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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74 : 조선의 역사 16 (태조실록 9)

두바퀴인생 2012. 1. 24. 06:20

 

 

 

한국의 역사 474 : 조선의 역사 16 (태조실록 9)

 

 

       

 

 

 

태조실록(1335~1408년, 재위 1392년 7월 ~ 1398년 9월, 6년 2개월)

 

 

장군을 군왕으로 만든 무학

정도전이 이성계에게 새로운 왕국 건설의 당위성을 가르쳤다면 무학은 이성계를 일개 장수에서 군왕으로 이끈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정도전이 이성계를 통해 성리학적 이상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면, 무학은 이성계에게 군왕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이처럼 조선을 개국하는 데에 정도전의 역활 못지 않게 무학의 공헌도 지대하였다.

 

무학은 1327년 경상도 합천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박씨로 대몽항쟁의 명장 박서의 5대손으로 알려져 있다. 법명은 자초이며 18세에 수선사(송광사)로 출가하였고 용문산의 혜명스님에게서 불법을 전수받았다.

 

무학의 부모는 고려 말 당시 해안지방에 자주 출몰하던 왜구에게 끌려가다가 간신히 탈출하여 안명도에서 갈대로 삿갓을 만들어 팔던 하층민이었다. 때문에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무해서 그의 행적은 출가 이후 일부만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무학은 출가한 지 몇 년 후에 원으로 유학하였다. 그느 거기서 인도 출신의 고승 지공을 만나 선불교를 배웠고, 또한 원에 유학 중이던 나옹 혜근 스님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

 

무학은 원에서 돌아온 뒤 나옹을 찿았다. 그때 나옹은 공민왕의 왕사로 봉직하고 있었는데 무학을 전법제자로 삼았지만 나옹의 제자들은 이를 용인하려 들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나옹은 문도들의 반대로 그에게 의발을 전수하지 못하고 전법제자임을 알리는 시를 한 수 지어준다.

 

나옹의 제자들이 무학을 배척하였던 것은 우선 무학이 천민 출신이라는 것이었고, 다음으로는 보수적인 자신들의 성향 때문에 무학의 선진적인 사상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무학은 공양왕의 왕사 책봉도 받아들이지 않고 나옹의 곁을 떠나 오랫동안 토굴 속에서 수도생활에 전념했다.

 

하지만 이성계를 만난 뒤부터 그의 삶은 달라진다. 무학은 새로운 왕국의 건설을 꿈꾸는 혁명가임과 동시에 왕조의 군왕이 될 이성계의 충실한 인도자가 된다. 사실 그가 이성계를 만난 경위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조선 중기 휴정이 지은 <석왕사기>에 따르면 이성계가 그를 찿아온 것으로 기록되어 잇을 뿐이다.

 

무학은 천문지리와 음양도참설에 밝았고, 파자점과 해몽술에도 능하였던 모양이었다. 그를 찿아온 이성계가 문(問)자를 짚어 보이자 어느 쪽으로 보나 군(君)이라고 하며 그가 장차 임금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는가 하면, 꿈에서 서까래 세 개를 지고 나왔다는 말을 듣고  그것은 임금 왕(王) 자라고 하여 후에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록을 남긴 자가 이성계의 조선 개국 정당성과 무학의 예지능력을 좀 과장해서 한 말인지도 모른다.

 

이 기록의 사실 여부를 떠나 무학이 이성계에게 왕의 기상이 깃들어 있음을 각인시킨 것만은 분명했던 것 같다. 이후 이성계는 그를 스승으로 우대하였고, 조선 개국 이후에는 왕사로 받들었다.

 

무학의 혁명에 대한 염원은 부패 상황이 극에 달한 고려 말의 불교계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신분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성계와 새 왕조를 개창하려는 세력들이 불교를 극구 배척하던 성리학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학이 정도전을 비롯한 성리학자들과 손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불교적 입장보다는 개혁에 대한 염원이 더욱 간절하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무학은 태조의 왕사로 있으면서, 조선의 안정을 위해 새로운 왕도를 정하는 일과 왕궁을 건축하는 일에 가담하는 등 노년의 전부를 조선의 건설에 쏟았다.

