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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21 : 조선의 역사 63 (세조실록 7) 본문
한국의 역사 521 : 조선의 역사 63 (세조실록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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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세조실록(1417~1468년, 재위 1455년 윤6월 ~ 1468년 9월, 13년 3개월)
2. 세조의 강권 정치와 문치의 후퇴(계속)
명, 왜 등의 외국과는 유화정책을 통해 변방의 안정을 꾀했으며, 문화사업도 활발히 벌여 <역학계몽>, <주역구걸>, <대명률강해>,<대장경>, 등을 인쇄 간행했고, 태조부터 문종에 이르는 왕들이 지은 시들을 결집한 <어제시문>을 편집 발간했다.
이처럼 세조는 관제 개편과 관리들의 기강 확립을 통해 중앙 집권제를 확립하고 민생 안정책과 유화적인 외교 활동을 통해 민간 생활의 편리를 꾀했으며, 법전 편찬과 문화사업으로 사회를 일신시켰다. 그러나 정치 운영에서는 '문치'가 아닌 '강권'으로, 인재의 등용에서는 실력 중심이 아닌 측근 중심의 인사로 일관했기 때문에 이로 인한 병폐가 심각했다.
세조는 내용에 상관없이 자신을 비판하는 세력은 가차없이 제거하고, 반대로 자신에게 복종하는 인물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했다. 일례로 계유정난 공신이기도 하고 변방의 안정에 공이 많았던 양정이 '세조의 퇴위를 희망한다'는 불손한 말을 했다는 이유로 참형에 처하여진 반면, 또 한 명의 공신인 홍윤성은 자신의 세력을 믿고 수하로 하여금 사람을 살해케 했는데도 순종을 잘한다는 이유로 주의만 주고 끝내기도 했다.
세조는 대간과 의정부의 기능을 완전히 축소하고 승정원을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했는데, 이 승정원과 육조를 모두 그의 심복들인 정난공신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외교통인 신숙주는 예조판서, 군사통인 한명회는 병조판서, 재무통인 조석문은 호조판서를 했는데, 이들은 동시에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에도 겸직으로 봉직하고 있었다. 또한 이들 공신들은 현직에서 물러나도 부원군 자격으로 조정의 정무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한마디로 죽을 때까지 권력을 누리면서 부귀영화도 누리도록 배려해준 것이었다.
이와 같이 세조는 비서실 중심의 철저한 측근정치를 펼쳤다. 이는 모든 정무를 세조 자신이 직접 처리하기 위함이었는데, 이 때문에 국왕의 좌우에서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의 힘은 강화될 수밖에 없었고 무소불위의 강력한 무단정치가 가능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로 태어난 것이 '원상제(院相制)'였다. 이 제도는 세조가 말년에 와서 체력의 한계를 느껴 고안한 것인데, 왕이 지명한 세 사람의 중신(한명회, 신숙주, 구치관)이 승정원에 상시 출근해 왕자와 함께 모든 국정을 상의해 결정하는 일종의 '대리서무제'였다.
세조가 세 중신에게 이런 부탁을 한 것은 이미 악화된 자신의 건강 때문이었다. 그는 원상제를 도입한 해인 1468년 9월에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고는 다음날 죽었는데, 이는 세조가 죽기 직전까지 왕권의 안정에 얼마나 주의를 기울였는지를 알게 해주는 부분이다.
어쨌던 세조 대는 지나칠 정도의 왕권 강화책 덕분으로 왕권이 조선 역사상 그 유례를 찿아볼 수 없을 만큼 강화되었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의 상명하달식 국정 운영은 정국 경색을 초래했으며, 공신들의 권력 남용으로 비리가 누적되기도 했다. 이는 공신들의 권력집단화를 초래하였고 그들은 훈구대신들로 왕권을 능가하는 세력집단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후 성종대에와서는 비대해진 공신집단들의 권력횡포가 도를 지나치자 신진세력인 사림파를 본격적으로 대거 등용하게 되었고 두 세력 집단 간에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이 조선 시대 당쟁의 시초가 되었다.
세조의 정치는 왕권 강화에는 기여한 면은 있으나, 정치 문화에서는 '문치 대화 정치'를 멀리하고 힘을 앞세운 '무단 강권 정치'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저급한 수준을 보이고 있었다.
