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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69 : 조선의 역사 11 (태조실록 4) 본문
한국의 역사 469 : 조선의 역사 11 (태조실록 4)
태조실록(1335~1408년, 재위 1392년 7월 ~ 1398년 9월, 6년 2개월)
2. 쿠테타와 역성혁명을 통한 조선의 개국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 일파
1388년 이성계는 명의 요동을 공략하기 위해 압록강 하류에 있는 위화도에 진을 치고 있다가 말머리를 돌려 개경을 공격했다. 개경을 함락시킨 이성계는 요동 정벌을 명령한 최고사령관인 최영을 축출하고 우왕을 폐위시켜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고려가 요동을 공격하기로 한 것은 명이 무리한 공물 요구와 철령 비웁 땅을 차지하겠다고 고려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묭은 철령 이북 땅이 우너의 쌍성총관부와 동녕부에 속해 있었던 땅이므로 당연히 원을 몰아낸 명의 소유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명나라 역시 원과 마찬가지로 고려를 속국으로 삼겠다는 말이었다. 때문에 고려 정부는 이에 크게 반발하였고, 급기야 최영을 중심으로 명의 전초 기지인 요동을 정벌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이 때가 1388년 2월이었다.
우오아은 최영의 주장을 받아들여 8도에 군사를 징집하는 한편 세자와 오아족들을 한양성으로 보내고 우현보롤 하여금 개경을 방비토록 지시했다. 그리고 최영과 함께 서해도로 가 요동 정벌을 준비했다. 그리고 이 해 4월 우왕은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삼고, 좌군도통사에 조민수, 우군도통사에 이성계를 임명하고 드디어 요동 정벌을 감행했다.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5만 대군이 위화도에 당도한 것은 5월이었다. 그들은 위화도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강을 건너 요동성을 공략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고려 대군이 강을 건널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장마가 시작되어 압록강 물이 엄청나게 불어났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성계는 요동성을 공격할 수 없다는 것으로 판단하고 우왕에게 요동 정벌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것이 사불가론으로, 첯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하고, 셋째,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남쪽에 왜구가 침범할 우려가 있으며, 넷째,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고 병사들도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성계의 장계를 받은 우왕과 최영이 이성계의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요동 정벌을 독촉하자, 이성계는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논의 한 뒤 개경을 향해 회군을 단행하게 된다. 한마디로 목숨을 걸고 자신의 군대를 이용하여 조정을 뜻을 거스르고 쿠테타를 감행한 것이었다.
개경으로 진입한 이성계와 조민수는 최영의 진압군을 물리치고 개경을 장악한 뒤 최영을 고봉현으로 유배보내고 우왕을 폐위하여 강화도로 보낸다. 그리고 다소 이견들이 있었으나 조민수의 주장에 따라 어린 창왕을 옹립하게 된다.
후세의 사힉자들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두고 엇갈린 주장을 펴고 있다. 위화도 회군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한 계획된 쿠테타라고 보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요동성을 공략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단행한 자구책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한 이성계의 사불가론 중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주장한 부분에 대해 사대주의적 사고라고 비판하는 사가들도 있고, 한편으로는 명나라를 달래기 위한 실리지주의 적인 선택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어쨌던 결과적으로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욛오정벌에 대한 불가론을 앞세워 정권 장악을 노린 쿠테타였다. 그러나 경쟁관계에 있던 조민수와 함께 회군을 단행한 것을 볼 때 계획된 행동이었다고 단정짓기는 어렵고 오히려 상황 판단에 따른 실리적인 선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왕조의 최후
우왕을 폐하고 최영을 제거한 조민수와 이성계는 조정을 장악한 뒤 각각 좌시중과 우시중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이때부터 명의 년호인 홍무를 사용케 하고 의복도 원의 호복을 금하고 명의 것을 입게 했다.
하지만 조민수와 이성계는 차기 왕을 옹립하는 과정에서 이견을 보였다. 조민수는 우왕의 아들 창을 내세우는 데 반해 이성계는 우왕과 창이 신돈의 자식이기 때문에 왕씨 일족 중에서 왕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의견이 대립되자 조민수는 목은 이색에게 조언을 구해 공민왕의 정비 안씨에게 국새를 맡겼고, 안씨는 우왕의 아들 창으로 하여금 왕위를 물려받게 하였다. 그가 곧 창왕으로 겨우 아홉 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니, 이때가 1388년 6월이었다.
