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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18 : 조선의 역사 60 (세조실록 4) 본문
한국의 역사 518 : 조선의 역사 60 (세조실록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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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세조
논란과 의혹
사육신에 대한 가혹한 숙청
사육신의 단종복위 거사에 참여했던 한 사람인 성균관사예(司藝) 김질(金礩)이 실패의 두려움 또는 장인 정창손(鄭昌孫)의 회유로 장인 정창손에게 거사를 알리고 함께 세조를 찾아와 반역을 고변하였다. 세조는 즉시 성삼문 이하 주모자 6인이 모두 죄인으로 끌려와서 국문을 받았다. 세조는 사육신을 친국하였다.
세조가 유응부를 향해 너는 무슨 일을 하려고 하였느냐고 묻자 유응부는 “명나라 사신을 초청 연회하는 날에 내가 한 자루 칼로써 족하(足下)를 죽여 폐위시키고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고 하였으나, 불행히 간사한 놈()에게 고발을 당하였으니 응부는 다시 무슨 일을 하겠소. 족하는 빨리 나를 죽여주오.” 하니 세조는 노하여 꾸짖었다. “너는 상왕(단종)을 복위시킨다는 명분을 핑계하고서 사직(社稷)을 도모하려고 한 짓이지.” 하고 즉시 무사를 시켜 살가죽을 벗기게 하고서 불에 뜨겁게 달군 불판위에 올렸으나 유응부는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고 비명소리를 내지 않았다.
세조가 온갖 고문을 직접 가하며 그 정상(情狀)을 신문하였으나 유응부는 끝내 자복(自服)하지 않았으며, 성삼문 등을 돌아보면서 “사람들이 서생과는 함께 일을 모의할 수 없다고 하더니 과연 그렇구나. 지난번 사신을 초청 연회하던 날, 내가 칼을 사용하려고 하였는데, 그대들이 굳이 말리면서 ‘만전의 계책이 아니오’ 하더니, 오늘의 화를 초래하고야 말았구나. 그대들처럼 꾀와 수단이 없으면 무엇에 쓰겠는가!” 하고, 다시 세조에게 “만약, 이 사실 밖의 일을 묻고자 한다면 저 쓸모없는 선비에게 물어보라.” 하고는, 그는 입을 닫고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세조는 더욱 화가 나서 달군 쇠를 직접 가져와서 유응부의 배 밑을 지지게 하니 기름과 불이 함께 이글이글 타올랐으나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천천히 달군 쇠가 식기를 기다려 그 쇠를 집어 땅에 던지면서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 하고는 끝내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회유와 박팽년의 조롱
세조는 박팽년의 재주를 사랑하여 자신에게 귀부하여 모의사실을 숨기기만 하면 살려줄 것이라고 은밀히 유시하였다. 하위지에게도 그의 재주를 애석히 여겨 은밀히 사람을 보내 다른 사육신과 함께 정변을 일으킨 것을 시인하고 사죄하면 목숨을 구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하위지 역시 그의 회유를 뿌리쳤다.
세조는 여러번 박팽년에게 사람을 보내 회유한다. 그런데도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지라 웃음만 지었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세조를 가리켜 나으리(進賜)라 하고 상감(上監:왕을 높여 부르는 말)이라 부르지 않았다. 세조가 노하여 “그대가 나에게 이미 '신'이라고 칭하였는데도 지금 와서 비록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하자, 그는 “나는 상왕(上王:단종)의 신하이지 나으리의 신하는 아니므로 충청감사로 있을 때에 한번도 '신'자를 쓴 일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박팽년이 보낸 장계와 상소를 모두 갖다보니 신하 신(臣)이 아니고 클 거(巨)로 되어 있었다. 세조는 그가 충청감사로 있을 때 올린 장계를 실제로 살펴보고 과연 '신'자가 하나도 없자 더욱 노기를 띠어 심한 고문을 가하면서 함께 모의한 자들을 대라고 하였다. 박팽년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서슴없이 성삼문·하위지·유성원·이개·김문기(金文起)·성승·박정·유응부·권자신(權自愼)·송석동(宋石同)·윤영손(尹令孫)·이휘(李徽)와 자신의 아비 중림이라 대답하였다. 그는 심한 고문으로 그달 7일에 옥중에서 죽었으며, 다음날에는 다른 모의자들도 능지처사(凌遲處死) 당하였다. 그의 아버지도 능지처사되고, 동생 대년(大年)과 아들 헌(憲)·순(珣)·분(奮)이 모두 처형되어 삼대가 참화를 입었다.
하위지 역시 1456년(세조 2) 사예 김질의 고변으로 단종복위운동이 탄로나 그도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국문(鞫)을 받게 되었다. 하위지의 재주와 능력을 높이 산 세조는 여러번 하위지에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자신을 도와달라고 하지만 하위지는 이를 거절한다.
그는 국문을 받으면서 세조에게 이르기를 “……이미 나에게 반역의 죄명을 씌웠으니 그 죄는 마땅히 주살(誅殺)하면 될 텐데, 다시 무엇을 묻겠단 말이오.” 하였다. 세조는 국문장에서 그에게 자신의 편으로 올 것을 요청하였지만 하위지는 거절한다. 그는 국문과정에서 성삼문(成三問) 등이 당한 작형(灼形, 불에 달군 쇠로 죄인의 맨살에 지지는 형벌)은 당하지 않았으나, 사육신 등 여러 절신과 함께 거열형(車裂刑)을 당하였다. 그가 처형되자 선산에 있던 두 아들 호(琥)와 박(珀)도 연좌(連坐)되어 사형을 받았다. 이때 하위지의 작은 아들 박은 어린 나이였으나 죽음 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한다. 그는 금부도사에게 어머니와 결별하기를 청하여 이를 허락하자 어머니에게 “……죽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아버님이 이미 살해되셨으니 제가 홀로 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시집갈 누이동생은 비록 천비(賤婢)가 되더라도 어머님은 부인의 의를 지켜 한 남편만을 섬겨야 될 줄로 압니다……”고 하직한 뒤 죽음을 받자 세상 사람들이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하면서 감탄하였다 한다. 다른 사육신은 아들, 아버지, 형제, 조카들까지 처형하였으나 하위지에게만은 예외를 두어 그의 어린 조카들인 하포, 하원은 사형에 처하지 않고 변방으로 유배를 보낸다.
