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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15 : 조선의 역사 57 (세조실록 1)

두바퀴인생 2012. 3. 5. 02:40

 

 

 

한국의 역사 515 : 조선의 역사 57 (세조실록 1)

 

 

 

 

                                       

                                                                             드라마 '공주의 남자' 장면                                                                                          

 

 

제7대 세조

 

세조(世祖, 1417년 9월 29일 ~ 1468년 9월 8일, 재위 1455년~1468년)는 조선의 제7대 임금, 시인이다. 조선 왕조에서 최초로 왕세자를 거치지 않고 즉위한 임금이자, 최초로 반정을 일으켜 즉위한 군주이다. 는 유(瑈), 는 수지(粹之). 생전의 존호는 승천 체도 열문 영무(承天體道烈文英武)였고, 사후 정식 시호는 세조혜장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世祖惠莊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이고, 약칭으로는 시호는 혜장대왕(惠莊大王)으로 불렸다. 세종대왕소헌왕후 심씨의 둘째 아들로서, 문종의 동복동생이자 안평대군 용, 금성대군 유의 친형이며 단종의 숙부이기도 하다. 즉위전 호칭은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초봉은 진평대군(晉平大君)이었으나 여러차례 개봉된 끝에 수양대군이 되었다.

 

조선 왕조에서 최초로 반정(反正)을 일으켜 집권한 지도자로,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겨 했고, 역대병요 등을 편찬할 때 만난 권람 등을 통해 한명회를 소개받고, 문종 연간에 한명회를 통해 신숙주, 정창손, 정인지, 김질 등의 집현전 학사들을 포섭하여 조정을 장악해 나간다.

 

1455년(단종 3년) 계유정난으로 김종서, 황보 인, 안평대군을 죽이고 스스로 영의정부사에 올라 전권을 장악한 뒤 스스로 정난공신 1등관에 녹훈하였다. 1455년 조카 단종으로부터 명목으로는 선위의 형식으로 즉위하였으나, 훈신들의 압력에 의한 강제 퇴위였고 이는 이후 사육신, 생육신 등의 반발과 사림세력의 비판을 초래하였다. 단종 복위 운동을 진압하고 사육신과 그 일족을 대량 숙청하였으나 후일 죄를 뉘우치고 불교에 귀의하였다. 사육신 등의 대량 학살로 공신 세력이 강성해지자 김종직 등의 사림파를 등용하여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1468년 9월 7일에 예종(睿宗)에게 전위(傳位)하고, 9월 8일에 수강궁(壽康宮)의 정전(正殿)에서 승하하였다.

 

 

 

조선 세조
세조대왕 어진
세조대왕 어진
조선의 제7대 국왕
재위 1455년 ~ 1468년
왕비 정희왕후
부왕 세종
모비 소헌왕후
이전 왕 단종
다음 왕 예종
조선 세조
1417년 9월 29일 ~ 1468년 9월 8일
별명 별칭 대호(大虎), 작위는 진평대군, 함평대군, 함양대군, 진양대군, 수양대군, 시호는 세조혜장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世祖惠莊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
태어난 곳 조선 한성부
죽은 곳 조선 한성부
복무 조선
최종 계급 도제조, 중외 병마 도통사
지휘 조선 육군
기타 이력 영의정부사, 조선 국왕(1455~1468)

 

 

생애

잠저 시절

출생과 왕손

 

 

부왕 세종

 

 

세조 이유는 1417년 9월 29일 당시 본궁(本宮)에서 충녕대군이던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차남이자 네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그가 소년기일 때 태종이 어린 손자들과 산책을 하던 중 한 고승이 태종을 보고 두번째 손자분이 할아버지의 기상을 많이 닮았다고 예견하였다. 태종이 승려에게 어떻게 닮았느냐고 묻자, 둘째 손자가 할아버지와 같은 운명을 걷게 될 것이라는 예언하였다.

 

그는 보통의 왕자로 여생을 보낼 운명이었으나, 그가 태어날 무렵 할아버지 태종은 자신의 뒤를 이을 양녕대군이 세자로서의 위치가 상당히 불안하고, 주색을 즐기는 등의 많은 문제를 일으키자, 태종은 세자를 교체할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의 나이 2살때, 숙부인 성녕대군이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인 충녕대군이 왕세자를 거쳐 세종으로 즉위하였다.

 

그는 바로 입궐하지 못하였는데, 세종이 즉위한 뒤에도 세조는 궁밖 민가에서 자랐다. 그것은 당시 유아 사망의 정도와 궁실의 분위기가 그에게 맞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이며 이와 더불어 큰할아버지인 정종과 할아버지인 태종의 붕어가 잇따랐기 때문에 아이가 자라기에는 아직 환경이 좋지 않은 탓도 있은 듯하다.

