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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67 : 조선의 역사 9 (태조실록 2) 본문
한국의 역사 467 : 조선의 역사 9 (태조실록 2)
조선의 개국
역성 개혁파는 이성계와 연결하여 쿠데타를 기도하고 있었는데, 1388년의 1차 요동 정벌 당시 기회를 노리다가 실패하였지만, 이들 혁명파는 그해 어린 창왕을 몰아내고 공양왕을 세우면서 정치적 실권마저 차지했다. 1392년 혁명파는 역성 혁명을 반대하고 고려에 충성을 바치던 정몽주를 비롯한 온건 개혁파를 제거하였다.
뒤이어 정몽주가 숨을 거둔 지 4개월도 되지 않아 이성계는 정도전 등의 추대를 받아 1392년 음력 7월 17일에 송경(松京.개성) 수창궁(壽昌宮)에서 공양왕으로부터 선위(禪位) 받는 형식으로 왕위에 올라 개국하였다. 즉위한 다음날 개경 거리와 궁궐에 단비가 내렸다. 오랜 가뭄 끝에 모처럼 비가 내리자 사람들은 천지신명이 새 임금을 축복하여 내리는 비라고 떠들며 기뻐하였다. 처음에는 민심의 동요를 염려하여 국호는 그대로 고려로 두었으나, 1393년 음력 2월 15일 명나라의 인준을 받아 조선(朝鮮)이라 고쳤다.
이때 두문동의 72현을 비롯하여 고려의 유신들에게 개국공신과 그에 상응하는 개국원종공신의 지위를 내렸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거절하고, 낙향하거나 산으로 숨어버린다. 그는 지역의 민심과 사상적 기반을 달리 해야 될 필요가 있다는 정도전의 건의를 받아들여 도읍지 천도와 국교(國敎)를 불교에서 유교로 개정할 결심을 한다.
치적
태조는 조선의 3대 기본 정책을 내세워 건국이념으로 삼아 조선 왕조의 기반을 튼튼히 하였으니, 정치적으로는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삼고 국호 및 왕위의 승인을 받아 양국의 친선을 도모하며, 그밖에 다른 나라와 교린하는 사대교린정책을 썼고, 문화적으로는 숭유배불(崇儒排佛) 정책으로 고려 말기의 부패한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세웠으며, 경제적으로는 농본주의 정책으로 농업을 장려하고 전지(田地)를 개혁하여 농본민생주의에 따른 신분·사회 제도를 확립하였다.
1394년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여 새 수도의 도시 계획을 구상하였다. 이어서 음력 10월에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하였다. 이는 왕씨의 본거지인 개경을 버리고 한양(漢陽)으로 천도하여 도성을 신축하는 등으로 국가의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아울러 구세력의 뿌리를 뽑기 위하여 왕씨 일족과 구신(舊臣)들을 숙청하였다.
논공행상으로 창업에 공을 세운 이에게 개국공신의 호를 주고 전지(田地)와 노비를 내리어 왕권을 튼튼히 하였으며 관제(官制)를 비롯한 국가의 시설을 정비하고 《경제육전》을 찬집(纂輯)하게 하여 반포하는 등 여러 가지 정책에 힘썼다.
말년
태조에게는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여섯 왕자와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두 왕자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강씨 소생의 막내아들 방석을 몹시 사랑하여 세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조선 개국에 공이 컸던 한씨 소생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의 불만이 쌓였다. 이방원은 정도전 일파가 방석을 끼고 자신들을 해치려 한다는 이유를 들어 난을 일으켜 정도전 일파와 강씨 소생 왕자들을 살해했다.
태조는 이 사건에 몹시 상심하여 왕위를 둘째 아들 방과(정종)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은퇴했다. 그러나 정종마저 곧 물러나고 이방원(태종)이 왕이 되었다. 태종이 즉위하자 성석린(成石璘)을 보내 함경도에 가 있던 태조를 서울로 모셔 왔다. 그러나 1402년(태종 2)에 다시 함경도로 들어간 채 돌아오지 않으므로 태종이 차사(差使)를 보내어 돌아오기를 권유하니, 차사마저 돌려보내지 않고 죽였다는 전설이 있어 함흥차사란 말이 생겨났다. 뒤에 무학대사가 가서 겨우 서울로 오게 하였다.
만년에 불교에 전념 하다가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74세로 승하하였다. 그의 진영(眞影)이 영흥(永興)의 준원전(濬源殿) 및 전주(全州)의 경기전(慶基殿)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능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건원릉(建元陵)이다.
