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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66 : 조선의 역사 8 (태조실록 1)

두바퀴인생 2012. 1. 16. 02:02

 

 

 

 

한국의 역사 466 : 조선의 역사 8 (태조실록 1)

 

 

              

 

 

태조 이성계
조선 태조
조선의 초대 국왕
전주의 경기전에 있는 태조의 어진
전주의 경기전에 있는 태조의 어진
본명 이성계
재위 1392년 음력 7월 16일 ~ 1398년 음력 9월 5일
대관식 1392년 음력 7월 16일 개경
별명 자는 중결(仲潔) 또는 군진(君晋), 개명한 이름은 단(旦), 호는 송헌(松軒)·송헌거사(松軒居士), 몽골식 이름 아기바토르(阿其拔都)
출생일 1335년 음력 10월 11일
출생지 함경도 화령군 영흥 흑석리
사망일 1408년 음력 5월 24일
사망지 창덕궁 광연루 별전
매장지 경기도 구리시 건원릉
배우자 신의왕후
신덕왕후
부친 환조
모친 의혜왕후
전임자 (왕조 개국)
다음 왕 정종
왕조 조선
묘호 태조
시호 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
고황제
이성계 (李成桂)
1335년 음력 10월 11일 ~ 1408년 음력 5월 24일
별명
태어난 곳 고려 함경남도 함흥부
죽은 곳 조선 한성부
복무 고려 육군
최종 계급 문하시중(종1품급)
지휘 고려 육군
주요 참전 제1차 요동 정벌1388), 제2차 요동 정벌1392)
기타 이력 조선의 제1대 왕

 

 

조선 태조(太祖, 1335년 음력 10월 11일 ~ 1408년 음력 5월 24일, 재위 1392년 음력 7월 16일 ~ 1398년 음력 9월 5일)는 고려 말의 무신, 군인이자 조선의 초대 이다. (姓)은 (李), 본관전주, (旦), 초명은 성계(成桂), 초자는 중결(仲潔), 자는 군진(君晋), 는 송헌(松軒)·송헌거사(松軒居士)이며 몽골식 이름은 아기바토르(阿其拔都)이다.

 

고려에서 관직은 수문하시중에 이르렀고, 1392년 7월 고려 공양왕으로부터 양위의 형식으로 조선개국하였다. 원래 이름은 성계였으나 조선건국 후 단으로 이름개명하였다.

 

시호태조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며 이후 존호를 더하고 대한제국명나라에서 내린 시호 강헌(康獻)을 폐지하고 고황제(高皇帝)로 추존하여 정식 시호태조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太祖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이다. 재위 기간은 6년 2개월이며, 상왕위(上王位)에는 약 10년 동안 있었다. 향년은 74세이고 능은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건원릉(健元陵)이다.

 

출생과 가계

태조 이성계는 1335년 음력 10월 11일 원나라 쌍성총관부에 속해있던 함경도 영흥 흑석리에서 환조 이자춘의혜왕후 최씨의 적자로 태어났다. 어느 날 당시 쌍성총관부 만호 관리를 지내던 이자춘이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하늘에서 오색 구름을 타고 선녀가 내려왔다. 그 선녀는 이자춘에게 절을 하고 “천계에서 그대에게 내리는 것이니, 장차 이것을 동쪽 나라를 측량할 때 쓰십시오.”라며 소매 속에서 침척(바느질에 사용하는 자)을 꺼내 바쳤다. 이자춘이 그 자를 받은 뒤에 부인 최씨는 임신을 하였고, 13개월 만에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태어날 때 부터 총명하고 우뚝한 콧마루와 임금다운 얼굴로서, 신채는 영특하고 준수하며, 지략과 용맹은 월등하게 뛰어났다 고 한다.

그에게는 어머니가 다른 이복 형인 완풍대군 원계(元桂)와 역시 어머니가 다른 이복 동생 의안대군 화가 있었다.

 

유년기

어릴때에는 화령과 함주근처에서 살았다. 그 당시에 북방 민족들이 를 구하러 주로 내려왔는데, 흔히 말하길 "이성계와 같이 뛰어나게 걸출한 매를 얻고싶다"고 하였다.

