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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68 : 조선의 역사 110 (중종실록 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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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68 : 조선의 역사 110 (중종실록 3)

두바퀴인생 2012. 4. 27. 03:22

 

 

 

한국의 역사 568 : 조선의 역사 110 (중종실록 3)

 

                                                               

   

 

                   

                                                                                 중종의 능

 

                                                     

  

제11대 중종실록(1488~1544년, 재위: 1506년 9월~1544년 11월, 38년 2개월)                             

 

 

2.중종의 개혁정책 실패와 정국의 혼란

  

박원종 일파의 연산군 폐위 사건으로 중종은 왕위에 올랐지만 반정공신 세력에 밀려 조정의 주도권을 장악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이들 공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신진 사림 세력이자 급진 개혁론자였던 조광조를 등용시켜 조정에 끌여들이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광조의 급진적인 경향에 염증을 느낀 중종은 훈신, 척신 세력의 간언을 받아들여 그를 숙청시키고 만다. 이것이 '기묘사화'이다. 이후 조선 조정은 훈신, 척신 간의 치열한 권력다툼이 전개되어 정국은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된다.

 

중종은 1488년 성종과 그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역, 자는 낙천이다. 1494년 진성대군에 봉해졌으며, 1506년 9월 박원종, 성희안 등이 연산군을 몰아내고 그를 옹위하자 조선 제11대 왕으로 등극했다. 이때 그의 나이 19세였다.

 

중종은 등극한 뒤 가장 먼저 연산군의 폐정으로 말미암아 문란해진 나라 기강을 바로잡고 정치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역점을 두었다. 왕의 자문을 담당하던 홍문관의 기능을 강화하고, 경연을 중시하여 정책 논쟁의 강도를 높였으며, 문신의 월과, 춘추과시, 사가독서, 전경 등을 엄중히 시행하여 문벌 세가들을 견제하려 하였다.

 

중종의 이 같은 정책은 왕도정치를 앞세워 훈신과 척신들의 세력 팽창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인데, 초기에는 거의 실효성을 거두지 못했다. 이는 중종반정에 성공한 공신 세력의 힘이 너무 막강하여 왕의 입지가 미약한데서 비롯된 결과였다. 게다가 공신들 대부분이 기득권을 누리려는 훈신 세력이었기 때문에 중종의 사림 성향의 왕도정치 추구는 항상 그들의 저지와 도전에 직면해야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은 조금씩 달라졌다. 중종 즉위 4년 후인 1510년 영의정직에 있던 박원종이 죽자 공신 세력의 위세가 많이 위축되었고, 한편에서는 반정 이후 지속된 개혁적 분위기가 사회에 확산되면서 정치도 새로워져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가고 있었다.

 

개혁에 대한 목소리는 대개 갑자사화로 정치 일선에서 밀려났던 사림을 위주로 형성되었다. 당시 사림의 대표적인 인물은 조광조였다. 그는 무오사화로 유배 중이던 김굉필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1510년 사미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한 인물로서 당시 급진 개혁 세력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중종은 공신 세력을 견제할 방도를 모색하던 끝에 1515년 급기야 조광조를 정치 일선으로 끌어들인다. 엄격한 도학 사상가인 조광조를 앞세운 중종은 그때부터 도학적인 사상에 근거한 철인 군주정치를 표방하며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공신 세력을 견제하는 동시에 철저한 유교정치를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조광조의 주장에 따라 중종은 민간에 유교적 도덕관을 심기 위해 <여씨향약>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였다. <여씨향약>은 원래 송나라 학자 여대충의 저작이었는데 후에 주희가 첨삭하고 주석한 <주자증손 여씨향약>이 널리 유포되었다. 이는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한 일종의 민간 자치 규율이었다.

 

또한 과거제가 인재를 등용하는 데 한계가 있다면서 사림들의 천거에 의해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천거 등용제인 현량과가 실시되어 신진 시류 28명이 요직에 배치되었다.