그러나 창왕은 이듬해 11월 이성계 일파에 의해 폐위당하고 만다. 표면적인 이유는 창왕이 왕씨가 아니라 신씨라는 것이었다. 이성계는 정몽주 등과 함께 이른바 '폐가입진', 즉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는 논리로 창왕을 폐위시키고, 제20대 왕인 신종의 7세손 정창군 요창을 등극시킨다. 그가 바로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이다.
공양왕은 즉위하자마자 폐위된 우왕과 창왕을 죽인다. 물론 이성계 일파의 집요한 압력에 의해서 일 것이다. 또한 창왕을 옹립했던 조민수는 대사헌 조준에게 탄핵되어 창녕으로 귀양가게 된다. 이로써 이성계 일파는 고려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창왕이 폐출되었을 때 조정의 중신들은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자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이성계는 이들의 권고를 사양하고 공양왕을 세웠다. 그런데 마지막 정적이던 조민수가 실각하자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은 가속되었고, 마침내 3년 뒤인 1392년 7월, 이성계는 조준, 정도전, 남은, 이방원 등의 추대에 힘입어 왕으로 등극하고 전왕을 공양군으로 강등시켜 원주에 유배시킨다.
이로써 고려 왕실은 34왕 474년으로 막을 내리고, 마지막 공양왕은 원주, 간성, 삼척 등지로 유배지를 떠돌다가 2년 후인 1394년 이성계의 명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성계 일파는 공양왕을 내친 후에 왕씨 일가를 모조리 멸족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전국에 방을 붙여 왕씨들을 한 곳에 모아 수장시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방의 내용은 왕씨들에게 섬을 하나 내줄 테니 강화 해안에 모두 모이라는 것이었는데, 이미 불안에 떨고 있던 왕씨들은 이러한 약속을 믿고 강화도행 배를 탔다가 대부분 수장되고 말았다.
이때 이성계 일파의 모략임을 눈치챈 일부 왕씨들은 배에 오르지 않고 몰래 산 속으로 들어가 숨어 살면서 대개 자신들의 성씨를 전(全)씨, 옥(玉)씨, 전(田)씨, 용(龍)씨 등으로 속여 목숨을 부지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태조실록에는 왕씨의 후손들은 아버지 성을 따르지 못하게 하고 어머니 성을 따르도록 한 기록이 있어, 이성계가 정책적으로 왕씨들을 멸족하려 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물론 이성계는 고려 말기 어지러운 시대를 타고 나타난 뛰어난 장수였음은 틀림없다. 또 그가 부하들로부터 존경도 받고 있었고 가는 곳마다 승전함에 따라 직위로 높아져 갔다. 최영에 필적할 만한 능력있는 장수로 최영과 같이 고려 백성들의 우상이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 하늘 밑에 뛰어난 두 장수가 존재하는 한 투쟁은 불가피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최영의 청빈함에 우왕도 싫어했지만 최영의 세력앞에 왕위가 불안하였던 우왕은 최영을 반대에도 불고하고 그를 졸라 그의 딸을 후비로 맞아들이기도 했다. 일종은 안전장치였던 셈이었다. 명의 압력에 불안을 느낀 최영은 요동정벌로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기득권을 차지하려 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최영의 무리한 요동정벌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떠오르는 명의 기세를 나중에 감당하기에는 고려의 국력이 허약하다고 판단하였고 명나라와 싸워 고려의 멸망까지 초래할 수 있다는 생각까지 하였을 것이다.
결국 요동정벌이라는 출정으로 위화도까지 갔던 진퇴양난의 궁지에 몰린 이성계는 회군을 단행하게 된다. 목숨을 건 회군은 좌우군이 합심하여 최영의 진압군을 물리치고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어서 우왕, 창왕을 폐하고 최영을 처형하고 경쟁자였던 조민수까지 제거함으로써 이성계 일파는 절대권력자로 부상하게 되었고 급기야 수하들의 옹립으로 조선을 개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을 개국하면서 고려 왕실에 대한 이성계의 조치는 송나라 태조 조광윤과 비교하였을 때 많은 차이가 있다. 아래는 이성계의 인물됨됨이와 생각, 태도 등에 대한 비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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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테타, 고려 왕실 멸족,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인물에 대한 비판
이성계는 고려 왕족을 멸족시키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구사했다.
