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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77 : 조선의 역사 119 (중종실록 12)

두바퀴인생 2012. 5. 6. 05:05

 

 

한국의 역사 577 : 조선의 역사 119 (중종실록 12)

 

                                                               

   

 

                   

                                                                                 중종의 정능

 

 

                                                     

  

제11대 중종실록(1488~1544년, 재위: 1506년 9월~1544년 11월, 38년 2개월)                             

 

5. 기묘사화와 사림 세력의 후퇴

 

현량과를 통해 도학정치 구현의 터전을 마련한 조광조 일파는 마침내 본격적인 훈신 세력 제거 작업에 돌입하게 된다. 이 때문에 훈구 세력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고, 마침내 1519년에 이른바 반정공신 위훈 삭제 사건을 계기로 그 반발이 폭발하고 말았다.

 

조광조는 반정공신에 올라 있던 신하들 가운데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들의 공신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광조의 이런 주장이 전혀 근거없는 것은 아니었다. 반정 초기에 대사헌 이계맹 등이 원종공신이 많아 외람되므로 그 진위를 밝힐 것을 주장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이계맹의 주장은 반정공신들에 의해 묵살되고 말았다.

 

조광조는 훈구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공신들의 세력을 위축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과거의 반정공신 시비를 다시 꺼낸 것이다. 반정공신의 위훈을 삭제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조광조는 성희안, 유자광 등을 신랄하게 비난하였다. 성희안에 대해서는 반정을 하지도 않았는데 공신으로 책록되었다고 했고, 유자광에 대해서는 척족들의 권력과 부귀를 위하여 반정하였으므로 이러한 유의 반정은 소인배들이나 꾀하는 일이라고 비난하였다.

 

조광조의 이런 위훈 삭제 주장에 대해 중종은 반정공신은 한 번 정한 것이니 수정할 수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조광조의 설득은 집요했다. 즉 반정공신들의 대다수가 자신의 이익과 권력을 위해 거사를 도모한 자들이므로 이들이 계속 공신으로 머물러 있는 한 조정은 끝없이 이익과 권력만 추구하는 소인배들에 의해 점유당할 것이고, 따라서 이런 현실을 타파하지 않으면 국기를 유지하기가 곤란하다는 주장이었다.

 

조광조의 강력한 설득에 중종도 지쳐가고 있었다. 개혁이라는 대의명분을 앞세운 조광조의 논리를 중종은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조광조는 위훈 삭제의 실천 대안을 간단히 제시했다. 우선 반정공신 2,3등 중 일부를 3,4등으로 개정하고, 4등 50여 명은 모두 공도 없이 녹을 받아 먹고 있으므로 삭제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러한 실천 대안은 받아들여져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전체 공신의 4분지 3에 해당하는 76명의 훈작이 변경되거나 삭탈 일보 직전에 놓이게 되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훈구 세력들이 강력하게 반발하기 시작하였고, 중종도 조광조의 급진적인 개혁정치에 염증을 내고 있던 터였다. 현실적으로 정치 원로의 자리를 굳히고 있는 공신 세력을 일거에 몰아내려고 하는 것은 자칫 조정에 엄청난 파란을 몰고올 수 있다는 판단을 한 중종은 더 이상 조광조의 급진적인 행동을 방치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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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포로 돌아간 조광조의 개혁정치

 

중종은 세자가 아니었으니 제왕학(오직 세자에게만 교육시켰다)을 교육받지도 못했다. 따라서 정치를 이끌 경륜도 없었고 자신을 도와줄 정치세력을 형성할 수도 없었다. 중종 즉위 초기는 공신세력들이 이끌어 나갔고 그들에게 질질 끌려다니던 중종으로서는 이들 훈구파를 견제할 세력을 키우는 것이 급선무였다.

나름대로 이상적인 정치를 펼치려 했던 중종은 훈구파를 견제할 자구책으로 사림으로 눈을 돌렸다. 정암 조광조(1482-1519)는 중종에게 딱 필요한 인물이었다. 성종대부터 중앙 정계 진출을 시도했던 신진 사림들은 조광조를 밀어주는 중종의 정책에 힘입어 적극 등용될 수 있었다.

조광조는 사림들의 기반이었던 향약 보급과 현량과 실시 등 새로운 정책을 제시하며 도학정치에 바탕을 둔 개혁정치를 펼쳤다. 그러나 조광조의 이러한 정책은 단지 중종의 신임만을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기득권을 무너트리기에는 기반이 약했다.

