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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23 : 조선의 역사 65 (세조실록 9)

두바퀴인생 2012. 3. 13. 04:14

 

 

 

한국의 역사 523 : 조선의 역사 65 (세조실록 9)

 

                                       

 

                                       

                                                                                       

제7대 세조실록(1417~1468년, 재위 1455년 윤6월 ~ 1468년 9월, 13년 3개월)

 

  

4. 세조의 무단 강권 정치를 수행한 사람들(계속) 

 

 

수양의 '장량' 한명회(1415~1487년)

 

권람이 수양의 조장 역활을 했다면 한명회는 '장량' 격이었다. 말하자면 수양을 보좌한 최고의 책사이며 모사꾼으로 조선 시대를 통털어 가장 권모술수가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한명회는 조선 개국 당시 명나라에 파견되어 '조선'이라는 국호를 확정짓고 돌아온 한상질의 손자이며. 한기의 아들이다.

 

1415년에 태어난 그는 일찍 부모를 여윈 탓으로 불우한 소년 시절을 보내야 했고, 그 때문에 과거에 번번이 실패해 38세가 되던 1452년에서야 겨우 문음으로 경덕궁직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모사에 능하고 책략에 뛰어난 한편 일을 추진함에 과단성 있는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는 학문에는 소질이 부족하였던 모양이었으며 자신이 출세할 수 있는 길은 힘있는 자에게 붙어 무언가 사회를 뒤집는 큰 일을 저질러야만 가능하다고 판단하였던 혁명가적 기질이 다분하였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과거로는 도저히 관직에 나아갈 수가 없다고 판단하고 대세의 흐름과 수양대군의 입지를 살펴본 결과 수양을 충동하여 거사를 일으키도록 권유하는 방안을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친구 권람으로 하여금 수양대군을 찿아가 거사를 논하게 했고, 다시 그는 권람에 의해 천거되어 수양대군에게 소개되고 그의 거사계획을 듣고 수양은 내심 망서리지만 그의 수려한 언변에 동화되어 거사를 결정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그후 수양대군의 책사로서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된다.

 

계유정난은 한명회의 작품이었다. 한명회가 없었다면 계유정난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고 사육신들의 단종 복위 운동도 성공하면서 수양은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명회는 계유정난에서 눈에 띄게 엄청난 역활을 했다. 그는 1453년 조정의 핵심 세력인 김종서를 먼저 제거하는 것 만이 난의 성공을 가져올 수 있다고 판단하고 그가 계책을 내놓았는데, 수양이 무사들을 데리고 직접 김종서 집을 찿아가서 기회를 만들어 김종서를 일거에 척살하는 것이었다. 김종서를 먼저 제거하지 못한다면 난의 성공을 보장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고 김종서만 제거하면 나머지는 식은 죽먹기로 진행될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자신이 끌어들인 홍달손 등 무사들을 대동한 수양대군이 김종서 집을 찿아가서 방심한 김종서를 살해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른바 '생살부'를 작성하여 조정 대신들의 생과 사를 갈라놓기도 했다.

 

정난 성공 후 그는 1등 공신에 올랐으며,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부승지에 제수되엇고, 1456년 성섬문 등의 단종 복위사건을 좌절시킨 공으로 좌승지를 거쳐 승정원의 수장인 도승지에 올랐다. 이후 1457년에 이조판서, 이어 병조판서가 되었고, 1459년에는 황해.평안.함길.강원 4도의 병권과 관할권을 가진 4도체찰사를 지냈다.

 

이렇게 그는 당시 역활이 강화된 승정원과 육조, 변방 등에서 왕명출납권, 인사권, 병권 및  감찰권 등을 한손에 거머쥔 뒤 1463년 좌의정을 거쳐 1466년 영의정에 올랐다. 일개 궁직에 있던 그가 불과 13년 만에 52세의 나이로 조정을 완전히 장악한 것이었다. 그는  수양대군을 선택하여 쿠테타로 자신의 꿈을 이룬 입지적인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과 함께 정난에 가담했던 인물들과 친인척 관계를 맺음으로써 권력의 기반을 더욱 탄탄하게 다져나갔다. 

