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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14 : 조선의 역사 56 (단종실록 4)

두바퀴인생 2012. 3. 4. 03:24

 

 

 

한국의 역사 514 : 조선의 역사 56 (단종실록 4)

 

          

                                                                                           단종의 장릉

 

 

 

제6대 단종실록(1441~1457년, 재위 1452년 5월 ~ 1455년 윤6월, 3년 2개월)

 

  

4. 단종 복위운동을 전개한 사람들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자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역모로 단정지은 사람들은 단종 복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세조 즉위 4개우러 만에 발생했는데, 집현전 학사 출신의 대신들과 일부 무인들이 주동이 된 사건이었다.

 

1455년 윤6월에 수양대군이 금성대군을 비롯한 종친들과 신하들을 귀양보내고 왕으로 등극하자 세종과 문종에게 특별한 신임을 받았던 짐현전 학사 출신인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등의 문관들은 유응부, 성승 등의 무관들과 모의하여 상왕으로 물러앉은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운다.

 

이 계획은 책명사인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오겠다는 통보가 오자 유응부가 왕을 보호하는 별운검에 임명되면서 구체화되었다. 당시 세조는 명나라 책명사를 맞이하기 위해 상왕 단종과 함께 창덕궁으로 가게 되어 있었는데, 바로 이 순간에 유응부가 세조를 살해한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무위로 끝나고 만다. 세조가 별운검을 동반하고 연회장에 나서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한명회가 창덕궁 연회장이 너무 협소하여 당일에 별운검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세조가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암살 계획은 뒤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거사에 참여하기로 한 김질이 장인 정창손에게 이 사실을 알려 결국 단종 복위계획에 가담한 사람은 모두 붙잡히고 말았다.

 

사실 이 단종 복위사건의 정확한 주모자를 파악할 만한 자료는 아직 없다. 다만 김질이 고발할 때 성삼문에게 들은 말이라고 했고, 성삼문은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등이 같이 모의하였다고 했다. 이에 더 추궁합자 유응부와 박정도 등도 이 계획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집현전 학사 출신이 성삼문, 박팽년 등과 이에 연루된 17인이 투옥되었다. 이들은 모두 옥이 일어난 지 7일 만인 6월 9일 군기감 앞에서 처형되었다. 이후 중종 때 이들 중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등은 사육신으로 기록되었다.

 

집현전 학사 출신의 단종 복위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되었는데, 이때 또 한 번의 단종 복위사건이 발생한다.

 

두 번째 단종 복위사건은 수양의 친동생이자 세종의 셋째 아들인 금성대군이 일으킨다. 금성대군은  수양의 친동생이긴 했지만 촌수로 따지면 제종간이 된다. 그는 세종에 의해 태조의 여덟째 아들이자 태종의 이복동생인 방석의 봉사손으로 입적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양이 단종을 상왕으로 밀어내자 이에 항의하다가 유배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유배지를 전전하던 금성대군은 순흥에 유배되었을 때 그곳 부사 이보흠과 모의하여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거사 직전에 관노의 고발로 실패해 반역죄로 처형당하고 말았다.

 

그의 형제들 중 세조의 등극에 반기를 든 유일한 인물로 남아 있다. 그리하여 정조 때 사육신을 비롯해서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신하들의 어정배식록을 편성할 때 육종영의 한 사람에 올랐다.

 

단종 복위 움직임은 비단 이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계유정난 직후에 발생한 '이징옥의 난'도 따지고 보면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막으려는 시도로 볼 수 있으며, 세조 집권 이후 생육신들을 비롯한 유생들이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 대해 비판을 가한 것도 이의 연장선상에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수양대군의 왕권 계승은 당시 조선인들에겐 왕위 찬탈로 인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후대에 단종을 위해 충절을 보였던 신하들을 높이 평가했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대한 논쟁이 수백 년 동안 지속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5. <단종실록> 편찬 경위 

 

<단종실록>은 총 14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원명은 '노산군 일기'였다. 그래서 표지에는 '단종대왕실록'으로 되어 있으나 본문의 각 면에서는 모두 '노산군일기'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이는 단종이 상왕으로 밀려나 다시 노산군으로 강봉되고 다시 서인으로 전락했다가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1452년 5월부터 1455년 윤6월까지 단종 재위 3년 2개월 동안 각 방면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 편년체로 기술되어 있다.

 

<단종실록>에 대해서는 1455년 8월 29일에 "춘추관의 건의에 따라 노산군 즉위 이후의 시정기를 편찬하기로 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뿐 그 과정이나 참여 인물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1464년 10월 14일에 세조가 '정난일기'의 편찬을 명했는데 그 내용이 <노산군일기>에 편입되엇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뒤 1469년 예종 1년에 왕이 춘추관에 명하여 노산군 때의 일기와 계유정난 때의 사초를 들이게 하여 그 범례를 살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곧 당시에 <노산군일기>의 편찬 작업이 마무리 되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노산군일기>에서 수양대군을 세조라고 부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세조가 죽은 뒤에 작성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노산군일기>의 구성은 대부분 실록과 비슷하나 서술 방식에서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맨 앞쪽에는 왕의 출생과 즉위까지 과정을 간략하게 적었고, 즉위 뒤의 사건은 실록의 기재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실록들이 권말에 편찬자의 명단을 수록하고 있음에 반해 <노산군일기>에는 그 명단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 대신 숙종 때 만든 부록이 붙어 있다.

 

단종이 복위된 것은 1698년으로 숙종 24년 11월 때의 일이고 '단종실록'이라는 표제를 붙인 것도 이때인데, 숙종 때 붙인 부록에는 이 경위가 적혀 있다.

 

<단종실록>은 단종의 치세에 대한 중요한 사료지만 기록을 그대로 받아 들이기에는 곤란한 점이 많다. 특히 셉조의 찬탈 경위가 미화되어 있어 자칫하면 역사를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게 할 소지가 있다.

 

<노산군일기>는 1473년 성종 4년 역대의 실록을 인쇄할 때 처음으로 인쇄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그 뒤 1603년 선조 36년에 여러 실록을 함께 필사했는데 이때에 <노산군일기>도 간행된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