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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70 : 조선의 역사 12 (태조실록 5)

두바퀴인생 2012. 1. 20. 02:42

 

 

 

한국의 역사 470 : 조선의 역사 12 (태조실록 5)

 

 

       

 

 

 

태조실록(1335~1408년, 재위 1392년 7월 ~ 1398년 9월, 6년 2개월)

 

 

3. 조선 태조로서의 이성계

 

1392년 4월 공양왕의 스승이자 수문하시중으로 있던 정몽주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의 사주로 살해되자, 이성계는 마침내 그해 7월에 공양왕을 내쫓고 정도전, 조준, 남은, 이방원 등의 추대를 받아 고려 국왕으로 등극했다.

 

그는 즉위 초에는 고려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의장과 법제도 등도 고려의 것을 그대로 유지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차차 새 왕조의 기틀이 갖춰지자 정도전, 조준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호를 바꾸기로 결심하고, 이듬해 3월 명의 양해를 얻어 국호를 '조선'으로 확정지었다.

 

이성계는 국호를 개정한 후 수도를 옮기기로 결정하고 무학과 정도전으로 하여금 새로운 땅을 물색토록 한 뒤에 무학의 의견에 따라 한양으로 새 수도로 삼는다.

 

1393년 9월에 시작된 궁궐 건립 공사는 1396년 9월까지 계속되었으며, 미처 궁궐이 완성되지 않은 1394년 10월에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겼다.

 

이성계는 개국 후 법제 정비를 서둘러, 1394년에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을 비롯한 각종 법전이 편찬되었다. 또한 유교를 숭배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하여 한양에는 성균관, 지방에는 향교를 세워 유학의 진흥을  꾀하는 동시에 전국의 사찰을 폐하는 등 억불정책을 펼쳤다. 

 

이렇게 하여 이성계는 새 왕조의 기반을 다지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왕자들 사이에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싸움이 벌어져 노년에는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이성계는 즉위한 직후에 왕세자 책봉을 서둘러, 계비 강씨의 소생인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이성계의 크나큰 실수로 판단된다. 계비 강씨의 사주를 받은 정도전 등을 비롯한 신하들의 주청과 계비 강씨의 집요한 등살에 못이겨 세자를 아직 나이도 어린 방석으로 결정한 것으로 판단되는데, 한씨 소생의 이복형들이 즐비한 가운데 어린 방석으로 결정했다는 것은 차후 왕위 다툼이 일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하였고 피비린내가 날 것은 기정 사실인데도, 이성계가 다른 아들들에게 이해와 양보에 대한 설득도 하지 못한채 세자에 대한 보호대책도 강구하지 않고 그러한 결정을 하였다는 것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특히 다섯째 아들 방원이 자신을 도와 정몽주를 제거하는 등 개국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고 그러한 그의 공로에 따른 야망을 몰라보고 가벼이 생각하였다는 점일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결정에 대해 결국 첯째 부인 한씨 소생들의 불만이 높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이성계의 등극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의 불만이 높았다. 그래서 이방원은 자신의 사병들과 수하를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켜 세자 방석을 보필하고 있던 정도전, 남은 등을 제거하고, 계비 강씨 소생이던 세자 방석과 일곱째 아들 방번도 함께 살해해 버렸다. 1398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두고 흔히 '제1차 왕자의 난'이라고 한다. 이는 당나라 초기 이연이 세자를 맏이로 결정하였으나 동생이던 이세민이 당나라 창업에 누구보다도 기여한 공로가 지대하였던 바, 결국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형과 동생을 참살하고 왕위를 탈취한 경우와 거의 흡사하다. 결국 조선 태조 이성계는 능력있는 아들 이방원을 두고 어린 방석으로 세자를 결정하였던 것과 맏이로 세자를 결정하였지만 당나라 창업에 지대한 공헌을 한 둘째 아들 이세민을 공로를 무시하였던 점이나 비슷하다. 이는 명나라 때도 마찬가지로 명나라 창업에 지대한 공을 세운 삼촌이 조카를 제거하고 왕위를 찬탈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과도 비슷하다. 

 

이처럼 개국 초기에 창업에 많은 공을 세운 능력있는 아들 이방원을 무시하고 특히나 배다른 이복동생인 이방석을 세자로 세운 것은 당나라 역사의 교훈을 간과하엿다는 점에서 피의 반란을 조장한 것이나 다름없으며 정도전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것이라 판단된다. 그런 세자 방석이 아닌 같은 형제 중에 네 사람의 형들이 있었는데, 그 형들 중에서 누군가를 세자로 책봉하였다면 과연 이방원이 가만히 있었을지도 의문이다. 마찬가지로 권력에 대한 야망은 형제들 중에서 이방원이 가장 강하였다는 점은 친형들도 무참하게 참살한 '제2차 왕자의 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와병 중에 일어난 이 사건으로 이성계는 몹시 분노한 나머지 그해 9월에 둘째 아들 방과(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그 2년 뒤인 1400년, 방원이 동복형인 방간이 일으킨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매일 왕위에서 불안에 떨며 지내던 정종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오르자 태조 이성계는 태상왕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방원에 대한 증오심을 간직한 채 궁궐을 떠나 소요산으로 갔다가 다시 고향인 함주(함흥)으로 가서 그곳에 머물렀다. 이때 방원이 문안을 위해 여러 차사를 보냈는데 그때마다 죽여버려 '함흥차사'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는데, 이는 방원에 대한 태조의 증오가 대단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성계는 방원이 보낸 무학의 간청으로 2년 후인 1402년에 한양으로 돌아와 만년에는 불도에 정진하면서 덕안전을 새로 지어 그곳에서 염불삼매에 조용한 나날을 보내다가, 1408년 5월 24일 창덕궁 별전에서 향년 74세로 일기를 마쳤다. 