 

고려의 무신(武臣) 가문 출신인 이성계는 어릴 때부터 영웅의 기질을 타고나서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며, 용맹하기가 그지없어서 전쟁터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특히 활을 잘 쏘아서 ‘신궁(神弓)’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천하의 명궁으로 알려졌다. 훗날 그의 눈부신 활약상에 관해서는 여러 영웅담이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으며, 이성계는 30여 년 동안 전장에 나아가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원나라와 홍건적 격퇴

1356년(공민왕 5) 유인우공민왕의 명을 받들어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아버지와 함께 공을 세웠고, 1361년에 상만호(上萬戶)가 되어 고려의 함주 지방(함경도 지역)의 경비를 맡았다.

 

1361년 음력 10월에 고려 정부의 명령을 받고 출동하여 독로강 만호(禿魯江萬戶) 박의(朴儀)의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같은 달에 다시 압록강의 결빙을 이용하여 홍건적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의 영내에 침입하여 삽시간에 수도가 함락되자 이성계는 휘하의 고려인 및 여진족으로 구성된 강력한 친병 조직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 작전에 참가하였다. 1362년 그는 선봉에 서서 말을 탄 채 장수만 골라 쏘는 맹공을 펼쳐 마침내 홍건적의 괴수 사유(沙劉)와 관선생(關先生)까지 참살하고 수도에 제일 먼저 입성해 탈환하는 큰 전공을 세워 두각을 나타냈다.

 

1362년 심양행성 승상(審陽行省丞相)을 자처한 원나라 장수 나하추 (納哈出)가 수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함경도 홍원 지방으로 쳐들어와 기세를 올리자, 고려 정부에서는 이성계를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삼아 적을 막게 하였다. 여러 차례의 격전 끝에 마침내 함흥 평야에서 원나라 군대를 격퇴시켜 명성을 크게 떨쳤다. 적장인 나하추마저 이성계의 뛰어난 용맹과 탁월한 군사적 재능에 감탄하며 깊이 존경할 정도였다.

 

1364년 원나라에 있던 최유(崔濡)가 공민왕을 몰아내고 덕흥군(德興君)을 세우려고 압록강을 넘어 침입하자 이를 막았고, 함주를 침공한 김삼선(金三善)·김삼개(金三介) 형제를 격퇴하여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임명되었으며, 1370년 요동에 있는 원나라 동녕부(東寧府)를 원정하여 공을 세웠다.

 

 

왜구 격퇴

고려 말기에는 왜구의 약탈 또한 빈번하여, 고려를 괴롭혔다. 이처럼 왜구의 폐해가 극심해지자 고려 정부에서는 군대를 파견하여 제압하려고 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마침 1380년 이키 섬 출신 아키바츠(阿只拔都)라고 하는 소년 장수가 왜구를 이끌고 고려를 침공하여 지리산 일대를 약탈하며 북진을 하자 이성계는 삼도 도원수(三道都元帥)로 임명되어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였다. 전라도 운봉에 도착한 이성계는 운봉을 넘다가 길 오른쪽의 험한 길을 보고 “적이 반드시 이 길로 우리를 갑자기 습격하려 올 것이니, 우리도 이 길로 들어가야 한다”라고 말하고는 험한 곳에 들어갔는데, 과연 이성계의 예측대로 왜구가 습격해 왔다. 이에 이성계는 화살 70여 발을 쏘아 모두 얼굴을 맞히니, 왜구들이 활시위 소리를 따라 모두 쓰러졌다. 마침내 이성계의 군대가 황산에 진을 치고 왜구와 대치하게 되었다.

