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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77 : 조선의 역사 19 (정종실록 1)

두바퀴인생 2012. 1. 27. 04:35

 

 

 

한국의 역사 477 : 조선의 역사 19 (정종실록 1)

 

 

       

 

 

 

제2대 정종

 

정종(定宗, 1357년 ~ 1419년, 재위: 1398년 ~ 1400년)은 조선의 제2대 임금이다. 는 경(曔)(초명 방과(芳果)), 는 광원(光遠). 사후 시호가 없이 조선 중후기까지 명나라가 내려준 시호인 공정왕(恭靖王)으로 불리다가 숙종 때 정식으로 묘호와 시호를 올려 정종공정의문장무온인순효대왕(定宗恭靖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이다. 태조신의왕후의 둘째 아들이다.

 

 

생애

1357년 음력 7월 1일에 태조와 신의왕후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성품이 온화하고 용맹하고 지략이 뛰어나 고려 말기에 아버지를 따라 여러 전쟁터에 참여하여 많은 공적을 세웠다. 아버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이방과는 영안대군으로 책봉되었다가 1398년 음력 8월에 동생 정안대군 이방원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본래 왕위에 뜻이 없었던 이방과는 왕세자가 되기를 극구 사양하였지만, 태조의 맏아들이자 형 진안대군 이방우는 이미 죽었던 데다가, 그 당시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동생 이방원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왕세자에 올랐다가 1개월 뒤인 1398년 음력 9월에 태조의 양위로 조선의 임금이 되었다. 정종은 2년의 재위 기간 동안 동생인 이방원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이방원의 뜻에 따라 권력가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들을 해체하고 군사권을 국가의 최고 군사기관인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로 집중시켰다.

 

정종은 서울의 운기가 나빠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는 이유를 들어 수도를 서울에서 다시 개경으로 옮겼다. 그러나 다음 해인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이방원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9개월 뒤인 음력 11월 13일에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정종으로서는 권력의 중심인 왕위에서 물러나는 것만이 목숨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상왕으로 물러난 정종은 인덕궁에서 격구나 사냥, 온천, 연회 등의 오락으로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다가 세종 1년인 1419년 음력 9월 26일에 63살의 나이에 승하하였다. 능은 개경에 있는 후릉(厚陵)이다.

 

2년 동안의 짧은 치세에 거의 실권이 없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정종을 과도기 집권자로 여기고 묘호도 올리지 않고 ‘공정대왕’(恭靖大王)으로 불렀으나, 262년이 지난 1681년(숙종 7년) 음력 12월에 이르러서야 정종이란 묘호를 받게 되었다.

 

가족 관계

  • 부 : 제1대 왕 태조
  • 모 : 신의고황후 한씨
  • 왕비 : 정안왕후 김씨(定安王后 金氏)
  • 후궁 : 성빈 지씨(誠嬪 池氏)
    • 덕천군 후생(德泉君 厚生)
    • 도평군 말생(桃平君 末生)
  • 후궁 : 숙의 지씨(淑儀 池氏)
    • 의평군 원생(義平君 元生)
    • 선성군 무생(宣城君 茂生)
    • 임성군 호생(任城君 好生)
    • 함양옹주(咸陽翁主), 하가 지돈녕 박갱(知敦寧 朴賡)
  • 후궁 : 숙의 기씨(淑儀 奇氏)
    • 순평군 군생(順平君 羣生)
    • 금평군 의생(錦平君 義生)
    • 정석군 융생(貞石君 隆生)
    • 무림군 선생(茂林君 善生)
    • 숙신옹주(淑愼翁主), 하가 판돈녕 김세민(判敦寧 金世敏)
  • 후궁 : 숙의 문씨(淑儀 文氏)
    • 종의군 귀생(從義君 貴生)
  • 후궁 : 숙의 이씨(淑儀 李氏)
    • 진남군 종생(鎭南君 終生)
  • 후궁 : 숙의 윤씨(淑儀 尹氏)
    • 수도군 덕생(守道君 德生)
    • 임언군 녹생(林堰君 祿生)
    • 석보군 복생(石保君 福生)
    • 장천군 보생(長川君 普生)
    • 인천옹주(仁川翁主), 하가 행부사 이관식(行府使 李寬植)
  • 후궁 : 가의궁주 유씨(嘉懿宮主 柳氏)
    • 불노(佛奴)
  • 후궁 : 시비 기매(侍婢 其每)
    • 지운(志云)
  • 후궁 :?
    • 덕천옹주(德川翁主), 하가 행부사 변상복(行府使 邊尙服)
    • 고성옹주(高城翁主), 하가 지중추 김한(知中樞 金澣)
    • 전산옹주(全山翁主), 하가 행사직 이희종(行司直 李希宗)
    • 함안옹주(咸安翁主), 하가 부지돈녕 이항신(副知敦寧 李恒信)