그것은 그의 왕위가 정당하지 못한 방법인 쿠테타라는 무력으로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즉위하는 것이며 태조 왕건이 50여 년간 후삼국 시대의 험난한 춘추전국 시대를 마감하고 통일을 이루어 세운 고려라는 500여 년 역사를 이룬 한 나라를 찬탈한 것에 대한 비난을 후세에 남기지 않으려고 왕씨를 멸족시킨 것으로 보이며 그들이 남아 살아있는 한 언제라도 자신에게는 위협적인 세력일 수밖에 업을 것이며 반란이나 반정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이성계의 조선이라는 나라는 힘을 이용하여 쿠테타를 일으켜 고려라는 왕조를 무너뜨리고 부도덕한 출발을 하게 된 왕조였던 것이다. 이성계가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였다면 중국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황제로 칭송받고 있는 송나라 태조 조광윤의 인물됨됨이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행동으로 보아서는 그렇지 못하였다는 점이 보이는데, 이성계의 인물됨됨이가 송태조 조광윤과는 비교가 되지 못 할 정도로 수준이 낮은 저급한 인물에 불과하였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중국의 송나라를 건국한 송태조 조광윤과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사고와 행동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조광윤에 비해 이성계라는 인물이 포용력이나 친화력, 대국적인 기질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판단이 갈 것이다. 둘 다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전장터를 누비면서 전승가도를 달리던 맹장들이었다는 점도 같다. 자신이 몸담았던 나라에서 무장으로 승승장구하였고 인정을 받았으며 왕의 총애도 받았던 인물이었다. 무너져 가는 나라를 무너뜨리고 부하들의 추대를 받아 새로운 나라를 세운 점도 같다. 그러나 차이점이 있다. 송태조 조광윤도 마찬가지로 부하들의 추대와 후주의 마지막 황제 공제에게 양위를 받아 즉위한 사람이지만, 그는 북송을 세운 후 후주 황제나 황족을 죽이거나 박해하지도 않았고 황실 자손들을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며 살도록 특별히 배려해 주어 뒤에 주자로부터 그 덕망을 칭송받았던 사람이다.
그는 죽기전에 2가지 유훈을 후손들에게 남겼는데 후주 황실 시씨 가문 후손들을 잘 보살피도록 할 것과 뜻이 다르다고 사대부를 함부로 죽이지 말도록 유훈하였다고 한다. 송태조 조광윤은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황제로 평가받고 있으며 칭송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 후주 황실 후손들은 남송이 멸망하기전 벌어진 마지막 '애산전투'에서 남송의 황실과 같이 운명을 다하는 충절을 보인 것은 바로 조광윤에 의해 자신들의 삶이 보호되었고 보장되었기에 그들이 보답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그러지 못했고 고려 왕족을 멸족시키기 위해 수장이라는 방법을 구사하였고 그래서 후세인들로부터 별로 칭송도 받지 못한다. 세자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후계자 선택도 현명하지 못했고 그로인해 피비린내나는 치열한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이 발생하여 수많은 자신의 혈육들과 충신들이 도륙당했다. 그래서 태종과 불화로 말년에 그는 비참한 노후를 보낼 수밖에 없었고 한을 품고 눈을 감았다.
이러한 그의 업보로 인해 조선은 임진왜란이나 청나라 침공시 중간에 망했어야 될 나라였으나 한 충신과 스스로 나라를 구하고자 일어선 전국 각지의 의병들로 인해 구사일생으로 왕조를 연명하였지만 결국에는 유교 폐습에 젖어 명분과 허레허식에 아까운 세월을 다 보내고, 조정과 선비들은 부패와 비리, 국론을 분열시키며 벌인 치열한 당쟁, 탐관들의 탐욕, 외척들의 준동으로 나라를 망쳐 결국에는 왜눔들에게 나라마져 빼앗기는 우리 민족 역사상 최대의 불행의 시대를 열고 말았던 것이며 그 여파는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그의 허물은 단지 그의 손자 세종이라는 한국 역사상 가장 뛰어나고 현명하며 지혜로운 군주가 나타났다는 점에 묻히고 말았고 운좋게 때를 잘 만나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운 인물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송나라를 세운 태조 조광윤의 일대기
조광윤은 하북성 돈주(涿州) 고안현 사람으로 부친은 오대 십국때 후당의 금군 장관이었던 조흥은(趙弘殷)이었고, 모친은 두씨(杜氏)이다. 한족이었던 그는 삼국시대 촉한의 유비와 동향이기도 했다. 조흥은과 두씨의 둘째 아들이었던 조광윤에게는 형 조광제, 친동생 조광의와 동생 조광찬, 그리고 이복 동생 조정미가 있었다. 형 조광제(趙光濟)와 막내 동생 조광찬이 요절하면서 그는 사실상 장남의 역할을 대신 수행하게 되었다. 후당(後唐), 후진(後晋), 후한(後漢)의 3조를 섬기던 부친은 그에게 기대를 걸었고, 그는 아버지 조홍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군관의 꿈을 키우게 된다. 당나라의 관료 가문이었던 조광윤의 선조는 증조부 부터 이같은 제위 찬탈을 노리는 군벌 아래에서 군관으로 공로를 쌓아왔고 그의 아버지는 956년 사망할 당시에 상당한 고위직 군관이었다.