 

하지만 조선의 중심 세력은 성리학자였고, 그것은 곧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정치로 이어졌다. 무학은 이런 현상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소임이 끝났음을 알고 조용히 왕사직을 물러나 수행에만 전념하다가 1405년 79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그것이 조선 개국의 주체이면사도 전혀 그 기득권을 주장하지 않았던 유일한 인물, 무학의 선택이었던 것이었다. 그것은 대부분의 인간들이 버리기 힘든 탐욕을 버리고 무학의 일생을 지배하였던 무소유 사상이 바탕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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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대사는 어떤 인물이었나?

 

무학은 종교인이면서 정치적인 개혁론자였다는 점은 오늘날에 비하면 진보적인 종교인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무학은 당시 고려 조정의 무능과 부패, 불교의 타락을 눈여겨 보면서 새로운 세상을 열어 타락한 불교를 나름대로 치유하고픈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고려의 국사(國師)되기를 거절하고 조선 건국자 이성계의 왕사(王師)가 된 풍운의 사나이이다. 그를 찿아온 이성계를 보고 왕기를 느낀 무학은 그를 새로운 나라의 군왕으로 정신적인 이상을 품게 해준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조선을 개국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고 숭유억불정책을 추구하는 조선에 대해서 불교를 개혁하고 융성시키기를 청원하지도 않았다. 오로지 그는 조선의 개국을 도우고 한양 천도를 주도하였고 왕궁을 건설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며 태종대에 부자간에 벌어진 갈등을 봉합하는데 크게 기여하는 등 조선을 안정시키는데 일조한 인물이기도 하다.

 

무학은 현실정치의 중심에 서 있는 듯 하면서도 비켜가는 듯 하기도 하였던 처세에 뛰어난 인물이기도 하였고 무소유의 사상을 실천하였으며 소유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는 그 과정을 보면서 한 시대의 일대 격동기이며 변환기 한 가운데서 특이한 역정을 걸어나갔던 인물이기도하다.

 

이러한 무학에 비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종교지도자들은 종교 편향적인 사고와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 재물과 권력을 탐하며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탐욕에 찌들은 인물이 대부분이기에 무학같은 지혜로운 종교지도자가 나타나 위기에 봉착한 아 나라의 미래를 조언해줄 인물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무학같은 종교 지도자가 나타나 무능하고 어리석은 나라의 지도자와 지도층을 깨우치게 하고 위기에 앞장서는 솔선수범의 정신을 선양하는 인물이 나타났으면 하는 바램이기도 하다.  

 

아래는 한국정신문화원의 박성수 객원교수의 글을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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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학대사의 삶과 사상

TV 역사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태조 이성계를 돕고 다시 태조 방원을 돕는 무학대사.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나. 정권교체기에 정도전과 하륜은 처세 잘못으로 각각 태종과 태조에게 화를 입었으나 무학대사는 신중한 처세술 덕에 두 임금에게 모두 사랑을 받고 무사히 일생을 마칠 수 있었다. 『잘 모르겠습니다』는 무학의 겸손이 인생의 한 귀감이 된다고나 할까.


무학대사. 성은 박씨요 이름은 자초라 했다. 박자초(朴自超). 좀 이상한 이름이다. 무학(無學)이라는 승명 또한 특이하다. 무언가 사연이 있을 듯한 이름이다. 고향은 경상도 삼기군 삼가면(오늘의 경남 합천읍)이었고, 1327년(고려 충숙왕 14년)에 아버지 박인일(朴仁一)과 어머니 채(蔡)씨 사이에 태어났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보다 여덟살 위였다.

