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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68 : 조선의 역사 10 (태조실록 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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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68 : 조선의 역사 10 (태조실록 3)

두바퀴인생 2012. 1. 18. 13:07

 

 

 

한국의 역사 468 : 조선의 역사 10(태조실록 3)

 

    

 

 

 

1. 조선 개국 이전의 이성계

 

이성계의 등장

이성계의 집안은 고조부 이안사가 여진의 남경(여진은 당시 원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남경은 지금의 간도 지역)에 들어가 원의 지방관이 된 뒤부터 차차 그 지역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하였다. 이안사의 아들 행리, 손자 춘이 대대로 원나라의 관리를 지냈으며, 춘의 아들 자춘도 원의 총관부가 있던 쌍성의 천호로 있었다.

 

그러나 이자춘은 원이 고려 출신 이주민들에게 차별정책을 실시하자 점차 원에 대해 회의를 품기 시작하였다. 당시 원나라는 원주민과 이주민의 대우를 달리하기 위해서 차별적인 호적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이는 이주민을 기반으로 하고 있던 이자춘은 원에서 등을 돌려 고려를 돕기로 결심하게 된다.

 

당시 중국 대륙에서는 한족이 주원장을 중심으로 세력을 일으켜 명나라를 세우고, 원은 명에 의해 중원에서 밀려나고 있던 상황이었다.

 

원의 힘이 약화되자 공민왕은 반원정책을 실시하여 동북면의 쌍성총관부와 긴밀한 관계에 있던 기씨 세력을 제거하려 했고, 이를 위해서는 동북면 유민들의 힘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자춘은 이러한 공민왕의 의도를 간파하고 1355년 공민왕을 만나 고려가 쌍성총관부를 치면 자신이 돕겠다고 약속한다. 그 이듬해에 이자춘은 아들 성계와 함께 고려가 실로 99년 만에 옛 땅을 회복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이자춘은 이때의 공적으로 대중대복사복경이 되어 개경으로 오게 된다. 하지만 1년 뒤인 1356년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로 임명되어 동북면으로 되돌아간다. 이때 고려의 조신들은 그가 동북면으로 돌아가면 토착 기반을 이용하여 고려를 배반할 것이라고 했지만, 공민왕은 그가 아니면 동북면을 안정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공민왕의 판단대로 이자춘은 동북면의 안정을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4년 후인 1360년에 병사하고, 그의 적자 이성계가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게 된다. 당시 이성계에겐 이자춘의 서자인 이복형 이원계와 이복동생 이화가 있었다.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뒤에 이안사는 목왕에, 행리는 익왕에, 춘은 도왕에 추존되었고, 이자춘은 나중에 환왕에 추존되었다.

 

이자춘의 아들 성계는 1335년 화령부(지금의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났다. 이자춘과 최한기의 딸 최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담대했으며 특히 궁술에 뛰어났다.

 

이성계가 성인이 될 무렵인 14세기 중반의 중원은 명이 일어나 원을 위협하고 있었고, 만주 지역에서는 여진족이 원의 세력이 약해지는 틈을 타서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남쪽에서는 왜구들이 노략질이 끓이지 않았다. 때문에 당시 한반도와 중국의 양민들은 전쟁의 불안과 공포에 시달려야 했고 따라서 문인보다는 무인이 대접을 받던 시기였다.

 

이성계는 그러한 시기에 걸맞는 인물이었다. 그는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이미 동북면 지역에서 뛰어난 궁수로 이름을 날렸으며,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고려의 옛땅이자 원의 점령지인 쌍성 지역에서 세력을 구축하기 위해 진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려가 이자춘의 도움으로 쌍성에 있던 원의 총관부를 함락시킨 후에는 고려 변방을 지키는 주역으로 성장하게 된다.

 

1360년 고려의 관리가 된 지 4년 만에 이자춘이 병으로 죽자 이성계는 사병을 육성하면서 동북면 지역에서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갔으며, 이듬해 10월에 독로강의 만호인 박의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면서 공민왕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홍건적이 고려를 침입하여 개경이 함락될 지경에 이르자 그는 사병 2천 명을 거느리고 수도 개경 탈환 작전에 참가해 가장 먼저 입성하는 성과를 올렸다.

 

1362년에 원의 나하추가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홍원 지방으로 처들어오자 고려는 비로소 이성계에게 동북면병마사 벼슬을 제수하여 나하추 부대에 응전케 한다. 이로써 이성계는 27세의 나이에 문무를 겸비한 고려의 주목받는 관리로서 역사의 전면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성계의 활약상

이성계는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 전쟁을 시작으로 1388년 위화도 회군에 이르기까지 30여 년을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했지만 한 번도 패하지 않았던 맹장이었다. 이 혁혁한 전공에 힘입어 그는 고려 조정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성계는 쌍성총관부를 재탈환하기 위해 침입한 나하추 부대를 격퇴시키면서 장수로서의 능력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쌍성총관부를 빼앗긴 원은 여진족 장수 나하추로 하여금 고려를 칠 것을 요청했고. 나하추는 1362년 수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지금의 함경남도 지역인 삼살(북청)과 홀면(홍원) 일대를 침범하였다. 이에 고려는 동북면도지휘사 정휘를 내세워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를 거듭했다. 그러자 고려는 이성계를 동북면병마사로 임명하여 나하추와 대적케 했다.