아버지 조흥은은 후당의 근위대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조광윤의 어머니 두씨는 고관의 아내였음에도 사치하지 않고 겸손하였다. 어머니 두씨의 성실성과 지혜와 통찰력은 조광윤에게 큰 영향을 끼쳤는데 961년 두씨가 죽은 뒤 조광윤은 황제라는 지위에 얽매이지 않고, 죽은 어머니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946년 20세에 군문에 입대, 후한(後漢)의 장수였던 추밀사(樞密使) 곽위(郭威)의 막료가 되었다. 조광윤은 처음에 후한의 대장 곽위(郭威)의 휘하에 있으면서 무예를 좋아하여 곽위의 눈에 들었다. 948년 곽위를 따라 전장을 누비며 공을 세웠다. 951년 곽위가 후한을 멸망시키고 칭제, 후주(後周)를 건국하자 그는 곽위를 도왔고 개국공신으로 금군군관(禁軍軍官), 전장금군(典掌禁軍)에 보직되었으며 이후 동방과 서방 원정을 수행하였다.
후주세종 시영(柴栄)의 부하였다가, 근위군의 장관이 되었다. 이후 시영을 따라 남정에 참여하였으며 양주(揚州) 등지를 공략했다. 후주에서 그는 광국절도사(匡國軍節度使), 전전도지휘사(殿前都指揮使)를 거쳐 검교태위전전도검(檢校太傅殿前都檢), 금군총장령(禁軍總將領)을 역임했다. 시영은 명군이었지만, 그의 후계자는 7세에 불과한 공제였다. 전란의 시대에 어린 군주에게 불안을 느낀 군인들은 자신의 수장인 조광윤이 권력을 쥐는 것을 원했고, 조광윤이 과음을 하여, 인사불성이 되어 있는 틈을 타서, 무리하게 그를 황제로 옹립해 버렸다. (진교의 변)
그 이야기는 아래와 같다.
960년 초에 북한이 거란과 손잡고 쳐들어왔다. 군사 실력자 조광윤은 이를 막기 위해 북상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카이펑을 떠난 다음날 밤, 진교(카이펑 북방에 있는 소도시)에서 숙영할 때 술이 많이 취해 잠든 그를 동생 조광의가 깨워서 마당으로 끌고 나갔다. 연병장에는 칼을 받쳐든 장교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들은 조광윤을 보자 마자 외쳤다.
"부디 천자가 되어주십시오."
조광윤에게는 술이 깨는 순간 순식간에 천자의 황포가 입혀지고, 만세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장교들이 조광윤을 부축하여 말에 태웠다. 조광윤은 개봉에 돌아와서 공제로부터 황위를 물려받아 국명을 송이라고 했다. 그리고 수도는 그대로 카이펑으로 정하였다.
그는 936년 천하통일을 선언, 출병한다. 976년 천하통일을 목표로 오나라와 월나라 그리고 북한의 잔재를 정복하고, 거란족을 만리장성 밖으로 몰아냈으나 통일 전 50세에 급사를 하게 된다. 동생 태종에 살해되었다고 하는 설도 있지만, 진교의 변에서 보았듯이 두주불사하는 그의 음주 습관 때문에 질환에 의한 급사라고 하는 설도 있다.
오대십국 시대가 시작된 해는 당나라가 완전히 멸망한 907년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왕조로써의 당나라는 875년 ~ 884년에 걸쳐 일어난 황소의 난에 의해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고, 그 후 장안(長安)을 중심으로 관중지역을 지배한 일개 지방정권으로 추락하여 주전충(朱全忠)과 이극용(李克用) 등 절도사 세력이 함께 존재하는 난립상태라고 말할 수 있었다.
