝓)의 딸인 전주 이씨와 결혼하여 왕실의 인척이 되었다. 그를 비난한 이심원은 보성군의 아들 평성도정의 아들로 처 이씨의 배다른 조카였다.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았고 글을 잘 지었다. 그뒤 한성부의 저명한 문인에게 수학하였으나 그가 후일 간신의 대명사로 몰렸으므로 그의 스승이 누군가는 알려지지 않았다.
청년기
이후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가문의 음덕으로 음서로 출사하게 된다. 음서(蔭敍)로 출사하여 사재감사정(司宰監司正)에 이르렀다. 그뒤 성균관에 입학하여 성균관유생으로 수학하였다.
1465년(세조 11년) 세조의 왕명을 받고 특별히 경서를 강론하였다.
사재감사정을 거쳐 사직(司直)으로 재직 중인 1465년(세조 11년) 알성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여 요직에 발탁되었다.
과거 급제와 관료생활 초반
1466년 다시 과거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다른 응시자와 답이 같다는 이유로 급제하지 못하였다. 그 뒤 다시 사재감사정(司宰監司正)을 거쳐 홍문관교리 등을 지냈다. 그는 조정의 공신들과 외척들이 권력을 남용한다고 비판하였으며 당대의 권신인 한명회(韓明會), 신숙주 등의 월권행위를 줄기차게 비난하기도 했다.
그뒤 1468년 외척인 남이와 강순 등이 역모를 한다고 비난할 때, 그들이 역모를 했다고 믿지 않던 그는 남이, 강순 공격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러나 1469년~1474년 사이(조선 성종 재위 기간) 조정의 대신들에게 ‘소인배’라는 말을 들을 만큼, 임사홍은 조정 대신들의 큰 공공의 적으로 몰리게 된다. 그러나 1478년 언관들과의 사소한 일로 마찰을 빚게 된다.
1468년(예종 1년) 예종 즉위 후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이 되고, 1469년(예종 2년) 1월 1일 사섬시 정(司贍寺正) 최영린(崔永潾)과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 김신몽(金信蒙)·성균 사성(成均司成) 고태정(高台鼎) 등과 함께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기 위한 원접사절단의 일행으로 개성에 파견되었다. 윤 2월에 되돌아와 통훈대부로 승진, 사재시정(司宰寺正)이 되었다.
관료 생활
언관, 경연관 활동과 직언
글씨에도 자타가 인정하는 당대 최고였던 그는 성종 즉위 초, 성종의 명을 받아 월산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의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지었다. 이후 승문원(承文院)에 보직되었다가 간관들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왕이 간관들을 해임한 뒤에 다시 등용되었다.
성종 즉위 후 행예문관 전한 지제교 겸 경연 시강관(行藝文館典翰知製敎 兼經筵侍講官)이 되어 경연에 참여하였고, 이어 홍문관전한(弘文館典翰)과 승문원 참교(承文院參校)를 겸하였으며 그뒤 춘추관수찬관(修撰官)을 겸하여 《세조실록》 편찬과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개혁, 감찰 활동
그뒤 사재감정(司宰監正)이 되었다. 1469년 성종 즉위 직후 그는 조정에 내불당(內佛堂)을 철거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여러 번 올렸다. 1470년 다시 내불당을 철거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의 상소에 왕실은 내불당을 옮길 것을 결정하고 대신들에게 적당한 곳을 물색하게 했다. 그해 4월 예문관을 겸관하였다. 1471년 1월에는 경연시강관(侍講官)이 되었으며, 그때 경연장에서 대간이 불경을 사올 것을 건의한 것을 논박하고, 흉년을 대비한 곡식 수송을 독촉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뒤 다시 사재감정이 되어 영성부원군(寧城府院君) 최항(崔恒)으로부터 문장력을 인정받아 추천되었다.
1471년 초에는 한명회, 신숙주 등과 경연시강관의 한사람으로 성균관 문묘에서 경연을 강론하였고, 그해 10월 9일에는 왕에게 《국조보감(國朝寶鑑)》을 강론하고 상으로 활 1장(張)을 하사받았고, 10월 11일에는 밤에 경연을 강하고 유의(襦衣)를 선물로 받았다. 그해 12월 세조실록 편수관(編修官)에게 상을 하사할 때 아마 1필과 향표리(鄕表裏)를 상으로 받았다.
1471년말 예문관 전한(藝文館典翰)이 되고 1472년 1월 평안도병마절도사의 선위사로 파견되었다. 그뒤 홍문관 교리로 있을 때 강직한 성품과 소신으로 직언을 했다. 그해 승정원승지로 발탁되었다가 경연관이 되었다.