 

2월에 남침한 나하추 부대가 고려 땅을 공략한 지 이미 5개월이 지나, 때는 여름의 막바지를 향해 치달리던 7월이 되었다. 나하추 주력부대는 홍원 달단동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동안 승전을 거듭한 끝에 군사의 수가 두 배로 불어나 있었고 사기도 한층 고조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하추는 휘하 지휘관에게 군사 1천을 내주면서 이성계 부대와 맞서게 하였다. 나하추는 계속된 승전에 도취되어 이성계 부대를 얕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나하추 부대의 대패였다. 나하추의 선봉 부대는 이성계 부대에 쫓기다가 거의 전멸하고 말았다. 이에 격분한 나하추는 진영을 덕산동으로 전진 배치하여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할 태세를 갖추었다. 하지만 이성계는 먼저 야음을 틈타 나하추 주력 부대를 기습하였다. 이 기습으로 나하추는 다시 달단동으로 후퇴하였지만 이성계는 고삐를 늦추지 않고 맹공을 가해 나하추의 잔병들을 거의 섬멸하였다. 이 전투로 나하추는 수하 몇 명만 데리고 겨우 목숨만 건져 심양으로 되돌아 갔으며, 그 이후 세력이 약화되어 명의 주원장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이성계의 활약은 비단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이성계는 나하추를 격퇴시킨 후에도 약 30년 가까이 전장을 누비면서, 매번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고려 최고의 장수로 맹위를 떨쳤다.

 

1364년(공민왕 13년), 원의 순종은 기황후의 오빠인 기철을 역모죄로 처형하는 등 반원정책을 펼치던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새 고려 왕으로 지명하여 최유, 김용 등 덕흥군 일파에게 군사 1만을 내주고 고려를 치게 하였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자기 오빠를 죽인 고려 공민왕에 대한 원한을 품은 원의 기황후의 지시에 의해서였다. 공민왕은 일단 사신을 보내어 순종의 군사를 회유하려 하였으나 기철의 누이인 기황후로 인해 실패하고, 따라서 고려 왕실과 덕흥군 부대의 무력전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첯 전투는 의주에서 벌어졌는데, 의주성을 지키고 있던 사람은 안우경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최유 부대의 공격을 잘 막아냈지만 지원 부족으로 버티지 못하고 안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주가 함락되자 고려는 최영을 급파하여 안주를 중심으로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이성계에게 정예 군사 1천을 내주어 최영과 합동 작전을 펴게 하여 덕흥군의 선발 부대를 대파했다.

 

최영과 이성계는 다시 덕흥군의 주력 부대를 공략해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이성계가 적장을 활로 쏴 말에서 떨어뜨림으로써 중앙 돌파에 성공하였고 이성계의 중앙 돌파로 덕흥군 부대는 양분되면서 전열이 흔들리게 되었고 최영이 좌우로 흩어진 적군을 공략하자 덕흥군 부대는 거의 전멸당하고 덕흥군은 간신히 목숨만 건져 원으로 달아났다.

 

1369년과 1370년에 걸쳐 이성계는 공민왕의 명을 받아 만주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동녕부를 공격하였으며, 1376년 우왕 2년에는 왜구에 의해 충청도 공주가 함락되고 개경이 위협을 받자 군사를 남으로 돌려 왜구 토벌에 나섰다.

 

일본은 14세기 당시 호죠정권이 몰락하고 사무라이 군벌이 들어서면서 내분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러한 내분으로 국가의 기강이 문란해지자 일본의 영주들은 공공연히 인접 국가의 상인들에 대해 침탈을 자행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왜구라고 했다.

 

이성계는 1377년을 전후하여 고려에 창궐하고 있던 왜구를 경상도, 전라도 일대와 지리산에서 크게 물리쳤으며, 1380년에는 소년 장수 아기바투가 이끄는 왜구를 운봉에서 크게 섬멸하였다. 이 전투를 흔히 '황산대첩'이라고 부르는데, 최무선이 화약과 화통을 응용한 포를 등장시킨 것이 이때였다.

 

1382년 여진의 호바투가 동북면 일대에서 노략질을 일삼자 이성계는 다시 동북면 지휘사가 되어 다시 북으로 올라가 이들을 격퇴하였으며, 1385년에는 함주로 쳐들어온 왜구를 섬멸하였다.

 

이성계는 승전할 때마다 지위가 올라갔다. 1362년 동북면 병마사가 된 이후 같은 해 밀직부사에 제수되었고, 1382년에는 동북면도지휘사, 1384년에는 동북면 도원수문하찬성사가 되었으며, 1388년에는 수상격인 문하시중 바로 아래인 수(守)문하시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