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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524 : 조선의 역사 66 (세조실록 10) 본문
한국의 역사 524 : 조선의 역사 66 (세조실록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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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대 세조실록(1417~1468년, 재위 1455년 윤6월 ~ 1468년 9월, 13년 3개월)
4. 세조의 무단 강권 정치를 수행한 사람들(계속)
세조의 '위징' 신숙주(1417~1475년)
세조는 죽음을 앞두고 "당 태종에게는 위징, 나에게는 숙주"라고 말했다고 한다. 위징은 당 태종의 문화 통치를 수행하여 당 태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인물이었다.
세조가 신숙주를 당 태종의 위징에 비견한 것은 자신도 당 태종처럼 신숙주를 통해 문화 통치를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한편으로는 그만큼 신숙주를 신뢰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실 신숙주는 계유정난의 공적 면에서는 한명회에 뒤질지는 몰라도 세조에게 끼친 정치적 영향력과 개인적인 친분에서는 누구보다도 앞섰다고 한다. 따라서 정사를 논하는 것과 관련하여 신숙주는 단연 세조의 오른팔격이었다.
신숙주는 1417년 태생으로 세조와는 동갑내기이다. 공조참판을 지낸 신장이 그의 아버지이며, 어머니는 지성주사 정유의 딸이다. 그는 한명회와는 달리 일찍 관직에 나갔다. 22세가 되던 해인 1438년 사마양시, 생원, 진사시 등에 합격했으며, 이듬해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농시직장이 됐다. 이후 그는 집현전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이때 세종의 명을 받아 훈민정음 정리 작업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의 도움을 얻기 위해 성삼문과 함께 요동을 13차례나 다녀오기도 했는데, 당대 최고의 언어학자였던 황찬이 그의 뛰어난 이해력에 감탄할 정도로 대단히 총명한 인물이었다.
1447년 그는 중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집현전 웅교가 되었고, 1451년 명나라 사신 예겸 등이 조선에 당도하자 왕명으로 성삼문과 함께 시짓기에 나서 동방거벽(동방에서 가장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찬사를 얻기도 했다. 이 해에 사헌부 장령, 집의를 거쳐 직제학에 오른다.
신숙주가 수양과 가까워진 것은 1452년 그와 함께 명나라를 다녀오면서부터이다. 당시 수양대군은 중국의 고명에 답하기 위해 사은사를 자청했는데, 신숙주는 이때 서장관으로 그를 수행했다. 이듬해 4월 조선으로 돌아온 뒤부터 둘 사이는 급격히 가까워졌고, 결국 수양의 거사에 신숙주는 간접 지원의 형태로 가담하게 된다.
1453년 신숙주는 승정원에서 동부승지, 우부승지, 좌부승지를 거쳤지만 김종서 등의 권신들의 경계를 받아 계유정난이 일어나던 10월 당시에는 외직에 나가 있었다. 이때 집현전 학사 출신 중에 가장 빠른 출세를 하고 있던 신숙주가 외직에 나가 있었다는 것은 그와 수양대군의 관계를 김종서 쪽에서 눈치를 채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현실은 신숙주로 하여금 수양의 거사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계유정난이 성공으로 끝나자 신숙주는 정난공신 1등에 책록된 뒤 곧 도승지에 올랐다. 세조가 권력을 집자마자 비서실장격인 도승지에 신숙주를 앉혔다는 것은 그만큼 그를 신뢰했다는 의미가 된다. 신숙주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도승지의 위치에 있으면서 단종의 일거수 일투족을 면밀하게 감시, 관찰하여 수양대군에게 보고했다.
1455년 수양이 즉위한 뒤에 그는 예문관 대제학이 되었고, 주문사로 명에 가서 새 왕의 고명을 청하고 인준을 받아옴으로써 세조는 명이 인정하는 공식적인 조선의 제7대 왕이 된다.
이후 신숙주는 14546년에 병조판서, 이듬해 좌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오르고 1459년에는 좌의정에 오른다. 그리고 3년 뒤인 1462년 마침내 영의정부사직(영의정)에 제수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46세였다.
그러나 그는 지위가 너무 높아진 것을 염려하여 1464년에 영의정부사직을 사직한다. 하지만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세조의 유명에 의해 한명회와 함께 원상으로 서무를 결재하는 데 참여하고, 이듬해 예종이 죽자 한명회와 함께 세조의 비 정희왕후에게 덕종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성종)을 왕으로 추천해 결국 그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는 데 성공한다.
1469년 성종이 즉위하자 그는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그는 이때 노령을 이유로 여러 번 사직을 청하였으나 성종의 윤허를 얻지 못했으며, 이후 정치적, 학문적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정계에 남아 있다가 1475년 5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에 대한 당대의 평은 "대의를 따르는 과단성 있는 인물"이었으나, 후대에는 사육신, 생육신 등을 좇는 도학적인 분위기가 형성돼 "기회에 능한 변절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사육신 중의 한 사람인 성삼문과는 절친한 벗이었지만 성삼문은 당종 복위거사를 도모할 때 "비록 신숙주는 나의 평생 벗이나 죄가 무거우니 죽이지 않을 수 없다." 고 했다고 한다. 그것은 곧 신숙주가 집현전 학사 출신 벗들에게 변절자로 낙인 찍혀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러한 변절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선조에서 역사적으로 대단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었다. 그는 세조의 이른바 문화 통치를 위해 왕들의 귀감이 될 <국조보감>을 편찬했고, 국가 질서의 기본을 적은 <국조오례의>를 교정, 간행하였으며, 사서오경의 구결을 새롭게 만들었다. 또한 훈민정음 확산을 위한 사업에도 참여하여 수많은 고전과 불경의 언해본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는 특히 외교와 국방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는데, 당시 이 분야에 관련된 대부분의 저술에 그의 손이 미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서예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송설체의 유려한 필치를 보여주는 <몽유도원도>에 대한 찬문과 해서체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화명사 예겸 시거>등의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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