 

 

 

 

 

 

 

정종실록(1357~1419년, 재위 1398년 9월 ~ 1400년 11월, 2년 2개월)

 

 

1. 태조의 세자 책봉과 왕자들의 반발

 

태조는 둘째 부인 강씨를 총애했다. 강씨는 젊고 총명하였으며 친정이 권문세가였기에 태조에게 힘이 되어 주기도 했다. 그 때문에 태조는 많은 부분을 그녀에게 의존하였으며, 그녀 또한 태조의 집권 거사에 직접 참여하여 막후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 출신의 개국공신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한 강씨의 영향력은 마침내 자신이 낳은 아들로 세자 책봉을 하는 데 까지 미치게 된다.

 

태조는 첯째 부인 한씨 소생의 장성한 왕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강씨 소생인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에 책봉했다. 1392년 8월, 그때 방석의 나이 불과 11세였다. 혈기왕성했던 한씨 소생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처사에서 분개했지만 어쩔수 없는 노릇이었다.

 

1392년 7월, 태조가 조선을 개국하고 한 달 뒤에 소년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을 때, 장남 방우의 나이는 이미 불혹을 바라보는 39세였고, 방석의 세자 책봉에 대해 가장 불만이 많았던 정안군 방원의 나이는 혈기왕성한 26세였다. 방원은 맏형인 방우를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태조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방원은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에게 개경의 최영 부대를 쳐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정몽주를 살해해 개국 반대 세력을 제거했는가 하면, 왕대비 안씨를 강압하여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이성계를 등위시킨 주인공이었다. 따라서 공적을 따진다면 세자 자리는 당연히 방원에게 돌아가야 했지만, 조선 개국 후 그에게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왕후 강씨와 정도전 등 개혁파의 배척으로 군권을 상실하고 개국공신 책록에서도 제외당하는 등 굴욕을 맛보아야 했다. 그런 가운데 세자 자리마저 강비의 소생인 방석에게 돌아갔던 것이다.

 

태조는 원래 계비 강씨의 요구에 따라 일곱째 아들 방번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다. 하지만 공신인 배극렴, 조준 등은 방번이 아직 어리고 자질이 세자에 적당하지 않기 때문에 방원의 세자 책립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태조는 방번 대신에 친아우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고 정도전으로 하여금 세자를 가르치도록 했다.

 

결국 태조와 강비 그리고 정도전의 방원에 대한 지나친 경계와 냉대, 이것이 화근이 되어 조선왕조는 개국 초장부터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감내해야 했다.

 

이같은 강비의 집요한 탐욕과 이성계의 현명치 못한 후계자 결정은 결국 왕자들 간에 피비린내 나는 살륙전이 일어나게 되는 원인이 되었는데 바로 제1차, 2차 왕자의 난이다. 이성계가 고려 왕족들을 모두 강화도 앞바다에 수장시켜 멸족시키고 조선을 세운 업보인지도 모른다.

 

이후 조선은 태종, 세종, 세조 시대 왕권이 강화되었던 시대를 지나고 양산된 공신위주의 훈구세력이 중심이 된 신권중심의 사회로 전개되었고 신분질서가 역동성을 점점 상실하고 고착화되면서 양극화가 심화되어 갔다. 사회 지도층인 귀족.선비들에 의해서 권력이 농단되면서 비리와 부패가 심화되어 갔으며 계파별로 파벌이 조성되면서 사색당파가 태동되었고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권력투쟁인 당파싸움이 후기까지 계속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선이 멸망의 위기까지 갔으나 충신.열사들과 명나라의 지원으로 운좋게 국체를 연명하였다. 영.정조 시대의 탕평책과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기존 세력의 격렬한 반대로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숙종대에는 환국정치로 선비들이 피비린내나는 숙청이 계속되었고 민중들의 거센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후 안동 김씨 등 외척 세력이 등장하여 권력을 독식하면서 조정은 무능한 왕이 옹립되어 나라는 파탄을 향해 질주하다가 고종대에 흥선과 민비의 권력 투쟁 가운데 외세를 끌여들이므로써 조선은 망국의 길로 가고 말았던 것이다. 

