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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76 : 조선의 역사 118 (중종실록 11) 본문
한국의 역사 576 : 조선의 역사 118 (중종실록 11)
중종의 정능
제11대 중종실록(1488~1544년, 재위: 1506년 9월~1544년 11월, 38년 2개월)
조광조는 누구인가?(계속)
사후
이이는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등을 가리켜 ‘동방사현’이라 불렀다. 그의 제자인 홍문관 관원 소쇄 양산보(梁山甫)는 기묘사화로 스승인 조광조가 사사되자 '개처럼 사느니 흙이 되겠다'며 모든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전라남도 담양군으로 내려와 소쇄원(瀟灑園)을 짓고 은거하며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세상에 나오지 않는다.
1544년(중종 39년) 성균관 생원 신백령(辛百齡) 등이 그의 사면 상소를 올렸다.
그뒤 인종이 즉위하고 1544년(인종 원년)에 이황 등의 상소와 그를 평소 동정하던 인종의 뜻에 의해 사면, 복권되었다. 명종 초에 훈구파인 이기에 의해 계속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1559년(명종 14년)에는 경상도 산음(山陰)의 유생(儒生) 배익겸(裵益謙)이 정사의 폐단을 논하면서 그의 개혁정치를 언급했다가, 훈구파들로부터 비판 공론이 다시 나타났으나 1560년초 인순왕후의 외숙인 이량(李樑)이 그를 두둔하여 무마시켰다. 선조 대에는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정(文正)의 시호를 받았다.
1567년(명종 21년) 선조 즉위 후 기대승에 의해 조광조에 대한 복권과 증직을 청하는 상소가 올려진 이후, 계속된 사림파들의 상소와 주청으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의 증직이 내려지고, 시호가 추증되었다. 1582년 신도비가 세워졌고, 신도비문은 노수신이 짓고, 이산해가 글씨를 썼으며하였다. 1610년(광해군 2년)에는 성균관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김굉필, 정여창(鄭汝昌),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등과 함께 ‘동방 5현’이라 일컫기도 한다.
1519년(중종 14년) 학포 양팽손에 의해 건립된 사당에 사액이 내려져 1570년(선조 4년) 능주의 죽수서원(竹樹書院)이 된 이후, 1576년 희천에 양현사(兩賢司)가 세워져 배향되었다. 그밖에 한때 정몽주를 배향한 용인 모현면의 충렬서원에 배향되었다가 후에 묘소 근처의 심곡서원(深谷書院)으로 위패를 옮겨왔다.
1605년(선조 38년)에는 그의 묘소 아래에 있는 심곡서원(深谷書院)이 세워졌다. 묘는 용인시 수지구 상현1동에 있으며 묘소 왼편에 심곡서원이 있다. 양주의 도봉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
《정암집》이 있다.
사상
국왕의 솔선수범론
그는 성리학과 예로써 정치와 사회 기강과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와 도덕론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다. 그것은 국왕 교육, 성리학 이념의 전파와 향촌 질서의 개편, 실력과 파벌에 구애받지 않는 인재 채용 등이었다. 그는 또한 국왕이 성리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봤다. 이는 국왕 교육은 군주가 정치의 근본이라는 점에서 이상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 먼저 힘써야 할 것이었으며, 국왕이 먼저 사사로운 욕심과 사심을 버리고 학문에 정진하며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에 힘써 노력하여 스스로 정체(政體)를 세우고 만인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과,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분별하여 활용할 것을 비전으로 제시하였다.
소학과 도덕윤리 보급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은 소학(小學)과 향약의 보급에 전력을 다했다. 조광조는 자신이 비용을 부담하여 소학과 사서육경을 인쇄하여 보급, 배분하였고, 그와 그의 동료 사림들은 지방 오지에까지 '소학'을 보급하였다. 백성들의 교화를 목적으로 자치규약인 향약(鄕約)을 실시하게 하였는데, 이는 성리학적 이념과 질서를 향촌에 보급하는 동시에 지방에서의 사림파의 입지를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사림파가 주도하는 성리학적 질서 확산과 도덕적 이상향 구현에 노력하였다.
