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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13 : 조선의 역사 55 (단종실록 3)

두바퀴인생 2012. 3. 3. 09:00

 

 

 

한국의 역사 513 : 조선의 역사 55 (단종실록 3)

 

 

 

 

          

                                                                                           단종의 장릉

 

 

 

제6대 단종실록(1441~1457년, 재위 1452년 5월 ~ 1455년 윤6월, 3년 2개월)

 

  

3. 계유정난의 배경과 사건 분석 

 

12세의 어린 나이로 단종이 조선 재6대 왕으로 즉위하자 조정은 고명대신에 의해 장악된다. 이는 곧 조정이 신권에 의해 왕전히 장악당하였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러한 신권의 팽창이 왕권 자체를 위협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왕권을 위협한 것은 수양을 위시하여 호시탐탐 왕위를 노리던 세종의 적자 아들들인 왕족들이었다.

 

당시 조정은 영의정에 황보인, 좌의정에 남지, 우의정에 김종서가 포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지는 건강이 좋지 않아 이 해 10월에 좌의정을 내놓게 되고, 좌의정에 김종서, 우의정에 정분이 앉게 된다. 당시는 의정부서사제였기에 조정의 권력은 의정부의 삼정승이 쥐고 있었는데 건강이 악화된 남지가 정사에 적극 참여할 수 없자 조정은 황보인과 김종서가 좌지우지하고 있는 상황이 되었고, 정분이 우의정이 된 다음에도 계속 두 사람이 권력을 잡고 있었다.

 

단종실록에 따르면 이들 대신들이 안평대군 등 종친뿐 아니라 혜빈 양씨, 환관 등과 모의하여 궁중에까지 세력을 펴는 한편, 황표정사를 통해 자신의 세력을 요직에 배치하여 붕당을 조성하고 끝내는 종실을 뒤엎고 수양대군에게 위협을 가한 것이 계유정난의 원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단종신록>이 세조 때에 편찬된 점을 고려할 때 이 기록은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즉 황보인 등 고명대신들은 문종의 유지를 받들어 어린 왕을 보필하는 데 최선을 다했을 뿐, 붕당을 조성하려고 한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대신들의 협의체인 의정부가 본래의 권한을 넘어서 왕권을 미약하게 만들었던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한 사관의 기록에 따르면 "왕은 손 하나 움직일 수 없는 허수아비로 전락하고, 백관들은 의정부는 알았으나 군주가 있는 것은 알지 못한 지가 오래 되었다."고 했다. 또한 재상 중심 체제를 주장하던 성상문을 비롯한 집현전 학자들도 김종서의 지나친 권력 증대에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이런 두 가지의 예는 곧 의정부가 권력 남용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왕권이 완전히 땅에 떨어져 있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하지만 대신들의 합의체인 의정부가 세력을 키워 수양을 제거하려 한 것 같지는 않다. 수양은 자청하여 명나라 고명 사은사로 간 바 있는데 망약 의정부가 그를 제거하려 했다면 이 기간에 충분히 가능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수양은 그의 수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명을 다녀왔다. 이는 곧 당시 김종서 등이 수양의 행동에 별로 관심이 없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수양은 명을 다녀옴으로써 의정부 대신들에게 자신이 정권에 대한 야욕이 없음을 보여주려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의정부 대신들을 안심시켜 허를 찌르겠다는 계산을 하였는지 모른다. 이는 수양의 거사 계획이 명에서 돌아온 뒤 급진전된 점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수양대군은 명에서 돌아온 1453년 4월에 신숙주를 막하에 끌여들이는 한편, 홍달손, 양정 등 심복 무사를 양성하기 시작하였고, 6개월 뒤에 드디어 거사를 감행했다.

 

우선 그는 조정의 핵심 세력인 김종서를 제거했다. 당시 김종서는 병권을 쥐고 있었고, 조정 대신들의 구심체였기에 그를 제거하지 않고는 거사를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김종서는 문관 출신이지만 북방 6진 개척 과정을 통해 그의 주변에는 많은 무신들이 연계되어 있었고 문종이 사망할 당시 어린 단종을 부탁한 고명대신으로 지명된 그의 위상은 당시 어느 누구도 따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김종서는 수양의 야심과 의도를 몰랐을까? 그것은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으나 김종서가 수양에게 너무나 어처구니 없이 당한 것을 보면 아마 김종서 측에서 방심하고 자만하였던 것 같다. 당시 김종서는 병권을 쥐고 있었고, 조정 대신들의 구심체였기에 그를 제거하지 않고는 거사를 성공시키기 어려웠다. 그래서 수양은 대규모 병력 동원은 불가하다고 판단하고 핵심 무장 세력만 대동하고 상대 핵심세력을 제거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해 10월 10일 밤 유숙, 양정, 어을운 등을 데리고 김종서를 찿아가 간계를 써서 그를 철퇴로 죽였으며, 바로 다음에는 왕명을 핑계로 대궐로 불러들인 영의정 황보인, 병조판서 조극관, 이조판서 민신, 우찬성 이양 등은 왕명을 통고받고 대궐로 급히 들어오다가 한명회 등이 살생부를 들고 기다리고 있다가 문안에 대기하고 있던 무사들로 하여금 차례로 모두 참살하였다.

