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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22 : 조선의 역사 64 (세조실록 8) 본문
한국의 역사 522 : 조선의 역사 64 (세조실록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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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세조실록(1417~1468년, 재위 1455년 윤6월 ~ 1468년 9월, 13년 3개월)
4. 세조의 무단 강권 정치를 수행한 사람들
세조 시대의 정치는 한마디로 무단 강권 정치였다. 이는 왕권 강화와 안정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행해진 세조 특유의 전제정치로, 조선 성리학자들의 왕도정치 개념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세조가 이 같은 무단정치를 할 수밖에 없엇던 것은 그의 대의명분 없는 즉위 때문이었다. 대의명분을 정치적 행위의 최상의 근거로 여겼던 조선 사회에서 폐륜적인 행동으로 얻은 왕위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물리적인 힘뿐이었다. 따라서 세조는 물리적인 힘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기 위해 전례를 찿아보기 힘든 무단정치를 지향했으며, 그 방법으로 철저한 측근정치를 택했던 것이다.
측근정치란 말 그대로 자신의 심복 내지는 측근을 위주로 정사를 운영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조의 이런 측근정치를 가능케 한 것은 그와 함께 계유정난을 일으킨 이른바 정난공신 세력 덕분이었다.
정난공신 세력은 권람과 한명회를 주축으로 하는 세조의 심복 세력과 정인지, 신숙주, 최항을 주축으로 하는 집현전 학사 세력으로 나뉠 수 있다. 심복 세력들은 정권 획득을 목적으로 수양대군을 앞세워 계유정난을 일으킨 인물들이며, 집현전 학사 세력은 계유정난을 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이 거사의 대의명분을 설정해준 인물들이었다.
이들 두 세력의 공통점은 김종서, 황보인 등의 고명대신들로부터 배척을 받았거나 또는 이들의 정권 독점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무리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계유정난에 협조한 이유는 사뭇 달랐다. 심복 세력들이 수양대군을 왕으로 옹립하여 정권을 잡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학사 세력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대의명분이 미약하였으나 결국은 수양을 내세워 고명대신들을 제거하고 자신들이 권력을 잡고 향유하며 부귀영화를 누리겠다는 탐욕에서 출발하였던 것이다. 반면 수양은 이들 세력을 이용하여 자신이 원하던 왕위를 탈취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한 것이며 이러한 구도는 역사에서 수없이 많이 발생하였고 서로의 목적이 연계되었을 때 가능하였다. 그래서 성공하면 역사를 기록하며 이름을 남겼으나 실패하면 3족이나 9족이 멸문지화를 당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이며 이들실패한 이들도 물론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래서 이들 학사 세력도 결국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동조했으며, 그 대가로 세조시대를 이끄는 주역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공신세력으로 훈구세력이 되어 훗날 사림파에 의해 제거될 때까지 자손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렸다.
세조시대를 이끌었던 이들 두 세력 중 대표적인 핵심 인물인 권람, 한명회, 신숙주 등의 삶을 약술하면서 세조시대의 무단정치 상황을 살펴보기로 한다.
수양의 좌장 권람(1416~1466년)
세조의 심복 세력 중 수양대군에게 가장 먼저 접근한 인물은 권람이었다. 그는 한명회와 동문수학하던 사이로 단종 등극 후 김종서 등이 권력을 독점하는 데 불만을 품고 집현전 시절부터 친분이 있던 수양대군을 찿아가 거사를 도모할 것을 권유했다.
권람은 권근의 손자이자 권제의 아들이다. 1416년에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학문이 넓었으며 뜻이 컸다. 그래서 책 상자를 말에 싣고 명산고적을 찿아다니며 학문을 쌓았고, 이때 한명회를 만나 평생의 벗으로 삼게 된다.
그는 한명회와 "남자로 태어나서 변방에서 무공을 세우지 못할 바에는 만 권의 책을 읽어 불후의 이름을 남기자." 는 약속을 할 정도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한명회를 수양대군에게 소개한 사람이기도 하다.
1450년, 35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로 향시와 회시에서 장원으로 급제했으며, 전시에서는 4등이 되었으나 장원한 김의정이 출신이 한미한 관계로 대신 장원이 되었다. 같은 해에 사헌부감찰이 되었고, 이듬해 집현전 교리로서 수양대군과 함께 <역대병요>의 음주를 편찬하는 데 동참하여 그와 가까워졌다.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조정의 권력은 김종서, 황보인 등이 독점하게 되었고, 안평대군이 그들 대신들과 결탁하여 세력을 키우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 수양대군이 이에 불안을 느껴 동지를 찿고 있을 때 권람은 한명회의 부탁을 받고 수양대군에게 접근하여 집권 거사를 모의하게 된다.
이후 권람은 수양의 부탁에 따라 양정, 홍달손, 유수, 유하 등 무사들을 규합하여 수양과 함께 계유정난을 일으켜 성공한다. 정난에 성공하자 정난공신 1등에 책록된 그는 집현전 교리에서 일약 승정원 동부승지에 올랐으며, 이듬해 2월에는 부승지,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이조참판에 제수되었다. 다시 1년 뒤에는 이조판서에 올라 집현전대제학, 지경연춘추관사를 겸하였다.
1458년 신숙주와 함께 <국조보감>을 편찬하고, 그해 12월에 의정부우찬성, 이듬해 좌찬성과 우의정을 거쳐 1462년에는 좌의정에 이르렀다.
이처럼 급성장을 거듭하던 그는 1463년 병을 핑계로 관직에서 물러나 부원군으로 진봉되었으며, 이듬해부터 신병으로 고생하다가 1465년 50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그는 문장에 능했고 호탕한 성격에 걸맞게 활쏘기 등 무예에도 뛰어나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청년 시절에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전국을 돌아다닌 것은 아버지 권제가 첩에 혹하여 어머니를 내쫓는 것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한명회를 만나 권력을 꿈꾸게 되었으며, 마침내 수양과 함께 정난을 일으켜 그의 조장으로서의 역활을 성실히 수행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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