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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73 : 조선의 역사 15 (태조실록 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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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73 : 조선의 역사 15 (태조실록 8)

두바퀴인생 2012. 1. 23. 02:04

 

 

 

한국의 역사 473 : 조선의 역사 15 (태조실록 8)

 

 

       

 

 

 

태조실록(1335~1408년, 재위 1392년 7월 ~ 1398년 9월, 6년 2개월)

 

8. 조선 개국을 이끈 사람들

 

 새 왕조를 꿈꾸는 혁명가들

조선을 개국한 사람들은 한마디로 고려 조정의 주변 세력들이었다. 역성혁명론을 개국 이념으로 앞세운 이들은 이성계, 정도전, 무학대사 세 사람으로 압축할 수 있는데, 이는 고려 멸망과정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고려 멸망과 조선 개국 과정은 공민왕조 때 벌어진 친원파와 반원파 간의 대립에서 시작된다. 친원파의 대표격인 기씨 가문과 반원파의 대표격인 공민왕의 싸움은 원의 몰락으로 공민왕의 승리로 끝난다.

 

이때 공민왕파에 속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이성계와 최영이었다. 하지만 이들 반원 세력은 다시 둘로 나누어진다. 이성계는 근본적으로 변방 세력이었기에 언제나 전쟁터로 내몰렸으며, 최영은 중앙의 권력을 잡고 있었다. 이는 곧 조정의 주변 세력과 고려 왕조를 중심으로 한 중앙 세력으로 구별될수 있다. 이 주변 세력에는 이른바 성리학 이념에 바탕을 둔 개혁론자들이 포진하고 있었고, 중앙 세력에는 왕족을 비롯한 훈구 세력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양대 세력은 요동성 공략에 대한 이견으로 갈등이 절정에 이르렀고, 이 때문에 이성계 일파는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여 중앙 세력의 수장인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위시키게 된다.

 

하지만 이들 개혁론자들이 다시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고 새로운 왕조를 주창해야 한다는 역성혁명론자들과, 고려왕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성리학 사상을 중심으로 고려를 개혁해야 한다는 고려개혁론자들로 나누어진다.

 

역성혁명론의 대표격은 정도전이었고, 고려개혁론의 대표격은 정몽주였다. 이들은 모두 이색의 문하생으로 동문수학한 사이였지만 대립은 결국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역성혁명론자들의 승리로 끝난다. 이렇게 해서 세운 나라가 곧 조선이다.

 

조선의 태조로 등극한 이성계는 군권을 쥐고 있었지만 원래 새 왕조를 주창하겠다는 의지는 그다지 강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오히려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품엇던 인물은 무학대사와 정도전이었다.

 

이들은 출신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능력과 상관없이 배척의 대상이 되엇고, 항상 주변 세력으로 머물러야 했다. 이들의 이런 상황은 변방 세력이란 이유로 끊임없이 전쟁터만 전전해야 했던 이성계의 처지와 같았다. 그래서 이들은 힘은 있으나 주변 세력으로만 머물러 있던 이성계를 찿아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것을 역설했다. 정도전은 사상적인 부분에서, 무학은 이성계 개인의 인성과 천명론을 들먹이며 그를 부추겼고, 결국 이들의 설득과 논리가 이성계의 불만과 일치되면서 비로소 조선의 개국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었다.

 

 

 

 

역성혁명론을 실천한 풍운아 정도전

조선의 개국은 역성혁명론의 결정체였으며, 이러한 논리를 고려왕조에 대입한 사람이 바로 정도전이었다.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 물리력으로 왕조를 교체할 수 있다는 맹자의 사상을 바탕으로, 정도전은 이미 국운이 기울어져가던 고려왕조를 폐하고 성리학 사상을 통치 이념으로 한 새로운 왕조를 꿈꾸었다.

 

정도전은 고려말에 개혁을 꿈꾸던 일군의 성리학자들이 명망 있는 가문 출신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보잘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조부 정공미는 고을의 아전격인 호장으로 있었으며, 대대로 미미한 벼슬을 유지해오다가 아버지 정운경에 이르러서 비로소 직제학이라는 중앙관리로 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서얼 출신의 노비였다. 이런 출신 배경은 정도전의 출세에 엄청난 걸림돌로 작용하였을 뿐 아니라, 동문수학했던 벗들로부터 따돌림 받는 주된 원이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 외톨박이 생활이 정도전으로 하여금 역성혁명을 꿈꿀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작용했던 것이다.

 

정도전은 이성계보다 2년 늦은 1337년에 경북 영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정운경이 이색의 아버지 이곡과 친구였던 탓으로 이색 문하에서 글을 배우게 되었으며, 거기서 정몽주, 이승인 등과 교분을 가졌다. 24세가 되던 1360년 공민왕 9년에 성균시에 합격하고 2년 후에는 진사시에 붙어 충주사록, 전교주부, 통례문지후 등을 역임하였다. 그 후 성균관의 박사로 있으면서 동갑내기인 정몽주 등과 함께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유학을 강론했으며, 1371년에는 태상박사에 임명되어 5년간 전선을 관장했다.

