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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69 : 조선의 역사 111 (중종실록 4)

두바퀴인생 2012. 4. 28. 09:07

 

 

 

한국의 역사 569 : 조선의 역사 111 (중종실록 4)

 

                                                               

   

 

                   

                                                                                 중종의 능

 

                                                     

  

제11대 중종실록(1488~1544년, 재위: 1506년 9월~1544년 11월, 38년 2개월)                             

 

 

2.중종의 개혁정책 실패와 정국의 혼란(계속)

  

이렇듯 정국의 혼란이 가속되는 가운데 1531년에는 그동안 정권에는 소외되었던 김안로가 다시 집권하게 되자 정계는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으로 변했다. 이에 중종의 외척 윤원로 형제가 등장하여 김안로와 대립하게 되자 정계는 훈신과 척신 사이에 정권 쟁탈전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정국의 불안은 국방정책에도 많은 훈란을 야기시켰다. 성종, 연산군 대에만 해도 비교적 잠잠하던 삼포의 왜인들이 대마도 왜구의 지원을 받아 세력권을 넓혀 나가더니 기어코 폭동을 일으켜 한때 제포, 부산포를 함락시키고 웅천을 공격하는 등 삼포왜란이 일어나 경상도 해안 일대가 막대한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 난으로 조선과 일본의 통교가 중단되었으나, 일본의 아시카기 막부의 간청에 의하여 1512년 임신조약을 체결하였다. 임신조약 이후 조선은 종래 쓰시마에서 보내던 무역선인 세견선과 그에 대한 응답으로 조선 조정에서 보내던 세사미두를 반감하는 동시에, 상주하던 왜인들을 삼포 거주를 엄금하고 제포 하나만을 개항하는 등 왜인 출입을 엄격히 제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엄격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왜인들의 변란은 자주 일어났다. 1522년 5월에는 추자도 왜변, 동래염장 왜변 등이 있었고, 1529년에는 전라도 왜변, 1544년에는 사랑진 왜변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 사랑진 왜변으로 조선은 왜인들의 내왕을 완전히 금지시켰다.

 

한편 북방에서는 야인들의 내침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는데, 1512년 갑산, 창성 등지를 침입하여 인마를 살상하였고, 이를 계기로 조정에서는 4군 지대에 거주하는 야인들을 퇴거시키고, 6진 지대에 순변사를 파견하는 동시에 의주산성을 수측하여 북방 방어력을 보강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야인들은 4군, 6진 지역에 대한 노략질은 계속되었다. 그래서 만포첨사가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분쟁이 끓이지 않았다.

 

 

 

윤원로

윤원로(尹元老, ? ~ 1547년)는 조선시대 중기의 무신이자 척신으로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파산부원군 윤지임의 아들. 윤원형(尹元衡)의 형이며, 윤원개, 윤원필과 윤원량의 아우이다.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남동생이며, 대윤의 영수 윤임(尹任)은 그의 아버지 윤지임과 8촌형제 간이 된다.

 

김안로와도 사돈간이 되는데, 김안로의 아들 김희중종장경왕후의 딸 효혜공주의 장녀 김선옥은 그의 아들 윤백원과 결혼했다. 또한 그의 형 윤원필의 딸 숙빈 윤씨인종의 후궁이었다. 김안로의 사돈이면서 중종과는 처남매부간이자 인종의 처숙부이고 명종의 외숙부이자 중종의 딸 효혜공주의 사돈으로, 종과는 이중 삼중 인척관계에 있었다.

 

윤원량, 윤원필의 동생이자 윤원형의 형이었고, 그의 누이 동생은 중종의 후궁으로 있다가 장경왕후가 사망하면서 왕비로 진봉되었다. 장경왕후가 병으로 죽자 윤임 등이 자신의 친족이기도 한 그의 누이인 숙원 윤씨를 지지하여 왕비로 간택된다. 그러나 이후 윤임 일가와의 관계는 악화된다.