 

또한 자신의 친동생 안평대군을 붕당 모의의 주역으로 지목해 강화도에 유배시켰다가 사사시켰다. 게다가 자신의 형제들 중 뜻을 달리하는 금성대군을 유배시켜 죽였으며, 단종을 상왕으로 밀어낸 후 다시 노산군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서인으로 전락시켜 죽였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은 수양대군이 왕권에 대한 야심이 없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었다. 또한 비록 의정부 대신들이 조정을 쥐고 있었다고 해도 이는 적어도 왕권에 대한 야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왕이 권한을 펼 능력이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한시적인 일이었다.

 

조선이 개국 초부터 재상 중심제를 정치이념으로 삼았던 점을 감안할 때 사실 왕은 상징적인 존재로 남아 있어도 통치에는 별 문제가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계유정난은 수양과 그 주변 무리들이 왕권을 탐한 나머지 저지른 비윤리적인 역모라고 보는 것이 올바른 평가일 것이다.

 

수양의 계유정난은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후세에 많은 지탄을 받고 있다. 어린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영원한 역적 세조, 그를 둘러싼 주변 세력들, 특히 한명회 같은 인물은 세조 등극에 절대적인 모사로 역활하였으며 그로 인해 정난공신에 올라 수대에 걸쳐 영의정을 거치면서 부귀영화를 누린 대표적인 훈구대신의 표상이되었다. 반면 단종 복위운동을 시도하다가 죽음을 면치 못한 사육신과 관직을 버리고 조정을 떠났던 생육신은 조선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창업주 태조가 무너져가던 고려에 반기를 들고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고려 조정을 뒤엎고 정권을 장악한 다음 공양왕과 최영을 제거하고 고려의 왕족들을 모두 강화 앞바다에 수장시키며 조선을 개국하였지만 태조의 불행은 같은 배에서 태어난 그의 아들끼리 왕권을 둘러싸고 서로 죽고 죽이는 피비린내나는 살륙전을 전개하여 자중지란을 일으킨 것도 어쩌면 업보인지도 모른다. 세조 또한 어린 조카 단종과 수많은 충신열사를 모두 제거하면서 왕권을 이었지만 이러한 그의 행위는 자신의 당대에 많은 업적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세종이 이룩한 위대한 업적을 모조리 뒤엎고 그 후에도 여러 문제점을 잉태한 결과 조선이 역사에서 뒷걸음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그것은 세조 이후 여러 훈구대신들이 권력을 잡고 200년 가까이 신권우위의 조정을 이루게 되었고 그들의 탐욕과 부귀영화에 비해 백성들은 비참한 삶을 가져오게 만들었고 나라는 온갖 비리와 부패로 썩게 되면서 탐관들이 백성들을 수탈하는 세월을 만들었으며 급기야 임진왜란이라는 외침을 받자 조선은 지리멸렬 무너져 갔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개혁은 커녕 당파싸움과 공리공론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병자호란을 당하여 치욕적인 항복을 하고 수많은 백성들과 아녀자들이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서 능욕을 당하고 노예같은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이 모두 조선의 태생적인 부도덕성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조는 유약한 어린 조카 단종이 조정 신료들에게 허수아비 같은 왕에 불과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강력한 왕권에 욕심이 있었지만 즉위 후 훈구대신들을 총애하여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었고 그들은 왕권에 능가하는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조선 사회에서 상층부로 자리메김하게 되었던 것이다. 세조는 훈구대신들을 이용하여 왕권을 쥐었고 조선의 대표적인 역신이라는 오명을 영원히 지을 수 없는 왕이 되었지만, 반면 훈구대신들은 세조를 이용하여 오랫동안 자손 대대로 그들끼리 부귀영화를 누렸다는 점에서 세조가 그들에게 이용되었는지도 모른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