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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77 : 조선의 역사 19 (정종실록 1) 본문
한국의 역사 477 : 조선의 역사 19 (정종실록 1)
제2대 정종
정종(定宗, 1357년 ~ 1419년, 재위: 1398년 ~ 1400년)은 조선의 제2대 임금이다. 휘는 경(曔)(초명 방과(芳果)), 자는 광원(光遠). 사후 시호가 없이 조선 중후기까지 명나라가 내려준 시호인 공정왕(恭靖王)으로 불리다가 숙종 때 정식으로 묘호와 시호를 올려 정종공정의문장무온인순효대왕(定宗恭靖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이다. 태조와 신의왕후의 둘째 아들이다.
생애
1357년 음력 7월 1일에 태조와 신의왕후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성품이 온화하고 용맹하고 지략이 뛰어나 고려 말기에 아버지를 따라 여러 전쟁터에 참여하여 많은 공적을 세웠다. 아버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이방과는 영안대군으로 책봉되었다가 1398년 음력 8월에 동생 정안대군 이방원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본래 왕위에 뜻이 없었던 이방과는 왕세자가 되기를 극구 사양하였지만, 태조의 맏아들이자 형 진안대군 이방우는 이미 죽었던 데다가, 그 당시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동생 이방원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왕세자에 올랐다가 1개월 뒤인 1398년 음력 9월에 태조의 양위로 조선의 임금이 되었다. 정종은 2년의 재위 기간 동안 동생인 이방원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이방원의 뜻에 따라 권력가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들을 해체하고 군사권을 국가의 최고 군사기관인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로 집중시켰다.
정종은 서울의 운기가 나빠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는 이유를 들어 수도를 서울에서 다시 개경으로 옮겼다. 그러나 다음 해인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이방원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9개월 뒤인 음력 11월 13일에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정종으로서는 권력의 중심인 왕위에서 물러나는 것만이 목숨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상왕으로 물러난 정종은 인덕궁에서 격구나 사냥, 온천, 연회 등의 오락으로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다가 세종 1년인 1419년 음력 9월 26일에 63살의 나이에 승하하였다. 능은 개경에 있는 후릉(厚陵)이다.
2년 동안의 짧은 치세에 거의 실권이 없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정종을 과도기 집권자로 여기고 묘호도 올리지 않고 ‘공정대왕’(恭靖大王)으로 불렀으나, 262년이 지난 1681년(숙종 7년) 음력 12월에 이르러서야 정종이란 묘호를 받게 되었다.
가족 관계
- 부 : 제1대 왕 태조
- 모 : 신의고황후 한씨
- 왕비 : 정안왕후 김씨(定安王后 金氏)
- 후궁 : 성빈 지씨(誠嬪 池氏)
- 덕천군 후생(德泉君 厚生)
- 도평군 말생(桃平君 末生)
- 후궁 : 숙의 지씨(淑儀 池氏)
- 의평군 원생(義平君 元生)
- 선성군 무생(宣城君 茂生)
- 임성군 호생(任城君 好生)
- 함양옹주(咸陽翁主), 하가 지돈녕 박갱(知敦寧 朴賡)
- 후궁 : 숙의 기씨(淑儀 奇氏)
- 순평군 군생(順平君 羣生)
- 금평군 의생(錦平君 義生)
- 정석군 융생(貞石君 隆生)
- 무림군 선생(茂林君 善生)
- 숙신옹주(淑愼翁主), 하가 판돈녕 김세민(判敦寧 金世敏)
- 후궁 : 숙의 문씨(淑儀 文氏)
- 종의군 귀생(從義君 貴生)
- 후궁 : 숙의 이씨(淑儀 李氏)
- 진남군 종생(鎭南君 終生)
- 후궁 : 숙의 윤씨(淑儀 尹氏)
- 수도군 덕생(守道君 德生)
- 임언군 녹생(林堰君 祿生)
- 석보군 복생(石保君 福生)
- 장천군 보생(長川君 普生)
- 인천옹주(仁川翁主), 하가 행부사 이관식(行府使 李寬植)
- 후궁 : 가의궁주 유씨(嘉懿宮主 柳氏)
- 불노(佛奴)
- 후궁 : 시비 기매(侍婢 其每)
- 지운(志云)
- 후궁 :?