 

1537년 좌사어로 근무할 때 사돈인 희락당 김안로(金安老)와 다투다가 파직, 유배되었다. 그뒤 김안로가 문정왕후를 폐출하려다가 실패하자 관직에 복귀했다. 44년 윤임과 다투다가 파직·유배되었다.

 

중종이 죽고 1544년(인종 1년) 인종이 즉위해 윤임의 대윤이 득세하자 탄핵을 받고 파직당했다. 이후 그는 동생인 윤원형, 조카 윤춘년 등과 짜고 윤임을 축출할 계획을 세운다.

 

1545년(명종 즉위년) 인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다시 풀려나 군기감첨정이 되었다. 국왕의 장례는 5월장이 원칙이었으나 문정왕후·윤원형·이기(李芑) 등과 함께 '인종은 1년을 넘기지 못한 임금이니 대왕의 예를 쓰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인종의 장례를 박하게 치르게 했다.

 

그해 7월 앞서 다시 윤임대윤(大尹) 일파를 축출하려고 대윤 일파가 경원대군을 해치려 했다고 무고(誣告)했으나, 영의정 윤인경(尹仁鏡)과 좌의정 유관(柳灌)이 망언(妄言)을 조작하고 천친(天親)을 이간한다고 탄핵함으로써 전라남도 해남으로 유배되었다가 1년 만에 풀려났다. 대윤의 윤임은 그와 9촌 숙질간이 된다.

 

그뒤 을사사화윤임, 유관(柳灌), 유인숙 일파가 제거, 사사되자 석방됐다. 그뒤 돈녕부 도정에 이르렀으나 공신에 참여하지 못한 것을 분하게 여기다가 1546년 동생 윤원형과의 정쟁에서 패하여 탄핵을 받아 파직 유배되고, 사사당하였다. 이 일로 그의 아들 윤백원은 윤원형의 정적인 이량과 결탁하게 되었다.

 

정적인 김안로(金安老)와 사돈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윤원로의 아들 윤백원중종의 딸 효혜공주와 연성위 김희(延城尉 金禧 ? ~ 1531년)의 딸 김선옥(金善玉, 1531년 ~ ?)과 결혼했다. 며느리 김선옥은 김안로의 손녀였다.

 

가계

  • 조부 : 윤욱(尹頊)
  • 부 : 윤지임(尹之任)
  • 모 :
    • 형 : 윤원개
    • 형 : 윤원량
      • 조카 딸 : 숙빈 윤씨, 인종의 후궁.
      • 조카 사위 : 제 12대 인종
    • 형 : 윤원필
    • 누나 : 문정왕후
      • 외조카 : 제 13대 명종
    • 동생 : 윤원형
  • 처 : 평창이씨, 이량(李亮)의 딸.
    • 아들 : 윤백원(尹百源, 1528년 ~ 1589년)
    • 며느리 : 김선옥(金善玉, 1531년 ~ ?)
      • 손녀 : 개미치
    • 첩며느리 : 복이, 아들 윤백원의 첩
      • 서손 : 윤덕경, 윤백원의 서자
    • 아들 : 윤천원(尹千源)
    • 아들 : 윤만원(尹萬源)
  • 첩 :
    • 서자 : 윤조원
  • 사돈 : 연성위 김희(延城尉 金禧 ? ~ 1531년, 김안로의 아들)
  • 사돈 : 효혜공주, 중종의 딸
  • 중종, 매제이자 겹사돈

 

 

삼포왜란

 

삼포 왜란(三浦倭亂, 1510년 4월 4일 ~ 4월 19일) 또는 경오왜변(庚午倭變)은 1510년(중종 5년) 4월 4일제포(내이포), 부산포, 염포의 삼포에 거주하고 있던 왜인들이 대마도주 종성친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왜변을 말한다.

 

삼포 개항(三浦開港)은 1426년(세종 8년) 대마도주 소 사다모리(일본어: 宗貞盛 종정성)의 청에 따라 기존에 개방하였던, 웅천(진해)의 내이포(乃而浦), 부산포 이외에도 울산의 염포(鹽浦)를 추가로 개항하고 일본인에게 교역을 허락한 일이다.

