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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63 : 조선의 역사 105 (제10대 연산군일기 13) 본문
한국의 역사 563 : 조선의 역사 105 (제10대 연산군일기 13)
제10대 연산군 일기(1476~1506년, 재위: 1494년 12월~1506년 9월, 11년 9개월)
4. 양대 사화를 통한 연산군의 권력 독점(계속)
갑자사화
무오사화로 언론 기관의 기능이 완전히 상실된 상황에서 연산군의 국정 운영은 방만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사림이 완전히 제거된 마당이라 그에게 학문을 권하는 이도 없었고, 간언을 하는 이도 없었다. 더군다나 대신들은 한결같이 연산의 비위에 맞는 인물들로 구성되었다.
조정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연산군은 향락과 퍠륜 행위를 일삼았다. 매일 같이 궁궐에서는 연회가 벌어졌으며, 전국 각지에서 뽑아 올린 수백 명의 기생들이 동원되었다. 게다가 단정할 수는 없으나 자신의 큰어머니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를 겁탈하는 등 종친 간의 상간을 범하기도 했다하기고 하고 , 여염집 아낙을 궐내로 불러들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는 중종반정의 주역인 박원종의 누이로 반정의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겁탈당한 박씨가 '연산군의 아이를 낳았다', '목을 메어 자살했다'는 등 야사에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나 이는 사실은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이렇게 연산군의 사치와 향락이 심해지자 점차 국가 재정이 거덜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신들은 그의 행동을 비판하지 못했다. 오히려 연산군의 폭정을 기화로 권신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국고가 빈 것을 알고 이를 메우기 위해 공신들에게 지급한 공신전을 요구하였고, 노비까지 몰수하려 하자 이에 대신들의 태도는 급변했다. 왕이 사치와 향락에 마음을 빼앗겨 급기야 자신들의 경제 기반까지 몰수하려 하는 것을 더 이상 묵과할 수는 없다고 판단하게 된 것이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대신들은 막상 왕의 요구가 자신들의 이해 관계와 맞물리자 왕의 처사가 부당함을 지적하면서 그동안 못마땅하게 여겨오던 왕의 지나친 향락을 자제해줄 것을 간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하들 모두가 연산군에 반발했던 것은 아니었다. 무오사화 이후 조정은 다시 외척 중심의 궁중파와, 의정부 및 육조 중심의 부중파로 갈라져 있었다. 따라서 공신전을 소유하고 있던 부중파 관료들은 연산군의 공신전 몰수 의지에 반발하고 있었지만, 궁중파는 일단 왕의 의도에 부합하자는 논리를 펴고 있었다.
이런 대립을 이용하여 정권을 잡으려는 인물이 바로 임사홍이었다. 그는 일찍이 두 아들을 예종과 성종의 부마로 만든 척신 세력 중 하나였다. 임사홍은 성종시대에 사림파 신관들에 의해 탄핵을 받아 22년 동안 귀양을 간 적이 있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사림을 싫어한 그는 연산군과 신하들의 대립을 이용하여 훈구 세력과 잔여 사림 세력을 일시에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된다.
여기서 무오사화의 원흉인 유자광과 갑자사화의 원인 제공자인 임사홍은 둘 다 유능한 선비였고 머리가 비상한 뛰어난 인재들이었다. 유자광은 서출 출신으로 이시애의 난을 진압할 당시 남이와 같이 많은 전공을 세운 인물이었고 왕족 출신인 남이보다 자신이 차별 대우를 받자 남이에 대해 항상 시기심이 많았다. 그래서 남이가 쓴 시 구절을 번역하여 '남이의 역'을 일으켜 남이를 죽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는 무오사화에서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번역하여 세조를 비난하는 글이라는 사실을 밝혀내는 등 글씨를 잘 해독하고 쓴 사람의 의도와 심중을 꿰뜷어보는 혜안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다. 임사홍도 유자광에 버금가는 인물로 그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하였으니 생략하겠다.