 

1375년 우왕 1년 권신, 이인임, 정복흥 등의 친원 세력과 맞서다가 전라도 나주목에 유배되었으며, 2년 뒤에 유배지에서 풀려난 뒤로는 낙향하여 4년간 칩거하다가 한양으로 가서 삼각산 밑에 초가를 짓고 후학을 가르치는 훈장이 되었으나 주변 유학도들의 방해로 서재를 철거당하고 다시 김포로 이사했다.

 

이렇게 유랑생활을 하던 정도전은 1383년 동북면에 있던 이성계를 찿아간다. 이때 이성계는 나하추 부대를 격퇴시킨 후 각종 전쟁에서 승전을 거듭하여 고려의 영웅으로 떠오르고 있었으며, 고려 변방 동북면의 도지휘사를 맡고 있었다.

 

이성계와 인연을 맺은 정도전은 이성계의 천거로 드디어 성균관 대사성에 오른다. 이후 1388년 이성계가 의화도 회군에 성공하자 밀직부사로 승진하여 조준 등과 함께 전제개혁안을 건의하고, 조민수 등 구세력을 제거하여 이성계가 조정을 장악하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이듬해 정몽주 등과 함께 우왕의 아들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여 좌명공신에 봉해지고, 1391년 삼군도총제부 우군총제사가 되어 병권을 장악한다. 그러나 다음 해 봄 이성계가 사냥 중에 낙마하여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정몽주, 김진양 등의 탄핵을 받아 또다시 유배생황을 하게 된다. 이때 정몽주 등이 그를 탄핵한 주된 이유는 "가풍이 미천하고 가계가 불명확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도전을 탄핵한 실제 목적은 이성계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정몽주 일파의 정치적 공세에 위기감을 느낀 이방원은 급기야 수하들로 하여금 정몽주를 살해하는 등의 극단적인 조치를 단행한다. 이방원에 의해 정몽주가 격살당하자 정도전은 유배지에서 풀려나 그해 7월에 조준, 남은 등 50여 명과 함께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마침내 조선을 개국하였다.

 

조선의 개국은 정도전의 역성혁명론의 실천임과 동시에 그가 염원하던 유교적 왕도정치의 실습장이었다. 정도전은 꿈에도 그리던 새 왕조 주창에 성공하자 성리학적 이념에 바탕을 둔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 매진했다. 우선 <조선경국전>을 편찬해 새로운 법제도의 틀을 닦았으며, 도읍을 옮겨 새 왕조의 면모를 높였고, <경제문감>을 저술하여 재상, 대간, 수령, 무관의 직책을 확립했다. 또한 명의 공물 요구가 거세지자 요동 정벌을 계획하고, 군량미 확보, 진법 훈련, 사병 혁파 등을 적극 추진해 병권집중 운동을 펼쳐나갔다.

 

이러한 하부조직에 대한 개혁 작업뿐 아니라 <경제문감별집>을 저술하여 왕이 나갈 길을 밝혔으며, <불씨잡변>을 저술하여 숭유억불 정책의 이론적 근거와 기초를 확립했다.

 

그러나 정도전의 이 같은 노력은 사병 혁파에 위기를 느낀 이방원의 무력동원으로 중도에 좌절되고 만다. 정도전의 세력이 날로 강해지자 이방원은 자신의 형제들과 힘을 합쳐 그를 제거해버렸던 것이다. 정도전은 어린 세자 방석을 교육시켜 재상이 중심이 되는 왕도정치의 실현을 꿈꾸었지만, 왕권과 자신의 입지가 약화되는 것을 두려워한 이방원이 사병을 이끌고 불시에 기습하여 그를 살해하고 더불어 세자 방석도 죽여버렸다. 이때가 1398년으로 정도전의 나이 62세였다.

 

정도전은 자신을 한나라의 '장량'에 비유하며 조선 개국에 자신의 공이 가장 컸음을 공공연하게 자랑하곤 하였다. 그리고 한 고조 '유방'이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 고조를 이용하여 한나라를 세웠다고 말하면서 자신도 이성계를 이용하여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개국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지나친 자부심이 결국 그의 죽음을 자초하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조선에 끼친 영향은 대단한 것이었다. 역성혁명이론에 입각해 이성계로 하여금 조선을 개국하게 했고, 한 나라의 근본이 되는 법제를 확립하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천도를 단행했다. 그뿐 아니라 조선의 개국 이념인 유교사상을 사회 속에 확립시켰고, 재상이 중심이 되는 왕도정치를 내세워 왕의 바른 길을 가르쳤다. 또한 명의 공물 요구가 지나치자 요동 정벌론으로 맞서며 정치적 독자성을 실행하였고, 병권집중화 운동으로 군권을 안정화시켰다.

 

이렇듯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조선 개국을 이끌었던 그가 후대에 이르러 오히려 두 왕조를 섬긴 변절자로 또는 단지 처세에 능한 모사가로 인식된 것은 태종 이방원의 권력 집착에서 비롯된 정권 찬탈을 미화시키기 위한 조선왕조의 의도적인 매도 때문이라고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