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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12 : 조선의 역사 54 (단종실록 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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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12 : 조선의 역사 54 (단종실록 2)

두바퀴인생 2012. 3. 2. 02:28

 

 

 

한국의 역사 512 : 조선의 역사 54 (단종실록 2)

 

 

 

 

          

                                                                                           단종의 장릉

 

 

 

제6대 단종실록(1441~1457년, 재위 1452년 5월 ~ 1455년 윤6월, 3년 2개월)

 

  

2. 어린 단종의 즉위와 왕위를 찬탈하는 왕숙 

 

단종은 어린 나이인 12세로 왕위에 올랐다. 스무 살 이하인 미성년의 어린왕이 즉위하면 궁중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후비가 수렴청정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당시 궁중의 사정은 그렇지 못했다. 대왕대비는 물론이고 대비도 없었으며 심지어 왕비도 없었다.

 

단종의 모후 권씨가 산욕열로 죽었고 문종의 후궁으로도 귀인 홍씨, 사칙 양씨 두 사람뿐이었다. 비록 세종의 후궁 중에 혜빈 양씨가 있기는 하였지만 늦게 입궁한 데다 후궁인 탓으로 정치적인 발언권은 없었다. 후궁들은 모두 비슷한 위치에서 다만 내사를 돕는 정도에서 그쳐야 했다. 따라서 단종은 수렴청정조차도 받을 수 없는 처지로 즉위한 것이었다.

 

문종과 현덕왕후 사이에서 테어난 단종은 조부인 세종의 칭찬이 자자할 정도로 어릴 때부터 명석했다. 세손 시절에는 성상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자들의 지도를 받았고, 왕세자로 책봉된 후에는 이개와 유성원이 그의 교육을 맡았다.

 

단종은 즉위하긴 했지만 나이가 너무 어려 정사를 돌볼 수 없었기에 모든 조처는 의정부와 육조가 도맡아 했으며, 왕은 단지 형식적인 결재를 하는 데 그쳤다. 인사 문제에서도 대신들은 '황표정사 제도'를 썼는데, 이는 조정에서 지명된 일부 신하들이 인사 대상자의 이름에 황색 점을 찍어 올리면 왕은 단지 그 점 위에 낙점을 하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모든 정치권력은 문종의 유명을 받든 이른바 고명대신들인 황보인, 김종서 등에게 집중되었다.

 

이렇듯 왕권이 유명무실해지고 신권이 절대적인 위치에 이르자 세종의 아들들, 즉 왕족들의 불만이 증가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의 세력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수양, 안평, 임영, 금성, 영응 등의 왕숙들이 서서히 왕권을 위협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둘째인 수양과 셋째 안평은 서로 세력 경쟁을 벌이기까지 했다. 이런 왕족 간의 세력다툼은 급기야 엄청난 피바람을 일으키고 말았다.

 

수양대군은 1453년 10월 '계유정난'을 일으킨다. 수양은 문종이 죽자 어린 왕을 보필한다는 명목으로 정치권에 뛰어들었고, 그 과정에서 김종서, 황보인 등의 대신들이 안평대군 주변에 모여들자 그들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수양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는데, 유력한 경쟁자인 안평대군의 세력 확대는 바로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수양은 한명회 권람 등의 건의와 계획을 듣고 수많은 고심끝에 거사를 결정하게 된다. 수양은 죽음을 불사한 거사를 결정하고 자신의 수하인 한명회, 권람 등의 계책에 따라 먼저 핵심세력의 우두머리인 김종서를 피살하고, 황보인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을 대권로 불러들여 죽였다. 이들의 죄명은 인평대군을 추대하여 종사를 위태롭게 한다는 것이었다.

