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2012년 새해에 바라는 마음 4 본문
2012년 새해에 바라는 마음 4
"북한의 현재와 미래"
새해 아침
북녘 땅 어둠의 역사
북한은 남한과 마찬가지로 일제가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 후 강대국에 의해 남북한이 미소의 일본군 무장해제 당당구역으로 38도선을 중심으로 분리되면서 남북으로 분단되게 되었다. 당시 미소는 합의하기를 관동군 장악 지역은 소련군이, 기타 일본 대본영 당당지역은 미군이 무장해제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당시 북한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군 17사단이 대본영 직속으로 편제되어 임무를 수행하다가 전쟁 말기 소련군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대본역 직속에서 만주 지역을 관할하던 관동군으로 편제가 변경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남북분단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일본군 17사단이 만주를 관할하던 관동군으로 예속이 변경되지만 않았더라도 미군이 한반도 북부까지 일본군 부장해제를 당당하였을 것이며 소련군은 관동군이 장악하고 있던 만주 지역에 국한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리되지는 않았을 것이며 김일성이라는 소련군 대좌 출신이 북한에 정권을 세우지도 못햇을 것이다. 모두가 얄굿은 운명의 장난치고는 우리 민족에게 영원히 씻을 수 없는 한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은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자국의 영향력을 넓히려는 팽창야욕에 김일성을 앞세워 꼭두각시 정부를 수립하고 중공군의 팔로군, 항일 빨치산, 항일 유격대 등을 흡수하여 급속하게 군대를 조직하기 시작하였고 소련군의 지원으로 최신 전차 등으로 무장을 증강하였다. 그것은 남한까지 점령지역을 넓혀 영향권을 확장하려는 소련의 속셈이었다. 당시 미군정은 한국에서 각 파벌이 혼란을 거듭하는 가운데 미국에 가장 우호적이던 이승만에게 정부를 수립하도록 힘을 보태주고 남한에서 철수하였다. 당시 전후 미군 감축과 전략 변경에 따라 미국의 방어선은 한반도의 남한을 제외한 일본 본토를 연한 소위 '에치슨 선언'선언으로 방어선을 확정 발표하였다.
그래서 김일성은 자체 무력으로 남한을 정복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50년 6월 25일에 한국전쟁을 유발하였으며 당시 남한은 남로당을 포함한 반정부 세력들이 제주 4.3폭동, 국회 프락치 사건, 정판사 사건, 대구 폭동 등 남한 각지에서 폭동을 획책하고 여순.춘천 반란 사건 등 군내 반란을 일으키는 등 남한 전역이 정치적, 사회적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을 즈음이었다. 북한군의 계획된 기습남침으로 큰소리치던 한국군은 38선 일대에서 추풍낙엽처럼 무너졌고 전전선이 동시에 붕괴되기 시작하였으며 패닉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당시 북한군의 강력한 공격에 축차적으로 투입된 남한의 후방 사단들이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공격에 연기처럼 사라졌다. 북한군은 단기간내에 서울을 점령하고 전차를 앞세우고 파죽지세로 내려오면서 멕아더에 의해 신속하게 투입되었던 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를 오산 근방 죽미령에서 격파하고 금강선을 연하여 대전을 방어하던 미 제24사단을 붕괴시키고 사단장 딘 소장을 포로로 잡는 등 전과를 올리면서 낙동강까지 진출하였다.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포항, 영천, 다부동, 왜관, 고령, 진주 등지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며 부산교두보만 남겨둔 상태로 적화통일을 목전에 두었다. 그러나 유엔군 사령관 멕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후방이 차단되자 북한군의 낙동강 전선은 순식간에 붕괴되기 시작하였고 이에 서울을 탈환한 유엔군이 38도선을 돌파, 북진하여 평양을 탈환하고 압록강 초산까지 진출하였고 미 제1해병사단은 장진호로 진격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엔군도 마찬가지로 통일을 목전에 두었으나 중공군의 대규모 개입과 인해전술, 포위전술로 유엔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후퇴를 시작하여 휴전선 근방에서 지리한 공방전을 벌이다가 전쟁 발발 3년 만에 휴전이 성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동안 북한은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세습왕조를 구축하면서 우상화에 열중하였고 재래식 무력 증강은 물론 미사일, 핵무기까지 개발하는 등 무력증강만이 자신들의 체제가 살 길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기에 강성대국 건설에 매진하여 왔다. 그러나 무리한 군사력 증강 투자로 경제가 마비되고 생산성이 떨어지며 공산주의식의 집단농장체제가 무너지면서 폭압통치가 계속되자 아사자가 속출하면서 도저히 살 수가 없다고 판단한 주민들이 압록강, 두만강을 연한 중국, 러시아쪽인 육로나 동.서해의 해로 등을 통해 탈북자가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북한은 지난 12월에 김정일이 사망하고 3대 세습 왕조를 이어받은 29살의 젊은 김정은이 두 형을 제치고 정권을 이어받고 있다. 그러나 김정은의 불안한 정권 인수로 무언가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으며 대남정책도 변화될 것으로 대부분 전망하고 있다.
