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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10 : 조선의 역사 52 (문종실록 2) 본문
한국의 역사 510 : 조선의 역사 52 (문종실록 2)
문종의 현능
제5대 문종실록(1414~1452년, 재위 1450년 2월 ~ 1452년 5월, 2년 3개월)
2. 문종의 짧은 치세와 왕권의 위축
1450년 2월 세종이 죽자 문종은 8년의 섭정을 끝내고 마침내 왕으로 등극했다. 하지만 원래 병약했던 그는 세자 시절의 업무 과중으로 건강이 심하게 악화된 상태였다. 즉위 후에는 병세가 심해져 재위기간의 대부분을 병상에서 보내야 했다.
문종은 1414년 태종 14년에 세종과 소헌왕후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향, 자는 휘지였다. 8세 되던 해인 1421년에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29세 되던 해인 1442년부터 세종을 대신해 섭정을 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해 학자를 가까이 했으며, 측우기 제작에 직접 참여했을 정도로 천문, 역산(일월 및 오성의 움직임을 계산하는 법) 및 산술에 뛰어났고, 서예에도 능했다. 또한 성격이 유순하고 자상하여 누구에게나 호평을 받았으며, 거동이 침착하고 판단이 신중하여 남에게 비난을 받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착하고 어질기만 하여 문약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8년 동안의 섭정에 이은 즉위였기에 문종시대의 정치는 세종 후반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문종이 즉위하면서 왕권은 세종 대에 비해 다소 위축되었다. 그것은 세종이 집권기 절반을 병석에 누워 있었고 또한 후반기에 세자에 의해 섭정이 계속되었기에 수양, 안평 등 다른 왕자들의 세력이 비대해져 있었던 탓이었다.
왕자들의 세력이 심상치 않게 조성되자 언관들의 종친들에 대한 탄핵이 잦을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문종 집권기 내내 종친과 언관들 사이에는 긴장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문종은 언관의 언론에 관대한 정치를 펴 이 시대의 언관들의 언론은 정치 전반에 걸쳐 영향력이 증대되었다. 척불언론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세종 말기에 세종과 왕실에 의해 이루어진 호불정책에 의해 각종 불교행사가 행해졌고 궁에 내불당을 조성하는 등 불교 융성 정책이 활발했지만, 유신들은 이를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문종이 즉위하자 유학 중심의 언관들은 왕실의 불교적 경향을 불식하고 유교적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안간힘을 썼으며, 이는 대부분 문종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이렇듯 언관의 언론이 활성화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종은 언로를 더 넓히는 정책을 폈다. 그래서 6품 이상의 신하들에 대해서는 윤대(돌아가면서 왕을 만나는 것)를 허락해 벼슬이 낮은 신하들의 말에 대해서도 경청했다.
이와 같이 관대한 정책을 기본 통치 방향으로 설정한 문종은 우선적으로 <동국병감>, <고려사>, <고려사절요>, <대학연의주석> 등을 편찬하게 했다. 이는 곧 문종이 역사와 병법을 정리해 사회 기반을 정착시키고 각종 제도를 확립하려는 의도였다. 왜냐하면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을 정리한 것은 단순히 전 왕조의 역사를 정리한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정치, 제도, 문화의 정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문종은 세자 시절부터 진법을 편찬하는 등 군정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런 연장선상에서 보면 <동국병감>의 편찬은 병법의 정비와 군정의 안정을 위한 조치였다. 그는 즉위 초에 스스로 군제 개혁안을 마련해 총 12사로 분리돼 있던 군제를 5사로 집약시키고, 군제상의 세세한 부분들을 개선, 보완하기도 했다.
문종은 이렇듯 유연함과 강함을 곁들인 정책을 실시했으나, 건강 악화로 재위 2년 3개월 만에 3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야 했다. 이때가 1452년 5월이었다.
문종은 어린 나이에 이미 세자에 책봉되었기에 일찍 혼인했다. 그래서 첯 번째 빈궁으로 김씨, 두 번째로 봉씨가 있었으나 둘 다 과실이 있어 폐위되었다. 순빈 봉씨가 폐출되자 당시 양원에 진봉되어 있던 권전의 딸이 세자빈으로 정해졌는데 그녀가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 권씨다.
현덕왕후 권씨는 1441년 세자빈 시절에 단종을 낳고 3일 만에 죽었는데, 그녀의 원혼이 수양대군이 왕권을 찬탈한 후 궁중에 나타나 그의 가족들을 괴롭혔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그래서 세조의 큰아들 덕종이 그녀의 원혼에 시달려 죽었으며, 세조 역시 꿈에서 그녀가 뱉은 침 때문에 심한 피부병에 걸려 재위기간 내내 고생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문종은 3명의 부인에게서 1남 2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현덕왕후 권씨에게서 단종과 경혜공주를, 사칙 양씨에게서 경숙옹주를 얻었다. 그의 능은 현릉으로 현재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있으며, 현덕왕후도 이곳에 함께 묻혀 있다.
3. <문종실록> 편찬 경위
<문종실록>은 총 13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1450년 3월부터 1452년 5월까지 문종 재위 2년 3개월간에 이루어진 각 분야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문종실록>은 1454년 3월에 <세종실록>이 완성되자 곧바로 편찬 작업에 들어가 1455년 11월에 완성되었다. 이 책의 감수관은 원래 김종서, 황보인 등에 이어 수양대군이었지만 수양이 즉위하자 정인지가 책임을 맡았다.
이 작업이 완료된 다음 달 세조는 실록각에서 연회를 베풀었으며, 도승지 박원형, 좌부승지 성상문 등에게 명하여 편찬 관계자들에게 술, 감귤, 향혼 등을 하사했다.
그러나 현존하는 <문종실록>은 1451년 문종 1년 12월과 이듬해 1월에 해당하는 두 달분이 없는 상태인데, 이에 대하여 1600년 선조 33년 8월 예문관대교로 있던 권태일이 묘향산에 가서 실록을 살피다가 처음으로 <문종실록>의 착오를 발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에 대해 권태일은 인쇄하여 각 사고에 나누어 보관할 때 착오가 발생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다시 말해 춘추관본을 인쇄하여 전주사고로 보내질 때 <문종실록>의 10, 11권 두 권이 누락된 채로 묶여져 나갔다는 뜻이다. 그것은 또 전주사고 이외에 다른 사고 한 곳으로 <문종실록>이 표지는 11권이지만 내용은 13권으로 되어 나갔다는 것으로 추론이 가능하다.
따라서 현재 <문종실록> 은 두 권이 누락된 상태로 1451년 12월과 1452년 1월에 대한 정확한 역사적인 고증은 불가능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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