 

그러나 이런 정설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설이 전국적으로 퍼져 있다. 금강산 어느 절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무학은 부모 없이 자란 고아였다고 한다. 사연인즉 한 늙은 선비가 장가든 아들을 먼저 저승으로 보내고 청상과부 며느리와 단 둘이 한 집에서 살게 되었다. 늙은 선비는 누구나 그렇듯이 아들을 대신할 손자를 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하루는 며느리더러 절에 가 백일기도를 드려 보는 게 어떻겠는가 권했다. 며느리는 시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절에 가서 백일기도를 드리고 집에 돌아와 먹음직한 천도 복숭아가 있는 것을 보고 그만 집어 먹었다. 그랬더니 태기가 있어 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이가 곧 무학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아이를 낳고 보니 동네에서 망칙스런 소문이 났다. 결국 아이를 몰래 버리기로 했는데 버린 이튿날 현장에 가 보니 학이 날아 오르고 그 밑에 아이가 방긋이 웃고 있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는 더 이상 아이를 죽일 수 없어 기르기로 했는데 이름을 날아가는 학, 즉 무학(舞鶴)이라 했다는 것이다.


 

나옹 선사를 만나서

이러한 출생설화 말고도 무학의 어린 시절에 관한 설화가 남아 있다. 무학대사는 원효대사 만큼이나 유명한 역사적 인물이기 때문에 떠도는 설화도 많은 것이다. 고향인 합천에서는 무학이 어려서 읍내 제일 가는 부잣집에 꼴머슴을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 오고 있는데, 그때 벌써 축지법 같은 도술을 썼다는 것이다. 부모없는 고아에 머슴살이를 했다는 설화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무학은 매우 비천한 집안에서 가난하게 자라난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머리는 뛰어나서 하나를 배우면 열 가지를 알았다는 천재 소년이었다. 18세에 홀연히 집을 나가기로 결심한 무학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가 찾아간 곳은 경기도 양평의 용문산이었는데 이 산의 용문사에는 유명한 혜명국사가 계셨다. 무학은 혜명국사를 사사한 뒤 묘향산 금강굴에 들어가 도를 닦았다. 어느날 무학은 새벽 종소리를 듣고 크게 깨달았다고 한다. 깨닫는다는 것을 도에 통한다, 즉 도통이라 하는데 강도 높은 수도 끝에 갑자기 깨닫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무학은 비범하여 20세 남짓에 일차로 도통하고 그것도 모자라 여러 산사를 돌아다니면서 자기보다 더 높은 스승을 찾아 헤맸다. 그런데 무학이 만난 스님들은 젊은 무학보다 나을 것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마침내 중국에 유학가기로 결심했는데 그때 중국은 몽고족이 지배하는 원(元)나라 였다.

 

공민왕 2년(1353). 원나라에 들어간 26세의 무학은 뜻밖에 나옹 선사를 만나 사사하게 되었다. 나옹은 중국인이 아니라 고려인이었으니 이국에서 스승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무학을 한눈에 알아보고 장차 큰 일을 할 인물로 점 찍었다. 나옹은 귀국하여 공민왕의 왕사(王師)가 되어 전남 승주의 송광사에 자리잡게 되고 무학은 경기도 여주 고달산에 들어가서 조그만 암자에 머물게 된다.

 

공민왕의 왕사가 된 나옹은 경기도 양주에 크게 회암사를 짓고 그 낙성식에 무학을 불러 고려의 국사(國師)가 되어 달라고 청했으나 무학은 굳이 사양하였다. 고려의 멸망을 미리 알아차려서 그랬을까. 아니면 그 보다 훨씬 앞서서 태조 이성계와를 만나서 그랬을까. 아무튼 무학은 고려의 국사되기를 거절하고 조선 건국자 이성계의 왕사가 되는 것이다.


이성계와의 만남

무학은 태조 원년(1392) 10월11일 왕사로 임명되었다. 바로 태조의 생일날이었다. 태조는 무학을 왕사로 임명하면서 묘엄존자(妙嚴尊者)라는 법호를 하사했다.

 

고려의 국사 되기를 한사코 거절하고 태조 이성계의 왕사가 되기까지 무학과 태조 사이에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인연이 있었다.