오대십국의 혼란기
오대십국의 오대는 후량, 후당, 후진, 후한, 후주를 뜻하며, 십국은 오월, 민, 형남, 초, 오, 남당, 남한, 북한, 전촉, 후촉을 포함한다.
조광윤의 세력은 후주에 속해 있었다. 세종의 뒤를 계승한 사람은 겨우 7살의 공제 시종훈이었다. 이 상황을 보고 북한은 요나라의 후원을 얻어 후주를 침공하였다. 이를 막기 위해 나선 인물이 세종의 제일 측근이었으며, 전전도점검(殿前都点検;금군사령관)이었던 조광윤(후에 송나라 태조)이었다.
960년 정월, 조광윤은 어린 황제 공제를 모시고, 요나라와 싸우는 것에 불안을 느낀 군인들은 도중에 개봉 부근의 진교역(陳橋驛)에서 조광윤에게 술을 만취하도록 먹이고, 정신을 잃은 그에게 황포를 입혀 강제로 추대하였다. 조광윤은 조보, 조광의 등 부하들의 추천에 못이기는 척하며 개봉에 입성하여 7세의 어린 시종훈에게 황제를 선양 받아 송나라를 건국하였다. 이것을 진교병변(陳橋兵變) 또는 진교의 변(陳橋之變)'이라고 한다.
반대를 하던 한통(韓通)은 조광윤의 부하들에게 피살되었고, 당시 후주의 재상이었던, 범질(范質)과 왕부(王溥) 등을 협박하여 굴복시켰다.
오대에서는 선양은 이렇듯 자주 일어났었고, 양위를 물려준 황제는 뒷날 일어날 역습을 우려해 죽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조광윤은 시종훈을 죽이지 않았고, 시종훈의 자손은 남송의 멸망 때까지 두터운 보호를 받았다. 시종훈은 젊은 나이로 병사하고 송태종은 황제의 예로 장례를 치뤄준다. 태조가 '진교병변' 후에 회군하여 변경 황궁으로 들어왔을 때 어떤 후궁이 어린애를 안고 있는 것을 보고 누구의 아이인지를 묻자 후주 세종의 아들이라 대답했다. 이때 태조는 한 쪽에 서 있던 범질, 조보, 반미(潘美)에게 그들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지 물었다. 조보 등은 당연히 제거하여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대답했지만, 태조는 "내가 남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그의 자식마저 죽여야 하다니, 나는 차마 그러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태조는 그 아이를 반미에게 키우라고 준 후에 이후 그 아이에 대해서 묻지 않았으며, 반미도 태조에게 그 아이 이야기를 한번도 꺼내지 않았다. 그 아이는 성인이 된 후에 이름을 유길(惟吉)이라 하고 송조에서 벼슬이 자사(刺史)에 이르렀다.
배주석병권
휘하 장수들과 술을 마시고, 황제로 옹립되었던 송태조는 961년 역으로 금위군(禁衛軍) 장수 석수신(石守信) 등의 휘하 장수들을 초청하여 말술을 먹이고, 병권을 자발적으로 내놓게 하는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을 단행하였다. 정세가 안정된후 조광윤은 석수신 등 공신들을 초청해 연회를 차렸다. 연회 참석자들이 한창 주흥이 도도해 졌을무렵 조광윤은 갑자기 시종들을 멀리하고 엄숙하게 공신들에게 말하기를 '만일 당신들의 힘이 없었다면 나는 황제로 될 수 없었을 것이오. 그러나 황제가 된 후 나는 매일 편안한 밤을 잘 수가 없었다'고 밝혔다.
이 말은 들은 장교들은 놀라움을 표하면서 "우리가 어찌 감히 황제에게 다른 마음을 가질수 있겠습니까?"라고들 답했다. 조광윤은 이때 "당신들은 비록 황위를 탐내지 않는다고 치더라도 당신들의 수하에 부귀를 꿈꾸는 자들이 있을까 봐 두려운 것이오. 만일 당신들에게 황포를 걸쳐주는 사람들이 있으면 당신들도 거절하기 힘들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오."라고 말했다. 이에 공신들은 다급히 어떻게 하면 황제를 안심하게 할 수있는가고 조광윤에게 물었다. 조광윤은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사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재부(財富)라고 보아지오. 당신들은 아예 권리를 내놓고 지방에 내려가 땅을 사고 호화저택 지어놓고 살면서 나와 친척으로 지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소"라고 답했다. 장교들은 조광윤의 말 뜻을 완전히 이해할 수가 있었다. 다음날 모든 고급 장교들은 모두 황제에게 사직서를 제출하였고, 조광윤은 바로 그들의 직무를 해임시켰다.
