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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17 : 조선의 역사 59 (세조실록 3)

두바퀴인생 2012. 3. 7. 02:45

 

 

 

한국의 역사 517 : 조선의 역사 59 (세조실록 3)

 

                                       

                                    

                                   
                                                                                          

제7대 세조

 

만년

현덕왕후 부관참시

 1457년 음력 6월 갑자기 악몽을 꾸고 형수 현덕왕후의 묘를 파헤쳐 부관참시한 뒤 폐서인시켰다. 이를 두고 여러가지 전설과 야사가 나왔고, 세조 사후 희극 작품의 소재의 하나가 되기도 했다. 야사는 1457년 아들 덕종(의경세자)가 일찍 죽자 세조가 아들 단종의 죽음에 한을 품은 문종현덕왕후의 혼령이 사주한 것이라 착각하여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치고 관을 꺼내는 엽기적인 행각을 저질렀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전혀 맞지 않는 낭설이다. 덕종이 사망한 것은 1457년 음력 9월 2일로, 오히려 단종(1457년 음력 10월 21일)보다 한 달 정도 먼저 사망했다.

 

또한 현덕왕후가 세조 시기인 1457년 음력 6월 26일에 서인으로 격하되었지만, 그것 또한 현덕왕후의 어머니와 동생이 단종 복위 운동을 벌이다 발각되어 처형당해 현덕왕후(1457년 음력 6월 26일 폐서인)가 아버지 권전(1456년 음력 7월 7일 폐서인)과 함께 연좌된 것이었다. 폐서인된 왕후의 능은 평민의 격에 맞도록 작게 재조성되었고, 제사 또한 지내지 않게 된다.

 

이후 중종 때부터 현덕왕후의 연좌제 적용이 합당치 않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그에 따라 1513년 음력 3월 12일에는 중종현덕왕후를, 1699년 음력 7월 15일에는 숙종이 현덕왕후의 아버지 권전을 명예 회복시키게 된다.

 
문둥병

세조는 피부에 고름이 생기다가 문둥병으로 이어졌다. 전설에 의하면 단종의 모친인 현덕왕후의 원혼이 세조의 꿈에 나타나 내 아들을 죽인 원수라며 침을 뱉은 이후로 병증이 심해졌다 한다.

 

어의들도 치료를 못하자 그는 그 치료를 위해 온천욕을 즐겨 다녔으며, 아산온양온천 등에 행궁하기도 했다. 한번은 오대산 상원사 문수보살상 앞에서 100일 기도를 했다. 기도를 마치고 몸이 가려워 혼자 목욕을 하는데, 지나가는 동자승이 있어서 등을 밀어달라고 했다. 그리고 "네가 나가서 행여나 사람을 만나더라도 상감 옥체에 손을 대고 흉한 종기를 씻어드렸다는 얘기를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더니 동자승이 미소를 지으며 "잘 알겠습니다. 상감께서도 후일에 누구를 보시던지 오대산에 가서 문수동자를 친견했다는 말씀을 하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하는 말과 함께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현재 오대산 상원사 문수전에는 세조가 보았다는 목조 문수동자상이 있다.

 

불교에 귀의

만년의 세조는 심한 악몽에 시달렸고, 악몽을 계기로 불교에 귀의할 결심을 한다. 이는 유교 성리학을 국교로 하는 조선의 국가 이념과 정면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의 불교 귀의에 항의하여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 학자들과 훈구 유학자들은 연명 상소와 사퇴 등으로 항의의사를 표시하기도 했으나, 세조의 만류로 무마되었다. 그러나 조선건국 당시 금지한 불교 금지령을 완화시켜 양반 사대부들 중에도 불자가 나타나기도 했다.

 

 

 

 

 

합천 해인사에 봉안된 세조 영정 (이름 미상의 승려 작)

 

 

세조는 여러 불당의 중수와 창건을 지원하였다. 훈구파 공신들과 사림파 신진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궁내에 불당을 지었고, 원각사신륵사 등을 지원하였다. 또한 수종사(水鍾寺) 등의 중건을 지원하기도 한다. 강원도월정사, 상원사 등에도 적극 시주, 후원하였고 파주 보광사, 남양주수종사양평 용문사, 합천해인사 등도 그가 후원하는 사찰들이었다.

 

그가 지원하던 사찰 중에는 양주수종사도 있었다. 그런데 수종사는 세조가 죽인 자신의 동생 금성대군이 시주해 세운 곳이기도 하다.