소학은 수신과 위기지학(爲己之學)을 강조하였는데, 특히 그가 보급하는데 중점을 두었던 '소학'은 성리학의 기초 이론을 담은 서적으로 조광조의 스승인 김굉필에 의해 적극 수용되었다. 그의 스승 김굉필은 소학동자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소학 연구에 치중하였으며 '업문(業文:문장에 힘씀)으로는 천기(天機)를 알 수 없었는데 소학에서 어제의 잘못을 깨달았다.'고 할 정도로 소학 예찬론자였다. 소학이나 사서 육경 외에도 삼강행실, 이륜행실, 주자가례와 같은 책을 널리 인쇄, 간행하여 조선 팔도에 배부, 보급한 것도 유교적 도덕이념을 확산시키려 한 노력의 결과였다.
동시에 그는 소격서(昭格署)의 혁파를 추진하였다. 소격서는 하늘과 별자리, 산천에 복을 빌고 병을 고치게 하며 비를 내리게 기원하는 국가의 제사를 맡았던 기관이다. 유교적 이상국가를 세우려는 정암으로선 도교적 제천행사를 용납할 수 없었다.
거병과 군자론
도적을 토벌하는 일이라고 해도 정당한 명분을 갖추지 않고, 비밀리에 출정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 그의 논의였다. 중종연간에 함경북도 회령부(會寧府) 성 아래에 사는 야인 속고내(速古乃)는 변방의 야인들과 몰래 연통하여 와서 갑산부(甲山府)를 침략하다가 함경북도, 평안북도일대를 노략질하여 사람과 가축을 많이 약탈해갔다. 이 죄로 변장(邊將)를 처벌하려 하자, 변장은 도망갔고 화가 난 중종은 토포사를 구성하여 출정시킨다.
1518년 남도병사(南道兵使)가 은밀히 장계를 올려 "속고내가 갑산 근처에 몰래 왕래하며 물고기를 잡고 사냥을 하는데 무리가 많아 잡기 어렵습니다. 청컨대 저들이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때 군사를 출동해 사로잡으소서."라는 내용의 장계를 올렸고, 중종은 감사에게 은밀히 하유(下諭)하고 이지방(李之芳)을 방어사에 제수한 뒤 토포사로 임명하여 보내 감사(監司)ㆍ병사(兵使)와 함께 속고내를 잡아서 처벌하기로 하였다. 중종이 친히 선정전(宣政殿)에 납시어 연회를 열고 토포사 이지방에게 어의(御衣)와 궁시(弓矢)를 하사하고 삼공(三公)과 병조(兵曹), 지변재상(知邊宰相)들이 파송식에 참석했다.
그러나 부제학 조광조는 청대(請對)하고 나아가 아뢰기를 "이 일은 속임수를 쓰는 것이고 바르지 못하니, 왕자(王者)가 오랑캐를 막는 도리가 전혀 아니고 바로 몰래 좀도둑질이나 하는 도적의 계책과 같습니다. 당당한 큰 조정으로서 일개 작은 오랑캐 때문에 도적의 계책을 써서 국가를 모욕하고 위엄을 손상시키니 이는 군자가 할 짓이 되지 못한다"며 반대하였다. 이에 병조판서 유담년(柳聃年)은 담략을 써서 적을 사로잡는 일이라며 출정을 강행해야 된다며 반박하였다. 그러나 조광조는 고집을 굽히지 않았고, 좌우에 입시한 문무대신들은 병가(兵家)에는 정공과 기습이 있고 오랑캐를 막는 데는 정도와 권도(權道)가 있으니, 임기응변해야지 한 가지 주장만 고집해서는 안된다며 논의가 이미 합일되었으니, 한 사람의 말 때문에 갑자기 바꾸어서는 안된다고 들고 일어섰다.
논쟁은 계속되었고 이에 병판 유담년은 "논밭 가는 일은 남종에게 물어야 하고 베 짜는 일은 여종에게 물어야 하는 법입니다. 신은 젊을 때부터 북방을 출입하여 저 오랑캐의 실정을 신이 이미 잘 알고 있으니, 청컨대 신의 말을 들으소서. 오활한 선비의 말은 형세상 다 따르기 어렵습니다."라며 방어사 출정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중종은 조광조 등의 의견을 들어 토포사로 출정했던 이지방에게 회군을 명하니, 좌우에 있던 훈구파 신하들은 불평을 늘어놓았다.
