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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78 : 조선의 역사 20 (정종실록 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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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78 : 조선의 역사 20 (정종실록 2)

두바퀴인생 2012. 1. 28. 05:38

 

 

 

한국의 역사 478 : 조선의 역사 20 (정종실록 2)

 

 

       

 

 

  

정종실록(1357~1419년, 재위 1398년 9월 ~ 1400년 11월, 2년 2개월)

 

 

3. 정종의 등극과 퇴위

 

'왕자의 난'으로 방석과 방번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태조는 그 다음 달인 1398년 9월 둘째 아들 방과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상왕으로 물러나고, 방과는 동생 방원의 뜻에 따라 조선 제2대 왕으로 등극했다.

 

영안군 방과는 원래 왕위에 뜻이 없었다. 세자 책봉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도 그는 "당초부터 대의를 주창하고 개국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업적은 모두 정안군(방원)의 공로인데 내가 어찌 세자가 될 수 있느냐?"고 반문하며 세자되기를 극구 사양하였다. 그러나 방원의 강권으로 세자로 책봉되었고, 1개월 후에 태조가 물러나면서 불안한 왕위에 올랐다. 방원은일차적으로 도덕성과 대의명분을 살리고 자신은 다음 차례를 기다린 것이었다.

 

태조가 물러난 것은 자의보다 타의에 의한 면이 짙다. 이미 조정은 방원의 세력이 포진하고 있었고, 태조는 와병 중이어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방원의 형식적인 양보로 즉위한 정종이 비록 왕좌에 있긴 했지만 조정의 모든 권력이 방원의 손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날이 불안한 자리였고 방원의 눈치를 보면서 허수아비처럼 행동할 뿐, 모든 결정권은 방원이 쥐고 있었다. 그래서 정종조의 정치는 거의 정안군 방원의 뜻에 따라 진행되었다.

 

1399년 한양의 지향에 문제가 있다 하여 수도를 다시 개경으로 옮겨 갔으며, 같은 해 8월 분경금지법을 제정, 관인이 왕족과 외척들에게 의존하는 것을 금지하여 권력을 가진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켰다. 그 후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방원을 세자로 책봉하였고, 그해에 왕족 및 권력가들의 사병을 혁파하고 병권을 의흥삼군부로 집중시켰다. 또한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치고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치면서, 삼군부에 직을 두고 있는 자는 의정부에 합좌하지 못하게 해 정무와 군정을 분리했다. 이러한 일련의 개혁은 왕권 강화를 위한 것으로 모두 방원의 영향력 하에 이루어졌다.

 

1399년 3월에는 집현전을 설치하여 장서와 경적의 강론을 담당하게 하였으며, 5월에는 태조 때 완성된 <향약제생집성방>을 편찬하였고, 이듬해 6월에는 '노비변정도감'을 설치하여 노비의 변속을 관리하였다.

 

정종은 재위시에 정무보다는 격구 등의 오락에 탐닉했는대 이는 나름의 보신책이기도 하였다. 이런 보신책 덕분에 정종은 방원과의 우애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1400년 11월 마침내 방원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상왕으로 물러나는 것은 그와 그의 정비 정안왕후의 간절한 바램이기도 했다. 왜냐면 그것이 현실적으로 목숨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정종은 상왕으로 물러난 뒤에는 인덕궁에 거주하면서 주로 격구, 사냥, 온천, 연회 등의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다가 왕위에서 물러난 19년 후인 세종 원년에 6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죽은 후에도 오랫동안 묘호도 없이 공정대왕으로 불리다가, 1681년 숙종 7년에 비로소 정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그의 능은 후릉으로 개성시 판문구 령정리에 있으며, 정안왕후 김씨와 함께 묻혀 있다. 정종의 묘호가 숙종 대에 와서 정해진 것과, 능이 일반 왕족들이 묻히는 개성시 판문구에 있는 점으로 보아 그는 조선 중기까지 왕으로 대우를 받지 못하였던 듯하다.   

 

 

4. 정종의 가족들

 

정종은 1명의 정비와 9명의 후궁을 두었으며, 정비에게서는 자식을 얻지 못하고 후궁들에게서 서자 17명, 서녀 8명을 얻었다.

 

정종은 짧은 치세에 비해 후궁이 많은 편이었다. 정식으로 선원록에 기록된 그의 후궁은 성빈 지씨, 숙의 지씨, 숙의 기씨, 숙의 문씨, 숙의 윤씨, 숙의 이씨 등 6명이지만, 이외에도 가의궁주 유씨, 시비 기매, 이름이 전하지 않는 후궁 등 3명이 더 있어 총 9명이다.

 

정안왕후 김씨(1355~1421년)

정안왕후 김씨는 경주 김씨 천서의 딸이다. 1398년 방원의 난이 일어나 영안대군(정종)이 세자에 오르자, 덕빈에 책봉되었고, 그해 9월에 정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덕비에 책봉되었다. 1400년 정종이 태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면서 순덕왕대비의 존호를 받았고, 1421년 58세를 일기로 죽었다. 소생은 없었다.

 

야사에는 정종에게 왕좌를 내주라고 권유한 사람은 정안왕후 김씨라고 한다. 김씨는 정종이 왕위를 더 오래 유지하고 있다가는 방원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잠자리에서 정종에게 그만 물러날 것을 권고하였고, 정종 역시 그녀의 생각과 같았기에 권고받은 바로 다음 날 왕위에서 물러났다고 한다. 그만큼 정종과 정안왕후는 잠자리에서조차 죽음을 걱정해야 될 정도로 동생 방원을 두려워했는데, 이는 실권 없는 왕과 왕후의 처지가 얼마나 비참하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능은 정종과 같은 곳에 마련되었으며, 능호는 후릉이다.

 

 

5. <정종실록> 편찬 경위

 

<정종실록>은 총 6권 1책으로 구성되었으며, 1399년 1월에서 1400년 12월까지 2년 동안 있었던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연원일 순에 따라 편년체로 서술하고 있다. 원래 명칭은 '공정왕실록'이며 숙종 때 정종이라는 묘호가 정해진 뒤로 비로소, <정종실록>이라 불리게 되었다. 현재 다른 실록과 함께 국보 151호로 지정되어 있다.

 

1422년 세종 4년 태종이 죽자 이듬해 12월 세종은 공정왕과 태종의 양조실록을 수찬하라고 지시하고 사관들에게 사초를 제출하라고 명했다. 사초 제출 시한은 한성에 있는 자는 그해 2월까지, 경기도 등의 중부권에 있는 자는 3월까지, 그리고 경상, 전라, 평안, 함경도에 있는 자는 4월까지 제출토록 하였다.

 

편찬 작업은 1423년 3월부터 시작하여 3년 뒤인 1426년 8월에 '공정왕실록'이 먼저 완성되었다. 편찬 장소는 동부 연희방에 있는 덕흥사 내에 마련한 사국이었으며 책임자는 변계량과 윤희였다. 하지만 1430년 변계량이 사망하자 좌의정 황희와 우의정 맹사성이 가담하였다.

 

그 뒤 1438년, 변계량이 지은 헌릉 비문 가운데 두 번에 걸친 왕자의 난에 대한 기술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되자 세종은 이를 개수하도록 하여 1442년에 개수작업이 완료되었다.

 

<공정왕실록>은 7년 동안 작업 끝에 1431년 <태조실록>, <태종실록>과 함께 충주사고에 봉안되었고, 1445년 3부를 더 필사하여 신설한 전주, 성주사고에 추가 봉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