 

또한 세조는 유점사를 왕실의 복을 비는 원당으로 정하였으며, 조선의 왕 중에서는 유일하게 직접 금강산에 와서 장안사, 표훈사, 정양사 등을 들러보며 매년 쌀 100섬과 소금 50섬을 금강산의 사찰들에 (시주로) 지급하도록 지시한다. 이를 '세헌'이라고 하는데 뒤에는 200여섬으로까지 늘어나게 된다. 그런가 하면 반역죄로 처형당한 사람의 토지와 노비, 삼림 등을 금강산 사찰들에 나눠주기도 했다.

 

한편 그의 사후 금강산에 있는 표훈사에 그의 영정이 봉안되기도 했다. 합천 해인사에도 그의 영정이 봉안되었는데[8], 이 해인사 영정은 2000년대까지도 전하고 있다.

 

왕자시절부터 불교에 심취했던 그는 불교는 왕실의 안녕과 미래를 보장하는 종교적인 신앙으로서 필요했다. 세조는 불교가 가지고 있는 호국성에 근거한 국가·민족 의식의 고양을 통해 국방력과 집권체제의 강화를 도모하고자 원각사(圓覺寺)를 세우고 〈월인석보 月印釋譜〉를 간행하였다. 1461년에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해 많은 불경을 국역하도록 명하기도 했다.

 

말년

 

 

서울시 마포구 신수동 복개당에 봉안되었던 세조영정

 

 

함경도에서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조카 귀성군(龜城君)을 파견하여 평정케 하고, 강순(康純)을 파견하여 건주위(建州衛) 여진족을 토벌하였다. 그는 무장들을 신뢰하여 구성군, 남이, 강순 등을 측근에 두었는데, 이들에 대한 총애에 반감을 품은 세자 해양대군은 즉위하자 마자 이들을 모두 제거한다.

 

만년에는 왕위의 찬탈로 인한 인간적인 고뇌에 싸여 불교에 귀의했다고도 한다. 1468년 세조는 자신의 건강이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음을 깨닫고, 한명회신숙주, 구치관 등을 불러 그들에게 왕세자 해양대군을 잘 보필해줄 것을 부탁했다. 음력 9월 7일에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다음 날인 8일에 승하하였다.

 

바로 명나라에 고부사신 황중(黃中)·김계박(金繼朴)을 파견하여 그해 12월 혜장이라는 시호를 받아왔다. 당시 나이 향년 52살이었다.

 

사후

그의 사후 단종을 암군으로 보고, 그가 과단성있게 반정을 일으켜서 국정을 안정시켰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었으나, 성종 때부터 사림파가 본격 정계에 진출하고 도학을 숭상하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1910년대까지도 사사로운 탐욕으로 어린 조카를 폐출한 폭군, 비정통 군주로 평가되었다. 능은 경기도 양주(楊州)의 광릉(光陵)이다. 후에 정희왕후가 안장될 때 동원이강형의 봉분으로 조성된다. 본래 묘호를 신종(神宗)으로 하려 하였으며 광종이라는 묘호도 고려되었으나 아들인 예종의 강력한 주창으로 묘호가 세조로 정해졌다. 사후 일부 무속인들에 의해 무속의 신으로 숭배되기도 하였다. 그 밖에 여러 사찰에도 봉안되었다.

 

그를 모신 대표적인 신당으로는 1970년대까지 서울시 마포구 신수동에 있던 복개당이 있다. 이 당제는 조선시대에는 제관이 열 명이 넘을 정도로 규모가 컸으나 일제 시대에 제관이 5~6명으로 줄었다. 1978년 노인정 공사로 철거되었다. 복개당에 보관되오던 영정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중에 있다.

 

저서와 작품

저서

  • 석보상절》(釋譜詳節)
  • 월인석보》(1459)
  • 역대병요》 (歷代兵要)

작품

  • 공주 마곡사 영산전 현판
  • 세조 친필수결의 용문사 면세 교지(보물 729호)
  • 오대산 상원사 중창권선문 현판(보물 제140호)

 