중종13년(1518) 조광조는 현량과란 새로운 인재등용책을 발의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댔다. 관리를 시부(詩賦)로 뽑기 때문에 성리 학문을 소홀히 하고, 벼슬을 얻지 못하면 어떻게 하면 얻을까 궁리하고, 얻고 나면 놓치게 될까 봐 근심하는 폐습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현량과는 천거를 받아 왕이 선택하는 인재등용책으로 경학에 능한 신진세력들을 등용할 수 있고, 덕행을 보고 천거하는 현량과를 시행하면 분경(奔競·개인적인 일로 하여 대소관리가 서로 찾아보는 것)하는 폐습이 사라질 뿐더러 대현인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 병풍석의 면석에 새겨진 문관문양은 당시 사림들이 활발하게 정계로 진출하던 시대상을 반영하듯 본격적인 문치주의의 상징처럼 보였다.
이러한 조광조의 주장은 기존 과거를 통해 정계에 진출한 조정대신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현량과의 실시 목적은 경학(經學)을 위주로 하는 조광조 등의 신진세력이 개혁정치에 뜻을 같이 하는 지지세력들을 중앙정계에 진출시켜 사림세력을 강화하려는 데에 있었다. 따라서 기존 세력들은 상대적으로 약화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광조의 무리한 개혁정책은 1419년 실시한 '정국공신 위훈삭제(僞勳削除)'에서 절정에 달했다. 이 일로 결국 중종은 조광조에 등을 돌리게 되고 그 결과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정국공신 위훈삭제'는 신진세력인 사림이 기성세력인 훈구파에 직접 칼을 꽂은 정면도전이었다. 현량과 실시로 훈구파를 외직으로 몰아낸 것만 해도 충분히 반발을 가져왔는데, 신진세력들의 집요한 개정논의 끝에 중종반정의 공신 3/4에 달하는 76명의 위훈을 삭탈하고 이들에게 분급한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게 했으니 마지못해 허락한 중종마저도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성급하고 과격하게 개혁을 몰아붙이는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의 세력이 너무 커지자 중종은 다시 사림을 견제할 방법을 모색했고 공신들 역시 공신삭제에서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꼈다.

반격의 기회를 노리던 김전·남곤·심정 등과 희빈 홍씨의 아버지인 홍경주는 중종의 이런 심경변화를 알아채고 그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이들은 희빈 홍씨를 앞세워 나라의 인심이 모두 조광조에게 돌아갔고 왕권까지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중종에게 속살거리게 하고, 조씨가 왕이 될 것이라는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나뭇잎에 새겨 왕이 보게 하는 '생쇼'까지 연출했다.

명분이 없어서 조광조를 죽이지 못한 중종은 조광조를 죽여서 생사여탈의 권한이 임금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 기강을 확립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오자 즉시 조광조·김정·김식·김구 등을 사사하라 명을 내렸다.

▲ 중종반정을 주도했던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은 무과 출신이고 이들은 어떤 공적도 세운 것이 없다. 어딘가 얼빠진 듯 해학적인 무인석은 코까지 깨져나가 당시 무인의 위상을 보여주는 듯.
성리학을 바탕으로 왕도정치를 행하려던 조광조의 개혁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의 도학정신이 계승되어 이황·이이 등의 유학자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공신들의 정치적 비리를 비판하는 사림의 정치이념이 지지 받아 광범위한 사림이 중앙정치에 진출하게 되었다.

기묘사화는 사림이 주도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기득권자인 공신재상들의 반격으로 야기된 정치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런 사화마저도 사림정치로 바뀌는 대세를 막지 못했다. 조광조는 조선 중기에 훈구파에서 사림으로 정권이 넘어가는 과도기에 중추를 담당하며 사림정치의 기초를 세운 인물이다.

어쨌든 중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반정을 주도한 성희안, 박원종, 유순정은 돌아가면서 영상자리에 올랐고, 폭군을 몰아냈다는 반정 명분은 팽개치고 사리사욕을 채우며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세상의 비난을 받으며 비슷한 시기에 죽었다.

뽕나무밭은 빌딩 바다로 변하고

중종39년(1544) 11월 14일 창경궁 환경전에서 11대 왕 중종은 57세로 눈을 감는다. 인종 원년(1545) 2월 3일 계비 장경왕후 희릉 오른쪽 줄기에 장사지냈다가 명종17년(1562) 9월 4일 현재 자리로 천장했다.

▲ 중종의 능상에서 물이 스며나와 거뭇거뭇하게 병풍석을 적시고 있다. 잔디도 빈약하다.
정릉에 올라 능상을 살피니 축축한 물기가 흐르고 있어 장마철에 정자각까지 물이 들어찼다는 기록이 정확하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이렇게 물기가 흐르는 왕릉은 처음 본다. 비가 온 직후라도 능상은 높은 언덕 위에 있어서 무덤 속에서 물이 흘러나오지는 않는다. 아버지 성종의 능상은 같은 자리에 있어도 좀 더 높은 줄기에 있기에 물기가 줄줄 흐르지는 않았다. 중종의 능상 역시 성종과 마찬가지로 잔디가 빈약했다.

▲ 일그러지고 휘어진 소나무 가지는 땅으로 향해 있어 고통스러워 보인다.
능 주위를 둘러싼 소나무마저 기묘하게 뒤틀리고 가지를 아래로 뻗고 있어 심상찮게 보인다. 셋째 마누라 때문에 죽어서도 물구덩이에 홀로 있는 중종이 딱해 보인다. 중종 역시 병풍석 두르기 좋아하는 문정왕후 덕분에 병풍석을 두르고 있다.

정자각 아래 비둘기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잔디에서 모이를 찾거나 참도까지 올라가 노닐고 있는 모습은 평화로웠다. 문정왕후가 보우와 의논해서 천장한 정릉 주변에는 수백년 전 역사라는 걸 말해주듯 주위에 즐비한 빌딩 숲이 들어섰다.

▲ 도시의 비둘기는 왕릉 참도에 내려앉아 어도에서 무심히 제 꼬리를 돌아본다.
정릉을 나서면서 문득, 문정왕후가 이 모습을 봤다면 어떤 말을 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변한다는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실감나는 곳이 정릉이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잠실(蠶室)이 왕실에서 양잠을 장려하기 위해 운영하던 뽕밭이 있던 곳이니 뽕나무밭이 빌딩 바다로 변한 지금 과히 틀리지 않은 말이 아닐까 싶다.
출처 : 오마이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