 

아키바츠는 고려군이 토벌에 나선 것을 알았지만 자신의 힘만을 믿고 교만을 부리다가 이성계가 쏜 화살에 맞아 죽었다. 이에 왜구의 기세는 크게 꺾여져서 물러났다. 당시 이성계는 아키바츠의 투구를 활로 쏘아 맞히어 벗긴 뒤 벗겨진 이마를 향해 다시 활을 쏘아 죽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화살 두 대를 연사하여 투구가 벗겨지자마자 다시 화살이 날아들어 맞아 죽었다고도 한다. 이에 왜구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고려군의 공격은 더욱 맹렬해져서 왜구의 정예부대가 모두 죽었다. 기록에 따르면 “죽임을 당하는 왜구의 곡성이 마치 만 마리의 의 울음소리 같았고, 냇물이 모두 그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라고 한다. 이 전투를 ‘황산대첩(荒山大捷)’이라고 한다. 이때 이색, 김구용, 권근이 시를 지어 승리를 하례하였다.

 

이렇듯 고려 말기의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상황은 이성계를 변방의 무명 장수에서 일약 고려 제일의 장수이자 영웅으로 만들었다. 계속되는 승전은 이성계의 무장으로서의 진가를 확실하게 보여주어 고려 내에서 입지를 굳히게 만들었다. 백성들의 신망을 받게 되었고, 그에 따라 벼슬도 올라갔다. 군사력을 갖춘 신망받는 이성계에게는 자연히 신진 사대부들이 몰려들었다.

 

위화도 회군

 

 

정치적 동지 포은 정몽주
(후에 역성혁명과 온건혁명의 방법차이로 정적이 된다.)

 

 

최영과 협력하여 이인임 일당의 전횡을 제거하고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이르렀다.

 

우왕 때(1388년) 우군 도통사(右軍都統使)가 되어 요동을 정벌하러 갔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반대파를 제거하고 권력을 잡았다. 당시 중국원나라명나라 교체기에 있어 고려에 친원파와 친명파 사이의 대립이 확대되었다. 이에 고려에서는 요동 정벌을 논하였고, 이성계는 그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이성계가 진군하다가 위화도에 이르렀을 때 장맛비가 계속 내렸으므로 회군을 청하였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자 군사들을 설득하여 회군하였다. 회군하기 전에 장맛비가 내림에도 불구하고 강물이 불어나지 않았는데, 막상 회군하여 군사들이 강을 건너자 갑자기 강물이 밀려와 위화도가 물 속에 잠겨 버렸다고 한다. 회군한 이성계는 우왕을 폐위하여 군사적 실권을 장악한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이때 길가의 어린 아이들이 “나무의 아들(木子)이 나라를 차지하리라.”라는 동요(참요)를 부르자 백성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따라 불렀다고 한다.

 

정적 숙청

 

 

즉위 초기 영정사진 (1837년작)

 

 

그가 역성혁명파를 이끌고 신 왕조를 수립할 계획을 세우자 그를 지지했던 이색, 정몽주는 모두 그의 적으로 변신한다. 정도전을 통해 이색정몽주를 탄핵하여 조정에서 축출하는 한편,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우왕의 장인이자 무장인 최영을 반역죄로 몰아 처형한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이후 삼군 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가 되어 조준 등과 결탁하여 사전(私田)을 개혁하고 특권층의 세력을 좌절시키는 한편 신흥세력의 기반을 굳게 하였다. 우왕 때에 정치 일선에서 배제되었던 신진 사대부도 속속 정계에 복귀하여 본격적인 개혁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하지만 신진 사대부 사이에는 사회의 모순에 대한 개혁의 방향을 둘러싸고 서로 대립하였다. 이색, 정몽주 등 온건 개혁파는 고려 왕실을 보존하여 그 틀 안에서 점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다. 반면 정도전 등 급진 개혁파는 고려 왕조를 부정하는 쿠데타를 주장하였다. 그런가운데 이성계파는 점차 쿠데타를 시도하기 위한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1392년 정몽주정도전, 조준 등을 줄기차게 탄핵하는 한편, 기회를 봐서 이성계를 제거하려는 시도를 보인다. 이성계가 병을 칭하여 은신해 있자, 정몽주는 그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직접 말을 타고 왔는데, 이때 다섯째 아들 방원정몽주를 추격하여 선죽교에서 타살한다. 그뒤 신하들은 공양왕에게 양위할 것을 청하였고, 공양왕은 스스로 부덕함을 탓하며 1392년 7월 양위를 선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