 

계유정난으로 고명 대신들이 거의 참살당하자 조정은 수양대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수양대군은 영의정에 올랐으며, 또한 왕을 대신해 서무를 관장하는 등 왕권과 신권을 동시에 장악했다. 수양은 자신의 집권 거사에 참여한 인물들을 정난공신에 봉하고, 그들이 지칭한 난의 장본인인 안평대군과 그의 아들 우직을 강화도로 유배시켰다가 안평대군은 사사시키고 우직은 진도에 유폐시켰다.

 

중앙을 장악한 수양은 변방에 자신의 세력을 심기 위해 함길도 도절제사를 교체했다. 당시 함길도 도절제사로 있던 이징옥은 이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신임 도절제사로 부임하던 박호문을 참살하고 난을 일으켰다. 이징옥은 원래 4군과 6진 개척에 공로가 컸던 인물로 김종서의 많은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수양이 조정의 대신들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주변 인물들과 함께 수양을 치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종성판관 정종, 호군 이행검 등에 의해 내부 반란자들로부터 살해당하고, 이징옥의 난은 그만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이처럼 정치적 실권이 완전히 수양대군에 의해 장악된 가운데 1454년 정월에 단종은 송현수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이듬해 윤6월에 수양대군이 자기 수하의 신하들과 의논하여 왕의 측근인 동생 금성대군 이하 여러 종친, 궁인 및 신하들을 모두 죄인으로 몰아 유배시키자, 위험을 느낀 단종은 왕위를 내놓고 상왕으로 물러나 수강궁으로 옮겨갔다.

 

이후 1456년 6월 상왕 복위사건이 일어나 성상문, 박팽년 등 집현전 학사 출신과 성승, 유응부 등 무신들이 사형당했으며, 이듬해 단종도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1457년 9월, 유배되었던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된 사건이 발생하여 단종은 다시 서인으로 강봉되었고, 한 달 뒤인 10월 17세의 나이로 사사되었다.

 

단종의 부인은 송형수의 딸 정순왕후로 두 사람 사이엔 후사가 없었다. 단종은 1681년 숙종 7년 노산대군으로 추봉되었고, 1698년 단종으로 복위되었다. 그의 능은 장릉으로 강원도 영월에 있으며, 정순왕후의 능은 사릉으로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릉리에 있다.

 

 

 

계유정난

 

계유정난(癸酉靖難)은 1453년(단종 1) 음력 10월 수양대군이 친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기 위하여 김종서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을 말한다. 이 정변이 계유년에 일어났으므로 계유정난이라 한다.

 

배경

세종의 뒤를 이은 병약한 문종은 자신의 단명(短命)을 예견하고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 등에게 자기가 죽은 뒤 어린 왕세자가 등극하였을 때,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하였다.

 

 

 

수양대군의 책사 한명회

 

 

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단종이 즉위 당시 12세로 어렸기 때문에 세종과 문종의 유명을 받들어 조정과 군권을 장악한 당시 좌의정 김종서를 중심으로 한 영의정 황보인 등이 정권을 잡았다. 수렴청정을 통해 왕실의 구심점 역할을 해야 할 대비, 대왕대비 등의 부재 상황에서, 세종의 영특한 아들들은 세종 시대에 각종 정치, 문화 사업에 참여한 과정에서 각자 만만치 않은 세력을 이루고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세종의 둘째아들 수양대군과 셋째아들 안평대군 등의 세력이 가장 강성해, 조정의 신료와 왕실, 심지어 환관, 나인까지도 이들의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이에 왕권에 위협이 될 수도 있다고 판단한 김종서황보인 그리고 이조판서 민신 등은 그중에서도 가장 위협적인 수양대군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끼고 안평대군과 손을 잡았다. 안평대군 역시 수양대군과의 정치적 대결은 친형제 관계를 떠나 피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책사 노릇을 한 이현로, 아우이자 세종의 6남 금성대군을 중심으로 수양대군과 대립하게 된다.

