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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75 : 조선의 역사 17 (태조실록 10)

두바퀴인생 2012. 1. 25. 06:41

 

 

 

한국의 역사 475 : 조선의 역사 17 (태조실록 10)

 

 

       

 

 

 

태조실록(1335~1408년, 재위 1392년 7월 ~ 1398년 9월, 6년 2개월)

 

 

9. 태조시대의 경제정책

 

과전법의 확립과 토지제도의 정착

조선 개국 세력이 가장 강력하게 추진한 정책 중의 하나는 이른바 과전법(科田法)으로 대표되는 토지제도의 개혁이었다.

 

1389년 고려 창왕 원년 7월에 개국 세력의 핵심 인물인 조준의 '전제개혁에 관한 소(疎)'에 의해 촉발된 토지제도 개혁운동은 신진사대부 세력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강력하게 추진되어 1391년 고려 공양왕 3년 5월에 과전법이 정식으로 공포됨으로써 결실을 얻게 된다.

 

당시 고려 사회는 토지제도의 근간을 이루고 있던 전시과(田柴科, 전현직관리들에게 각 과에 따라 지급하는 토지)제도가 무너져 권문세가들이 불법적으로 겸병하고 점탈하여 대농장을 소유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대농장주들은 편법과 권력을 이용하여 국가에 조세를 바치지 않았으며, 농장에 귀속된 전호(佃戶)들에 대하여 불법으로 국가의 역역(力役)을 면제해주는 대신 가혹하게 노동력을 착취했다. 이 때문에 국가 재정이 바닥나 관리의 녹봉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였고, 대다수의 양민이 대농장의 전호로 전락하는 바람에 병역 및 부역의 의무를 담당할 사람의 수가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심지어는 군량미를 확보하지 못하여 변방을 지키는 군인들이 끼니를 거르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따라 토지를 적게 소유한 관료와 농민들의 원성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조준을 비롯한 신진사대부 세력은 이러한 국가의 어려움이 근본적으로 권문세가들이 소유한 사전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사전제도에 대한 일대 개혁을 단행할 것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토지제도에 대한 개혁은 공민왕 대에 '전민변정도감'의 설치를 통하여 이미 실시된 바 있으나, 권문세가들의 강한 반발에 밀려 실패로 돌아간 적이 있었다. 따라서 신진사대부 세력의 토지 개혁 역시 권력층의 강한 반발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개혁 세력은 이성계의 정치, 군사적 힘에 의존하여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세움으로써 권문세족의 반발을 차단하고 과전법을 공포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고 1392년 7월 조선이 개국됨으로써 과전법은 조선 토지제도의 근간이 된다.

 

과전법은 전국 토지의 대부분을 국가의 수조지(조세를 받는 땅)로 편성하는 것을 목표로 두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대농장에 소속된 사전들 중에서 원래부터 농장주가 직접 경작하던 극히 일부의 토지를 제외한 나머지 소작지를 국가가 환수해야 했다. 그리고 환수된 땅에서 농사를 짓는 농민은 종래에 대농장주에게 내던 세금을 일정한 원칙에 따라 국가에 내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농장주 역시 자신이 경작하는 토지에 비례하여 국가에 세금을 비치도록 하였다.

 

따라서 과전법의 실시는 곧 농민에게 경작지를 돌려주면서 동시에 조세에 대한 부담을 줄여주었고, 국가로서는 세수의 증대로 재정의 안정을 꾀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과전법에서 토지 분급은 수조권이 개인에게 귀속되는 사전과 수조권이 국가 공공기관에 귀속되는 공전으로 나뉜다.

 

사전으로는 관리에게 주는 과전, 공신에게 주는 공신전, 외직에 나간 관리에게 주는 외관직전, 한량관에게 주는 군전, 향.진.역의 아관에게 주는 외역전, 군장.잡색의 위전 등이 있었다.

 

또한 공전으로는 군자시에 귀속된 군자전, 왕실에 속한 능침전.창고전.궁사전, 공공기관에 딸린 사사전과 신사전 등이 있었다.

 

이들 공.사전 중에서 과전법은 토지 분배의 중심에 두었다. 과전은 문무관료들에게 경제적 기반을 보장해주기 위해 현직자, 산관(정해진 사무가 없는 관리), 즉 퇴직자 및 대기발령자를 막론하고 18과로 나눠 15결에서 150결 사이의 전지가 각 직급에 따라 분급되는 형태였다.

 

과전법에 따라 1395년 태조 5년에 각 품계별로 분급된 토지의 현황을 살펴보면 대군 및 정승인 정1품에게는 150결, 종1품에게는 125결, 정2품은 115결, 종2품 105결, 정3품 당상 85결, 정3품당하 80결, 종3품 75결, 정4품 65결, 종4품 60결, 정5품 50결, 종5품 45결, 정6품 35결, 종6품 30결, 정.종7품 25결, 정.종8품 20결, 정.종9품 15결 등이었다. 이외에는 품계가 없는 아관이나 잡권무에게는 10결이 주어졌다. 이때 1결의 넒이는 약 1만 제곱미터 정도였고, 각 농민들이 소유한 평균 경작지는 1~2결 정도였다.