 

조광조의 이 같은 정책은 이른바 사림파를 중심으로 한 지치(至治)주의적 이상 정치를 행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조광조 일파의 개혁정책은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해서 훈구 세력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더군다나 조광조 일파가 도학적 정치이념을 내세워 임금에게까지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자 중종 역시 조광조의 급진적인 개혁 성향에 서서히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중종의 이런 심중을 헤아린 훈구파의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은 1519년의 반정공신 위훈 삭제사건을 계기로 조광조 일파를 몰아낼 계획을 세우고, '조광조 일파가 붕당을 만들어 중요한 자리를 독차지하고 임금을 속여 국정을 어리럽히니 죄를 밝혀 바로잡아야 한다'고 상계를 올렸다. 조광조 일파의 지나친 도학적 언행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중종은 이들 훈신들의 상소를 받아들여 조광조, 김정, 김식 등 신진 사림 세력을 숙청하였는데, 이를 '기묘사화'라 한다.

 

중종의 이러한 결심은 급격하게 세력이 불어나는 사림 세력이 왕권을 위협할 수 잇다는 불안감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된다. 중종은 자신이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사람인 만큼 반정에 대한 불안감이 마음 속 깊이 잠재되어 있어 왕족과 훈, 척신들의 동태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였는데, 훈, 척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개혁적 성향의 조광조를 등용하였으나 그의 세력이 훈, 척신을 넘어 무한대로 세력이 넓혀지자 그에 대한 불안감이 생겼던 것이다. 일부 민간에서는 조광조가 이씨 왕조를 뒤엎고 조씨 왕조를 세울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그래서 중종은 조광조의 급진개혁 성향에 염증도 느꼈지만 왕에 대한 사사건건 도학적인 규율을 강조하자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기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훈, 척신 신하들이 놀랄 정도로 전격적으로 조광조를 제거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조광조를 통한 4년 동안의 중종의 개혁정치는 종말을 고하였다. 이후 심정 등 훈구파의 전황이 자행되면서 중종 중반기 이후에는 정치적 혼란이 거듭되면서, 각종 옥사들이 끓이지 않고 일어났다.

 

1521년 기묘사화의 여파로 심정, 남곤 일파인 송사련의 '신사무옥'이 일어나 안처겸 등의 사림파가 다시 숙청되었다. 1524년에는 심정, 남공 등에게 쫓겨났다가 기묘사회 이후에 정계에 다시 복귀하였던 권신 김안로가 다시 파직되고, 이듬해 3월에는 윤세창 등의 '모역사건'이 일어나는가 하면, 1527년에는 김안로의 아들 김희가 심정, 유자광을 제거하고자 일으킨 동궁의 '작서의 변'이 일어나 관련도 없는 경빈 박씨와 복성군이 쫓겨나 죽었다.

 

  

 

송사련의 '신사무옥'

 

신사무옥은 1521년(중종 16) 신사년에 송사련이 안돈후의 손자 안처겸 등을 고변하여 일으킨 옥사를 말한다. 원래 송사련의 외조모인 중금(重今)은 안씨 집안 노비로 후에 정승 안당의 부친인 안돈후의 비첩(婢妾: 종 출신의 첩)이 되었다.


첩이 된 중금은 딸 감정(甘丁)을 낳아 송린에게 시집보냈는데, 이들이 낳은 아들이 바로 송사련이다. 그는 서자이긴 했지만 안당과 그의 아들 안처겸과는 외삼촌과 외사촌지간인 셈이다. 안씨 집안에서는 송사련을 크게 신임하였고, 그는 안당의 도움으로 천한 신분을 면하고 관상감판관(觀象監判官)02이란 벼슬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조광조를 따르던 안당이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파직되면서, 이 일로 아들인 안처겸·처근 형제가 사화를 주도한 남곤과 심정에 대해 불평스런 심사를 내비치고 다녔다. 송사련은 출세를 목적으로 이를 조작하여, 안당의 부인 사망 시 온 문상객과 장례를 도운 일꾼들을 거사세력으로 꾸며 고변하였다.

