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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72 : 조선의 역사 14 (태조실록 7) 본문
한국의 역사 472 : 조선의 역사 14 (태조실록 7)
태조실록(1335~1408년, 재위 1392년 7월 ~ 1398년 9월, 6년 2개월)
5. 이성계의 아버지와 형제자매
환조 이자춘(1315~1360년)
태조 이성계의 본관은 전주이며, 전주 이씨의 시조는 이한이다. 이성계의 21대 조상인 이한은 신라 사람으로 사공의 벼슬을 지낸 인물인데, 그의 아내 김씨는 태종 무열왕 10세손인 김은의의 딸이다. 그와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이지연은 시중 벼슬을 지냈고, 손자 천상은 좌복야 벼슬을 지냈다.
그 뒤로 천상은 아간 벼슬을 지낸 광희를 낳았고, 광희는 사도 삼중대광 임전을 낳았고, 임전 이후로 긍휴, 염순, 승삭, 충경, 충민, 화, 진유, 궁진, 용부를 거쳐 고려의 내시집주 이인에 이르렀다. 이인은 대장군 이양무를 낳았고, 이양무가 상장군 이강제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안사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태조의 고조부 이안사다. 안사는 원나라에 귀순하여 천호 벼슬을 얻었으며, 이후로 행리, 춘, 자춘으로 이어지며 후손들이 벼슬을 대물림했다.
이자춘은 1315년에 이춘과 부인 박씨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몽고식 이름은 오로사불화이다. 형 자홍이 일찍 죽자, 그는 어린 조카 교주(이천계)가 성장한 뒤에 자춘은 천호의 벼슬을 돌려주지 않았다. 실록에는 교주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사실은 아닌 듯하다. 이자춘이 죽은 뒤에 자신이 적장자임을 내세워 이성계를 죽이고 지위와 재산을 되찿으려고 시도하다 실패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고려에 귀부하여 관직을 얻었는데, 노비를 죽여 살인혐의로 하옥된 뒤, 사형에 처해졌다.
이자춘이 천호 벼슬을 잇게 되자, 자신의 외손자에게 천호 자리를 잇게 하려던 쌍성의 조총관은 이자춘을 몹시 싫어했다. 거기다 당시 원나라는 쌍성 지역에 있는 백성들에게 호구 조사를 실시하여 그곳에 살고 있던 고려인들을 몹시 불안하게 하였다. 이런 일들은 쌍성의 고려인들을 이끌고 있던 이자춘에겐 매우 위협적인 일이었다.
그 무렵, 원나라는 황위 계승권을 두고 다툼이 지속되는 바람에 내정이 몹시 불안한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홍건적이 일어나 원의 몰락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그렇듯 원나라가 무너지자 새롭게 고려 왕으로 등극한 공민왕은 원나라를 배척하는 정책을 골격으로 삼아 일련의 개혁을 실시하여 자주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동시에 잃었던 북방의 영토를 회복하고자 했는데, 이를 위해 고려 땅을 지배하고 있던 원나라 총독부인 쌍성총관부를 무너뜨리려는 계획을 세웠다.
공민왕의 그런 움직임은 이자춘에게도 큰 자극이 되었다. 총관부와 사이가 좋지 않아 위협을 느끼고 있던 이자춘도 고려와 내통하여 쌍성총관부를 무너뜨리려는 마음을 품고 있었고, 결국 1355년에 개성으로 찿아와 은밀히 공민왕을 만난 뒤, 고려 조정에 귀부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당시 고려의 권력은 원나라 기황후의 족속인 기씨 일파가 장악하고 있었는데, 공민왕은 우선 그들을 처단하고, 이어 유인우에게 군대를 안겨 쌍성총관부를 공격하도록 했다. 하지만 유인우는 쌍성에서 2백여 리 떨어진 안변에 진채를 내리고 쉽게 진군하지 못했다. 그는 이자춘의 내응이 있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한편 공민왕은 이자춘에게 밀사를 보내 소부윤 벼슬을 내리고 자신의 어대 징표를 주면서 고려군의 공격에 내응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이자춘이 공민왕의 요청에 호응하여 군대를 이끌고 유인우의 군대와 합세하여 쌍성을 공격했고, 마침내 무너뜨렸다. 이후 그 주변 지역을 모두 장악하여 함경남도 일원이 거의 고려 수중에 떨어졌다. 이 지역은 고종 재위 시절 원나라에 강점되어 무려 99년 동안 그들의 지배를 받다가 이때 회복되었던 것이다.
이자춘은 쌍성 회복의 공에 힘입어 벼슬이 대중대부 사복경으로 올랐고, 공민왕이 내린 개성의 집으로 이사했다. 그 뒤, 군기감 판사, 천우위상장군 등을 지내다가 1360년에 영록대부 장작감 판사의 벼슬로 삭방도 만호 겸 병마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해 4월 지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때 그의 나이 46세였다. 실록에는 그의 사망 년도를 1361년인 원나라 지정 21년 신축년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연려실기술>의 저자 이긍익은 이색의 문집 속에 남아 있는 이자춘의 비문과 정총이 지은 정릉 비문에 모두 1360년 경자년에 죽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쓰고 있어 <연려실기술>의 기록을 따른 것이다.