훗날 그가 27세의 나이에 승지로 발탁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1472년 경연관으로 경연에서 재상도 금지령을 어기고 잘못하면 용서함이 없이 벌을 주어야 된다고 건의했다가 승정원 승지들이 문제삼았으나 성종이 '임사홍이 아뢴 말을 무엇 때문에 핍박하여 쓰게 하였는가'며 승지들을 꾸짖었다.
6월 행 사헌부 집의(行司憲府執義)가 되었다. 7월에는 종친과 결탁하여 불법을 행한 김지경·김계창·방호련 등을 처벌할 것을 건의하였고, 7월 21일에는 부패행위 등을 자행한 이숙(李塾)·강의산(康義山)·김정광(金庭光)·이숭수(李崇壽) 등을 탄핵하였다. 그러나 왕이 무마시키자 이틀 뒤 다시 김계창, 김지경 등을 탄핵하였다. 8월에는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 성준(成俊)과 함께 오백창(吳伯昌) 등을 옥사를 그르쳤다 하여 탄핵하는 등 불법이나 위법행위를 자행한 대소신려들을 가리지 않고 공격하였다.
이러한 그의 능력과 글재주로 성종 초반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사간원 대사간, 예조 참의 등을 거쳐 승정원 도승지, 이조판서가 되었다.
경연 활동
1472년(성종 3년) 9월에는 예문관의 관원을 70명을 선발한 것이 부족하니 더 선발해야 된다는 부제학 유권의 건의에 반발하여 적당하다고 반론을 제기하였다. 12월에는 강원도 평창의 지방관으로 발령되었으나 규피하고 부임을 미룬 김순성(金順誠)을 탄핵, 서용하지 말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12월 8일 다시 사헌부 집의로 왕에게 한명회를 죄줄 것을 상소했다가, 그로 인해 사헌부의 관원이 모두 갈리게 되었다.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권감(權瑊)이 책임지고 인책사퇴하려 하였으나 다른 사헌부 관원들과 함께 스스로 사직을 청하였고 곧 체차되었다. 1473년 1월 성균관사예가 되었다.
이미 과거급제 직후부터 경연관을 겸하여, 1466년 이후 본직 외에도 매일 경연에 참여하였다.
1473년 11월에는 사예(司藝)로 선정전(宣政殿)에 나가 고림정(高林正) 이훈(李薰)·풍성 부정(豐城副正) 이강(李杠)과 문신(文臣)인 사예 장계이(張繼弛), 생원(生員) 손집경(孫執經) 등과 함께 경연을 강하였다. 1474년(성종 5년) 1월 통정대부 예문관 부제학(藝文館副提學)으로 승진하였다.
1474년(성종 5) 성종의 의경세자(의경왕)의 추가 시호를 청하는 것을 잘못된 것이라며 반대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그해 12월 참찬관(參贊官)이 되었다. 한편 1475년 새로 형방승지가 되어 경연에 대한 것을 모르는 신정(申瀞)을 도와주기도 했다. 이를 두고 실록은 '신정은 성품이 말을 잘하여 일찍이 형방 승지(刑房承旨)가 되어서는 아뢰는 일이 자못 자상하였다. 그러나 배우지 아니하고 재주가 없어, 천인(天人)의 이치를 그가 아는 것이 아니고, 임사홍의 말을 따라서 모르는 것을 억지로 급작스럽게 함부로 대답을 하니, 듣는 자가 그를 비웃었다.'라며 비방하기도 하였다.
1475년 6월 17일 통정대부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고 6월 25일 왕명으로 신숙주의 빈소를 조문하고 돌아왔다.
7월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 1476년 3월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가 닷새만에 우승지(右承旨)로 승진하였다. 77년에는 명나라에 파견되는 성절사와 주문사가 모두 공신이라 하여 형평성에 어긋남을 논하기도 하였다.
1477년 폐비 윤씨가 성종의 용안을 긁은 일로 대간과 사헌부, 의금부 등의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왕비는 세자 융(후일의 연산군)의 생모이므로 세자를 봐서라도 탄핵해서는 안된다며 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폐비를 반대한 일로 그는 간사한 인물이라는 인신공격을 당하게 된다.
과부 재혼사건
1477년(성종 8년) 승정원 승지가 되었다. 이때 유자광(柳子光)과 결탁, 지평 김언신(金彦辛)을 사주하여 자신의 조카사위이며, 효령대군의 손자 서원군(瑞原君)의 사위인 승정원 도승지 현석규(玄錫圭)를 '왕안석(王安石)과 같은 소인'이라고 탄핵하도록 사주하였다.