 

일설에 이성계가 스무살 때 아버지 환조가 죽었는데 묏자리를 찾고 있었다.

 

그때 마침 중 두 사람이 함흥 땅을 지나가게 되는데 뛰어난 산세를 보고 스승이 먼저 제자에게 묻기를 『이 곳에 왕이 날 흥왕지지(興王之地)가 있다고 하는데 너도 아느냐』 하니 제자가 대답하기를,

『산이 세 줄기로 갈라져 내려오고 있는데 아마도 가운데 줄기에 명당자리가 있는가 봅니다』 하였다.

 

이에 스승이 제자의 의견을 고쳐주면서 『아니다. 사람을 보면 왼손보다 오른손이 더 긴요하듯이 저 산도 오른 쪽 긴 줄기에 명당자리가 있는 것이다』 고 하였다.

 

이 대화를 이성계 집 종이 옆에서 듣고 있다가 급히 집에 가서 주인에게 사실을 알렸다. 그랬더니 이성계가 하인에게 『무엇을 꾸물대고 있느냐 빨리 따라가서 두 분을 모셔오라』 하였다.

 

종은 함관령 밑까지 따라가서 두 스님을 모셔와 환조의 장지를 택하게 되는데 바로 이 두 스님 중 스승이 나옹이요, 제자가 무학이었다는 것이다.

 

또 이런 일화가 있다. 무학 대사가 설봉산 아래 토굴에 살고 있었는데 태조가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이다. 아주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에 1만 마리는 됨직한 닭이 일시에 『꼬끼오』하고 우는가 하면 1천여호나 되는 큰 동네에서 한꺼번에 방아찧는 소리가 쿵하고 요란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이성계가 다 쓰러져 가는 집에 들어가서 서까래 세개를 지고 나왔는데 꽃잎이 우수수 떨어지고 거울이 땅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꿈이 하도 이상해서 이성계는 먼저 이웃마을 점쟁이 노파를 찾아갔다. 노파는 『여인의 소견으로는 도저히 해몽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멀지 않는 곳에 설봉산이 있고, 거기 토굴에 9년간이나 도를 닦고 있는 신승(神僧)이 있습니다. 가서 해몽을 부탁해 보시지요』했다. 이성계는 노파가 가르쳐 주는대로 설봉산 토굴에 찾아갔다. 그 신승은 바로 무학이었다.

 

무학은 『당신이 찾아올 줄 알았다』고 하면서 해몽을 시작했다.

 

『그 꿈은 매우 희귀한 꿈입니다. 1만여 집에서 일시에 닭이 울고 1천여집에서 방아 소리가 난 것은 높고 귀하게 된 것을 축하한다는 뜻이고, 헌집에 들어가서 서까래 셋을 지고 나온 것은 임금 왕(王)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꽃이 떨어지면 열매를 맺는다는 뜻이요, 거울이 땅에 떨어지면 소리가 난다는 뜻이니 모두가 왕이 되라고 독촉하는 길몽입니다』

 

무학은 이성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 보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군왕이 될 상을 가졌습니다. 오늘 이 일을 남에게 말하지 마시오. 목숨이 위태할 것이니 극비에 부치십시요. 큰일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반드시 성인(聖人)의 도움을 받아야 될 것이니 이곳에 절을 짓고 이름을 석왕사(釋王寺)라 하고 천일기도를 드리도록 하시오. 그러면 반드시 당신이 왕업을 일으킬 것입니다』


한양천도

이 이야기는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지었다는 설봉산 석왕사기(雪峰山 釋王寺記)에 기록된 것이다.

 

이성계는 설봉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안변(安邊)에 살고 있었고 무학이 하라는 대로 절을 짓고 남몰래 천일기도를 드리며 왕이 될 야망을 불태웠다. 이후 이성계는 왕명을 어기고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고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무학의 예언에 힘을 얻은 것이다.