이자춘의 무덤은 함흥 동쪽 귀주동에 마련되었으며, 신도비의 비문은 이색이 썼다가 나중에 환조로 추존된 뒤에 정총이 다시 지었다. 능호는 정릉이다.
이자춘에게는 3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첯째는 영흥(화주)의 천호였던 최한기의 딸 최씨이며, 그녀 소생으로 태조와 정화공주가 있다. 태조가 왕위에 오른 뒤 의혜왕후에 추존되었고, 무덤은 정릉과 같은 산에 마련되었다. 능호는 화릉이다.
나머지 두 부인은 이자춘의 여종으로 첩이 된 여자들이다. 그 중 하나는 이씨로 이름은 내은장이며, 소생은 이자춘의 서장자 원계이다. 다음으로 김씨가 있는데, 이름은 고음가이며, 소생은 의안대군 화이다. 김씨는 후에 정안옹주에 봉해지고, 다시 정빈으로 추증된다.
동복누나 정화공주(생몰년 미상)
정화공주는 태조의 유일한 동복 남매로 조인벽에게 시집갔다. 조인벽은 한양 사람으로 함주를 원나라에 바쳐 쌍성 총관을 지낸 조휘의 증손이며, 판도판서를 지낸 조돈의 아들이다.
1356년 쌍성을 회복할 때 동북면병마사 유인우를 도운 공으로 호군 벼슬을 얻었다. 1363년 김용 토벌에 공을 세웠고, 그 뒤 왜구 토벌에 참전하였으며, 1388년 위화도 회군에 가담하여 삼사좌사 벼슬에 올랐다.
그는 정화공주와 결혼한 까닭에 이성계와 친분이 두터웠고, 조선 개국 후에는 용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의정부 찬성사를 지낸 조온이 그의 아들이다.
이복형 이원계(1330년~?)
이원계는 환조 이자춘이 자신의 노비였던 내은장을 취해 낳은 아들이다. 그는 적자인 이성계보다 다섯 살 연상이었다. 그런 까닭에 이성계는 그가 서출임에도 불구하고 형으로 깍듯이 대접하였다.
이원계는 공민왕 때에 이성계 휘하에 있으면서 홍건적을 격퇴한 공로로 2등공신에 올랐고, 개경 수복에도 큰 공을 세웠다. 1376년 원나라 황제가 고려 국왕으로 임명한 심양왕 탈탈불화가 군대를 이끌고 입국할 때에 그는 동지밀직 벼슬에 있다가 서북방어군의 조전원수가 되어 그들을 막기도 하였다.
1377년에는 나세의 휘하에 들어가 강화도에서 왜구를 격퇴하였고, 1380년에는 왜구가 또다시 대대적으로 침입하자, 전라도 일대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또 왜구 격퇴의 계기가 되었던 황산대첩에서 이성계를 도와 전공을 세웠다. 1388년 요동 정벌 때 이성계 휘하에서 조전원수로 출전하였고, 위화도 회군에도 참여하여 1390년엔 회군공신에 책록되기도 하였다.
이렇듯 이성계와 함께 전장을 누빈 까닭에 두 사람의 우의는 돈독하였고, 이성계는 그의 어머니 이씨의 노비 문서를 불태워 없앴다. 이성계는 또 조선 건국 후에 그에게 완산군의 봉직을 내리고, 그의 후손들에게도 각별한 신경을 쓰며 그들에게 모두 군의 칭호를 내렸다.
이원계는 양우, 천우, 조, 백온 네 아들과 딸 셋을 두었다. 그 중 장녀는 장담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변계량에게 시집갔다가 버림을 받아 유정현에게 재가했으며, 셋째는 홍노에게 시집갔다가 버림받아 변처후에게 시집갔다.
이복동생 이화(1340~1408년)
이화는 환조 이자춘이 1340년 노비 고음가를 취하여 낳은 아들이며, 이성계보다 다섯 살 어린 이복동생이다.
그는 1388년 이성계를 따라 요동 정벌에 나섰다가 위화도 회군에 동참하였고, 그 공으로 회군공신에 봉해졌다. 또 1392년 이성계를 추대하여 왕으로 옹립하는 데도 참여하여 개국공신 1등에 서훈되기도 하였다. 1398년에는 이방원의 편에 서서 왕자의 난을 도왔으며, 이 공으로 정사 1등공신에 책록되기도 하였다.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 때도 이방원을 도왔고, 그 공으로 좌명공신 2등에 올랐다.
그는 이렇게 네 차례에 걸쳐 공신 목록에 오른 덕분에 공신들 중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하사받아 총 570결(약 1만 8천 평)의 공신전을 소유하기도 하였다.
1407년 영의정부사에 임명되어 민무구, 민무질 형제를 탄핵하는 데 앞장서서, 태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듬해인 1408년 10월 6일 61세를 일기로 죽었다. 시호는 양소공이며 의안대군에 피봉되었다.
성격이 순박하고 용감했던 그는 어린 시절부터 태조를 무척 따랐으며, 전장에서도 늘 태조 곁에서 호위하연서 곁을 떠나지 않아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왕자의 난 때 이방원 편에 선 까닭에 태조의 원망을 듣기도 하였다.
그는 지승, 숙, 징, 담,교, 회, 점 등 7명의 아들과 딸 하나를 얻었다. 그의 딸은 처음에는 고려 종실 왕아무개에게 시집갔다가 다시 최주에게 재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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