학맥
조광조는 사사되었지만 그의 제자인 백인걸과 이연경 등은 명종 때에 정계에 진출하며, 백인걸의 문하에서 한때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이 수학하였다.
백이정, 안향→이제현→이색→정도전
→이숭인
→정몽주→권근
→권우→세종대왕
→정인지
→길재→김숙자→김종직→정여창
→김굉필→조광조→백인걸→이이(율곡)
→성수침→성혼(우계)
→이연경
→김안국
→김정국
→주계부정 이심원
→김일손
→김전
→남곤
그러나 이이는 그가 지나치게 급진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가계
- 고조부 : 조온(趙溫, 1347년 ~ 1417년, 시호는 양절공(良節公))
- 고조모 : 전주이씨(全州李氏, 태조 이성계의 조카딸)
- 아버지 : 조원강(趙元綱).
- 어머니 :
- 동생 : 조숭조
- 부인 : 한산이씨
- 아들 : 조정(趙定)
- 아들 : 조용(趙容)
평가
긍정적 평가
그의 사상은 유학의 정통으로 돌아가 바른 정치를 실천하자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한국의 도학 및 실천유학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율곡 이이(李珥)를 비롯한 후대 학자들이 그를 모범으로 따랐다.
38세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당대는 물론 후세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부패하고 침체된 당시 사회의 변화와 개혁을 열망하였던 신진 사림들에게는 이념과 실천을 겸비한 개혁의 지도자였고 후대 사람들에게는 학자요, 정치가로서 이상적 모델이 되었다. 정암은 현실정치에서 패배하여 수많은 인재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먼 후대에까지 깊은 영향을 끼친 지도자였다.
그는 유교 특히 성리학만을 유일한 배타적 종교로 신봉하고, 다른 사상이나 종교에 대해서는 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평가도 있다. 불교·도교·도참비기(圖讖秘記) 등을 금할 것을 주장하여, 도교에 대해서는 소격서 혁파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무격(巫覡)의 숭신 및 영철야의 풍습을 금지시켰으며, 불교에 대해서도 사찰 중창을 엄금하고 사찰의 노비·전지를 몰수하였다.
부정적 평가
급진적이었다는 점이 부정적인 평가로 지적되고 있다. 선조때의 성리학자 이이는 자신의 저서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옛 사람들은 반드시 학문이 이루어진 실천하는 요점은 왕의 그릇된 정책을 시정하는데 있었다. 그런데 그는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 다스릴 재주를 타고 났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일선에 나간 결과 위로는 왕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도 막지를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도학을 실천하고자 왕에게 왕도의 철학을 이행하도록 간청하기는 하였지만 그를 비방하는 입이 너무 많아, 비방의 입이 한번 열리자 결국 몸이 죽고 나라를 어지럽게 하였으니 후세 사람들에게 그의 행적이 경계가 되었다."며 그 급진성을 비판하였다.
퇴계 이황(李滉)은 '퇴계집(退溪集)'에서 “그는 자질이 참으로 아름다웠으나 학력이 충실하지 못해 그 실행한 바가 지나침을 면치 못하고 결국은 실패를 초래하고 말았다. 만일 학력이 넉넉하고 덕기(德器)가 이뤄진 뒤에 나와 나라의 일을 담당했던들 그 성취를 이루 헤아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군민이 요순시대의 군민과 같고 또 비록 군자의 뜻이 있다 하더라도 때와 힘을 헤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기묘의 실패는 여기에 있었다”라고 했다.
또한 수많은 인재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인물이라는 점 역시 부정적인 평가로 지적된다.
기타
인들은 조광조를 죽인 남곤과 심정을 ‘곤쟁이 젓갈’(남곤의 ‘곤’, 심정의 ‘정’ 발음에 빗대 둘을 싸잡아 비난한 말. 이후 ‘곤쟁이 젓갈’은 젓갈 중 최하등급이라는 인식이 퍼졌다)이라고 두고두고 욕했다. 그가 사사될 당시 그를 제거한 인물 중 대표적인 인물로 심정과 남곤이 지목되었다. 김전 역시 조광조의 죽음에 관계되었다 하여 배신자나 변절자로 몰려 후배 사림파로부터 지탄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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