 

민가에서 성장한 것은 왕자 유에게 오히려 많은 영향을 주었다. 궁실에서 애지중지되어 귀하게 자라 세상물정을 모르고 자라기보다는, 자유롭게 뛰어놀면서 민간의 일들을 상세히 겪으면서 활달한 아이로 자랄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어려움과 사실과 거짓을 일찍부터 알게 되었고,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그의 고귀함은 그대로 그에게 전해져 이미 남다르게 숙성하였다. 왕자로서의 고귀함과 도량이 자연스럽게 그의 몸에 배어져 있었던 것이다. 세조는 또한 이미 다섯 살의 나이에 <효경(孝經)>을 외워 주위의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는데 그의 이러한 영특함은 자라면서 형제들 중 단연 뛰어나 세종과 형인 문종에게 인정을 받았다.

 

대군 시절

입궐과 대군 봉작

 

사저에서 자라다가 5세 무렵 입궐하였다. 1428년(세종 10년) 6월 16일 대광 보국(大匡輔國) 진평대군(晉平大君)에 봉작되었다. 1429년(세종 11년) 2월 세종이 평강(平康)에 친히 나가 무예를 강무(講武)할 때 그는 그간 익혔던 궁술을 발휘한 적이 있었다. 이 때가 그의 나이 불과 열 셋이었다. 몰이꾼들이 몰아오는 사슴을 향해 화살 7발을 쏘았는데 이것이 모두 사슴 목을 관통하였으니 보는 이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처음에는 진평대군이었으나, 후에 봉작이 바뀌어 함평대군(咸平大君), 진양대군(晉陽大君) 등으로 개봉되었고, 훗날 1445년(세종 27년) 다시 수양대군 (首陽大君)으로 개봉되었다. (중간에 함양대군에도 봉해졌던걸로 잘못 알려져있는데 함양대군으로 봉해졌던 기록은 없다.) 1428년(세종 10년) 파평 윤씨 윤번의 딸 윤씨(후일의 정희왕후)와 길례를 올렸다. 성리학을 수학하였으나 일찍이 글재주가 없음을 깨닭고 활쏘기와 무술 연마에 정진하였다.

 
교육과 소년기
 

 

세조 어필 석각본

 

 

포은 정몽주의 제자 권우의 문하에서 수학한 세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유교정치(儒敎政治)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세자(뒤의 문종)를 성균관에 입학시키고, 이어 다른 대군들도 성균관에 입학시켜 성리학을 배우게 한다. 세종은 왕업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 왕자들의 교육에도 상당히 관심을 갖고 신경을 썼다. 이러한 세종의 특별 배려 속에 왕자들과 함께 수학하였으나 그 가운데에서도 다재다능하여 일찍 배운 것을 습득하고 응용하였다.

 

1434년 16세 때 그는 세종을 따라 왕방산(王方山)에서 강무하게 되었는데 그는 하루아침에 사슴과 노루 수 십 마리를 쏘아서 털에 묻은 피가 바람에 날려 겉옷이 다 붉게 물들었다. 늙은 무사 이영기(李英奇) 등이 보고 감격하여“오늘 뜻밖에 다시 태조의 신무(神武)를 뵙는 듯합니다.” 하였다. 박시백 화백의 《조선왕조실록》(휴머니스트)에 의하면, 수양대군은 박식하고, 병약했던 형 문종과는 달리 무예 실력도 출중했다. 승마격구, 쏘기 재주가 뛰어났고, 사냥을 즐겼다.

 
무인

세조는 무인의 기질이 뛰어났다. 사람들이 궁마(弓馬)에 대한 일을 이야기하려 하면 그는 마음속으로 이를 좋아하였고 자신도 그렇게 하려고 마음먹기도 하여 항상 활과 화살을 가지고 다녔다. 또 당시 수렵 중 가장 재미있고 호쾌한 것으로 꼽히던 매사냥을 좋아하여 자신이 직접 를 사육시켜 사냥을 다니곤 하였다. 자칫 궁중 생활로 약해질지도 모르는 체력을 승마를 통하여 다져나갔다. 세조는 사냥과 궁술, 마술 등을 익혀 상당한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고, 이는 훗날 무인 선발과 그가 중심이 되어 편찬하는 <역대병요(歷代兵要)> 찬집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1436년(세종 18) 2월, 그의 나이 약관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세종이 세조가 문학을 좋아한다고 하여 친히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내려 주었다. 이 때 세조가 고금의 서사(書史)를 다 보았고, 더욱 성리학에 정통하였는데 매양 말하기를, '천하의 서적을 다 읽지 않고서는 나는 다시 활을 잡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그의 형인 세자는 일찍이 수양의 활에다 쓰기를, '철석 같은 그 활이여, 벼락인양 그 살이로다. 버티임은 보겠으나 풀어짐을 못 보겠네.'라는 시를 친히 적어주기도 하였다.