 

과전은 일대에 한해서 분급되었지만 관리가 죽으면 부인에게 지급되는 '수신전과' 그 부인마저 죽으면 죽은 관리의 자제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지급하는 '휼양전' 등으로 부분적으로 세습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이 두 조건이 해제될 때에는 국가가 환수하였다. 때문에 관전은 관리의 직책에 대한 단순한 반대급부라기보다는 관리와 그 가족들이 신분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신분제적 분급수조지' 성격이 강했다.

 

과전법은 공.사전을 막론하고 수조권자에게 바치는 세금을 1결(3백 두)당 10분의 일에 해당하는 30두로, 그 땅의 주인이 국가에 바치는 세금은 매 1결당 2두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세의 징수를 위해 조정의 관리와 전주가 매년 농사의 작황을 직접 답사하여 세를 매기는 '담험손실법'을 마련하였다. 이는 고려 말에 땅 주인에게 생산량의 반 이상을 바치던 것에 비하면 경작자의 부담이 획기적으로 감소한 것이었다. 또한 국가는 사전의 전주와 공전에서 일정한 세금을 거둘 수 있어 국가 재정을 정상화 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전법의 확립은 신진관료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주었을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조선 양반사회를 지탱하는 토대가 되었다. 또한 비록 적은 면적이었지만 전체 농민의 약 70% 정도가 자신의 경작지를 소유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의 경제적 안정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과전법 실시로 국가에 대한 공역의 부담도 종래의 장정수에 매기던 것에서 토지 소유분에 따라 매기는 '계전법'으로 바뀌었다. 말하자면 장정 수에 따라 부과하던 공역을 소유와 소득에 따라 부과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조선은 고려 말에 실시된 과전법의 확립을 통해 국가 경제를 안정시키고 관계의 체계와 관리의 기강을 바로잡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조정은 과전법 실시 이후에도 개인의 전답인 사전에 대한 억압시책을 꾸준히 시행하여 1466년 세조 12년에는 현직 관리에게만 땅을 지급하는 직전법을 확립하게 된다.

 

 

상업조직과 시장의 발달

조선은 개국 후 2년 만인 1394년 10월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다.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조선 역시 수도를 건설하면서 궁궐을 세우고, 지역을 나누고, 시장을 세우는 일을 3대 주요사업으로 삼았다.

 

농본주의를 국시로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수도 건설의 3대 사업 중의 하나가 시장을 세우는 일이었는데 그것은 궁궐에서 사용할 물건을 조달하고 백성들의 삶을 원활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장이 필수불가결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시장으로 대표되는 조선의 상업기관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될 수 잇다, 첯째는 전국적으로 1천여 개 이상이 있었던 향시를 들 수 있겠고, 둘째는 좀더 진보된 상업기관으로 한양의 육의전이 있었고, 셋째는 지방도시의 화물집산지 구실을 했던 객주가 있으며, 넷째는 행상을 주로하는 보부상이 있었다.

 

첯 번째 향시는 이미 고대 때부터 형성된 것으로 '장'이라는 이름으로 대개 5일마다 한 번씩 섰으며, 지방민들의 상거래장으로 활용되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개인이 만든 가내수공업이나 곡물, 가축 등을 거래하였다. 따라서 향시는 당시 지방 백성들의 유일한 상거래 장소이자 정보교환의 장이기도 했다.

 

이에 비해 육의전을 비롯한 객주와 여각, 보부상 등의 형태는 좀 달랐다.

 

우선 육의전은 관아에서 설치한 공랑에 형성된 시장으로 전매특권과 국역 부담의 의무를 지고 있었으며, 육주비전, 육부전, 육분전, 육장전, 육조비전 등으로 불리었다.

 

이곳에 시전을 연 사람들은 한양에 거주하는 직업적인 상인으로 관아에서 만든 공랑을 사용하기 때문에 시전에 대하여 남세의 의무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관부의 수요에 따라 부과되는 임시 부담금, 궁중.부중의 수리 및 도배를 위한 물품, 왕실의 관혼기제, 중국에 파견되는 각종 사절의 세폐와 수요품 조달 등 이른바 국역을 부담하였다. 이와 같이 국역 부담률이 높은 6개 상전을 육주비전 또는 육의전이라 했다.

 

육의전을 구성하고 있는 점포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하기는 하지만 대개 비단전, 무명전, 명주전, 종이전, 모시전, 생선전 등이었다. 그러나 태조시대만 하더라도 이러한 육의전은 제 모습을 갖추지 못했다.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도읍은 다시 개성으로 옮겨갔고, 태종 대에 가서야 겨우 한양이 조선의 도읍으로 정착하였기 때문이다.