 

 

2. 제1차 왕자의 난

 

1398년 무인년 8월 25일, 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 한씨 소생 왕자들이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 반대파 세력을 불의에 습격하여 살해하고, 세자 방석과 그의 동복형 방번을 죽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을 '제1차 왕자의 난', '방원의 난' 또는 '무인정사', '정도전의 난'이라고 한다.

 

조선 건국 이후 개국공신들의 지위는 급상승되었다. 1392년 의흥삼군부 설치를 계기로 하여 정도전을 중심으로 추진되기 시작한 병권집중 운동과 중앙집권화 정책은 권력구조 면에서 큰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개국공신 중에서 정도전의 지위가 크게 부상되었고 여타의 훈신과 왕실 세력 그리고 개국 핵심 세력인 무장 세력들은 정치 일선에서 소외되기 시작하였다.

 

정도전은 개국 과정에서 스스로 자신을 한나라 장량에 비유하면서 한 고조 유방이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 고조를 이용했다면서 이성계보다 자신이 더 개국의 주역임을 내세우곤 하였다. 그는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는 물리력에 의해 통치자를 교체할 수 있다는 맹자의 역성혁명론을 주장하였고 실제로 그 혁명 논리에 따라 왕조 교체를 수행하였다. 또한 재상을 최고 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인 관료 지배체제를 이상적인 정치체제로도 보았다.

 

정도전의 이러한 정치관은 신권 중심의 왕정이라는 점에서 왕족들에게는 대단히 위협적인 내용이었다. 이방원이 정도전을 제거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게다가 정도전은 세자 방석과 왕후 강씨를 끼고 있었다.

 

조선 개국 이후 방원은 정치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나 있었지만 정계 복귀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던 중 1396년 최대의 난적이자 세자 방석과 정도전의 배후 세력인 강비가 병으로 죽자 이것을 기화로 방원의 정계 복귀 노력은 한층 가속화 되었다. 

 

그러나 그동안 꾸준히 병권집중 강화를 벌여오던 정도전 일파는 1398년 이른바 진법 훈련 강화를 내세우며 왕족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들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방원과 정도전의 대립은 불가피해졌다. 정도전은 왕족들이 사병을 거느리고 있는 한 병권이 정부로 모아질 수 없다고 판단하였고, 방원은 유일한 힘이며 세력인 자신들의 사병을 잃을 경우 바로 완전히 힘을 빼앗기는 처지가 될 것이며 그런후에는 언제 제거될지 모르는 상황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사병은 방원의 마지막 보루였던 셈이고, 정도전은 사병만 해체하면 가장  위험스런 정적들인 왕족들의 기세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자 방원은 극약처방을 내리게 된다. 한씨 소생의 왕자들은 세자 책봉 문제로 이미 불만이 팽배해진 상태였고 게다가 정도전과 세자의 가장 큰 후원자였던 계모 강씨마저 이미 죽고 없는 상황이었다.

 

방원은 방의와 방간 등 형제들과 함께 정도전 일파를 살해하기로 결정하고 정도전 일파의 밀모설을 만든다. 즉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이 밀모하여 태조의 병세가 위독하다고 속이고 왕자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인 후 일거에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살륙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방원은 이것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신속한 행동을 먼저 시작하였다. 그래서 방원 일파는 사병을 동원하여 일시에 정도전 일파를 습격해 살해하고, 세자 방석은 폐위하여 귀양을 보냈다가 방석의 동복형 방번과 함께 죽여버렸다. 태조는 이때 병중이어서 내막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다가, 뒤늦게 방번, 방석 형제가 살해당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무척 상심하여 왕위를 내놓고 말았다.

 

방원은 거사에 성공하자 하륜, 이거이 등 방원의 심복들은 그를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으나 방원은 이를 극구 사양하였다. 이에 따라 장남인 장우가 1393년에 이미 병사하고 없었기에 방원의 뜻에 따라 둘째인 방과가 세자에 책봉되고 곧 왕위를 이었다. 이는 실리를 감춘채 명분을 내세우고 윤리.도덕적인 비난을 회피하기 위한 방원의 고도의 정치술수였다.

 

방과가 비록 세자에 책봉되고 곧 왕위를 넘겨받긴 했지만 모든 실권은 방원에게 있었다. 방원 일파는 정종 즉위 후 정사공신에 서훈되었으며, 또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여 병권 집중과 중앙집권체제 강화를 위한 제도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방원은 정도전에게 병권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제거했지만, 막상 자신이 권력을 잡게 되자 세력 강화를 위해서 왕족들의 사병을 혁파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그것을 실현시키는 과정에서 훗날 이것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유발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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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정치사상가, 정도전의 최후......