 

1418년 세종 초년 제3차 대마도 정벌 이후 대마도주 사다모리(종정성)는 단절된 조선과의 정상적 교역을 누차 청하여 왔기 때문에 조정에서도 그들에 대한 유화책의 하나로 3포를 세종 8년 개항했다. 그래서 웅천(熊川, 현재의 진해)의 내이포(乃而浦, 제포[薺浦]라고도 함), 동래(현재의 부산)의 부산포(富山浦), 산의 염포(鹽浦) 등 3포를 열어 무역할 것을 허락하였다. 3포에는 각각 왜관을 두어 왜인 60명에 대하여 거주를 허락하였다.

 

1510년 중종 5년 4월 4일 제포에 거주하고 있던 항거왜추(恒居倭酋), 대조마도(大趙馬道), 노고수장(奴古守長) 등이 병선 100척과 무장한 왜인 4~5천명을 거느리고, 성을 공격하였다. 이들은 삼포의 각 관리들의 부당한 요구를 토로하며, 부산포 첨사는 소금과 기와를 굽는데 사용하는 땔감을 과하게 요구하였고, 웅천 현감은 왜인들의 상업 활동을 금하면서 급료를 제대로 주지 않고, 제포의 첨사는 고기잡이를 할 때 허락을 해주지 않으면서, 왜인을 4명을 살해했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웠다. 이들은 부산포, 제포를 함락시키고, 영등포를 불사르고, 웅천진 등을 공격하였다.

 

이 변란으로 인해 부산포, 제포, 웅천, 영등포가 함락되고, 부산포 첨사 이우증이 살해당하였다. 군사와 백성들 272명이 죽고, 동평현, 동래현, 민가 796호가 전소되었다.

 

1510년 4월 13일 확전을 염려한 대마도주 종성친은 서계를 보내 강화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황형(黃衡), 유담년(柳聃年)을 경상좌우도방어사(慶尙左右道防禦使)로 임명하여 군사를 보내 이들을 토벌하였다. 1510년 4월 19일 제포에 모여있는 왜인들을 세 갈래로 포위를 하여 8시간의 협공 끝에 적을 물리쳤다.

결과

1510년 삼포왜란으로 삼포는 폐쇄되었다. 결국 1512년 중종 7년 《임신약조》(壬申約條)를 체결하여 제포만을 개항하고 국교를 다시 재개한다. 이 약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한 해에 세견선을 50척에서 25척을 반감한다.
  2. 해마다 주는 쌀과 콩 200석을 100석으로 반감한다.
  3. 특송선(特送船)을 보내지 말고, 전할 말이 있으면 세견선 편으로 고한다.
  4. 도주의 아들 및 대관(代官)과 직(職)을 받았거나 도서(圖書)를 받은 사람들에게 주는 쌀·콩과 세견선은 모두 없앤다.
  5. 도주가 보낸 것이 아닌데 가덕도(加德島) 근처에 와 정박하는 배는 모두 왜적으로 간주한다.
  6. 내부 깊숙이 사는 왜인으로서 직(職)을 받았거나 도서를 받아 통행(通行)하는 자들을, 그 세월이 얼마나 오래되었느냐 하는 것과 공로(功勞)와 긴급 여부를 판단하여 감한다.
  7. 통행을 허락한 사람 중에 도서를 받은 자는 도서를 고쳐 발급한다.

이후 조선 관병과 대마도 왜인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으므로 1514년 중종 36년에 부산포로 왜관을 옮기고, 1678년 숙종 4년에는 다시 왜관을 초량(草梁)으로 옮겼다. 왜관에는 주위에 성을 쌓고 그 안에 왜인이 거류하며 시장, 창고, 공청(公廳) 등이 있고 관수왜(館守倭, 관을 지키는 왜인) 등이 상주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