한편, 세조는 즉위 기간 내내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만년에 가서는 단종의 어머니이자 형수인 현덕왕후의 혼백에 시달려 아들 의경세자가 죽자 그녀의 무덤을 파헤쳐 부관참시를 하는 등 폐륜을 범하기도 했다. 또한 현덕왕후가 자신에게 침을 밷는 꿈을 꾸고 나서부터 피부병에 걸려 고생하기도 했다는 이야기와, 그 피부병을 고치려고 오대산 상원사를 찿았다가 문수동자에 의해 쾌유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세조는 불교를 융성시킨 왕이기도 했다. 궐내에 사찰을 두었고, 승려를 궁으로 불러들이기도 했다. 그는 왕자 시절에 불경 언해 작업에 참여한 경험이 있어 교학에도 밝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의 불교 융성책은 즉위 과정에서 보여준 왕위 찬탈과 어린 조카 단종의 죽임, 안평대군, 금성대군을 포함한 수많은 혈족과 충신열사들에 대한 피의 숙청을 자행함으로써 유교적 입지가 약한 그의 현실적인 선택이었다는 측면도 있다. 즉 형제들을 죽이고,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는 것도 부족해 결국 죽여버린 폐륜적인 행동이 명분과 예를 중시하는 유교적 입장에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세조의 찬불정책은 유교이념에 투철한 성리학자들을 견제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파란만장한 삶을 산 세조는 1468년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는 정희왕후 윤씨를 비롯 2명의 부인에게서 4남 1녀를 얻었으며, 능은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있는 광릉이다.
광릉은 세조가 석실의 유해무익함을 강조하면서 석실과 병석을 쓰지 말라고 유언한 것에 따라 병석을 없애고 석실은 회격으로 바꾸어 꾸몄으며, 십이지상을 난간동자석주에 옮겨 새겼다. 석실을 회격으로 바꿈에 따라 쓸데없는 비용을 절약했으며, 능의 배치상으로 동원이강(同原異岡)의 형식을 취했는데 이는 국초왕릉제의 일대 개혁으로 평가받고 있다.
3. 세조의 가족들
세조는 늦게 왕위에 오른 탓으로 후궁을 많이 거느리지 않았고, 따라서 후사도 그리 많지는 않았다. 어쩌면 부왕 세종이 많은 후사로 인해 결국에는 형제간에 피비린내나는 살륙전을 겪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는 정희왕후 윤씨와 근빈 박씨에게서 각각 2남 1녀, 2남을 얻어 총 4남 1녀를 두었다. 이들 중 정희왕후 윤씨 소생이 의경세자 (덕종), 해양대군(예종), 의숙공주이며, 근빈 박씨 소생으로 덕원군, 창원군이 있다.
세조의 가족은 많지 않은 관계로 정의황후 윤씨와 후에 덕종으로 추존된 의경세자의 삶을 간단히 약술한다.
정희왕후 윤씨(1418~1483년)
정희왕후 윤씨는 판중추부사 윤번의 딸로 본관은 파평이다. 1418년 홍주군에서 태어나 1428년 가례를 행했으며, 처음에는 낙랑대부인에 봉해졌다가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녀는 계유정난 당시 정보 누설로 수양대군이 거사를 망설이자 손수 갑옷을 입혀 그에게 용병을 결행하게 할 만큼 결단력이 강한 여장부였다. 또 1468년 예종이 19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예종이 재위 1년 2개월 만에 죽자 요절한 맏아들(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성종)을 그날로 즉위시켜 섭정을 하기도 했다.
예종이 죽었을 때 그의 아들 제안대군이 있긴 했으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그에게 왕위를 넘겨주지 않았으며, 덕종에게도 큰 아들 월산대군이 있었으나 자을산군을 즉위시킨 것은 정희왕후 개인의 결단에 의한 것이었다. 물론 어린 세자인 제안대군을 즉위시키는 것에 부담을 느낀 것이나 자신의 딸을 왕비로 들이기 위한 한명회 등를 위시한 훈구대신들의 입김이 작용하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녀는 13세의 어린 자을산군을 대신해 무려 7년 동안 정사를 이끈 정희왕후는 섭정 기간 중에 과감하고 결단력 있는성품을 마음껏 발휘하여 왕권을 인정시켰으며, 성종이 성년이 되자 섭정를 끝내고 1476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처럼 과단성 있는 행동으로 조정을 안정시킨 그녀는 1483년 3월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녀 소생으로 덕종(의경세자), 예종 등 두 왕과 의숙공주가 있고, 능은 경기도 낭양주에 있는 광릉으로 세조의 능 동편에 언덕에 있다.