 

 

                           태종 이방원

 

SBS <뿌리 깊은 나무>에서, 화면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지만 가장 많이 거명되는 인물이 있다. 삼봉 정도전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얼굴 없는 제3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다.

 

조선 건국공간에서 사대부 중심의 세상을 추구하다가 왕권 중심주의자 이방원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한 정도전. 그가 죽기 직전에 '사대부 중심의 세상을 건설하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게 이 드라마의 설정이다.

 

조선의 시조는 이성계다. 하지만, 그는 형식적 시조에 불과했다. 태조 원년 7월 17일(1392.8.5) 조선을 세운 실질적 시조는 다름 아닌 정도전이었다. 건국을 향한 아이디어나 추동력은 기본적으로 정도전에게서 나온 것이다. 일례로, 최초의 헌법전인 <조선경국전>도 그가 '개인적'으로 집필한 것이었다.

 

건국의 소프트웨어뿐 아니라 하드웨어도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예컨대, 경복궁 앞 세종로 사거리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뻗는 도로의 구조, 경복궁이니 안국동이니 가회동이니 하는 사대문 안의 지명들도 기본적으로 그의 두개골에서 나왔다. 건국현장에서 정도전은 그야말로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정도전이 이성계와의 술자리에서 툭 하면 강조한 말이 있다. <태조실록>에 실린 '정도전 졸기'에 따르면, 그는 "유방(한나라 시조)이 장량(유방의 책사)을 쓴 게 아니라 장량이 유방을 쓴 것"이라고 말했다. 바꿔 말하면 "이성계가 정도전을 쓴 게 아니라 정도전이 이성계를 쓴 것"이라는 뜻이었다. 이성계가 자신의 머리를 빌린 게 아니라 자신이 이성계의 군사력을 빌렸다는 의미다.

 

이런 말을 듣고도 이성계는 웃어 넘겼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는 이성계의 그릇이 그만큼 컸음을 보여주는 것인 동시에, 건국 과정에서 정도전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태조 7년 8월 26일(1398.10.6)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이 피살되고 이방원이 권력을 장악하기 전까지, 조선은 실질적으로 정도전의 나라였다. 그날까지의 6년간은 이씨 조선이 아니라 정씨 조선이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럼, 1398년 10월 6일 마지막 숨을 쉬기 직전에 정도전이 남긴 말은 무엇이었을까? <뿌리 깊은 나무>에서처럼 '사대부 중심의 세상을 건설하라'고 말했을까? 그날 밤 이경(二更, 밤 9~11시)에 벌어진 정도전 최후의 현장으로 가보자.

 

  
경복궁 흥례문. 정도전은 <시경>을 근거로 경복궁이란 이름을 지었다.
 

10월 6일 밤, 이방원의 쿠데타 단행...정도전의 최후는

 

10월 6일 밤, 이방원은 이숙번의 군대를 거느리고 경복궁 앞에 포진했다. 쿠데타를 단행한 것이다. 태조 7년 8월 26일자 <태조실록>에서는 "광화문에서부터 남산까지 철기(鐵騎, 철갑을 입은 기병)가 꽉 찼다"는 과장된 표현으로 이 상황을 묘사했다.

 

그 시각, 정도전은 측근들과 함께 경복궁 근처인 송현마루에 있었다. 지금의 서울 광화문광장 동쪽에는 옛 한국일보 자리가 있다. 그곳이 바로 송현마루였다. 정도전의 측근인 남은의 첩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 그 집 정자에서 정도전은 남은을 비롯한 측근들과 더불어 10월 밤의 정취를 느끼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집 대문 밖에는 두서너 필의 말이 있었고, 대문 근처의 노복들은 잠들어 있었다. 대문 안을 들여다 보니, 정도전과 남은 등이 등불을 밝힌 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방원과 이숙번은 병력 10명으로 그 집을 포위했다.

 

이방원 측은 공격 개시에 앞서 이웃집 3곳에 불을 놓았다. 도주 경로를 미리 차단하는 한편, 정도전을 당황케 하기 위해서였던 듯하다. 그런 뒤에 병력을 집 안으로 투입시켰다. 정도전을 포함한 몇몇은 담을 넘고, 나머지는 몰살을 당했다.

 

이방원과 측근들은 정도전을 찾아 옆집으로 난입했다. 옆집은 전 판서인 민부의 집이었다. 민부가 먼저 말했다.

 

"배가 볼록한 자가 제 집에 들어왔습니다."