 

태조의 능은 건원릉으로 현재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있다. 

 

 

한양의 역사

한성부(漢城府)는 조선 시대 서울특별시의 이름이자, 그 지역을 담당하여 관할하는 관청이다. 조선이 개국하면서 조선 태조는 풍수 도참설에 따라 1394년 조선의 수도를 이곳으로 정하였다. 이 당시 한성부의 영역은 현재의 종로구, 중구보다 좁은 지역이다. 이어 조선 태종 때, 궁궐을 확장하고 상가를 짓는 등 도시가 확장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도시는 많이 파괴되었다가 19세기에 많이 복구되었다. 19세기말, 각종 근대 문물이 들어왔고,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경성부로 개칭되었다. 한성부는 정2품인 한성판윤이 최고 책임자였다. 하부 행정구역은 오부와 방(坊)과 계(契)·동(洞)으로 구성되었다. 15세기 초 인구는 10만명 정도였다.

 

 

서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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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경복궁 어좌의 모습

 

천도의 배경

1392년에 개경(개성)에서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는 조선왕조의 면목과 인심을 새롭게 할 목적으로 도읍지를 옮기기로 결심을 하였다. 수도를 옮기는 것을 결정하는 데에는 군주인 이성계의 의지가 결정적이었다. 태조는 한시라도 빨리 옛 왕조로부터 벗어나고 새 왕조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새 왕조가 하늘의 명을 받고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정당하게 세워졌음을 세상에 널리 강조하였다. 태조가 천도를 한 이유로는 기존 세력의 근거지인 개경에 대한 정치적 불안과 심리적 갈등, 그리고 풍수 지리설의 영향, 민심의 쇄신 등을 들 수 있다. 

 

새 도읍지를 물색하던 중 무학국사와 하륜(河崙) 등 중신들의 의견에 따라 1393년에 도읍지를 한양으로 정하고 1394년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설치하여 새 수도의 도시 계획을 구상하였다. 1394년 11월 26일(음력 10월)에 한양으로 천도(遷都)를 하였다. 천도의 기준은 풍수·도참설에 따르면서, 남쪽에 한강이 있어 교통상 조운(漕運)이 편리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정도전을 비롯한 유학자들은 이러한 논거에 반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성계의 의지가 굳건했기 때문에 천도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한편 풍수·도참설에 능했던 하륜에 따르면 오늘날의 연세대학교 자리인 무악 일대가 명당이었고, 이로 인해 수도의 위치에 대해 크게 논의가 일기도 했다. 실록에 따르면 이성계는 이러한 논거로 수도의 입지를 정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 경내에서는 송경이 제일 좋고 여기가 다음가나, 한되는 바는 건방(乾方, 북쪽)이 낮아서 물과 샘물이 마른 것 뿐입니다.”
임금이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송경인들 어찌 부족한 점이 없겠는가? 이제 이곳의 형세를 보니, 왕도가 될 만한 곳이다. 더욱이 조운하는 배가 통하고 [사방의] 이수도 고르니, 백성들에게도 편리할 것이다.”

– 《태조실록》, 3년 8월 13일조

따라서 풍수·도참설에 기반한 논의가 국왕의 결정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왕사 자초(무학)가 인왕산에서 출발한 축을 따라 하여 도읍의 터를 잡자고 주장했다는 설은 야사로 16세기 말~17세기 초에 간행된 《오산설림》에 수록되어 있는 이야기다. 실록에는 전혀 전하지 않는 이야기로, 신뢰할 수 없다.

 

1395년(태조 4년) 6월 6일에 한양부(漢陽府)의 명칭을 한성부(漢城府)로 고쳤다. 한양 천도 당시에 궁궐과 관청이 세워진 지역에 살던 백성들을 현주(見州)로 옮기고 양주군(楊州郡)이라 고친 바 있다.