위화도 회군 때 또 한 사람의 스님이 이성계의 두뇌가 되어 전략을 세워 주었다. 신조(神照)가 그 사람이다. 신조는 이성계 부대의 주축인 승군(僧軍)을 지휘하고 있었다.

 

이처럼 이성계가 왕조교체에 성공한 배후에는 불교세력의 공이 컸다. 무학만 하더라도 이성계에게 반드시 군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해 주어 그에게 무한한 용기를 갖게 해 주었고 또 신조는 실제로 승군을 이끌고 이성계의 손발이 되었다.

 

그러나 집권한 뒤 이성계의 후손들은 유교세력과 손을 잡고 억불(抑佛)정책을 썼다. 정치의 속성이 비정한 것이라 하지만 그때 불교와 유교를 같이 융성시킴ㄴ서 정신세계를 도모하였더라면 유교의 폐습이 조선을 멸망시키는 않았을 것이며 조선왕조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무학은 왕사가 되어 처음 양주 회암사에 있었으나 늙었다는 핑계를 대고 용문산으로 옮겨 조용히 도를 닦고 있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고려 유신들이 모두 두문동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가 하면 먼 시골로 낙향하여 불사이군(不事二君)을 고집하는 바람에 고려의 수도 개성에 정이 떨어져 한양천도를 결심하였다.

 

그런데 한양보다 계룡산 밑이 더 좋다는 의견이 있어 이성계는 먼저 계룡산에 가보기로 했는데 무학을 데리고 갔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서로 만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인연 아니겠습니까. 도사께서는 보통 사람의 눈과 다르니 과연 계룡산 신도안이 수도로 정할 만한 곳입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이성계는 무학을 천하제일의 도사로 믿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최종결정은 무학의 의견에 따랐다. 무학은 계룡산을 반대했다. 무학의 라이벌인 정도전도 반대했다. 그래서 공사를 중단하게 되고 이름만 신도안(新都安)으로 남게 되었다. 그 다음 후보지가 한양, 즉 지금의 서울이었다.

 

서울을 새 수도로 정하는 데 있어서도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의 의견을 물었다. 이번에는 무학의 대답이 모호했다. 왕이 왕사 무학에게 『이 곳 한양이 어떻습니까?』라고 물으니 왕사는 『이 곳은 사방이 높고 아름다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중앙이 평탄해서 도성으로 알맞은 곳입니다. 그러하오나 대신들과 지관(地官)들의 의견을 묻고 따르는 것을 잊지 마소서』 라고 대답했다.

 

이 대화는 「태조실록」에 기록된 것이다. 무학이 말끝을 흐린 데는 이유가 있었다. 무학은 한양 정도(定都) 문제를 놓고 정도전과 날카롭게 대립했었다. 무학은 정도전과 달리 무악산(毋岳山) 밑 지금의 신촌에 궁궐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도전은 한사코 무학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고 북한산 아래에 남향으로 경복궁을 지어야 한다고 우겼다. 이성계는 당황했다. 자기 눈에도 신촌은 왕도로 적절하지 않았다. 땅이 좁은 것은 고사하고 산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어 궁궐을 동향으로 짓게 되니 그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이성계는 정도전의 주장에 기울게 되었고 무학의 동의를 구했던 것이다.

 

무학은 항상 자기 의견을 먼저 내비치지 않았다고 한다. 왕이 물으면 『잘 모르겠습니다』로 일관했고 재삼 재사 물을 때 비로소 대답하되 『대신들의 의견을 참작하소서』라는 단서를 붙였다 한다.

 

어쨌든 한양 정도문제에서 정도전이 무학에게 이긴 것 같으나, 곧 태종 방원에게 죽는 것을 보면 긴 안목으로 보아 무학이 이긴 것이다. 정도전은 광화문에서 태종에게 칼 맞아 죽는데 너무 살이 쪄서 칼이 배에 꽃일 때 물통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고 한다.