사육신의 유래
단종복위운동이 있을 때 나이가 어렸던 남효온(南孝溫)이 성장한 뒤에 이 사건의 많은 피화자 중 충절과 인품이 뛰어난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여섯 사람을 골라 그 행적을 소상히 적어 후세에 남기니, 이것이 《추강집 秋江集》의 사육신전(死六臣傳)이다. 그뒤 사육신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충신으로 꼽혀왔으며, 그들의 신원(伸寃)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노력해오다가 마침내 1691년(숙종 17)에 이르러 이들의 관작이 회복되게 되었다.
평가와 비판
긍정적 평가
비록 의롭지 못한 행위로 왕위에 오르고 상왕이 된 자신의 조카의 작위를 격하시킨 뒤 다시 그를 죽여서 큰 도덕적 결함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후 스스로 뉘우치고 정사에 몰두하여 재위 14년간 많은 치적을 쌓았으며 조선 초기의 왕권 확립에 공헌이 많았다. 글씨에 뛰어났다는 평도 있다.
건국 초기라 아직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했던 왕권을 강화했고, 국방을 튼튼히 했으며, 개국공신에게 집중되었던 토지를 환수하는 토지법을 시행함으로써 국가재정을 확충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또 비록 그의 집권을 죽음으로써 막으려 했던 이른바 사육신 문제로 그들의 아지트였던 집현전은 폐지했으나,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법전이라든지 역사서 같은 공익적 편찬 사업을 주도하는 등, 학문을 발전시킨 공적이 높이 평가되기도 한다. 그밖에 호불(護佛)의 군주였다는 평도 있다.
세조의 치세 동안 신권이 감히 넘보지 못할 정도로 왕권은 조선 역사상 최고로 강화되었다. 그러나 세조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아닌 강압적인 철권 통치로 나라를 다스렸으며, 새로운 인재들을 과감히 발탁하기 보다는 한명회, 신숙주 등의 측근을 중심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또 자신을 조금이라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세력은 양정이나 남용신처럼 무조건 가차없이 죽여 버리기도 하였다. 홍윤성의 경우 자신의 숙부를 살해하였으므로 세조는 기회를 봐서 그를 처벌하려 하였으나, 공신들의 강한 반대에 부딛쳐 홍윤성의 노비들을 잡아다가 곤장을 치고 투옥시키는 것으로 불문율에 붙인다.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데 큰 기여를 해준 공신들을 대부분 죽인 할아버지 조선 태종에 반해, 세조는 공신들을 내치지 않았으며 오히려 우대하여 결국 조선의 당파 싸움을 최초로 시작한 훈구파의 형성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토지측량 의상(儀象)을 스스로 제작하기도 해 15세기 천문학 발달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부정적 평가
정변으로 조카를 축출하고 상왕이 된 자신의 조카의 작위를 격하시킨 뒤 다시 그를 죽여서 큰 도덕적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그에 의해 등용된 사림파에 의해 오랫동안 비판과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태종과의 비교
태종조에는 정도전 등의 개국공신 세력들이 왕실보다 오히려 높은 곳에 있으면서 왕실을 조정하려고 한 경향이 있었고, 세조조에는 김종서나 황보인 등의 대신들이 정권을 천단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신권(臣權)이 강화되어가는 점에 대한 왕실의 반발이 고조되고 있었다.
태종이 정변을 일으키기 직전에는 정도전 등의 개국공신 등 신하들이 왕권의 위에 있으면서 강력한 신권을 넘어 왕실을 조정하려고 한 경향이 있었고, 문종 때에는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면서 김종서나 황보인 등의 대신들이 정권을 천단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신권(臣權)이 강화되어가는 시점에서 왕족들과 일부 훈신들은 위기 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이때에 왕권의 강화를 표명하고 나서고 있음이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세조는 바로 이러한 생각에서 왕권의 행사가 왕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현실의 원인이 어린 단종과 고명대신인 김종서와 황보인, 그리고 안평대군의 모호한 태도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의 해결은 점진적인 개혁책으로서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또 그들이 그것을 허용하리라고는 기대하기 어려웠다. 왕이 왕다움을 행사하는 것을 되찾기 위한 것은 바로 이들에 대한 단호한 결단만이 가능할것이라고 하여 `계유정난'을 통해 이룩해 내었던 것이다.
시
“ | 밤에 솔바람 소리 듣고 밤에 솔바람 소리 듣고 / 夜中聞松風 |
” |
기타
안평대군과 이현로(李賢老)의 집에 있던 글과 작품들이 많았는데, 세조는 이 작품들을 보지도 않고 '괴상한 글과 작품'이라는 이유로 모두 불태워 버렸다.
그는 자신의 인척이기도 한 남이와 구성군 준을 총애하였다. 그러나 이는 그의 차남 예종의 질투심을 유발하여 남이와 구성군은 예종 즉위 초 숙청된다.
단종의 비참한 죽음을 소재로 한 《단종애사》를 지은 소설가 춘원 이광수는 다시 그의 일대기를 소재로 한 《세조대왕》이라는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조선과 대한제국의 역대 군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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