 

정치 활동

정치활동 초기와 전제 개혁

부왕 세종의 병환과 그의 재능을 알아본 세종의 특별 지시로 그는 정사에 참여할수 있었다. 1439년(세종 21년) 7월 종친(宗親)들을 관리하는 종부시 제조(宗簿寺提調)가 되었다. 이후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면서 전제상정소 도제조(田制詳定所都提調)가 되어 농지를 실제 농민에게 부여하는 토지제도의 분배 재개혁을 주관하였으며, 세종 재위기간 중 치평요람(治平要覽)· 역대병요(歷代兵要)·의주상정(儀註詳定) 등의 서적의 편찬과 찬술을 감독하였으며 중국의 운회(韻會)를 훈민정음(한글)로 번역하였다. 또한 명나라천축국에서 불서들을 구하여 불서들을 훈민정음으로 번역, 보급하기도 했다.

 

1440년(세종 22년)에 세종이 규표(圭表 : 천문관측기계의 하나)를 바로 잡을 때의 세조와 안평대군 및 다른 유신들에게 명하여 삼각산 보현봉(普賢峯)에 올라 해지는 곳을 관측하게 하였다. 돌길이 위험하고 또 불측한 벼랑이 내려다 보였으므로 안평대군 이하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눈이 어지럽고 다리가 떨려서 전진하지 못하였으나 세조만은 유난히 걸음이 나는 듯하여 순식간에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니 보는 이가 모두 탄복하여 `따를 수 없다' 하였다. 늘 소매 넓은 옷을 입었으므로 궁중 사람들이 모두 웃으니 세종이 이르기를, "너와 같은 용력있는 사람은 의복이 이만큼이나 넓고 커야만 될 것이다."라고고 하였다.

 

1444년 전제소 제조(田制所提調)에 임명되었고, 1445년(세종 27년) 진양대군에서 고쳐져서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개봉되었다.

 
문종의 대리청정

세종이 병들고 세자였던 문종이 대리청정을 하자, 그는 동생인 안평대군과 함께 신하들에게 세종과 문종의 교지를 전하기도 하였다.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형제는 당시 조정 중신들이 왕권에 공공연히 도전하는 것을 보고 탐탁치 않게 여기며 후일을 기약했다고 한다. 그러나 둘째 아들 수양과 셋째 아들 안평에게 야심이 있다는 것을 간파한 부왕 세종대왕은 수양과 안평을 궐 근처에서 떨어져 있게 했다.

 

세종 자신의 생각도 통념적인 종법대로 적자로서 왕위를 계승시켜 왕위 계승의 올바른 길을 마련해야 한다는 의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수양의 야심을 경계하면서도 수양이 왕위에 오르리라는 생각은 불가능하리라 확신했고, 세조의 형인 문종도 모든 면에 있어 군주로서의 능력을 십분 가지고 있었다. 수양의 역할이란 그저 왕실을 보위하는데 기여하는 것으로 끝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종의 건강이 좋은 편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세종 자신도 소갈증과 고혈압을 비롯한 질환에 시달려 건강이 좋지 않고, 문종도 좀 이른 시기이기는 하지만 문종에게 섭정을 하게 하여 왕위계승을 둘러싼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였다. 이에 부왕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에게 어린 원손을 보필하라는 당부를 여러번 거듭하였다.

 

저작 활동

 

 

측근 신숙주 , 집현전내 수양대군의 지지세력으로, 세조는 즉위 후 그를 당태종의 위징에 비유하기도 했다.

 

 

 

 

 

학역재 정인지, 그의 측근이자 사돈이 된다.

 

수양대군이 야심이 있다는 소문이 문종 즉위 초부터 확산됨에 따라 그는 철저하게 자신은 왕위에 뜻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였다. 계속 명나라인도에서 불서들을 수입하여 탐독하였고, 매사냥과 활쏘기를 즐겨하였다.

 

수양대군은 세종의 병약함을 기회로 일부 국정전반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되고자 하는 야심을 철저히 숨겼고, 정치 보다는 학문서적 간행에 힘쓰면서 인맥을 형성하고 정치를 하려는 기회를 노렸다. 이때에 그는 한명회, 권람을 알게 되고 그들로부터 뒤에 신숙주, 정인지 등의 인재들을 포섭하게 된다. 대군으로 있으면서 그는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여 도제조(都提調)가 되어 토지제도의 재개혁을 맡았으며, 〈치평요람 治平要覽〉·〈역대병요 歷代兵要〉·〈의주상정 儀註詳定〉 등의 책을 찬술했고 중국의 〈운회 韻會〉를 한글로 번역하기도 했다.

 

그는 집현전의 학사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집현전 학사들 중 일부는 안평대군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신숙주정인지, 김질 등을 자신의 편으로 포섭하는데 성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