 

무학이 주장했던 무악산 고개는 그 뒤 무학재(일명 무악재)로 바뀌어 두고 두고 무학이란 이름이 살아 남았다. 서대문에서 무학재를 넘으면 바로 홍제동 화장터로 가는 길이다. 이처럼 무학재는 학이 나는 고개가 아니라 저승으로 가는 길목으로 무학대사의 패배와 한이 서린 고개였던 것이다.


정도전과의 싸움

한양 정도를 놓고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싸움을 벌인 것은 단순한 개인의 싸움이 아니라 유교와 불교의 힘겨루기였다.

 

무학은 한양 정도 문제를 놓고 정도전에게 졌으나 의미심장한 이런 말을 했다고 전한다.

 

『이제 두고 보시오. 2백년 뒤에 큰 난리가 날 것이고 5백년 뒤에는 흉년이 들어 온 백성이 굶어 죽을 것입니다』

 

정도전이 이 소리를 듣고 뜨끔했으나 겉으로는 태연하게 『대사! 걱정하지 마시요. 남한에 보리가 있지 않소. 보리 먹고 살면 배고프지 않을 겁니다』 했다.

 

무학의 예언은 적중했다. 2백년 뒤 임진왜란이 터져 왜군이 한양을 유린했고 한말에는 백성들이 굶거나 배고파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게 되고 나라까지 망했다. 무학의 눈은 정확했다. 그러나 경복궁 자리는 학의 등에 해당하는 곳이라 궁궐을 지으면 이내 기둥이 쓰러지는 자리라는 것을 미처 몰랐다.

 

무학은 거듭되는 실패에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려워 한양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용문사로 가는 도중 지금의 서울 전농동을 지나 가는데 소를 몰고 밭갈이를 하는 한 농부가 있었다. 그는 자기 소를 보고 『이 놈의 소가 무학이처럼 미련한 놈이구나』 했다.

 

이 소리를 듣고 무학은 농부에게 다가가서 『왜 무학을 미련하다 하시오』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농부는 『누군지 모르지만 생각을 해보시오. 이 바닥에는 한양터가 학터란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어요. 무학 하나만 모르고 학의 등에다 궁궐을 짓고 있으니 학이 날개를 펴고 퍼득거리면 집이 무너지고 마는거요』 했다.

무학이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소』라 묻자 농부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이 양반아! 그걸 몰라요? 먼저 도성을 쌓고 사대문을 내야 합니다. 그래야 학이 날개를 펴고 날 수 없게 된다 그 말입니다』 했다.


『부처님 눈에는 모두 부처님』

 

이 농부는 사람이 아니라 둔갑한 삼각산 산신이었다고 한다. 서울에 궁궐을 지으면서 산신에게 제를 올리지 않아 삼각산이 노한 것이었다. 그래서 조선 왕조는 그뒤 삼각산과 목멱산(南山)에 국사당을 짓고 서울의 안녕질서를 빌게 되었다고 한다. 국사당은 일제에 의해 헐린 채 지금까지 복원되지 않고 있다.

 

무학은 처음부터 이성계에게 한양천도를 권했으나 개성의 송악산에서 바라보면 북한산이 가로막아 『한양이 좋기는 하나 1천년 갈 것이 5백년밖에 못 가게 되었구나』하면서 개탄했다고도 한다.

 

아무튼 무학은 농부의 말을 듣고 서울로 되돌아섰다. 그리고 즉각 도성부터 먼저 쌓고 궁궐을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서울은 정도전이 다 설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그렇지 않았다. 일설에는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서대문 자리를 놓고 격돌했다고 전한다. 무학은 서대문을 무악재 고개에 짓자고 주장했는데 정도전이 이를 반대하여 지금의 서대문 자리에 지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학은 또 다시 패배하면서 『5백년간 중(佛敎)은 힘을 못쓰게 되었구나. 선비(儒敎)들의 종노릇이나 하게 되었다』고 개탄했다. 결국 조선왕조 5백년간 중은 서울 사대문 안에 들어 오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는 무학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신임했다. 태조 2년(1393) 봄. 아직 한양으로 천도하기 전 태조는 송도(開城)에 연복사를 지어 문수법회를 열며 무학을 초청했다. 무학이 와서 설법을 하고 태조가 친히 참석, 설교를 들었다.