 

건국 이후, 정도전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았다. 이것저것 써야 할 글이 많았기 때문이다. 본래부터 과체중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생활습관도 복부비만에 한몫 했을 것이다.

 

  
광화문 광장의 동쪽에 있는 한국일보 터(오른쪽). 이곳에서 정도전이 살해되었다. 왼쪽에 있는 건축물은 동십자각.
 

'배가 볼록한 자'라는 말에 이방원은 정도전의 모습을 떠올리고 수하 4명을 시켜 집안을 샅샅이 뒤지도록 했다. 잠시 후 침실에서 정도전이 끌려나왔다. 그런 뒤, 그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이방원의 수하에 의해 목이 베였다.

 

여기서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있다. 이때 정도전이 남긴 그 한마디가 무엇인가와 관련하여, 이방원 측의 기록과 정도전 측의 기록이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방원이 정권을 잡은 뒤에 기록된 <태조실록>에 따르면, 침실에 숨어 있던 정도전은 이방원의 수하들이 호통을 치자 조그마한 칼을 쥔 채 엉금엉금 기어서 나왔다고 한다.

 

수하들이 칼을 버리라고 꾸짖자, 정도전은 칼을 문 밖으로 던지고는 이방원에게 애걸복걸했다고 한다. <태조실록>에서는 그가 "바라옵건대, 한마디만 하고 죽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예전에 공께서 저를 살린 적이 있으시니, 바라옵건대 이번에도 살려주소서"라고 했다고 한다.

 

'예전에 공께서 저를 살린 적이 있다'는 것은 건국 직전에 정몽주가 정도전을 암살하려 했을 때 이방원이 정몽주를 암살함으로써 정도전이 극적으로 회생한 일을 가리킨다. 정도전이 그때의 일을 상기시키면서 이방원에게 목숨을 구걸했다는 것이 <태조실록>의 기록이다.

 

하지만,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에는 이를 반박하는 자료가 있다. 정도전이 죽기 직전에 읊은 시 한 수가 그것이다. 제목은 자조(自嘲)다. '나를 비웃다'란 뜻의 시다.

 

두 왕조에 한결 같은 맘으로 공을 세워(操存省察兩加功)

책 속 성현의 뜻을 거역하지 않았건만(不負聖賢黃卷中)

삼심년 동안 애쓰고 힘들인 업적(三十年來勤苦業)

송현 정자에서 한 번 취하니 결국 헛되이 되누나(松亭一醉竟成空)

 

이방원은 왜 정도전 유언을 조작했나

 

  
<삼봉집>에 실린 ‘자조.’
 

이 시에 따르면, 최후의 순간에 정도전은 30년 업적을 한 잔의 술로 날려버린 자기 자신을 비웃으며 세상을 떠났다. 이방원 수하들의 호통을 들으며 엉금엉금 기면서 목숨을 구걸했다는 <태조실록>의 기록과는 달리, 이 시에 나타난 정도전은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당당한 패장의 모습이다.

 

이 시에서 나타난 또 다른 이미지는, 최후까지 정치적 목표에 집착하는 한 혁명가의 모습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스스로를 관조하는 한 인간의 모습이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는 죽는 순간까지 정도전이 사대부 중심의 세상을 갈구했다고 했지만, '자조'에 따르면 마지막 순간의 정도전은 한 잔 술과 함께 물거품이 된 57년 인생을 관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대부 중심의 세상을 추구하는 것도 일종의 이해관계에 얽매인 행동이다. '자조' 속의 정도전은 그런 이해관계마저도 초월해서 최후의 순간에 스스로를 비웃는 달관의 여유를 보이고 있다.

 

이방원 측이 정도전을 폄하하는 데 급급했다는 점, 이방원 측의 주장을 반박하는 시가 정도전의 문집에 존재한다는 점 등을 볼 때, 우리는 정도전의 마지막 유언이 '살려주세요'가 아니라 '자조'였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정도전은 생과 사를 넘나드는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을 살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죽음에 임박해서 스스로를 관조할 만한 인물이었을 것이라고 판단해도 무방하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 한 순간의 방심으로 모든 것을 놓친 정도전은, 최후의 순간에는 사대부 중심이니 왕권 중심이니 하는 정치적 이해관계마저도 다 털어내고 자신의 생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고 스스로를 비웃는 철학자적 여유를 보였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불행한 최후였지만, 인간적으로는 꽤 멋있는 최후가 아닐까.

 

출처 : 이방원의 유언 조작... 정도전 두번 죽였다 -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