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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19 : 조선의 역사 61 (세조실록 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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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19 : 조선의 역사 61 (세조실록 5)

두바퀴인생 2012. 3. 9. 02:45

 

 

 

한국의 역사 519 : 조선의 역사 61 (세조실록 5)

 

                                       

 

                                       

                                                                                       

제7대 세조실록(1417~1468년, 재위 1455년 윤6월 ~ 1468년 9월, 13년 3개월)

 

  

1. 수양대군의 정국 전복과 왕위 찬탈 

 

단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조선의 정국 구도는 왕족의 대표격인 수양대군파와 문종의 고명을 받은 고명대신파로 나뉘었다. 하지만 이 두 파의 내부에는 또 다른 작은 세력권들이 형성되어 있었다. 즉,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던 왕족 세력 중에는 수양을 견제하는 안평대군이, 재상정치를 목적으로 하고 있던 대신들 속에는 김종서와 황보인의 권력 독점을 비판하던 집현전 학사 출신들이 나름대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조선은 근본적으로 왕을 중심으로 하는 왕도정치를 표방하고 있는 나라였다. 때문에 정치 세력은 언제나 왕족을 등에 업거나 또는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는 대의명분을 얻기가 힘들었다. 특히 단종시대는 왕이 너무 어린 관계로 왕권 자체가 유명무실했고 왕을 대신할 실질적인 궁중 어른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신들은 자신들의 정치적인 대의명분을 얻기 위해서도 반드시 왕족 중에 한 사람을 전면에 내세울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고명대신들이 선택한 사람이 안평대군이었다.

 

고명대신들이 안평대군을 선택한 까닭은 한마디로 수양대군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왕권이 유명무실해지자 신권이 강해지는 한편, 왕위를 노리는 왕족들의 힘도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신들은 왕족들의 힘을 분산시킬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그래서 비교적 힘이 약한 안평 쪽을 끌여들였던 것이다.

 

당시 왕위를 노릴 만한 힘을 가졌던 인물은 수양과 안평 두 사람으로 입축될 수 있는데, 이들은 이미 왕의 건강이 약화되던 세종 후반기부터 서서히 힘을 길러오다가 문종 때에 와서는 자신들의 세력을 점차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힘이 없는 단종이 들어서자 이를 노골화한 것이었다. 특히 수양대군의 위세는 대단해서 고명대신들이 위협을 느낄 지경이었다.

 

수양대군의 위세가 높았던 것은 그가 왕족의 대표로 단종을 보필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종은 왕으로 즉위한 후 왕족 대표로 수양대군과 금성대군 두 사람에게 자신을 보필해주도록 부탁했는데, 가장 가까운 직계 혈족의 최고 어른인 수양과 수양의 네 번째 동생이지만 일찍이 태조의 여덟째 아들 방석의 봉사손으로 입적되어 촌수로 따지면 수양의 재종 아우뻘이 되던 금성대군이 선택되었다. 하지만 금성대군은 성격이 곧기는 하나 세력이 없었고 정권욕도 없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왕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단연 수양대군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명대신들에게는 이러한 수양의 세력 팽창이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수양은 본래부터 성격이 강직하고 독점력이 강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수양은 왕권 중심주의를 표방하고 있었기에 그의 권력이 강화되는 것은 곧 대신들의 권력이 약화되는 것을 의미했다.

 

김종서와 황보인을 위시한 고명대신들은 숙고 끝에 수양대군의 세력 팽창을 막기 위해 수양과 경쟁관계에 있던 안평대군과 손을 잡았다. 안평은 육진을 개척할 때에 김종서와 함께 여진족을 토벌한 인물인 데다가 조정의 대신들과도 비교적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학문과 문예에도 뛰어나 선비의 낭만적인 면모도 있었다. 말하자면 안평대군은 호방한 성격의 소유자인 수양에 비해 왕권을 넘볼 확률이 적은 인물이라고 평가되었던 것이다.

 

고명대신들이 안평과 손을 잡자 수양대군은 위협을 느끼고 기세가 위축되었다. 황표정사를 통해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그들이 자신과 견줄 만한 대표적인 왕족 세력인 안평대군과 힘을 합침으로써 그야말로 힘과 대의명분을 다 쥐게 된 까닭이다. 그래서 수양대군은 이에 대한 타개책을 모색하게 되었고, 결국 고명대신들을 무력으로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수양의 이 거사는 단종 즉위 초부터 조심스럽게 준비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수양이 1452년 7월 집현전에서 <역대병요>의 음주를 함께 편찬하던 집현전 교리 권람을 막하로 끌어들이고, 이후 한명회, 홍윤성 등을 심복으로 삼고 본격적으로 힘을 확대한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수양이 고명대신들을 제거한 것은 단종 즉위 이듬해인 1453년 10월이었다. 그는 이 거사를 단행하기 6개월 전에 스스로 명나라 사은사로 자청하여 1452년 9월에 명나라로 가게 된다. 이는 1452년 9월 명나라가 단종 즉위를 인정한다는 고명을 보내오자 조정에서는 이에 감사한다는 말을 전할 사은사를 보내기로 했는데, 수양은  이 일이 종친의 의무임을 내세우며 자신이 가야한다고 우겼다. 하지만 수양의 수하들이 그를 만류했다. 수양이 없는 틈을 타서 대신들이 세력을 팽창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양은 나름대로 상대를 기만내지 방심시키는 한편 자신의 거사를 단행할 준비를 하는 등 몇 가지 목적을 가지고 이 일을 강행하였다.