 

이 일로써 안당의 집안은 멸문되고 재산은 송사련이 차지하게 되었으며, 그 공으로 벼슬도 당상관까지 오르게 된다. 신분과 도리를 중시하는 유생들은 송사련에게 등을 돌리며 심히 비난하였다. 송사련은 80세로 죽을 때까지 권세를 누렸지만, 그 화(禍)는 송구봉 형제들에게 대물림된다.

 

 

동궁의 '작서의 변'

 

1527년(중종 22) 동궁(뒤의 인종)을 저주한 사건. 2월 26일 쥐의 사지와 꼬리를 자른 채 입·귀·눈을 불로 지져서 동궁의 북정(北庭) 은행나무에 걸어 둔 사건으로 동궁을 저주하기 위한 사건이었다.

 

3월 1일에도 이런 사건이 대전(大殿) 침실의 전란(典欄)에서 또 발생하자 우의정 심정(沈貞)과 좌의정 이유청(李惟淸)이 왕에게 범인을 잡을 것을 청했다.

 

결국 경빈 박씨(敬嬪朴氏)가 의심받아 아들 복성군(福城君)과 함께 사사(賜死)되었고, 심정 등 많은 사람이 화를 입었다.

 

그러나 1532년 이종익(李宗翼)의 상소로 김안로(金安老)가 심정·유자광(柳子光) 등을 제거하고 권세를 만회하기 위해 부마였던 아들 연성군(延城君) 희(禧)를 시켜 저지른 일임이 밝혀졌다.

  

 

김안로

 

김안로(金安老, 1481년 ~ 1537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이숙, 호는 희락당(希樂堂), 용천(龍泉), 퇴재(退齋), 본관은 연안이다. 김전의 형 김흔의 셋째 아들이다. 김제남의 종조부이다. 중종과 계비 장경왕후의 사돈이며, 중종의 셋째 부인인 문정왕후 일가와도 사돈관계를 형성했다. 그의 조카딸이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의 정실부인이었고, 손녀딸은 문정왕후의 오빠 윤원로의 아들 윤백원에게 출가하였다.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대사간을 지냈다. 기묘사화때 조광조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가 다시 채용되어. 1522년 부제학(副提學)이 되고, 1524년 대사헌을 거쳐 이조판서로 승진되었으나 아들이 효혜공주와 결혼한 후부터는 권력을 남용하였다가. 영의정 남곤(南袞)·좌의정 심정, 대사헌 이항(李沆) 등의 탄핵을 받고 경기도 풍덕(豊德)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1527년 남곤이 죽자, 1529년 유배에서 풀려나와, 1530년 심정 일파의 축출에 성공하였으며, 1531년 예조판서로 등용되어, 심정 · 이항 등을 죽이고, 홍문관·예문관 양관 대제학(문형)에 올라, 전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다시 이조판서를 거쳐, 1534년에는 우의정이 되고, 1535년 좌의정에 이르렀다. 정적(政敵)에 대해서는 무자비하여 친족, 재상과 종친 등에 관계없이 이를 축출하여 사형시키는 등 무서운 공포정치를 하였으다. 경빈 박씨와 복성군 미를 죽이는 등 여러 차례 옥사를 일으켜 허항·채무택과 함께 '정유 3흉'이라 한다.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를 폐하려 하다가 문정왕후의 밀명을 받은 윤안임(尹安任)과 대사헌 양연(梁淵)에 의해 체포. 유배되어 그 곳에서 사사당하였다. 저서로 《용천 담적기》가 있다.


아들 연성위 김희중종의 딸 효혜공주와 혼인하였다. 윤원형은 그의 사촌형 김안수의 딸과 결혼, 조카사위뻘이 되나, 김희의 장녀이자 맏손녀는 윤원로의 아들 윤백원에게 출가하여 윤원형일가와 이중으로 사돈관계를 형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