함흥차사
태종은 자주 차사(差使)를 함흥으로 보내어 아버지와 아들 간의 불화를 풀고 태조를 환궁시켜 옥새를 얻고자 하였으나, 태조는 차사로 오는 이들을 보는 족족 활을 쏘아 맞추어 죽였고, 그로 말미암아 보낸 사람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의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겨났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야담 수필집 《노봉집시장》(老峰集諡狀), 선조 때 차천로(車天輅)가 지은 《오산설림》(五山說林) 등의 책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함흥차사 고사는 태조와 태종이 왕자의 난 이후로 서로 화해하지 못하는 상황을 빗대어 만들어낸 이야기이다.
함흥차사의 모티브는 신덕왕후의 친척인 조사의가 일으킨 조사의의 난이다.
조사의가 동북면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당시 그는 그곳에 기반이 있지도 않았고 신덕왕후또한 그 지역과 관련이 없었으며 그 시기 태조가 조상들의 능을 돌본다는 명목으로 동북면에 들어간것으로 보아 배후에 태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후 태종은 박순을 보내 반군을 설득하게 하고 태조를 설득하기 위해 이서와 설오대사를 보냈으며 이천우를 선발로 진압군도 파견했다. 하지만 박순은 반군에게 살해당하고 이서와 설오대사는 반군에게 가로막혀 돌아왔고 진압군은 패하며 상황이 어렵게 되었다. 태종은 장인인 민제에게 수도인 개성을 맡기고 직접 출전하였다 그후 반군의 포로로 잡힌 김천우가 관군이 4만여명이라는 소문을 내어 그날밤 도망병이 속출했고 한 도망병이 지른 불로인해 하룻밤만에 와해되고 조사의등은 처형되고 그후 평양에 머물던 태조는 태종의 부탁으로 도성으로 다시 돌아왔다
사후
그는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곁에 묻히고자 하였으나 아들 정안대군 방원에 의해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현재의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 터에 최초로 안장되었다. 그의 능호는 건원릉(健元陵)이다.
바로 묘호를 태조(太祖)라 하고 시호는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다.
1898년(광무 1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고종의 칭제건원 직후 황제로 추존하면서 고황제(高皇帝)로 추존하여 정식 시호는 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가 되었다. 이때 때 명나라에서 내린 시호 강헌(康獻)은 삭제하였다.
가족 관계
- 부 : 환조 이자춘
- 모 : 의혜왕후 최씨
- 정비 : 신의고황후 한씨(神懿高皇后 韓氏)
- 진안대군 이방우(鎭安大君 李芳雨)
- 영안대군 이방과(永安大君 李芳果) : 조선 정종
- 익안대군 이방의(益安大君 李芳毅)
- 회안대군 이방간(懷安大君 李芳幹)
- 정안대군 이방원(靖安大君 李芳遠) : 조선 태종
- 덕안대군 이방연(德安大君 李芳衍)
- 경신공주 (慶愼公主), 하가(下嫁) 정사좌명공신 상당부원군 이애(定社佐命功臣 上黨府院君 李薆)
- 경선공주 (慶善公主), 하가(下嫁) 청원군 심종(靑原君 沈淙)
- 계비 : 신덕고황후 강씨(神德高皇后 康氏)[5]
- 무안대군 이방번(撫安大君 李芳蕃)
- 의안대군 이방석(宜安大君 李芳碩)
- 경순공주 (慶順公主), 하가(下嫁) 개국공신 흥안군 이제(開國功臣 興安君 李濟)
- 후궁 : 성비 원씨(誠妃 元氏)
- 후궁 : 정경궁주 유씨(貞慶宮主 柳氏)
- 후궁 : 화의옹주 김씨(和義翁主 金氏)
- 숙신옹주 (淑愼翁主), 하가(下嫁) 당성위 홍해(唐城尉 洪海)
- 후궁 : 찬덕 주씨(贊德 周氏)
- 의령옹주 (宜寧翁主), 하가(下嫁) 계천위 이등(啓川尉 李䔲)
외모
검은 수염에 광대뼈가 도드라진 얼굴이었다. 1832년(순조 32년) 도둑이 들어 파손되면서 어진이 파괴되면서 여러 개의 모사본이 그려졌다. 이후 1872년(고종 10년) 전북 전주의 경기전에 남은 것만이 전해져왔으나, 2006년 5월, 1832년(순조 32년)에 그려 영흥 준원전에 봉안한 모사본 초상화가 발견되기도 했다.
