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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11 : 조선의 역사 53 (단종실록 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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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11 : 조선의 역사 53 (단종실록 1)

두바퀴인생 2012. 3. 1. 03:02

 

 

 

한국의 역사 511 : 조선의 역사 53 (단종실록 1)

 

 

 

 

          

                                                                                           단종의 장릉

 

 

 

 

제6대 단종

 

단종(端宗, 1441뇬 음력 7월 23일 ~ 1457년 음력 12월 24일, 재위 1425년~1455년)은 조선의 제6대 왕이다. 휘는 홍위(弘暐). 1455년 숙부 세조의 정변으로 양위하였다가, 세조 측근들의 탄핵으로 강원도 영월군 청령포로 유배되었다가 암살되었다.

 

폐위되어 죽어서 시호를 받지 못한 채 노산군(魯山君)으로 불리다가 이후 중종 때에 복권 상소가 올려졌으나 거절당했고, 숙종 대에 가서야 성리학자들의 건의로 정종과 함께 묘호와 시호가 올려져 정식 시호는 단종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端宗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郭孝大王)이다. 세종의 장손인 문종과  현덕왕후의 외아들이며, 조선 왕조 최초의 왕세손이기도 하다.

 

 

 

조선 단종
Danjong of Joseon.jpg
조선의 제6대 국왕
재위 1452년 ~ 1455년
왕비 정순왕후
부왕 문종
모비 현덕왕후
이전 왕 문종
다음 왕 세조

 

 

생애

생애 초반

 

 

할아버지 세종

 

 

1441년 음력 7월 23일 단종은 당시 왕세자였던 문종과 왕세자빈이었던 현덕왕후의 외아들로 태어났으나 몸이 약한 현덕왕후가 단종을 낳은 지 3일 만에 산욕으로 세상을 떠났다. 모후가 죽자 어린 세손을 가련히 여긴 세종은 자신의 후궁인 혜빈 양씨에게 어린 단종을 부탁했고, 세종의 후궁으로 조모뻘인 혜빈 양씨의 보살핌 아래에서 성장하였다.

 

1448년 8살이 되던 해에 왕세손으로 책봉된 단종은 할아버지 세종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세종은 자신의 병이 악화되어 그리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예감하고 있었으며, 몸이 약한 아들 문종 역시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늘 어린 단종을 몹시 걱정했다. 문종마저 일찍 죽고 나면 야심으로 가득 찬 둘째 아들 수양대군을 비롯한 혈기왕성한 여러 대군 사이에서 어린 손자가 아무 탈 없이 잘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생전에 황보인.김종서.성상문.박팽년.신숙주 등에게 왕세손을 지켜줄 것을 부탁하였다.

 

세자와 즉위

1450년 세종의 뒤를 이어 문종이 즉위한 그 해에 단종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452년(문종 2년) 4월 문종은 수양대군을 관습 도감 도제조(慣習都監都提調)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수양은 야심을 철저히 숨기고 불사 중창과 법회에 참석하는 등 자신의 뜻을 철저히 감추었다. 그가 관습도감 도제조가 되자 사간원에서 종친에게 실직을 주는 것이 옳지 않다고 탄핵했으나 문종이 듣지 않았다. 세종이 우려했던 대로 문종은 왕으로 즉위한 지 겨우 2년 3개월 만에 병으로 승하하고 말았다.

 

1452년 단종은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단종은 어릴 때부터 세종의 칭찬이 자자했을 만큼 영리하였으나 12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므로 혼자서 나랏일을 결정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결정은 신하들이 도맡아 했고, 단종은 형식적인 결재를 하는 데 그쳤다. 특히 인사 문제는 ‘황표정사(黃票政事)’라는 방식으로 결정되었다. 이렇게 왕의 권력이 축소된 것에 반해 세종의 아들이자 문종의 동생인 수양대군 등 왕족의 세력은 나날이 팽창되어 갔다.

 

계유정난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 왕족의 대표로서 자신을 단종을 최측근에서 모실 수 있는 보호자라고 말하였고, 무신 세력을 양성하여 왕위를 찬탈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안평대군 계열이 먼저 손을 쓰려는 움직임이 감지되자 1453년에 계유정난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데, 이때 그는 지나치게 비대해진 신권을 억압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의 왕족과 성리학자자들의 지지를 획득한다. 이후 수양대군은 장악원 제조(掌樂院提調) 등을 역임하며 권력 기반을 다지게 된다.