의경세자(1438~1457년)
세조의 맏아들이자 성종의 아버지인 의경세자의 이름은 잠, 자는 원명이다. 1445년 도원군에 봉해졌으며, 1455년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한확의 딸 한씨(소혜왕후)를 아내로 맞아 1454년 월산대군을 낳고, 1457년에 자을산군 성종을 낳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예절이 바르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해서에 능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잔병이 많았으며, 그 때문에 20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세조의 가족들은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많이 시달린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의경세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죽기 전에는 늘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혼령에 시달렸으며, 그 때문에 그가 병석에 누워 있을 때 21명의 승려가 경회루에서 공작재를 베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쾌유되지 못하고 병세가 악화되어 죽고 말았다. 이 때문에 분노한 세조는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쳐 관을 꺼내 부관참시를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의 둘째 아들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1471년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능은 경릉으로 현재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에 있다.
제안대군(齊安大君, 1466~1525년)
조선 에종의 차남으로 안순왕후에게서 태어났다. 본명은 현(琄), 자는 국보(國寶), 시호는 영효(靈孝)이다.
형 인성대군은 어린 나이에 죽었기 때문에, 1469년 아버지 예종이 죽을 당시 후계왕이 될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그의 할머니가 되는 정희왕후가 대군의 백부 의경세자의 차남이자 대군의 사촌형인 자을산군 이혈(성종)을 후계자로 지목하여, 왕이 되지 못하고 이듬해 제안대군에 봉해졌으며, 후에 왕이 된 성종을 위해(危害)를 가하거나 정치에 간섭할 수 있다는 이유로 정희왕후와 왕실 원로대신이던신숙주와 한명회 등 사람들이 논하여 1483년 세종의 일곱째 아들인 평원대군의 봉사손으로 입양되었다.
첫 부인은 김수말(金守末)의 딸인데 안순왕후가 그녀를 쫓아내 박중선(朴仲善)의 딸과 재혼하였으며, 이후에 김수말의 딸과도 다시 합치게 된다. 그러나 자식을 두지는 못하였다. 연산군 시절에는 당시 사가에 혼인을 하였으나 미색이 빼어나다는 이유로 노비신분이었던 장녹수를 소개해 주기도 하였다.
명종때 어숙권이 지은 패관잡기(稗官雜記)에 제안대군의 일화가 실려있는데,
제안대군 이현은 예종 대왕의 아들로 성품이 어리석었다. 일찍이 문턱에 걸터앉아 있다가 거지를 보고 그 종에게 말하기를, “쌀이 없으면 꿀떡의 찌꺼기를 먹으면 될 것이다.” 하였는데, 이것은 “어째서 고기죽을 먹지 않느냐.” 한 말과 같다.
여자의 음문은 더럽다 하여 죽을 때까지 남녀 관계를 몰랐다. 성종은 예종이 후사가 없음을 가슴 아프게 여겨 일찍이 “제안에게 남녀 관계를 알 수 있게 하는 자에게는 상을 주겠다.” 하였더니, 한 궁녀가 자청하여 시험해 보기로 하고, 드디어 그 집에 가서 밤중에 그가 깊이 잠든 틈을 타서 그의 음경을 더듬어 보았더니 바로 일어서고 빳빳하였다. 곧 몸을 굴려 서로 맞추었더니, 제안이 깜짝 놀라 큰 소리로 물을 가져오라 하여 자꾸 그것을 씻으면서 잇달아 “더럽다.”고 부르짖었다.
일찍이 제안이 여자를 5ㆍ6명을 데리고 문밖에서 산보하는 것을 보았는데, 한 여자 종이 도랑에서 오줌 누는 것을 제 안이 몸을 구부리고 엿보고서 말하기를, "바로 메추리 둥지 같구나." 하였는데, 그것은 음모가 무성한 것을 이름이다.
월산대군(月山大君, 1454~1488SUS)
조선의 왕족으로, 이름은 정(婷), 자는 자미이고 호는 풍월정이다. 덕종의 맏아들로 자을산군 성종의 친형이다.
어릴 때에는 할아버지인 세조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으며 문장에도 뛰어나 중국에까지 그의 시가 알려졌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북촌에다 별장을 지어놓고 그 곳에서 시를 짓고 책을 읽으며 자연 속에 묻혀 일생을 보냈다.
사후 그의 묘는 수난을 당하였다. 연산군은 그의 부인 박씨와 함께 자다가 꿈에 그를 보고는 밉게 여겨 내관으로 하여금 긴 쇠기둥을 만들어 그의 묘 광중(壙中)에 꽂게 하였는데 우레와 같은 소리가 들렸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에 사당이 있으며, 전주 이씨 계성군파에서 사당을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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