강씨 소생 왕자에 대한 총애
태조에게는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여섯 왕자와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두 왕자가 있었다. 이는 고려의 관습이 서울 출신 경처와 지역 출신 향처 라는 두 명의 정실 부인을 둘 수 있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씨는 일찍 사망하고 신덕왕후는 그가 1392년 7월 출정을 머뭇거릴 때 갑옷을 입힐 정도로 그의 건국에 기여했다 한다. 그는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막내아들 방석을 몹시 사랑하여 세자로 책봉했다. 혹은 정안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신덕왕후가 대전 뒤에서 곡을 하는 바람에 대신들이 방석을 택했다고 한다.
한씨 소생의 다른 아들들은 불평이 심했는데, 특히 조선 개국에 공이 컸던 한씨 소생의 다섯째 아들이며 정몽주 등을 제거한 실질적인 건국의 공신인 다섯째 이방원의 불만이 제일 심했다. 그의 강씨 소생 아들들에 대한 편애는 후일 정안대군에 의한 방석, 방번 살해사건의 원인이 된다.
기타
전설에 의하면 조선 건국 이후 조선 태조 이성계 또는 조선 태종 이방원이 왕씨들을 모아다가 이주시키겠다 또는 관광을 시켜주겠다는 이유로 배에 태운 뒤 강화도에서 배를 난파시켜 익살시켰다. 이때 고려 태조 왕건이 이성계의 꿈에 나타나 너희가 내 후손을 몰살시켰으니 나 역시 같은 방법으로 보복하리라며 보복을 다짐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회룡사 전설
1401년(태종 1) 함흥에 은거한 태조를 모시고자 태종은 무학대사를 시켜 태조를 회유하여 양주까지 내려오게 했다. 이때 태종은 아버지를 뵙고자 찾아갔지만 태조는 만나주지 않았는데, 이때 태조와 태종이 머물던 곳을 회룡(回龍)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한다.
다른 전설에 의하면 1398년(태조 7) 태조가 함흥에서 한양의 궁성으로 되돌아오던 길에 왕사인 무학대사를 방문했는데, 무학대사는 1394년에 정도전(鄭道傳)에게 미움을 받아 이곳 토굴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중 태조의 방문을 받았던 것이다. 태조는 여기서 며칠을 머물렀고, 이에 절을 짓고는 임금이 환궁한다는 뜻으로 그 이름을 회룡(回龍)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후자의 전설은 후일 1881년(고종 18년) 구한 말의 승려 우송(友松)이 쓴 '회룡사중창기'(回龍寺重倉記)에도 실려 있다.
성계탕 설화
돼지고기와 관련해서 경기도 개성 지역에는 돼지고기를 가리켜 성계라고 부르는 전설이 있다. 태조가 직접 지시한 것의 여부는 불확실하나 고려 멸망 후 수많은 고려의 왕족들이 개성과 강화도 앞바다에서 실족사와 익사 등으로 살해당했다. 그리하여 고려 말부터 개성사람들은 이성계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개성 왕씨와 고려의 절신들을 무수히 죽였으며 수도 역시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겼다. 개성 사람과 평안도 사람들은 '위화도 회군'으로 억울하게 죽은 최영 장군을 기리기 위해 제사를 지냈는데, 이때부터 최영 장군은 무속의 신이 된다. 그런데 일부 최영 장군 제사 때는 집돼지 혹은 멧돼지를 통으로 삶아서 제물로 바쳤다. 이때 제물로 바쳐진 통 돼지를 '성계육'이라 했는데 제사가 끝나고 음복을 할 때 통 돼지를 칼로 도려냈다. 또한 개성과 평안도 지역 전설에는 돼지고기를 썰어 국을 끓여 먹었는데 이때의 돼지탕을 돼지탕이라 부르지 않고 '성계탕'이라 불렀다. 이는 바로 이성계가 기해년생(己亥年生) 돼지띠였기 때문이다.
이연계와 이원계
그의 이복 형 이원계는 태조의 위화도 회군에 부정적이었고, 고려에 충성을 바칠 것을 애써 설득하기도 하였으나 끝내 그의 마음을 되돌리지 못했다. 이원계는 1388년 죽으면서 아들들에게 자신과는 다르니 숙부를 따를 것을 유언하며 죽었다. 그의 6촌 형 대흥군(大興君) 이연계(李連桂)는 고려말기에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과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역임했다. 이연계 역시 사람을 보내 그의 새 왕조 수립을 만류하였으나, 태조는 듣지 않았다. 실망한 이연계는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으로 낙향하였고, 이후 이연계의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하여 대흥 이씨로 분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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