 

태조 대의 한양시전 상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첯째는 관부에서 지은 공랑에서 장사하는 공랑 상인으로 이들은 나중에 육의전 상인으로 발전하게 된다. 둘째는 임시 점포에서 장사하는 좌가 상인, 셋째는 점포없이 노점을 여는 행상인 등이었다. 이렇게 세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는 것은 한양시전이 아직 완전한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과도기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까닭에 한양보다는 오히려 고려 때부터 꾸준히 유지해온 평양과 개성에 마련된 상설 점포가 더 발달한 상태였다. 하지만 태종 대에 이르면 한양시전은 8백여 칸의 좌우행랑을 마련하여 대단위 상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그리고 중기로 가면서 공랑 상인이 좌가 상인과 행상인을 흡수하여 육의전으로 정착함으로써 명실공히 조선의 대표적인 시장으로 발돋음하게 된다.

 

 세 번째 상업기관인 객주는 주로 위탁받은 물건을 팔아주거나 매매를 거간하며 그에 따른 부수적인 여러 기능을 맡고 있었으며, 여각, 저가, 저점 등으로도 불리었다.

 

객주는 객지에서 장사하는 여러 상인들의 주인 역활을 하였는데, 주된 업무는 생산자나 상인으로부터 매매를 위탁받은 물건을 모아서 상인들에게 유통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여숙, 금융, 창고, 운송 등 여러가지 주선행위를 도맡는 자본가인 셈이었다.

 

객주는 다루는 물품과 일에 따라 일반적인 객주를 의미하는 물상객주, 미곡.어물.소금.과채.시탄 등 부피와 무게가 큰 품목만 취급하며 창고를 반드시 갖추고 있는 여각, 중국인을 상대로 장사하는 만상객주, 보부상을 상대로 하는 보상객주, 일반 보행자를 상대로 하는 보행객주, 금융업을 전업으로 하는 환전객주, 언제나 무시로 사용되는 가정용품을 다루는 무시객주, 지방의 관리를 위하여 중앙과 지방의 연락과 숙박을 제공하는 여각 주인을 일컫는 경주인, 행상을 대상으로 숙박업을 전문으로 하는 원우 등이 있었다.

 

네 번째 상업기관인 보부상은 보상(봇짐장수)과 부상(등짐장수)을 통칭하는 것으로 시장을 중심으로 행상하면서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교환경제를 매개하였던 전문적인 상인을 일컫는다.

 

이들 보부상은 고대사회부터 존속되어 왔는데, 보부상인 단체가 조직된 것은 조선의 개국 이후이다. 이들 보부상들이 단체를 결성한 것에 대해서는 대개 두 가지 설이 있다. 첯째는 이들이 이성계의 조선 개국에 공헌하였기 때문에 조선 조정이 그 조직의 결성을 허용하였다는 설이며, 둘째는 이들 자신이 상류계층과 무뢰배들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의적으로 조직하였다는 설이다. 이 두 가지 설 중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던 보부상이 조직적인 활동을 벌이기 시작한 시기가 조선 개국과 맞물리는 것만은 분명하다.

 

보부상은 흔히 보상과 부상으로 나뉘는데, 보상은 주로 정밀한 세공품이나 값이 비싼 사치품 등의 잡화를 취급한 데 반해 부상은 조잡하고 유치한 가내수공업품이나 토기, 철기 등을 취급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 취급하는 물품을 엄격히 구분하여 상대방의 물품을 취급하지 못하게 하였다.

 

보상과 부상은 별도의 조직을 가지고 있었으나, 19세기 말엽에 이르러 하나의 조직으로 통합하게 되었다.

 

이들 조직의 임원은 민주적인 투표에 의해 선출되었으며, 그들에 의해 지도자가 뽑히게 되는데 그를 접장이라고 불렀다. 또한 접장은 군과 도마다 한 명씩 존재했으며, 군을 맡고 있는 접장을 군접장, 도를 맡고 있는 접장을 도접장이라 하였고, 그들 접장을 이끄는 지도자를 도반수라고 하였다. 중앙의 임원은 하부조직 접장들로 구성되며, 임기가 정해져 있었다.

 

이 같이 철저한 조직체계로 구성된 보부상은 전국 시장을 떠돌며 조선 백성들의 핏줄 노릇을 하였고, 탄탄한 조직을 기반으로 때로는 조정의 명령을 수행하는 행동대 역활을 하였기 때문에 관아에서조차 그들의 힘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조선의 상업기관은 이처럼 태조 초기부터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성장하였다. 가장 기초적인 향시, 그 향시를 서로 연계시키는 보부상, 보부상과 상인을 대상으로 위탁업과 숙박업을 담당한 객주, 국가 상행위를 뒷받침하며 중앙의 최대 시장을 형성한 한양시전 등을 통하여 상인들은 전국을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연결하여 농민이 대다수인 조선 백성들의 혈관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