당나라가 멸망하고 오대십국의 혼란이 군벌의 폐해로 일어났다고 생각한 송태조는 휘하의 군벌들에게도 그러한 가능성이 있음을 생각하고 술자리에서 자신의 고민을 토로함으로써 하루 저녁에 군벌들의 세력을 넘겨받아 중앙으로 복속시킨다. 이 사건은 지방 군벌에 의한 군웅할거의 국면을 종식시키는 계기가 된다. 태조는 동일한 수단으로 왕언초(王彦超) 등 여러 명의 절도사들의 병권도 박탈하고, 지방의 행정과 재정을 모두 중앙으로 복속시켰다.
북송 황제
즉위 직후 시영의 신하로 자리를 찬탈했다는 비난에 직면하였다. 태조가 말을 타고 출궁하였다가 대계교(大溪橋)에 당도했을 때 갑자기 화살이 하나 날아와서 황룡기(黃龍旗)에 꽂혔다. 금위군이 당황하자 그는 오히려 가슴을 치면서 "내게 활쏘는 법을 가르쳐 줘 고맙구나!"라고 하고는 금위군이 화살 쏜 사람을 잡지 말라 하였다.
통일 전쟁
과거제도의 정비와 내치의 안정을 바탕으로 송태조 조광윤은 통일 전쟁을 시행하였다. 963년 중국대륙의 가장 중요한 요지라 할 수 있는 호북성의 형남을 합병했다. 965년에 사천성의 후촉을 병합하고 이땅의 풍부한 물산을 빼앗아 전쟁 비용을 보충한다. 970년경이면 조광윤은 중국의 북부지역을 거의 통일하게 된다. 한편으로 만리장성 안을 넘보던 거란족의 요나라를 정벌하고 후진 때 빼앗겼던 연운 16주를 수복할 계획을 세웠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고 971년 광동을 지배하던 남한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975년 화남에서 최대세력을 자랑하던 남당을 멸망시키게 되었다. 남은 것은 북쪽의 북한과 남쪽의 오월뿐이었지만 태조는 당돌에서 병사했다.
송나라 건국 뒤에도 정벌을 단행, 970년경 중국 북방을 거의 통일하였으며, 내정으로는 유교적 문치주의에 의한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확립하였고, 과거제도를 정비하였으며 직접 과거 시험을 주관하여 인재 선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비록 중국 재통일은 실패하였으나 그는 중국 재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군주로도 기록된다. 묘호는 태조(太祖)이고 시호는 효황제(孝皇帝)로 정식 명칭은 영무예문신덕성공지명대효황제(英武睿文神德聖功至明大孝皇帝)이다.
정책
계속된 오대십국의 혼란으로 조광윤은 군벌의 힘을 억제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당나라 때부터 전란의 원인이 되고 있었던 절도사의 힘을 조금씩 줄여 단순한 명예직으로 남겨두었다. 조광윤은 많은 대화를 통해 점진적으로 권한을 줄여나갔다. 조광윤의 정치는 만사가 이러한 방법으로 행해졌으며, 혈사를 일으키는 것을 싫어했다.