그래서 북한은 군부가 강력한 힘을 배경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만큼 당분간은 정치적 안정화 작업에 몰두할 것이며 김정은이 군부를 포용하고 완전히 장악할 때까지는 군부의 동의 없이 김정은이 자신의 뜻대로는 함부로 하지는 못 할 것이다. 그래서 주민들의 이탈과 동요를 방지하고 군부의 입김에 따라 강경책 위주의 대미전략과 대남전략 등 무리한 군부 위주의 정책을 추진할 가능성이 많다. 따라서 대남도발. 책동도 군부가 주동이 되어 도발할 가능성이 농후한 실정이다.
북한 정세의 불안정성
북중관계의 겉과 속은 우리들이 보기와는 다르다.
북한 김일성은 생전에 “중국을 믿지 말라”고 했다. 1950년대 종파투쟁 당시 소련파, 남로당파, 갑산파는 물론 중국계 연안파도 숙청했다. 원시적인 ‘주체’ 노선이 생겨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외교는 중·소 등거리 노선으로 밀고 나갔다.
북·중은 6·25전쟁을 함께 치른 혈맹관계다. 그런데도 김일성은 ‘베이징 사모곡’을 부르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중화론(中禍論)을 거론하곤 했다. 왜 그랬을까. 중국의 이민족 침탈과 영토 합병 역사를 두 눈으로 지켜봤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의 내몽골, 티베트, 위구르 등은 원래 남의 땅이었다.
미국 패권과 중국 패권의 차이점은 남의 땅을 먹느냐 안 먹느냐로 판가름하면 쉽다. 미국은 파나마,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지만 땅은 그 나라 국민에게 돌려줬다. 중국은 통째로 먹고도 배고파 한다. 허기를 채워줄 최후의 땅은 누가 봐도 북한이다. 중국은 한반도를 삼킬 준비를 하고 있는 아프리카의 맹수처럼 잇빨을 갈고 있다는 점이다.
김정일도 중국의 야심을 일찍부터 간파했다. 동북공정을 주도하는 후진타오와 감정싸움도 빈번했다. 2000년대 초의 일이다. 한번은 중국이 6·25 항미원조에 대해 보상을 요구하자 김정일이 발끈했다. 곧바로 대만과 우호관계를 추진한 그는 주북 중국대사관을 찾아가 “대만에 무기 팔아 갚겠다”고 큰소리친 적이 있었다. 중국이 분개하자 김정일은 방중으로 상황을 일단 무마했다. 하지만 분을 삭이지 못한 그는 귀국 후 친중 간부들을 숙청해 버렸다.
북·중 관계는 겉보기와는 다르다. 중국은 독자노선의 북이 강국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대북 지원도 간에 기별이 갈 정도만 한다. 북이 갑작스럽게 붕괴돼 미국을 등에 업은 한국이 흡수통일하는 상황도 거부한다. ‘현상유지’를 최상으로 보거나 아니면 한반도 전체를 자신들의 속구화 내지 완충지대로 삼으려는 속셈일 것이다.
김정일 사망 이후 중국은 주변국에게 “북을 흔들지 말라”고 했다. 북을 아주 걱정하는 척하지만, 알고 보면 헛웃음이 난다. 목장 주인이 소·돼지를 정성껏 키운다. 그게 도덕적이고 고상해서 그런것이; 아니라, ‘맛있는 요리감’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다. 북한을 보는 중국의 겉과 속도 그와 다르지 않다. 북도 안다. 그래서 힘겹게 버티고 있다. ‘중국 흡수’만은 절대 불가다.
핵무기를 들고 2300만 주민을 배고픔으로 내몰아 온 김일성 유일신교의 북한 운명은 여전히 예측불허다. 오늘 당장 무너져도 이상할 게 없고, 다시 10년 목숨을 이어간다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들은 '식물 국가적' 생존 방식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대북 정책도 북한 핵에 대한 단기적 처방과 북한 체제의 급변에 대비한 중·장기적 통일 대책을 적절히 혼용(混用)하는 수밖에 없다. 북한의 버릇을 고쳐주겠다는 매들기 처방이 이미 위험 상태에 다다른 북한의 중국 의존도를 더욱 심화(深化)시킬 경우, 그것이 과연 장기적 통일 정책에 도움이 될지 여부를 심사숙고해 볼 일이다.
중국의 한반도 통일관이 결코 우리에게 우호적이라고 할 수만은 없는 상황에서 북한의 중국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한반도 통일에 대한 중국의 발언권은 강화되고, 통일 문제의 중국화도 가속화될 것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북핵 단기 처방과 중·장기적 통일 전략 사이의 모순을 최소화하는 전략을 짜는 데 지혜를 모아야 한다. 통일은 어느날 갑자기 눈사태처럼 닥쳐올지 모른다는 것이다.