 

66세의 무학은 그뒤 연복사에 머물면서 자주 궁안으로 불려가 태조를 뵙게 되었는데 두 사람은 수창궁에서 농담을 주고 받았다 한다.

 

태조가 먼저 말했다.

『누가 농담을 잘하는지 내기를 해봅시다』

『대왕께서 먼저 하시지요』

『내가 보니 스님은 돼지처럼 생겼소』

『제가 보니 대왕께서는 부처님 같습니다.』

『어째서 스님은 같이 농담을 안 하시오』

『아닙니다. 농을 한 것입니다. 용의 눈에는 모두 용으로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모두 부처님으로 보인다고 말한 것입니다.』

두 사람은 손뼉을 치며 파안대소했다.

 

태조는 이듬해인 태조 3년(1394) 3월 무학대사의 출생지인 삼기현(三岐縣·지금의 합천)을 군으로 승격시키고 작고한 왕사의 아버지에게는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추증했다.

 

그뒤 무학은 다시 회암사로 돌아가 도를 닦게 되는데 태조 4년(1395) 4월에 태조는 쌀과 콩 1백70섬과 오승포(五升布) 2백필을 무학에게 하사했다. 그해 7월에는 내신(內臣)을 보내 모시 여러 필을 하사했다. 내신이 돌아와 왕사 무학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전하자 태조는 자신의 주치의를 보내 치료케 하는 한편 태조 6년(1396) 7월에는 만일을 위해 미리 회암사에 대사가 죽으면 사리를 안치할 부도(浮屠)를 세워 주었다.


함흥차사가 되어

왕자의 난이 일어나 태종 이방원이 등극하자 태조가 실망하여 함흥으로 떠났다. 그때 태종은 이성계를 모셔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는데 보내는 사신(함흥차사)마다 죽어서 돌아왔다. 그때 누가 태종에게 말하기를 『무학대사를 보내면 능히 태상왕을 모셔 올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무학은 태종의 부탁을 받고 함흥에 갔다.

 

태조는 무학을 보자 진노하면서 말했다.

『왕사까지 이러깁니까? 방원의 부탁을 받고 나를 보러 왔지요?』

 

무학은 웃으면서 말했다.

『전하께서는 어찌 그다지도 저의 마음을 몰라 주십니까. 빈도(貧道)가 전하를 한두 해 모셨습니까? 전하를 위로하러 머나먼 길을 걸어서 여기에 온 것입니다』

 

그제서야 태조의 얼굴이 부드러워지면서 같이 머물도록 허락했다. 수십일을 머무는 동안 무학은 단 한번도 태조의 잘못을 탓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가 하루는 밤중에 갑자기 태조에게 말했다.

 

『태종 방원은 진실로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전하의 사랑하는 아들은 모두 죽고 방원 하나가 남았습니다. 만약 태종마저 버리신다면 전하가 이룩해 놓은 대업(大業)은 장차 누가 맡겠습니가. 남에게 주느니 차라리 하나 남은 피붙이에게 주는 것이 옳은 일 아니겠습니까. 세 번 생각하여 주십시요』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던 태조는 그만 『왕사의 말씀이 옳습니다』고 승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태조는 서울로 곧장 가지 않고 두 달 동안이나 소요산에서 묵은 뒤 서울로 행했다.