 

혜빈 양씨와 영풍군 등은 단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문종의 후궁인 숙의 권씨 등은 정보를 훈신들에게 전달하기도 한다. 특히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세력 경쟁은 단종이 즉위한 지 1년 만인 1453년 음력 10월, 결국 계유정난을 불러왔다.

 

1453년 10월 수양대군은 정인지·한명회·권람 등과 공모하고 홍윤성·홍달손 등을 통해 병력을 모은 뒤 문종의 고명(誥命)으로 단종의 보호책임을 맡은 황보인·김종서 등을 죽이고 10월 10일 세력 경쟁자이며 아우인 안평대군을 강화도에 유배시키고 스스로 영의정부사가 되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어 1454년(단종 3년) 3월 논공행상을 정하여 정난공신을 책정하고 자신은 분충장의광국보조정책정난공신(奮忠杖義匡國輔祚定策靖難功臣) 1등관에 서훈하였다. 계유정난으로써 수양대군이 정치적 실권을 거의 장악하자 단종은 단지 이름뿐인 왕이 되고 말았으며, 안평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를 가서 사약을 받았다.

 

양위와 사육신 사건

 

 

 

단종이 유배생활을 하던 영월 청령포의 어소

 

 

1454년에 수양대군이 단종의 나머지 측근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유배하는 일이 일어나자 계유정난을 계기로 일부 신료들은 단종이 양위해야 된다는 공론을 세웠고 이는 통과되었다. 1455년(세조 1년) 단종은 수양대군의 측근 세력인 한명화·권남 등이 선위를 강요받아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1456년 음력 6월에 성상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 등 이른바 사육신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는 일이 일어났다. 세조가 즉위한 이듬해(1456년)에 성상문·유성원·하위지 등을 비롯한 집현전 학사 출신 관료들과 무인들은 연회때 별운검을 설치한 뒤 세조 3부자를 제거하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가담자의 한 명인 김질이 자신의 장인 정창손에게 이를 말하고, 정창손의 설득에 의해 사육신의 정변 기도를 폭로한다. 그 바람에 1457년 단종은 그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되었다. 같은 해 숙부인 금선대군 역시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사약을 받고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1457년 9월 금성대군은 배소인 순흥에서 단종복위계획을 세운다. 금성대군, 순흥부사 이보흠 등이 또다시 단종 복위 사건을 일으키자 세조는 금성대군을 죽이고 단종도 같이 죽였다. 또한 사육신과 관계된 여인과 재산을 공신의 노비로 분배하여 멸문시켰다.

 

최후

 

 

엄흥도

 

 

세조의 측근 공신들은 단종을 사사해야 한다는 여론을 조성하였고, 삼사는 단종 사사를 주청하게 된다.

 

1457년 음력 12월 24일 이 일로 단종은 서인(庶人)으로 내려지고 마침내 17살의 어린 나이에 사약을 받았다. 일설에는 교살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단종이 살해되자 아무도 그의 시신을 매장하지 못하였으나, 영월군의 호장(戶長)인 엄흥도가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지를 찾던 중, 눈보라가 치던 곳에서 사슴이 앉았다가 사라진 곳을 보고, 그 곳에 가매장하였다. 단종을 매장한 뒤 엄흥도는 가솔들을 이끌고 영월을 떠났다.

 

공적으로는 단종의 추모가 금기시되었지만 사망 직후 정보, 이수형 등은 복상하고 3년상을 치루기도 했다. 사후 무속에서 신으로 숭배되기 시작하였다.

 

단종은 죽은 뒤 묘호도 없이 노산군으로 불리다가, 중종 때 사림에 의해 복권 논의가 나왔으나 거절당하였다. 사림의 한 갈래인 서인,  노론은 단종과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의 복권을 주장하여 중종과 효종 때 단종의 복권 여론을 조성했다. 1681년(숙종 7년)에 우의정 김구의 상소로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추봉되고, 1698년(숙종 24년)에는 복위되어 묘호를 단종이라 하였다.