임사홍은 우선 연산군의 비 신씨의 오빠인 신수근과 손을 잡고 음모를 꾸미던 끝에 성종의 두 번째 부인이자 연산군의 친모였던 윤씨의 폐비사건을 들추어낸다. 폐비 윤씨 사건은 성종이 차후에 100년 동안 다시는 거론하지 말라는 유명을 남긴 적이 있어 그때까지 아무도 그 사건을 입에 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임사홍은 이 사건의 내막을 연산군이 알게 될 경우 윤씨 폐출을 주도했던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에게 동시에 큰 화를 입힐 수 있다는 계산을 한다. 그래서 결국 임사홍의 밀고로 윤씨 폐출 경위를 상세하게 알게 된 연산군은 엄청난 실인극을 자행하게 된다.
사실은 연산군이 자신의 친모가 폐출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알고 있으면서도 성종의 유명이 있었고 또 대신들이 아무도 그 일을 입에 담지 않기에 알고도 모른척 했을 것이다. 그러나 임사홍의 간계로 폐출 사건의 전모를 알게 된 연산군은 이번 기회를 이용하여 나머지 훈구, 척신, 사림 세력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다는 계산을 나름대로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임사홍은 연산군을 이용하여 권력을 잡게 되었고 연산군은 임사홍을 이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꼭 그렇게만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 친모의 추봉과 관련하여 효를 주장하는 유교 신봉자들인 대신들의 반대에 극심한 배신감 내지 불쾌감을 가지고 있었고 또 공신전 몰수에 반발하는 대신들을 일거에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 적절하였으며 한편으로 친모에 대한 복수를 할 수 있다는 복합적인 계산도 헸을 것이다.
연산군은 우선 윤씨 폐출에 간여했던 성종의 두 후궁인 엄귀인과 정귀인을 궁중 뜰에서 그녀들의 아들까지 동원하여 잔인하게 참하였고, 그녀들의 아들인 정씨 소출의 안양군, 봉안군을 귀양보내 사사시켜 버렸다. 그리고 윤씨 폐출을 주도한 할머니 인수대비를 머리로 배를 들이받아 부상을 입혀 그 충격으로 며칠 후 절명케 했다. 그리고 비명에 죽은 생모의 넋을 위로하고자 왕비로 추숭하고 성종묘에 배사하려 하였다.
이때 연산군의 행동을 감히 막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응교 권달수와 이행 두 사람만이 성종묘에 배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론을 펴다가 권달수는 죽임을 당하고 이행은 귀양길에 올랐다. 하지만 연산군의 행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막상 신하들이 자신의 행동을 저지하지 못하리하고 판단한 그는 윤씨 폐위에 가담하거나 방관한 사람을 모두 찿아내어 추죄하기 시작했다.
이 결과 윤씨 폐위와 사사에 찬성했던 윤필상, 이극균, 성준, 이세좌, 권주, 김굉필, 이주 등 10여 명이 사형당하였고, 이미 죽은 한치형, 한명회, 정창손, 어세겸, 심회, 이파, 정여창, 남효은 등으 부관참시에 처해졌다. 이 밖에도 홍귀달, 주계군, 심원, 이유녕, 변형량, 이수공, 곽종번, 박한주, 강백진, 최부, 성중엄, 이원, 신징, 심순문, 강형, 김천령, 정인인, 조지서, 정성근, 성경은, 박은, 조의, 강겸, 홍식, 홍상, 김처선 등이 참혹한 화를 입었으며, 이들의 가족 자녀에 이르기까지 연좌시켜 죄를 적용하였다.
이처럼 14504년 3월부터 10월까지 7개월에 걸쳐 벌어진 이 갑자사화는 희생자의 규모 뿐 아니라 그 형벌의 잔인함이 무오사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무오사화는 신진 사림과 훈구 세력 간의 정치 투쟁이었다면, 갑자사화는 왕을 중심으로 한 궁중 세력과 훈구, 사림 세력으로 이루어진 부중 세력의 힘의 대결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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