 

수양대군의 정변 기도

 

 

수양대군의 책사 신숙주

 

 

 

조정 대신들이 안평대군과 손을 잡게 되자, 정치적 입지에 위험을 느낀 수양대군은 자신의 뜻을 뒷받침해 줄 수하 책사로 권람, 한명회 등을 맞이하게 되는데, 수양대군은 모신(謨臣) 권람을 통하여 당시 경덕궁직으로 있던 한명회를 얻고, 한명회를 통해 다시 홍달손(洪達孫) · 양정(楊汀) 등의 유능한 무인(武人) 30여 명을 포섭하여 기회를 엿보았다.

 

 

 

 

조선 세조

 

 

 

한명회권람이 두 사람의 합류 이후 수양대군의 정치적 세력 확대에 가속도가 붙어, 평소 절친한 관계였던 집현전학사 출신의 소장파 관료 신숙주, 무예에 정통한 문관 홍윤성, 무관 양정, 청백리 영의정 황희의 아들 황수신, 김종서의 최측근 이징옥의 형과 아우 이징규, 이징석 형제 등이 그 세력으로 합류하게 되며, 왕실 인물들의 포섭에도 노력을 기울여 양녕대군, 임영대군, 영응대군 그리고 세종의 후궁 신빈 김씨 소생인 계양군 이증 등의 주요 종친도 그의 세력이 되었다.

 

한명회는 세상을 읽는 능력이 있는 인물로 수양대군의 책사로 활동한다. 불우한 처지에 있던 한명회권람은 왕권의 추락과 신권의 막강함과 사회 혼란을 이유로 들어 정변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경과

그리고 수양대군은 한명회 등의 도움을 받아 정치적 계략을 획책하게 되는데, 그 첫 시도는 김종서와 황보인, 민신 등의 경계심을 무마하기 위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것이었다. 사실 이것은 원래 안평대군이 책사 이현로의 조언으로 그 중요성을 깨닫고 자신이 자청을 했는데, 수양대군이 세력을 동원해 해 이를 저지시키고 자신이 가게 된 것이었다. 이 사행길을 통해 수양대군은 신숙주를 완전히 자신의 세력으로 포섭하게 되며, 본래 목적이었던 김종서 등의 조정 대신들의 경계심도 무마시키는 데 성공하게 된다.

 

귀국 후 수양대군은 한명회, 권람, 홍윤성 등과 함께 자신의 집권에 방해가 되는 조정 중신들을 제거할 살생부를 작성하고, 쿠데타 계획을 서둘렀다. 거사일은 음력 10월 10일, 첫 목표는 좌의정 김종서였다. 수양 대군은 병력 동원이 가능했던 무관 양정, 홍달손 등을 통해 경복궁을 점령하기로 하고, 자신은 직접 종 임어을운, 양정 등과 함께 관복 차림으로 김종서의 집으로 향한다.

 

김종서는 거사 며칠 전 신숙주, 최항 그리고 거사 당일 권람의 방문을 받았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쿠데타를 획책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던 김종서는 무방비 상태였고, 수양대군은 종 임어을운에게 철퇴를 가지고 있다가 자신이 신호를 내리면 즉시 김종서를 내려치라는 명을 내렸다.

 

김종서 제거와 조정 대신 제거

수양대군은 김종서의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수하들과 함께 대기하고 있었고, 김종서는 들어가 담소를 청하나 수양대군은 핑계를 대면서 주저하였고, 미리 준비한 유인용 편지를 김종서에게 전달한다. 김종서가 편지를 달빛에 비춰 보는 순간 수양대군의 신호를 받은 종 임어을운이 철퇴로 김종서를 내리쳤고, 이어서 양정이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와 그 동료들을 칼로 내리치니, 계유정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후 수양대군은 준비한 행동을 착실히 실행에 옮긴다. 사대문과 주요 군 시설을 장악한 뒤, 경복궁으로 들어가 단종에게 김종서가 안평대군과 짜고 역모를 획책했다고 보고한다. 그리고 한명회와 홍윤성, 홍달손을 시켜 광화문과 대궐문을 장악하게 한 뒤, 단종의 명을 빙자하여 조정 대신들을 모두 입궐하게 한다. 조정 대신 중 수양대군에게 협조적이었던 공조 판서 정인지, 참판 이계전, 이순지 등은 무사했던 반면에, 김종서 일파로 살생부에 적힌 영의정 황보인, 좌찬성 이양, 우찬성 조극관 등은 모두 철퇴에 맞고 살해되었다. 그리고 문종의 능인 현릉에서 비석 제작을 감독하고 있던 이조판서 민신을 현릉에서 참살하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우의정 정분을 유배시켰다가 사약을 내려 죽였다.

