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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79 : 조선의 역사 21 (태종실록 1) 본문
한국의 역사 479 : 조선의 역사 21 (태종실록 1)
제3대 태종
태종(太宗, 1367년 음력 5월 16일 ~ 1422년 음력 5월 10일, 재위 1400년 ~ 1418년)은 고려, 조선의 문신이자 조선의 제3대 임금이다. 휘는 방원(芳遠), 자는 유덕(遺德)이다. 왕자 때 받은 군호는 정안군(靖安君), 정안대군(靖安大君)이고, 사후 시호는 태종공정성덕신공문무광효대왕(太宗恭定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이며 이후 존호를 더하여 정식 시호는 태종공정성덕신공건천체극대정계우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太宗恭定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啓佑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이다.
과거 급제 후 명나라의 사신으로 이색을 수행하였으며, 이성계를 제거하려던 정몽주를 제거하고, 반대파들을 제거하여 조선건국의 기틀을 다져놓았다. 그러나 조선건국 이후, 건국에 기여한 전비 한씨 소생 자녀들은 외면하고 신덕왕후 소생 아들 중 세자를 정한 부왕과 정도전의 처사에 반발하여 제1차 왕자의 난과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반대파를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한다.
조선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 한씨의 다섯 번째 아들이며, 비는 민제의 딸 원경왕후(元敬王后)이다. 공신들을 추방하고 자신의 처남과 사돈 등의 외척을 숙청하여 왕권을 강화시켰다. 태조 이후 아직 왕권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던 조선의 기틀을 다져서 사실상 조선의 창업 군주로 불린다. 1402년 탐라 성주가 인부(印符 : 朱記)를 왕에게 반납하여 조선에 완전 병합되었다.
출생과 가계
태종 이방원은 1367년(공민왕 16년) 음력 5월 16일 고려 북동부, 함경도 함흥 귀주동(歸州洞)의 사저에서 태조 이성계와 증 영문하부사(贈領門下府事) 안천부원군(安川府院君) 한경(韓卿)의 딸 신의왕후 한씨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태조의 아들들이 대개 무인으로 성장했지만 이방원은 무예나 격구보다는 학문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위의 형들과 달리 학문을 가까이했다.
태종실록에 의하면 아들의 탄생이 특이하다 생각되었던 어머니 한씨(韓氏)가 점장이 문성윤(文成允)에게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이 사주(四柱)는 귀하기가 말할 수 없으니, 조심하고 점장이[卜人]에게 경솔히 물어보지 말라고 했다 한다. 뒷날 그의 손에 죽는 남은(南誾)은 어린 그를 보며 '이 사람은 하늘을 덮을 영기(英氣)이다.'라며 찬탄했다 한다. 유소년 시절 그는 성균관에서 수학하였고, 1381년(고려 우왕 8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과거 급제
1382년(고려 우왕 9년) 문과에 병과 7등으로 급제하였을 때 아버지 이성계와 어머니 한씨가 매우 기뻐하였다.
그는 1388년에 명나라에 파견되는 정조사의 서장관으로 이색을 따라 북경에 다녀온 이후, 아버지가 위화도 회군을 일으키자 가솔들과 함께 동북면으로 피신했으며, 아버지를 도와 고려 왕조 유지 세력을 제거하였다. 특히 부하인 조영무와 함께 정몽주 제거 계획을 세운다.
1390년 밀직사대언(密直司代言)에 임명되었고, 1391년 모후 신의왕후가 사망하자 개성군 상도리에 장사하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그러나 정몽주 일파가 이성계를 제거할 계획을 꾸미자 계모 강씨의 명으로 여묘살이를 중단하고 해주로 건너가 이성계를 개경으로 불러낸다.
역성 혁명 활동
정몽주, 온건파 제거
1392년(공양왕 4) 3월 아버지 이성계가 말에서 굴러 떨어져 부상을 당했다. 이성계는 병을 핑계로 은신했는데, 어머니 한씨의 상으로 경기도 영평에서 시묘살이 중이던 그는 계모 강씨의 급한 부름으로 개경의 집으로 되돌아온다.
정몽주 등은 이성계의 낙마사건을 계기로 이성계파의 인물들을 제거하고 그간의 개혁법령을 폐지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병문안을 빌미로 이성계의 가택을 방문하는 치밀함을 보인다. 그는 아버지 이성계에게 정몽주를 제거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이성계는 주저하였다.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정몽주를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일 것을 지시했다. 이에 이방원은 정몽주를 자택으로 오면 죽일 것을 결심하고 수하들에게 준비토로 지시했다. 정몽주는 정세를 엿보러 핑계를 대고 이성계를 병문안하러 왔다. 그때 정몽주와 이방원이 주고 받은 시조가 바로 《단심가》(丹心歌)와 《하여가》(何如歌)이다. 이방원은 마지막으로 정몽주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그와 마주앉아 시조 한 수를 읊었다.
