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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57 : 조선의 역사 99 (제10대 연산군일기 7) 본문
한국의 역사 557 : 조선의 역사 99 (제10대 연산군일기 7)
제10대 연산군 일기(1476~1506년, 재위: 1494년 12월~1506년 9월, 11년 9개월)
2. 연산군의 등극과 광적인 폭정(계속)
갑자사화는 겉으로 보기에는 모친 윤씨에 대한 연산군의 복수극으로 비치지만 사실은 연산군과 임사홍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벌인 고의적인 참살극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갑자사화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은 사림 세력뿐만 아니라 연산군의 부당한 공신전 몰수 행위를 비판하며 향락적인 궁중생활에 제동을 걸었던 중신들도 포함되었던 것이다. 이때 연산군은 대신들뿐만 아니라 할머니 인수대비의 머리를 받아 절명케 하는가 하면, 윤씨 폐출에 가담한 성종의 두 후궁들과 그 자손들, 그리고 관련된 내시와 궁녀들까지 모조리 죽여버렸다.
그는 막상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쥐게 되자 문신들의 직간이 싫다는 이유로 경연과 사간원, 홍문관 등을 없애버리고, 정언 등의 언관도 혁파 또는 감원하였으며, 기타 모든 상소와 상언, 격고 등 여론과 관련되는 제도들을 남김없이 철폐해버렸다. 또 성균관, 원각사 등을 주색장으로 만들고, 불교 선종의 본산인 흥천사를 마구간으로 바꾸었으며, 민간의 국문 투서사건이 발생하자 훈민정음의 사용을 금지하기도 하는 등 광적인 폭정을 일삼았다.
자신에게 그토록 충직하던 환관 김처선이 직언을 한다 하여 자신이 직접 활을 쏘아 죽이는 극악한 행동을 하기도 하였다. 그는 김처선에 대한 증오감이 극에 달하여 모든 문서에 김처선의 '처'자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 때문에 절기 중의 하나인 '처서'를 '조서'로 고쳐 부르기도 하였다.
이렇듯 연산군의 폭정이 계속 이어지자 민심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해 전국 각지에서 반정을 도모하려는 무리가 늘어났으며, 급기야 1506년 박원종 등이 군사를 일으켜 연산군을 폐하고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을 왕으로 옹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연산군 폐출이 성공하자 박원종 등은 연산군을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시켜 강화도에 유배시켰는데 두 달 뒤인 1506년 11월 그는 그곳에서 31세를 일기로 한으로 엉어리진 처절한 복수극과 참화를 벌여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는가 하면, 폐륜적이고 향락적으로 보내던 광적인 생을 마감하게 된다.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처럼 신승선의 딸 폐비 신씨와 수많은 후궁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서 4남 2녀의 자식을 얻었다. 후궁 중에는 장녹수처럼 이미 자식이 있는 기생 출신들도 있었다. 연산군은 장녹수를 너무 총애하여 그녀를 비방한 후궁들의 사지를 찢어 죽이고 그들의 머리를 뽑아 후궁들과 궁녀들에게 전시하는 엽기적인 행각을 벌이기도 하였다. 연산군에게는 수많은 후궁들이 있었으나 그들 모두를 후궁으로 인정하긴 곤란하다고 판단하여 자식이 있는 여자들만 후궁으로 인정하고 가계도에 넣었다.
연산군의 묘는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으며 묘에는 '연산군지묘'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연산군은 반정에 의해 쫒겨난 왕이라는 이유로 그에 대한 자료는 대부분 악행에 대한 것만 기록하고 있다. 때문에 연산군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단적으로 "폐륜적 행위를 일삼는 폭군"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최근에 와서는 그의 행위를 왕권 강화 차원의 연산군 나름의 자구책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그의 인간적인 고통과 낭만적인 성격을 부각시켜 동정론을 펴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역사를 단순히 실록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보지는 않는다는 의미에서 연산군에 대한 이러한 평가들은 나름대로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광적인 폭정까지 인간적인 동정론으로 감싸는 것은 위험한 시각이라고 판단된다.
조선 중기 당시의 사고 체계와 삶의 방식을 감안한다면 연산군의 행동은 엄청난 범죄 행위였다. 또 혹자는 연산군의 행동을 왕권 강화책으로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왕권이 강화된다는 것은 단순히 백성들과 신하들 위에 군림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왕이 백성과 신하를 하나로 묶어주는 구심체 역활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연산군의 폭정은 왕권 강화라기보다는 왕권을 볼모로 한 독재의 강권이라고 보아야 될 것이다.
또한 연산군에 대한 동정론을 펴는 사람들은 흔히 조선왕조사에 또 한 명의 폭군으로 기록된 광해군과 비교하려 들지만, 이 또한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광해군은 정치 역학적인 희생자인 데 반해, 연산군은 인륜과 민심을 배반한 독재자였기 때문이다.
장녹수
장녹수(張綠水, ? ~ 1506년)는 조선 연산군의 후궁이다.
아버지는 충청도 문의현령을 지낸 장한필이고 어머니는 첩이었다. 그 때문에 녹수는 성종의 종제인 제안대군의 노비로 살아야 했다. 노비라는 신분적인 한계, 그리고 첩의 자식이란 것 때문에 항상 불행한 삶을 살아야 했던 그녀는 몸을 파는 일도 했고 제안대군의 가노와 결혼해 아들을 낳기도 했다.
그렇게 뛰어난 미색은 아니었으나, 가무(歌舞)를 비롯한 다방면의 예술분야에 천재적인 재능을 겸비하여 그 소문이 자자했다. 연산군은 그 소문을 듣고 녹수를 입궐시켜 숙원에 봉하고 항상 그녀와 함께 했으며, 1503년에는 숙용에 봉하게 된다.
왕의 총애를 바탕으로 그녀의 오빠 장복수와 그의 아들을 양인의 신분으로 올려 놓게 된다. 그러나 권력을 함부로 남용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으며, 이는 연산군이 몰락하게 되는 하나의 원인을 제공한 셈이 되었다. 결국 그녀는 1506년 음력9월 2일, 중종반정으로 빛이 바래고 만다.
장녹수의 최후는 비참하였다. 반정이 성공하고 연산군이 폐위된 후, 반정군들에게 붙잡혀 군기시 앞에서 참형(斬刑)되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참수당한 그녀의 시체에 돌을 던지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녀와 관련한 수많은 문학작품 및 드라마 · 영화 등이 있는데, 김태웅이 희곡을 쓰고 직접 연출한 연극 이가 있고 또한 이(爾)를 원작으로 하여 이준익 감독이 만든 영화 왕의 남자(200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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