 

결과

이렇듯 쿠데타가 성공을 거두자, 수양대군은 안평대군의 처벌을 형식적으로 반대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나 곧 안평대군을 강화도에 유배시켰다가 의금부를 통해 사약을 내렸으며, 살해된 조정 중신의 처첩, 자녀들을 노비로 전락시켰다. 그리고 정난공신 1등에 자신과 정인지, 그리고 사돈지간이었던 한확 등을 임명하고, 나머지 신하들을 2등, 3등으로 책록하여 조정의 주요 관직들을 독점했다. 수양 자신은 영의정과 군권을 모두 장악하여 사실상 재위의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역적으로 단죄된 안평대군 등은 선원보략에서 삭제되었다가 훗날 숙종 때 복권된다.

 

수양대군과 정인지 등은 단종을 압박하여 살해된 조정 중신의 처첩, 자녀를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는 한편 집현전으로 하여금 자신을 찬양하는 교서(敎書)를 짓게 하는 등 집권태세를 굳혀갔다. 이때 김종서의 첩과 아들 김승규의 처와 첩, 황보인의 처와 며느리 등이 노비와 관비로 분배되었고, 안평대군의 8세 된 손녀도 이때 관비로 분배된다. 이렇게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여 1455년 마침내 왕위를 차지하게 된다.

 

영향

계유정난 이후 집중적으로 형성된 훈구(勳舊) 공신들은 정치권력과 경제적 부를 독점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서 반대급부로 사림(士林)은 지방 농민의 지지를 받으며 15세기 이후 조선 성종 때에는 중앙의 정치무대에 대거 등장하여 새로운 정치세력이 되었다. 이것이 훗날 기호학파(畿湖學派), 영남학파(嶺南學派)로 나뉘고 붕당정치(朋黨政治)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수양대군의 책사의 한사람인 한명회

 

수양대군은 모신(謨臣) 권람을 통하여 당시 경덕궁직으로 있던 한명회를 얻고, 한명회를 통해 다시 홍달손(洪達孫) · 양정(楊汀) 등의 유능한 무인(武人) 30여 명을 포섭하여 기회를 엿보았다. 한명회는 세상을 읽는 능력이 있는 인물로 수양대군의 책사로 활동한다. 불우한 처지에 있던 한명회권람은 왕권의 추락과 신권의 막강함과 사회 혼란을 이유로 들어 정변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먼저 단종을 협찬해 오던 3공(公) 가운데서 가장 지용(智勇)을 겸비한 김종서를 제거하고자, 1453년(단종 1) 음력 10월 무사를 이끌고 김종서의 집을 습격하여 그를 죽인 뒤, 김종서가 모반하므로 죽였는데 일이 절박하여 사전에 임금께 아뢸 여가가 없었다고 상주하였다. 곧 왕명을 빌어 신하들을 소집, 미리 계획했던 대로 영의정 황보인·이조판서 조극관(趙克寬)·찬성(贊成) 이양(李穰) 등 반대파 중신(重臣)을 궐문에서 죽이고, 좌이정 정분(鄭苯)·조수량(趙邃良 : 조극관(趙克寬)의 아우) 등을 귀양 보냈다가 이어 죽였다. 한편 김종서 등의 목을 베어 매달고 그 자손을 주살(誅殺)하였으며 이어서 안평대군이 김종서 등과 통했다고 하여 그를 강화도에 귀양 보내서 뒤에 사사(賜死)하였다.