의지할 곳이 없던 과부 조씨는 중매를 통해 김주와 재혼하였다. 그러나 그녀에게 의존하던 친정오라비와 형부는 조씨의 재산이 김주에게 넘어가는 것을 염려하여, 조씨를 폭행하면서까지 둘을 갈라놓으려 했다. 그들은 김주가 조씨를 강간했다고 소장을 제기하였으나 무고임이 드러났고, 이들은 여러 관청에 뇌물을 바쳤다. 이들에게 뇌물을 받은 승정원의 한확은 도승지 현석규를 제외한 다른 승지인 임사홍, 홍귀달을 설득하였다. 그리하여 동부승지 홍귀달이 최종 결정을 내려 '김주라는 사내가 조씨의 집에 기숙하는 것을 보았으니 오라비 된 입장에서 강간으로 오해할수 있다'며 그들을 변호하였다.
그런데 이때 도승지 현석규가 자신만 빼놓고 결정한 것에 분노하여 홍귀달과 싸움이 붙었다. 화가 난 성종은 승지들을 모두 해임했고 그도 이때 체직되었다. 그러나 현석규에 대한 비판이 계속되자 성종은 오히려 현석규를 4자급을 승진시켰고, 얼마 뒤 임사홍이 도승지직에 오르게 된다.
김언신에 이어 유자광이 직접 현석규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성종은 이를 붕당을 만들어 자기 편을 옹호한 일로 보고 김언신을 하옥하였다. 뒤에 이 일이 임사홍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밝혀져 그는 의주로, 유자광은 동래로 각각 유배되었다.
사림파와의 갈등
승정원 도승지로 재직 중인 1478년(성종 9년) 4월 비가 많이 쏟아졌는데, 흙으로 된 흙비가 내리는 변괴가 생겼다. 사간원·사헌부·홍문관에서는 이것을 하늘의 경고로 받아들여 근신해야 하며, 당분간 술을 일절 금지해야 한다는 합동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이때 임사홍은 지나치게 강경해진 대간을 비판한다.
그런데 이때 임사홍은 "그리 대단하지 않은 변괴인데, 이제 곧 국가의 제사가 연이을 지금 술을 일절 금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주장했다. 대단하지 않은 변괴를 하늘의 경고라고 주장하는 것은 과하다는 것이 왕과 승지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러나 삼사의 태도는 매우 강경했다. 이때 임사홍이 "무조건 언론에서 하라는 대로만 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항의를 하였다.
삼사는 곧바로 임사홍을 맹렬하게 성토하였다. 그의 비판 중 술을 금해야 한다는 요구를 반대한 것은 '퇴폐 향락 풍조를 부추겼다'는 혐의를 걸기 좋았고, 흙비의 중대성을 낮춰 보았으니 “하늘의 뜻을 우습게 알았다”고 비난하기 알맞았다. 임사홍이 효령대군의 손녀사위이며 두 아들이 예종과 성종의 사위로서 왕실의 겹사돈이었던 점은 '외척의 발호를 경계해야 한다'는 태종이 세운 조선 정치론의 원칙에 부합하였다. 언관들의 맹렬한 성토로 파직되어 유배되었고, 아무도 그를 나서서 구제하지 않았다.
1478년(성종 9년) 1월 통정대부 이조참의, 4월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가 되었으나 언관들로부터 계속 공격당했고, 그해 유자광 등과 함께 파당을 만들어 횡포를 자행했다는 이유로 유배되었다. 곧 며느리인 공주가 보고 싶어한다는 이유로 유배에서 풀리지만, 조선 성종 재위 기간에는 큰 활약을 하지 못하였다.
유배 생활
그가 몰락하자 그의 주변에 오던 친구들도 왕래를 끊었고 그는 실의의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유배지에서 글과 서예를 가르치며 소일하였다. 그뒤 성종의 특별 지시로 1488년 11월 절충 장군 부호군(折衝將軍副護軍)에 제수되었다.
대간들의 말대로라면 그는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 그러나 성종은 이를 끝까지 거부했고, 그를 귀양에서 풀어주려 애쓰다가 안되자 둘째 아들 임숭재와 자신의 서녀 휘숙옹주를 혼인시키기까지 했다. 임사홍이 워낙 총애하던 신하이기도 했지만, 나중에 보니 스스로도 임사홍의 혐의라는 것이 의심스러워져서이기도 했다.
교육, 외교 활동
그러다 한학과 중국어에 능통하였고 일본어, 여진어 등도 구사하는 재주를 인정받아 1490년(성종 21년) 명나라에 파견되는 관압사(管押使)가 되어 연경에 다녀왔으며, 1491년 9월 승정원 도승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전에 흙비 때 과도한 근신을 비판한 일로 계속 언관들의 탄핵에 시달렸다. 1491년 다시 선위사(宣慰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귀국 이후에는 사역원에서 한어(漢語)를 가르치기도 했다.
1492년(성종 23년) 2월 그를 선위사로 삼은 것이 옳지 못하다며 사헌부와 사간원이 탄핵하였다. 이후 1492년 한 해동안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계속 그를 탄핵하였다. 그해 9월 승문원에 출사하여 한어(漢語)를 가르쳤다.
1496년(성종 26년) 행 부호군(行副護軍)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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