 

태조는 무학의 설득으로 환도하게는 되었지만 마음속에는 아직도 분노가 가시지 않았던 것이다. 태종이 교외에까지 나아가 태조를 맞이하려는데 하륜이 태종에게 『태상왕의 노여움이 아직 가라앉지 않았을 것이오니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차일과 장막을 받치는 기둥을 굵게 세우도록 하소서』 라고 조언했다. 태종은 그렇게 하라 일렀다. 하륜은 열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를 베어다가 기둥으로 삼았다. 아니나 다를까 곤룡포를 입고 기다리는 아들 태종의 모습을 본 태조는 갑자기 분노가 터져 나와 활(동궁)을 힘껏 당겨 화살(백우전)을 쏘았다. 태종은 급히 기둥뒤로 숨었는데 화살은 탁 소리를 내며 기둥에 꽂혔다. 간발의 차이였다. 그러나 이것을 본 태조는 껄껄 웃으면서 『이는 하늘의 뜻이로다. 네가 바라던 것이 이거지』 하면서 옥새를 내놓았다. 태종은 눈물을 흘리면서 세 번 사양하는 척 하다가 옥새를 물려 받았다고 한다.

 

이어 성대한 축하연회가 베풀어졌는데 태종이 아버지 태조에게 헌수(獻壽)하게 되었다. 그때 하륜이 다시 태종에게 아뢰기를 『술통 있는 곳에 가서 잔을 잡고 술을 부으시고 아버님에게 잔을 올리실 때 전하께서 친히 올리지 마시고 내시를 시켜 잔을 드리게 하소서』 했다.

 

태종은 하륜의 말대로 내시를 시켜 술잔을 올렸다. 태조가 술잔을 받아 마시고 나서는 웃으면서 옷소매에 감추어 두었던 쇠방망이를 내어 놓으면서 『모두가 하늘이 시킨 것이다』 하였다는 것이다. 태조는 쇠방망이로 아들을 치려 했던 것이다.

 

무소유의 사상

무학은 태조가 말한 것처럼 돼지처럼 생기고 돼지처럼 살았다고 한다. 그는 소유(所有)를 싫어했다. 무엇이든지 남은 것이 있으면 갖지 않고 남에게 주는 것을 좋아했다는 것이다.

 

무학은 또 글쓰기를 싫어했다. 그의 사상은 너무 심오하여 글로는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글은 물론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도사는 말로 제자를 가르치지 않고 침묵으로 가르치는 법이어서 행위 그 자체가 진리요 도(道)였다. 그래서 그는 늘 『갓난 어린아이의 행동이 제일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무학은 말년에 회암사에서 금강산으로 옮겨가 진불암에 오래 머물렀다. 태종 5년(1405) 무학이 78세 때 가벼운 병을 앓게 되었는데 제자가 정성들여 약을 달여드리자 『나이 80에 병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약은 무슨 약』 하며 거절했다.

 

그 해 4월 금장암으로 옮겨 사는데 하루는 제자들에게 『머지 않아 세상을 떠날 것이니 그리 알아라』 했다.

 

한 제자가 『죽어서는 어디로 가시나이까』 물으니 무학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제자가 또 물었다. 『스님이 병중이신데 도대체 병은 누가 만들어 낸 것입니까』 무학은 또 손을 가로 저으면서 『모른다』고 대답했다.

 

제자가 다시 물었다. 『육신은 결국 썩어 없어지는데 없어지지 않는 진법신(眞法身)은 어디서 생긴 것입니까』 무학은 그때 두 팔을 뻗으면서 『바로 이것이다』고 하더니 이내 입적하였다 한다. 향년 79세. 무학은 역시 무학(無學)이었나 보다. 아는 척만 하는 모든 후학들에게 무학의 겸양을 가르쳐 준 것인지도 모른다. 이 제자와 나눈 문답을 후에 사람들은 무학사상의 총결산이라고 평했다.

 

무학이 금강산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태종은 그의 사리를 회암사로 모시도록 지시했다. 회암사에는 앞서 태조가 무학을 위해 세워둔 부도가 있었다. 지금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에는 넓고 큰 절터만이 그 옛날 태조와 무학의 고사를 증언하며 쓸쓸히 방치돼 있다. 무학이 예언한대로 아직도 불교는 5백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지금 회암사 절터에는 아름다운 무학의 부도(보물 388호)가 남아 있고 인도승 지공(指空)과 나옹 선사의 승탑(僧塔)이 무성한 잡초에 싸여 절터를 지키고 있다. 

 

朴成壽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