- 덕천옹주(德川翁主), 하가 행부사 변상복(行府使 邊尙服)
- 고성옹주(高城翁主), 하가 지중추 김한(知中樞 金澣)
- 전산옹주(全山翁主), 하가 행사직 이희종(行司直 李希宗)
- 함안옹주(咸安翁主), 하가 부지돈녕 이항신(副知敦寧 李恒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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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실록(1357~1419년, 재위 1398년 9월 ~ 1400년 11월, 2년 2개월)
1. 태조의 세자 책봉과 왕자들의 반발
태조는 둘째 부인 강씨를 총애했다. 강씨는 젊고 총명하였으며 친정이 권문세가였기에 태조에게 힘이 되어 주기도 했다. 그 때문에 태조는 많은 부분을 그녀에게 의존하였으며, 그녀 또한 태조의 집권 거사에 직접 참여하여 막후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 출신의 개국공신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한 강씨의 영향력은 마침내 자신이 낳은 아들로 세자 책봉을 하는 데 까지 미치게 된다.
태조는 첯째 부인 한씨 소생의 장성한 왕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강씨 소생인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에 책봉했다. 1392년 8월, 그때 방석의 나이 불과 11세였다. 혈기왕성했던 한씨 소생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처사에서 분개했지만 어쩔수 없는 노릇이었다.
1392년 7월, 태조가 조선을 개국하고 한 달 뒤에 소년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을 때, 장남 방우의 나이는 이미 불혹을 바라보는 39세였고, 방석의 세자 책봉에 대해 가장 불만이 많았던 정안군 방원의 나이는 혈기왕성한 26세였다. 방원은 맏형인 방우를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태조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방원은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에게 개경의 최영 부대를 쳐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정몽주를 살해해 개국 반대 세력을 제거했는가 하면, 왕대비 안씨를 강압하여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이성계를 등위시킨 주인공이었다. 따라서 공적을 따진다면 세자 자리는 당연히 방원에게 돌아가야 했지만, 조선 개국 후 그에게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왕후 강씨와 정도전 등 개혁파의 배척으로 군권을 상실하고 개국공신 책록에서도 제외당하는 등 굴욕을 맛보아야 했다. 그런 가운데 세자 자리마저 강비의 소생인 방석에게 돌아갔던 것이다.
태조는 원래 계비 강씨의 요구에 따라 일곱째 아들 방번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다. 하지만 공신인 배극렴, 조준 등은 방번이 아직 어리고 자질이 세자에 적당하지 않기 때문에 방원의 세자 책립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태조는 방번 대신에 친아우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고 정도전으로 하여금 세자를 가르치도록 했다.
결국 태조와 강비 그리고 정도전의 방원에 대한 지나친 경계와 냉대, 이것이 화근이 되어 조선왕조는 개국 초장부터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감내해야 했다.
이같은 강비의 집요한 탐욕과 이성계의 현명치 못한 후계자 결정은 결국 왕자들 간에 피비린내 나는 살륙전이 일어나게 되는 원인이 되었는데 바로 제1차, 2차 왕자의 난이다. 이성계가 고려 왕족들을 모두 강화도 앞바다에 수장시켜 멸족시키고 조선을 세운 업보인지도 모른다.
이후 조선은 태종, 세종, 세조 시대 왕권이 강화되었던 시대를 지나고 양산된 공신위주의 훈구세력이 중심이 된 신권중심의 사회로 전개되었고 신분질서가 역동성을 점점 상실하고 고착화되면서 양극화가 심화되어 갔다. 사회 지도층인 귀족.선비들에 의해서 권력이 농단되면서 비리와 부패가 심화되어 갔으며 계파별로 파벌이 조성되면서 사색당파가 태동되었고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권력투쟁인 당파싸움이 후기까지 계속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선이 멸망의 위기까지 갔으나 충신.열사들과 명나라의 지원으로 운좋게 국체를 연명하였다. 영.정조 시대의 탕평책과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기존 세력의 격렬한 반대로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숙종대에는 환국정치로 선비들이 피비린내나는 숙청이 계속되었고 민중들의 거센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후 안동 김씨 등 외척 세력이 등장하여 권력을 독식하면서 조정은 무능한 왕이 옹립되어 나라는 파탄을 향해 질주하다가 고종대에 흥선과 민비의 권력 투쟁 가운데 외세를 끌여들이므로써 조선은 망국의 길로 가고 말았던 것이다.
2. 제1차 왕자의 난
1398년 무인년 8월 25일, 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 한씨 소생 왕자들이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 반대파 세력을 불의에 습격하여 살해하고, 세자 방석과 그의 동복형 방번을 죽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을 '제1차 왕자의 난', '방원의 난' 또는 '무인정사', '정도전의 난'이라고 한다.