 

한성의 건설

 

 

1894년 한성의 모습

 

 

태조(太祖)는 궁궐을 중심으로 ‘좌묘우사, 전조후시(左廟右社, 前朝後市)’라는 동양 고래의 수도 배치 원칙에 따라서 도읍을 건설하였다. 천도 이후 한양에는 각종 공사가 잇따라 시행되어 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조정과 시장 또한 비슷한 시기에 건설되었다. 성곽은 궁궐과 종묘가 완공된 이후에 건설되었다. 가장 먼저 서쪽에 사직(社稷)을 완공하고, 궁궐을 세운 뒤, 그 동쪽에 종묘(宗廟)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광화문 앞에 육조관서(六曹官暑)를 배치하여 관아가(官衙街)로 하고, 북쪽 신무문(神武門) 밖에는 시장을 두었다. 이때부터 서울은 조선의 정치도시로서의 기능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으로 태조는 한양의 방위를 튼튼히 하기 위하여 북악산과 낙산(駱山)·남산(南山)·인왕산(仁旺山)을 잇는 약 17km의 성벽을 쌓기 시작하였다. 1395년에 한양을 한성(漢城)으로 개칭하고 1395년에는 한성의 행정구역을 설정하였다. 그 행정구역은 도성(都城)과 성저(城底)로 구성되었는데, 조선시대의 500년 동안을 사용하여 왔던 것이다. 도성은 성 안의 땅으로 모두 국유지이며, 궁궐·관청·도로·하수도·시장 등의 위치가 정해져 있었다. 성저는 성벽으로부터 사방 10리 되는 한계선까지를 가리키는데, 북쪽은 북한산, 남쪽은 한강 노도(露渡), 동쪽은 양주 송계원·대현(大峴),·중랑포(中浪浦)·장안평, 서쪽은 양화도(楊花渡)·고양덕수원(高揚德水院), 모래내(沙川)를 따라 난지도(蘭芝島) 부근까지였다. 이 지역내는 산림과 풍치의 보호를 목적으로 암장과 벌목·채석이 금지되었다.이 도성은 동·서·남·북·중부의 오부(五部)를 두고 그 밑에 52방(坊)을 두었다. 같은 해 9월에 성벽과 문루(門樓)가 완성되어 왕성은 주위에 견고한 성벽이 쌓여진 성곽도시가 되었다.

 

1398년 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정종이 즉위하면서 2년동안 수도를 개성으로 옮긴 일이 있었으나, 태종(太宗)이 즉위하자 곧 한성으로 다시 환도하였다.  태종대에는 태종의 즉위를 도와 강력한 권세를 지니고 있던 하륜이 다시금 무악천도론을 주장하였고, 여기에 개성까지 더해 세 개의 후보지가 다시금 조선조 수도가 입지할만한 곳으로서 놓이게 되었다. 여기서 태종은 동전을 던져 길흉을 점치는 척전(擲錢)으로 도읍을 결정하기로 했다. 척전의 결과는 "신도(新都)는 2길(吉) 1흉(凶)이었고, 송경(松京)과 무악(毋岳)은 모두 2흉(凶) 1길(吉)이었다"고 한다. 물론 태종은 태조의 결정으로 지어진 수도를 버리는 데 대한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고, 새로이 토목공사를 일으키는 데 대한 부담감 역시 컸을 것으로 보인다.

 

환도한 다음 해부터 궁궐을 수축하면서 도읍지로서의 여러 시설을 갖추어갔다. 노폭 56척(尺)의 (운종가(雲從街))를 비롯하여 노폭 16척, 11척의 각종 도로를 만들고, 그 양쪽에는 가가(假家)라고 부르는 상점을 만들어 번화하게 하였는데 상점이 들어서 있는 토지는 10년을 한도로 대여하여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간선도로변에는 2척의 구거(溝渠)를 만들어 배수가 잘 되게 하였다. 또한 개천(開川)을 준공하여 배수가 잘 되게 하였고, 도읍지의 미관과 화재예방을 위하여 초가(草家)의 건축은 억제하였다.

 

 

 

 

한성부 18세기 무렵 지도

 

조선 중기, 후기 시대의 한양

 

 

1905년의 한성

 

 

1592년 선조 때의 임진왜란과 1624년 인조 때의 병자호란으로 입은 피해는 흥선대원군 때에 와서 많이 복구가 되었다.1876년 개항 이래 외국인에게 문호를 개방하고 한성에는 새로운 문명시설이 갖추어져 가는 등, 현대화하기 시작하였다.

 

서울은 동아시아에서 전기, 전차, 수도, 전화, 전신 체계를 모두 동시에 갖춘 최초의 도시가 되었다.그 중 상당수는 미국과의 교역에 따른 것이었다. 근대적인 병원·학교·교회·신문사 등이 세워졌고, 1898년에는 서대문과 홍릉(洪陵) 사이에 전차가 부설되고, 1899년에는 경인선의 개통과 전화의 가설, 1900년에는 한강가교가 준공되었다. 그러나 계속하여 근대적인 상공업 발달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1895년 5월 26일 고종이 전국을 23부로 나누면서 한성부를 하나의 지방행정구역으로 개편하였고 1910년 총독부령에 따라 경성부로 개칭되었다.

 

지리

조선 시대의 한성부의 구역은 오늘날의 서울보다 훨씬 협소하였다. 동쪽의 낙타산, 서쪽의 인왕산, 남쪽의 목멱산, 북쪽의 백악산으로 둘러싸인 분지가 그 터전으로서, 성 밖의 일부 지역도 관할했지만, 원칙적으로 성 안의 구역만을 한양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