실력있는 인재를 지역색에 가림없이 널리 구해야 된다는 유학자 출신 조보(趙普)의 충고를 받아들여 인재 채용에 관심을 기울였고, 무인정치를 폐하고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확립시켰다. 이는 일종의 군벌 세력의 성장을 견제하려던 그의 정책적인 측면과도 일부 상통했다. 지방에 파견되던 군사지도자 성격의 절도사(節度使) 지배체제를 폐지하고 중앙에서 절도사를 직접 임명하여 파견하되 절도사에게 부여되던 재량권(행정, 사법, 군사권)을 대폭 축소시키고 중앙정부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또한 지방관 역시 중앙에서 직접 파견하게 하여 행정적 측면에서도 중앙집권화를 꾀하였다. 지방의 주와 군의 관리들의 재량권을 대폭 축소, 지방의 군권, 재정권, 사법권을 조정에 귀속시키고 중앙에 민정·병정·재정의 3권을 집중하고 금군을 강화하여 황제의 권한을 향상시켰다. 군권을 중앙에 귀속, 집중시키고도 군대 이동이 빈번하고 지방에 파견된 절도사와 군사 지휘관들이 독자세력을 형성하는 것을 경계하여 이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데 노력했는데 이는 송나라 군대의 전투력이 크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과거제도를 개선하여 전시(殿試)를 행하고, 무인보다 문인이 상위에 서는 문치주의를 확립했다. 과거시험이 실질적으로 관료선발 제도로 제 기능을 한 것은 송나라 때부터라고 한다. 조광윤이 폈던 문민통제 정책은 그 후 시대를 지날 때마다 극단적으로 강화되어, 군사력의 저하로 나타나 관료 간의 파벌싸움을 격화시키는 요인이 되었고, 약화된 군사력으로 외적의 도발을 막지못하여 멸망한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그는 관료들에게 독서를 권고하였는데 송나라시기 지식인에 대해 중시하고 우대해 주었기에 책을 읽는 풍토를 자연스럽게 조성하고 자신도 독서와 강독에 최대한 참여하려 노력했다. 관료 선발에도 직접 관심을 갖고 지도하였는데, 문관 등용에서 신분의 따지지 않고 평등한 과거 경쟁을 통해 문관들을 대거 발탁했다. 지방통치를 위해 전국에 파견되는 관료의 채용을 위한 과거제도를 정비하고, 황제가 형식적으로 주관하거나 보고를 받던 이전의 황제들과는 달리 황제가 직접 과거시험을 실시, 주관하는 전시(殿試)와 어시(御試) 횟수를 늘렸다.
수리건설 사업을 추진하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토로 조성하거나 식수조림을 장려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개국황제들이 후환을 없애기 위해, 이전 군주들을 죽인 것에 반해 조광윤은 후주의 시씨를 시작으로 항복한 나라들의 군주들을 살리고, 귀족으로서의 지위도 보장하였다. 이러한 개혁을 실행함에 있어 점차적으로 새로 선발하여 뽑아들인 관료로 구 귀족 및 지방 호족세력을 억제하되, 서서히 점진적으로 시행하여 반발을 최소화시키기도 하였다. 송태조 조광윤은 중국 역대 황제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명군 중의 명군이라는 평가를 받는 황제이다.
석각 유훈
석각유훈은 조광윤이 돌에 새겨 자손에게 전한 유언이다. 송왕조의 황제가 즉위를 하면 반드시 이것을 보는 것이 풍습이 되었다고 한다. 그 존재는 극비였고, 궁중에서만 전해져 내려와 정해진 사람들 이외에는 재상조차 알지 못하였다고 한다. 금군의 침입으로 황궁이 점령되어 발견되었고, 처음으로 그 존재가 표면화되었다. 거기에 새겨져 있는 유훈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 조광윤에게 황위를 미루었던 시씨 가문의 자손을 대대로 돌봐 주어라.
- 뜻이 맞지 않다고 사대부를 죽여서는 안 된다.
이 두 개의 유훈이 지켜진 것은 시씨의 자손이 남송이 멸망한 애산전투에서 운명을 함께 한 것과, 정쟁으로 실각한 관료(신법, 구법의 다툼. 사마광과 진회)가 처형되지 않고 정국의 변화에 의해 좌천되었다 중앙에 복귀하는 것으로 증명하고 있다. 조광윤의 우수한 인간성이 후의 송왕조의 정치에 반영된 것을 이 유훈은 말해 주고 있다.
생애 후반
거란족의 정벌을 단행하였으나 끝내 실패하였다. 976년 10월, 태조는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어 동생 조광의를 불러 대리청정을 시켰다.
976년 11월 북벌을 계획하던 중 갑자기 사망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49세였다. 그러나 조광윤의 사후 내부 정변에 의해 그의 적자들이 제거되고 그의 친동생인 조광의가 제위를 계승하였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조광의가 조광윤을 독살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묘호는 태조, 시호는 계운입극영무예문신성공지명대효황제(啟運立極英武睿文神德聖功至明大孝皇帝)이고, 하남성 공현(恐縣) 서남쪽 산에 안장되었고, 능호는 영창릉(永昌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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