조선 건국 이후 개국공신들의 지위는 급상승되었다. 1392년 의흥삼군부 설치를 계기로 하여 정도전을 중심으로 추진되기 시작한 병권집중 운동과 중앙집권화 정책은 권력구조 면에서 큰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개국공신 중에서 정도전의 지위가 크게 부상되었고 여타의 훈신과 왕실 세력 그리고 개국 핵심 세력인 무장 세력들은 정치 일선에서 소외되기 시작하였다.
정도전은 개국 과정에서 스스로 자신을 한나라 장량에 비유하면서 한 고조 유방이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 고조를 이용했다면서 이성계보다 자신이 더 개국의 주역임을 내세우곤 하였다. 그는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는 물리력에 의해 통치자를 교체할 수 있다는 맹자의 역성혁명론을 주장하였고 실제로 그 혁명 논리에 따라 왕조 교체를 수행하였다. 또한 재상을 최고 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인 관료 지배체제를 이상적인 정치체제로도 보았다.
정도전의 이러한 정치관은 신권 중심의 왕정이라는 점에서 왕족들에게는 대단히 위협적인 내용이었다. 이방원이 정도전을 제거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게다가 정도전은 세자 방석과 왕후 강씨를 끼고 있었다.
조선 개국 이후 방원은 정치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나 있었지만 정계 복귀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던 중 1396년 최대의 난적이자 세자 방석과 정도전의 배후 세력인 강비가 병으로 죽자 이것을 기화로 방원의 정계 복귀 노력은 한층 가속화 되었다.
그러나 그동안 꾸준히 병권집중 강화를 벌여오던 정도전 일파는 1398년 이른바 진법 훈련 강화를 내세우며 왕족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들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방원과 정도전의 대립은 불가피해졌다. 정도전은 왕족들이 사병을 거느리고 있는 한 병권이 정부로 모아질 수 없다고 판단하였고, 방원은 유일한 힘이며 세력인 자신들의 사병을 잃을 경우 바로 완전히 힘을 빼앗기는 처지가 될 것이며 그런후에는 언제 제거될지 모르는 상황임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사병은 방원의 마지막 보루였던 셈이고, 정도전은 사병만 해체하면 가장 위험스런 정적들인 왕족들의 기세를 완전히 제거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자 방원은 극약처방을 내리게 된다. 한씨 소생의 왕자들은 세자 책봉 문제로 이미 불만이 팽배해진 상태였고 게다가 정도전과 세자의 가장 큰 후원자였던 계모 강씨마저 이미 죽고 없는 상황이었다.
방원은 방의와 방간 등 형제들과 함께 정도전 일파를 살해하기로 결정하고 정도전 일파의 밀모설을 만든다. 즉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이 밀모하여 태조의 병세가 위독하다고 속이고 왕자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인 후 일거에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살륙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방원은 이것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신속한 행동을 먼저 시작하였다. 그래서 방원 일파는 사병을 동원하여 일시에 정도전 일파를 습격해 살해하고, 세자 방석은 폐위하여 귀양을 보냈다가 방석의 동복형 방번과 함께 죽여버렸다. 태조는 이때 병중이어서 내막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다가, 뒤늦게 방번, 방석 형제가 살해당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무척 상심하여 왕위를 내놓고 말았다.
방원은 거사에 성공하자 하륜, 이거이 등 방원의 심복들은 그를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으나 방원은 이를 극구 사양하였다. 이에 따라 장남인 장우가 1393년에 이미 병사하고 없었기에 방원의 뜻에 따라 둘째인 방과가 세자에 책봉되고 곧 왕위를 이었다. 이는 실리를 감춘채 명분을 내세우고 윤리.도덕적인 비난을 회피하기 위한 방원의 고도의 정치술수였다.
방과가 비록 세자에 책봉되고 곧 왕위를 넘겨받긴 했지만 모든 실권은 방원에게 있었다. 방원 일파는 정종 즉위 후 정사공신에 서훈되었으며, 또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여 병권 집중과 중앙집권체제 강화를 위한 제도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방원은 정도전에게 병권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제거했지만, 막상 자신이 권력을 잡게 되자 세력 강화를 위해서 왕족들의 사병을 혁파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그것을 실현시키는 과정에서 훗날 이것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유발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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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이방원의 유언 조작... 정도전 두번 죽였다 - 오마이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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