 

그 후 명에서 돌아온 1453년 4월부터 수양의 거사 계획은 급진전 된다. 수하에 당시 집현전과 조정에서 무게감 있는 신숙주를 끌어들였는가 하면, 김종서를 찿아가 철퇴로 죽인 홍달손, 양정 등 당대의 내노라 하는 무사들을 수하에 끌어들여 두고 본격적으로 무력을 양성한다. 따라서 이런 결과를 놓고 볼 때 수양의 명나라행은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이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즉, 김종서 일파의 경계에서 벗어나 더 자유롭게 거사 계획을 짜는 한편, 그들의 경계를 늦추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수양이 김종서, 황보인 등의 조정 대신들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한 이른바 '계유정난'은 1453년 10월 10일 밤에 일어났다. 수양은 그동안 진행해온 계획을 실행할 결심을 하고 우선 조정 최대의 권력자이자 정적인 김종서를 제거하기 위해 수하 무장들을 데리고 그의 집을 찿아간다.

 

김종서는 16세의 어린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오른 뛰어난 문인이자, 육진을 개척하는 등 무인적인 역량이 뛰어난 비상한 인물이었다. 김종서를 찿아간 수양은 사전 논의된 방법대로 대문 밖에서 김종서를 불러내어 서찰을 주자 희미한 달빛 속에서 서찰을 읽는 동안 방심한 틈을 이용하여 수하 무장들이 계획에 따라 철퇴로 김종서를 살해하고 나서 그 길로 입궐하여 왕명을 빙자하여 영의정 황보인을 비롯한 모든 신하들을 불러들이도록 하였다. 그 자리에서 이미 작성된 '생살부(生殺符)'에 따라 정적들을 모두 살해하고 마침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수양이 단종에게 보고한 내용은 이들 신하들이 '김종서가 황보인, 정분 등과 부동하여 장차 안평대군을 추대하려는 모반을 꾀했다."는 것이었다.

 

정난에 성공한 수양은 친동생 안평을 강화도로 유배 보냈다가, 다시 교동으로 보내 죽였다. 그리고 스스로 영의정부사, 영집현전, 내외전, 경연, 춘추, 서운관사, 겸판이병조, 내외병마도통사 등 여러 중직을 겸한여 병권과 정권을 독차지하고 거사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한 정인지, 권람, 한명회, 양정 등 자신을 포함한 43명을 정난공신에 책봉했다.

 

수양에 의해 이렇듯 정난이 벌어졌을 때 집현전 학사 출신들인 성삼문, 정인지, 최항, 신숙주, 하위지 등은 중립을 지켰거나 수양대군에 동조했다. 이들은 비록 유교적 비전제정치를 내세워 재상 중심 체제를 주장하고 있었으나, 의정부사서제의 핵심인 김종서, 황보인 등의 세력이 지나치게 확대되고 있는 것을 못마땅해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이 때문에 수양 역시 이들을 애써 적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수양이 집권한 뒤에 집현전 학사 출신들은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성삼문, 하위지 등은 수양이 왕위를 찬탈한 후 단종 복위를 기도하게 된다. 또한 당대 최고의 문인이자 학자인 김시습을 비롯한 원호, 이맹전 등은 수양의 왕위 찬탈 소식을 접하고 스스로 관직을 내놓고 다시는 관직에 나오지 않는 등 수양의 왕위 찬탈에 대한 유생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단종 복위사건을 주도한 성삼문, 하위지, 이개, 박팽년, 유성원, 유응부 등 여섯 사람에 대해 중종 대의 사림파들은 왕을 위해 충절을 바친 '사육신'으로 추앙했으며, 또한 이때 세조 밑에서 한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단종을 위해 절의를 지킨 김시습, 원호, 이맹진, 조려, 성담수, 남효온 등을 사육신에 대칭하여 '생육신'으로 높여 불렀다. 이 중 남효온은 사건 당시 불과 두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성장하여 세조의 부도덕한 찬탈 행위를 맹비난함으로써 생육신의 한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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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어느 불로그에 '김종서와 조선의 눈물' 책 내용을 소개한 글을 참고로 옮겨 싣는다.

 

 

 

김종서와 조선의 눈물

 

 

역사적 측면에 보다 충실하면서 계유정란에 대한 새로운 관점으로 접근하고자 한다면, '김종서와 조선의 눈물'도 한번쯤 볼만한 책이다.

 

이 책은 그동안 우리의 머리속에서 수양대군의 대칭점으로만 존재해왔던 김종서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김종서로 대표되는 조선초기 법치체계와 양반체계가 수양대군의 사리사욕에 의해 어떻게 망가졌는지를 심층적으로 다루고 있다.