 

능묘

단종은 1457년 17세의 나이로 사약을 받고 죽은 이후 가매장되었다가, 59년 후인 중종 11년 1516년 12월 15일에야 봉분을 갖추게 되었다.

 

능은 영월에 있는 장릉(莊陵)이다.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에 소재하고 있으며,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 196호로 지정되었다. 경국대전에 명시된 사대문 밖 100리 이내에서 벗어난 능 중의 하나이며, 다른 능과 달리 단종에게 충절을 한 여러 신하들을 장릉에 배향하기 위해 장릉 밑에 충신단이 설치되어 있다.

 

기타

동학사

새육신과 생육신을 비롯한 관련자 및 단종폐위에 분개하여 관직을 버리거나, 관직에 나가지 않은 인물들을 모신 사당이 충청남도 공주군 반포면 학봉리(현 공주시 반포면)에 세워졌다. 동학사 내 숙모전(肅慕殿)에 단종과 신하들의 위패가 봉안되었으며, 동학사는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67호로 지정되었다.

 

무속에서 신격화된 단종

민간과 무속에서 군왕신(君王神)의 하나로 모셔진다. 노산군지신(魯山君之神)이라고도 부른다. 영월읍에 있는 영모전(永慕殿) 서낭당을 비롯하여 영월·정선군, 삼척군 등 태백산 인근의 무속에서 신으로 받들고 있다.

 

가족 관계

  • 조부 : 제 4대 세종(1397년 ~ 1450년)
  • 조모 : 소헌왕후 심씨(1395년 ~ 1446년)
  • 부 : 제 5대 문종(1414년 ~ 1452년)
  • 모 : 현덕왕후 권씨(1418년 ~ 1441년)
    • 누나 : 경혜공주 (1436년 ~ 1473년)
  • 왕비 :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
  • 후궁 : 숙의 김씨(淑儀 金氏)
  • 후궁 : 숙의 권씨(淑儀 權氏)

 

 

 

 

 

 

 

 

 

제6대 단종실록(1441~1457년, 재위 1452년 5월 ~ 1455년 윤6월, 3년 2개월)

 

  

1. 비운의 왕자 홍위 

 

문종은 병약하여 많은 후사를 내지 못했다. 게다가 세자빈 권씨마저 몸이 약해 외아들 홍위를 낳은 지 3일 만에 죽었다. 그래서 홍위는 세종의 후궁이자 자신의 서조모인 혜빈 양씨의 손에서 자랐다.

 

현덕오아후는 스물다섯 살 나이에 경혜공주에 이어 홍위왕자를 분만하게 되었는데, 난산이라 간신히 아이를 낳긴 했지만 해산에 기력을 완전히 빼앗긴 탓으로 죽음을 앞두게 된다. 그녀는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에게 아들을 부탁하고 3일 만에 숨을 거두었다.

 

혜빈 양씨는 후덕한 여자엿다. 태어난 지 불과 3일 만에 어머니를 여윈 세자 홍위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자신의 둘째 아들을 품에서 떼어내어 유모에게 맡기기까지 했다. 이렇게 양육된 홍위는 여덟 살이 되던 해인 1448년 세종 30년에 세손에 책봉된다.

 

세종은 홍위를 무척 아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홍위를 세손으로 책봉한 그는 성상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신숙주 등의 집현전 소장학자들을 은밀히 불러 세손의 앞날을 부탁했다. 세종은 자신도 이미 병세가 악화되어 죽음을 얼마 앞두지 않은 상태였고 세자 향 역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둘째 아들 수양은 어릴 때부터 야심이 크고 호기가 많은 인물이었다. 죽음을 앞둔 연로한 어린 세손이 그들 대군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갈 일이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1450년, 세종이 죽고 문종이 즉위하자 홍위는 세손에서 세자로 책봉된다. 그때 홍위의 나이 겨우 열 살이었다.

 

조선 제5대 왕으로 등극한 문종은 세종이 예상한 것처럼 오래 살지 못하고 즉위 2년 3개월 만에 어린 세자를 부탁한다는 고명(임금이 신하에게 유언으로 뒷일을 부탁하는 일)을 남기고 결국 병사하고 말았다. 이때 홍위의 나이는 12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