 

우선 그는 자신의 딸을 세자였던 예종에게 시집보냄으로써 세조와 사돈을 맺었고, 나중에는 다른 딸을 성종 비로 만들어 2대에 걸쳐 왕비로 만들면서 외척으로서도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위치가 되었다. 또한 집현전 학사 출신 중에 세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던 신숙주와도 인척 관계를 맺었으며, 자신의 친구인 권람과도 사돈 관계를 맺었다. 이렇게 되자 한명회는 왕과 사돈을 맺고 2대에 걸친 왕비를 배출함으로써 강력한 외척에다가 조정의 핵심 대신들과도 인척관계를 맺음으로써 조선 시대에 한명회 만큼 탄탄한 권력 기반을 다졌던 인물은 찿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하지만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1466년 영의정에 제수되었을 때 함길도에서 '이시애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때 그는 이시애의 계략에 말려 신숙주와 함께 하옥되는 지경에 처한다. 이유는 함길도 절체사 강호문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것이었다. 이는 이시애의 계략이었다. 이시애는 조정에 혼란을 야기시키려는 목적으로 반란을 일으킬 때 "한명회, 신숙주 등이 강호문과 짜고 반란을 도모하려 하기에 이를 응징하기 위해 일어났다."고 그럴싸한 명분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시애의 난은 세조 집권기에 가장 큰 변란이었다. 즉위 이후 줄곧 왕위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던 세조는 이시애의 보고문을 믿고 일단 한명회와 신숙주를 옥에 가두고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은 신문을 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 결국 혐의가 없음이 밝혀져 석방된다. 이처럼 가장 믿고 있던 신하도 반란군 수장인 이시애의 보고서 한 장에 의해 의심할 정도로 세조는 항상 불안감에 떨고 있었던 것이다.

 

1468년 세조가 죽자 한명회는 세조의 유지에 따라 신숙주 등과 홤께 원상으로서 정사의 서무를 결재하였다. 그리고 1469년 예종 1년에 다시 영의정에 제수되었고 이 해에 예종이 죽고 성종이 즉위하자 병조판서를 겸임하였다. 이후 좌리공신 1등에 책록되었고, 노년에도 부원군 자격으로 정사에 참여하였으며, 대단한 권세를 누리다가 1487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한명회는 세조 이래 성종조까지 공신들과 함께 고관 요직을 독점하다시피 했으며 세조가 "나의 장량"이라고 할 정도로 그를 총애했고,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그는 엄청난 부를 누리기도 했다. 그는 세조가 등용시킨 젊은 귀성군과 남이 장군 등 신진 세력의 급부상을 견제하기 위해 두 사람을 제거하는 일도 앞장선 인물이었다.

 

한명회는 노년에 권좌에서 물러나 한가로이 갈매기와 벗하며 지내고 싶다고 하여 정자를 짓고 여기에 자신의 호를 붙여 '압구정'이라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노년에도 부원군 자격으로 여전히 정사에 참여하여 권좌를 지킨 인물이었다. 그 때문에 당시 백성들에게 압구정은 자연과 벗하는 곳이 아닌 권력과 벗하는 곳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그가 죽은 후에 연산군이 즉위햐여 갑자사화가 일어났는데, 이때 그는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비사건에 관여했다 하여 부관참시를 당했으나 중종 때에 신원되었다.

 

그는 엄청난 권세와 부를 누렸지만, 누구보다도 오래도 살았다. 만약 그가 빨리 죽었다면 조선의 역사도 달라졌을 것이다. 그만큼 세조, 예종, 성종대는 그의 입김에 의해 조정이 운영되었고 국가의 모든 중대사는 그의 결단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의 정자가 있던 압구정은 지금 서울 강남의 최고의 부자들이 모여 살고 있는 동네로 한명회의 정자가 아닌 고급 아파트가 즐비하고 개발 당시 서울에서 내노라 하는 부자들이 대부분 분양받아 살았던 곳이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그 곳 아파트 창가에서 야경 찬란한 한강을 바라보며 고급 양주를 마시며 미모의 부인이나 애첩을 거느리고 그를 기리며 권력과 부를 행유하고 있는 현대판 권세가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