 

우리는 흔히 김종서를 북방개척를 이룬 장수로만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심지어 그에 대한 인상은 말을 타고 긴칼을 휘두르는 장신의 용장으로 기억하기 쉽다. 하지만 그는 5척 단신의 작은 체구에 불과했다. 5척이면 대략 1.5미터정도된다. 지금보다 작은 조선시대 평균신장을 고려해도, 5척이라는 신장은 그 시대에도 결코 큰 편은 아니었다. 더욱이 그는 문관 출신이었다. 그것도 단순히 문관으로 등용된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유능하면서도 지조있는 선비의 전형이었다.

 

그의 관료생활 초기에는 자신과 비슷하거나 높은 직위의 지방관리들의 비리를 찾아 문제점을 보고하는 암행어사로 특명을 받기도 한 사헌부 감찰과 사헌부 차석인 집의를 거치면서 왕 앞에서도 원칙을 고수하는 선비의 기상을 높인 이로 이름이 높았다. 더욱이 말기에는 성균관 유생들로부터 성균관을 책임지는 영성균관사로 임명해달라는 청원을 받을 정도로 인품과 학문의 인정을 받았고, 문종과 학문과 정치를 논하는 경연의 강론을 맡은 지경연사이자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편찬한 역사학자로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 중 하나였다.

 

어떻게 보면 그는 허생전에 나오는 허생처럼 풍채는 작아도 항상 책을 함께 하면서 꼬짱꼬장하고 지조가 강한 서생의 이미지가 강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가 어느 무장들도 쉽게 이루기 힘든 북방개척의 주역이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가 북방개척을 처음 시작할 당시에도 관료들은 수도권 이외의 지방발령 자체를 꺼려해 발령을 받으면 벼슬을 그만두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그러한 지방 중에서도 가장 오지인 함경도에 단순한 지방관리가 아니라 여진족과 싸워 영역을 넓히라는 명을 받고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로 가족들과 떨어져 홀홀단신으로 거친 여진족과 거친 함경도 무장들의 텃새 속에서 무려 8년간이나 자신이 맡은 바를 완벽히 수행했다.

 

이처럼 김종서는 단순히 문에 편중되지 않고 문무를 모두 아우르면서 국가가 필요로 하다면 자신의 안위나 편안함은 포기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진정한 선비의 표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가 조선관료의 정점인 정승의 두번째인 좌의정에 올랐다는 것 자체가 조선의 초기 선비상이 어떠했고 조선의 관료체제가 얼마나 건강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는 태종이 조선이 건국과정에서 발생한 부도덕과 혼란을 정리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특권층인 공신들과 인척들조차 모두 척결시킨 뒤, 그의 아들인 세종이 제위기간동안 전력을 다해 새로운 체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결과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법치체계와 사회적 원칙은 조선이 새로운 시대로 발전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기반이었다. 만약 조선 중기까지라도 그러한 기반이 유지되었다면 조선은 우리가 아는 것과는 전혀 다른 나라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자산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자산을 만드는데 누구보다 노력했던 세종의 아들 중 하나였던 수양대군 개인의 사리사욕에 의해 망가졌다.

 

그결과 한때 같이 국가를 위해 일했던 동료 관료와 그들이 모시던 왕의 부인과 딸 그리고 모친을 성적 노리개로 나눠가지고, 문밖 시내에서 말을 씻기는 사람을 보고 말과 사람을 죽이고, 남의 땅을 빼앗기 위해 그 땅의 주인인 늙은 할머니를 바위에 엎어놓고 모난 돌로 쳐 죽이고 시체를 길가에 두고, 일반 백성들의 세금을 대납한다는 명분으로 세금의 몇배가 되는 재산을 강탈해도, 문제가 되기는 커녕 왕이라는 작자로부터 "쇠붙이의 자석과 같아 간격이 없고, 불에 던져진 섶과 같아 기세가 성하여 막을 수 없고, 하늘에 대하여 땅이 생성된 것 같아서 의론할 수 없다"는 애기를 들으며 보호받는 부도덕한 공신집단과 그 가족들이 무려 1만 명이 넘어서면서 조선은 퇴보의 길로 접어들었다.

 

결국 조선은 수양대군 개인의 사욕으로 형성된 사회악인 공신집단들을 정리하고 정상적인 법치체계를 새롭게 형성하는데 수백년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 했다. 그과정에서 제대로 외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수없는 피해를 봐야했고, 다시는 세종 시대에 만들어진 진취적 기상과 원칙을 갖추지 못한 체 소모적인 당파논쟁으로 무너지는 길을 걸어야 했다.

 

우리는 흔히 역사는 결국 진보한다고 하지만, 계유정란을 보면 간혹 한 개인의 무모한 행동이 역사를 얼마나 퇴보시키고 망칠 수 있는지를 잘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은 다소 나아졌지만 그래도 김종서보다는 한명회나 수양대군 같은 자들이 더 대접받고 영웅화되는 우리시대도 아직 갈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