가계

  • 부 : 제 4대 세종
  • 모 : 소헌왕후 심씨
  • 왕비 :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 尹氏, 1418년 음력 11월 11일 ~ 1483년 음력 3월 30일), 윤번의 딸
    • 장자 : 의경세자(덕종)(懿敬世子:德宗) : 성종의 아버지
    • 차자 : 해양대군 황(海陽大君 晄): 예종
    • 장녀 : 의령공주(懿姈公主) 세희(世姬) - 의화공주(懿華公主)라고도 함, 야사(野史) 금계필담 속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존재로서 야사에 기록된 이름은 '세희(世嬉)'이다. 실록에서는 공주 작호를 받은 것과 실존여부 확인이 불가능한 인물이다. 실록에 의하면 1446년 당시 "수양대군은 1남 2녀"를 두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실존가능성이 없지는 않다.[15]
    • 차녀 : 의숙공주(懿淑公主) 세선(世宣)
  • 후궁 : 근빈 박씨(謹嬪 朴氏)
    • 덕원군 서(德源君 曙)
    • 창원군 성(昌原君 晟)
  • 후궁 : 폐 소용 박씨(廢 昭容 朴氏) 덕중(德中)
    • 아지(阿只)
  • 후궁 : 숙원 신씨(淑媛 申氏) - 신숙주의 서녀이다. 성종폐비 윤씨의 외6촌 언니가 된다.


  • 장인 : 파평부원군 윤번
  • 장모 : 흥녕부대부인 이씨 - 이문화의 딸
  • 처남 : 윤사분, 윤사윤(장경왕후의 증조부), 윤사흔(문정왕후의 고조부)
  • 동서 : 홍여방(인수대비의 외숙부), 성봉조(성삼문의 재종숙), 이연손, 이염의, 노덕기, 서원군 한계미(한명회의 6촌), 정사종

 

사상과 신념

육조직계제

 

 

세조 존영도

 

 

그는 왕권이 신권보다 우위에 서야 된다고 확신하였다. 따라서 의정부 서사제나 6조의 판서와 한성부 판윤->의정부 좌,우찬성->삼정승을 거쳐서 왕에게 하달되던 것을 왕이 직접 6조 판서와 한성부 판윤에게 결재를 받고 직접 인사권과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였다.

 

공신 견제

사육신의 숙청과 생육신 등의 축출로 공신들의 권력이 비대해지자 그는 재야에 있던 김종직 등의 사림파를 등용하여 공신들의 월권행위를 견제하려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명회신숙주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이는 등 이중적인 태도를 취했다.

 

수종사 복설

 

 

1459년 세조에 의해 복설된 수종사 전경

 

 

세조가 만년에 병을 치료하려 오대산에 갔다 돌아올 때였다. 뱃길로 한강을 따라 환궁하는 도중 밤이 되어 양수리에서 야경을 즐기고 있었다. 이 때 옆에 있는 운길산에서 때 아닌 종소리가 들렸다. 신하를 보내 알아보게 하니 절터가 있고, 바위벽에 18나한상이 줄지어 앉아 있는데 그 바위틈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종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 사실을 접한 세조는 매우 감동했고, 마침내 발심하여 절터에 절을 복원케 하고 이름을 수종사라 하도록 했다고 전한다. 수종사는 1459년(세조 5) 왕명에 의해 중창되었다. 종각 밑에는 세조가 직접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오랜 세월만큼이나 굵은 나이테를 간직하고 있다.

 

무속 신봉

유교사회에 속했으면서도 그는 무속과 불교를 신봉하였다. 왕위찬탈을 모의하고 있던 수양 대군이 하루는 시중의 민심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특이하게 글자판, 한자로 판을 놓고 글자로 점을 치는 점쟁이를 만났다. 수양대군은 아무 생각없이 밭전(田)자를 고르자 점장이가 '허허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지만 왕이 많은 이 나라는 어디로 가는가?'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놀란 수양대군은 무슨 얘기인지를 물어본 즉, 밭전자는 임금 왕(王)자 두개를 수평과 수직으로 겹쳐놓은 글자라는 것이다. 얼마 후 수양 대군은 다시 점장이를 찾아 똑 같이 밭전자를 골랐다고 합니다. 그러자 점장이가 '첩첩산중'이라고 예언하였다. 다시 궁금증이 생긴 수양대군이 점장이에게 이유를 묻자 뫼산(山)를 사방으로 겹쳐놓은 것과 같은 글자이므로 산중의 산, 첩첩산중이라는 것이다. 점장이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고 의심한 수양 대군은 바른 말을 하지 않으면 죽여버릴 요량으로 허리에 칼을 차고 다시 점장이를 찾아가 칼 끝으로 다시 밭전(田)자를 골랐다고 한다. 죽음을 느낀 점장이는 말없이 밭전자의 좌우를 치더랍니다. 밭 전(田)자에서 좌우를 없애면 임금 왕(王)자가 된다. 그리고 좌와 우를 치우라고 예언했는데 이에 크게 깨달은 수양대군은 좌와 우를 좌의정과 우의정으로 판단, 좌의정 김종서와 우의정 황보인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