“ | 此亦何如彼亦何如 /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城隍堂後垣頹落亦何如 /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我輩若此爲不死亦何如 /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 년까지 누리리라 |
” |
《하여가(何如歌)》라는 제목의 이 시조는 망하기 일보 직전인 고려 왕실을 붙들려 하지 말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 새로운 왕조를 창업하는 일에 동참하는 것이 어떠하겠느냐는 내용이었다.
정몽주는 이에 《단심가(丹心歌)》로 그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 | 此身死了死了一百番更死了 /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白骨爲塵土魂魄有無也 /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鄕主一片丹心寧有改理歟 /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 |
결국 정몽주는 결코 회유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결론을 내린 이방원은 조영무와 함께 무사를 보내 선지교에서 정몽주를 맞춰 말에서 굴러 떨어뜨린 뒤 교각 위에서 때려 죽이도록 지시하였다. 정몽주가 죽은 후에 이 자리에서 대나무가 솟았다고 하여 선죽교라 부르게 된다. 이어 그는 정봉주 일파인 이색과 그의 두 아들 및 그의 제자인 이숭인, 길재 등을 숙청하여 반대파를 제거한다.
그러나 뒤에 방원은 1398년 정도전을 숙청한 뒤에 정몽주를 충철의 상징으로 현창시켜 익양부원군에 추증하고 영의정부사를 추서한다. 이는 정도전을 깎아내리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이기도 했다.
조선 건국
이방원은 정몽주 등을 제거함으로써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진 세력의 기반을 굳건하게 하여 새로운 왕조인 조선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392년 이성계가 태조로 등극함에 따라 이방원은 정안군(靖安君)에 봉해졌다가 다시 정안대군 (靖安大君)에 봉해졌다.
원래 왕세자를 장자로 세워야 하는 것이 원칙이나, 조선 개국에 회의적이었던 태조의 장남인 진안대군 방우를 제치고, 신하들은 가장 유능한 왕자를 세자로 세우라고 주청을 올렸다. 개국의 공로를 따지면 이방원이 태조의 아들 중 가장 많은 공을 세웠으나, 당시 "왕권(王權)보다 신권(臣權)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국정이 안정된다"는 신권을 주창하던 정도전은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면 신권을 주장하는 자기들을 제거할까 봐 두려워 결국 왕세자로 태조의 막내아들이자 계비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의안대군 방석을 선택하였다.
세자 책봉을 놓고 세자 책봉 1순위는 개국에 공을 세운 이방원이었으나 개국공신 간에 이견이 발생했을 때, 신덕왕후가 전각 뒤에 숨어서 이를 엿듣다가 통곡소리를 냈고, 그때 정도전 등은 무안대군 방번을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방번은 성격이 난폭하였으므로 뒤에 의안대군으로 교체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방원은 심히 불쾌감을 드러냈고, 형제들을 찾아가 정실 부인의 자제를 두고 후실의 자제를 세자로 책봉하였다며 불만을 드러냈다.
왕자의 난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왕자들은 이에 크게 불만을 나타냈으며 그것은 누구보다 조선 개국에 공이 컸던 이방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정도전이 왕자들의 정치 언급을 막고 급기야 사병 혁파를 기도하는 등 이방원과 마찰을 빚자, 이방원은 1398년에 부왕 태조가 와병 중임을 틈타 아내 민씨의 후원과 하륜·이숙번·사촌 이천우·처남 민무구·민무질 등과 함께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남은과 배다른 동생들인 무안대군 방번·세자 방석 등을 몰아내어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 일이 있은후 얼마 안가 태조는 권력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영안대군 방과에게 보위를 물려주고 함흥으로 떠났다. 왕위를 물려받은 태조의 둘째 아들 방과가 바로 조선의 제2대 국왕 정종이다. 이때 아버지 이성계의 서형인 이원계의 아들들이 그를 지지한다. 이천우(李天祐) 등은 군사를 이끌고 그를 도와 궁궐 장악에 성공한다.
하지만 형제들간의 다시 한번 분란이 발생하는데, 이방원의 넷째 형인 회안대군 방간이 박포의 꼬드김에 넘어가 왕위에 오를 목적으로 1400년에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이때에도 이천우 등이 그를 도왔고, 상대적으로 우수한 장수들과 병사들을 가지고 있던 이방원은 쉽게 이 난을 진압하고 왕위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되었다. 이후 박포등을 처형하고 회안대군과 아들 맹종을 귀양보낸다. 이때에도 회안대군을 죽여야 된다는 여론이 나왔으나 그는 유배선에서 불문율로 부친다.
그해 음력 2월에 정종으로부터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책봉된 지 9개월 만에 정종의 양위를 받아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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