 

선위

정변으로써 실권을 얻게 된 수양대군은, 바로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이조·형조판서, 내외병마도통사(內外兵馬都統使) 등을 겸직함으로써 정권과 병권을 장악하고, 정인지를 좌의정에, 자신의 맏아들 도원군의 장인이기도 한 한확을 우의정에 임명하는 한편, 집현전으로 하여금 수양대군을 찬양하는 교서를 짓게 하여 이것을 왕의 이름으로 받았다.

 

수양대군의 위세와 권위로 인하여 사태가 어쩔 수 없는 처지에 달했음을 깨닫고 단종은 1455년(단종 3) 윤 6월 수양대군에게 양위할 뜻을 전하고 친히 대보(大寶)를 전수(傳授)하니, 단종의 뒤를 이은 그가 곧 세조이다.

 

단종 복위 운동

선위 계획은 권남·정인지 등이 극비리에 추진한 것이라 비록 선양의 형식을 택하였다고는 하지만, 계략에 따른 왕위의 강탈이었다. 이러한 처사에, 특히 집현전 학자로서 세종의 신임이 두터웠던 성삼문·형조참판 박팽년·직제학(直提學) 이개·예조참판 하위지·사예(司藝) 유성원 등과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成勝)·무인(武人) 유응부 등은 상왕으로서 수강궁(壽康宮)에 있는 단종의 복위와 반역파의 숙청을 꾀하고 그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들은 1456년(세조 2) 6월 창덕궁에서 명사(明使)를 향응하는 기회를 타서 거사하기로 하였으나 계획이 어긋나자 김질(金礩)·정창손(鄭昌孫) 등은 사태의 불리함을 보고 이를 밀고하였다. 세조는 곧 성삼문 등에게 참혹한 고문을 가했으나 모두 굴하지 않았으므로 성삼문·박팽년·유응부·이개는 작형(灼形 : 불살라 죽이는 형벌)으로 형살(刑殺)되었으며, 하위지도 참살되고, 유성원은 자기 집에서 자살하였다. 이들을 사육신이라 부르며, 이에 연루된 자로 권자신(權自愼)·김문기(金文起) 등 70여 명도 모두 처벌되었다.

 

이 일이 있은 뒤 세조는 성삼문 등의 이 밀로에 상왕 단종도 관계하였다 하여 강봉하여 노산군(魯山君)으로 삼아 군사 50명으로 호송케 하여 영월로 귀양 보내고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를 추폐(追廢)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세조의 아우 금성대군도 순흥(順興)으로 귀양 보냈다.

 

그 후 9월에 금성대군은 부사(府使)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여 영남 인사에게 격문(檄文)을 돌려 군사를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밀고가 들어가 탄로 나서 금성대군은 안동에 하옥되고, 이보흠과 기타 영남의 인사들도 많이 주살(誅殺)되었다. 한편, 세종의 아들 한남군(漢南君)·영풍군(永豊君) 등도 멀리 귀양 가고 노산군에 대하여는 군(君)을 폐하여 서인으로 하였다. 이에 영의정 정인지·좌의정 정창손·이조판서 한명회·좌찬성 신숙주 등은 계속 노산군(단종)과 금성대군을 치죄할 것을 주장하여, 세조는 마침내 금성대군을 사사(賜死)하고 불과 이때 나이 17세였던 단종도 죽였다.

 

영향

조선 최초의 반정으로 중종 반정인조 반정, 이괄의 난, 경종 독살 미수 사건 등에 영향을 미쳤다. 세조 찬위, 곧 단종 폐위 사건은 뒤에도 사화(士禍)를 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으며 또 문인·학자 간에도 많은 충격을 주어 대립 반목을 이루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