김정일이 죽고 김정은이 세습권력를 손에 쥐었다. 당분간 혼란이 가중 될 것으로 예상하였지만 지금까지 순조롭게 권력장악이 진행되고 잇는 모양이다. 김정은 북한 군부의 힘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군부의 위상과 군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휴전선,동.서해안이나 백령도,연평도 등지에서 일시 점령이나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과 같은 불장난을 저지를 가능성도 있으나, 남침에 대한 빌미와 한.미 공조보복에 대한 우려로 쉽게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다. 북은 그동안 남한의 설탕 맛을 맛나게 보았기에 마구 퍼주던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 그리울 것이다.
또 북한은 남한의 계속된 경제발전과 국제적 위상 고조에 대한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으며, 특히 IT 기술의 세계적인 선도기술개발과 우주선 발사체 개발에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우주선 발사체 개발은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 몇 안되는 국가중에 속하는 획기적인 일로 그들의 노동,대포동 장거리 발사체의 기술을 뛰어넘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재래식 무기는 점차 노후화되어가고 있으며 폐기처분해야 하는 전력이 만만치 않고 있는 실정이다. 병력이 많다고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그들은 아라크 전쟁이나 아프칸 전쟁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북한의 미래
김정일이 아버지 김일성을 보냈을 때엔 지천명의 나이였다. 공식 후계자로 지명되고 20년 동안 세자 수업도 충분히 마친 상태였다. 7년 전 어머니를 여읜 김정은은 김정일의 사망으로 천애의 고아가 됐다. 금년 나이 27세. 남한의 풍경에 대입하면 군복무를 마친 복학생 또는 입사시험을 막 통과한 사회초년생 정도에 해당한다. 병사한 어머니를 아련하게 떠올렸을 법한 이 청년은 아버지 시신 앞에서 북받치는 울음을 참느라 두 볼을 한참 불룩였다. 아버지의 깃발이 어떤 행로를 예고할 것인지를 감지하기에는 너무 어리고 벅찼다. 오히려 정체성 혼란이 빚은 눈물처럼 보였다.
세자 책봉을 위해 조부(祖父)의 헤어스타일과 의상으로 연출된 이 청년의 심중엔 머지않아 북한의 운명을 좌우할 심리적 모순과 정체성 혼란이 자라고 있다. 가장 눈여겨볼 대목은 적자가 아닌 데서 오는 열등감이다. 김일성은 그의 생모 고영희를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았다. 혈통을 중시하는 이 특이한 나라에서 정통성 결핍은 극단적 경계심을 낳는다. 게다가 그는 세상에 눈뜨는 사춘기를 낯선 이국땅에서 혼자 보냈다. 정신적 고립과 물질적 풍요가 혼합된 스위스 학생 시절의 추억은 춥고 어두운 북한 현실에 막연한 거부감과 이질감을 부추겼을 것이다. 귀국 후 받았던 6년간의 군사교육이 그를 현실로 되돌려 놓기는 했겠지만, 심리적 균열은 잠재되어 있다. 경계심·고립감·이질감을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상태에서 엄청난 권력이 주어졌다. 조부의 외모를 빌린 자신은 누구일까, 어리둥절할 것이다.
그는 스위스에서 민주주의를 배웠다. 조부의 망토가, 아버지의 절대권력이 명하는 철권통치와의 간극을 메우고 감당할 이론적·사상적 자산을 배양할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더욱이 백두혈통을 치장하는 항일무장투쟁의 조작된 역사와 자신을 일체화할 아무런 계기도 없는 터에, 만주 항일유적지를 데리고 다녔던 아버지의 안쓰러운 정치적 몸부림을 얼마나 내면화했을까? 실력 부족과 정체성 혼란에 직면하는 청년이 저 극단적 권력을 감당할 방법은 과대망상에 호소하는 길이다. 과대망상은 현실도피의 매혹적 방법인데, 자주 과시적 행위로 이어진다. 한국에도 이런 사람이 더러 있다.
그래서 이 청년에게 아버지의 깃발은 너무 버겁고 혹독하다. 김정일은 겨우 2년여간의 세자 수업을 해주는 대신 해결하기 난망한 유산을 남겼다. 핵문제, 땔감과 식량, 그리고 권력장악. 세계 현대사에서 이 세 가지 난제를 해결한 청년은 보지 못했다. 핵무기를 제외한다면, 27세에 권좌에 오른 리비아의 독재자 카다피와 33세에 쿠바를 장악한 카스트로가 있기는 하다. 그들은 폭력이나마 자기 실력으로 정권을 세웠고, 이데올로기도 만들었다. 북한에는 어지간해서 끄떡도 않는 무력이 존재한다. 그 무력집단 내부로 진입해 실권을 장악하는 일이 이 경험 없고 정통성이 취약한 청년에게 쉽겠는가?
북한전문가들은 엘리트 집단이 결속해야 할 절박성 때문에 김정은 체제가 안정될 거라고 예견한다. 그럴지 모른다. 그런데 북한정권의 아킬레스건인 혁명이념의 상징적 매력이 점점 쇠락한다면 어떻게 될까? 3대에 걸친 승계가 성공하려면 권력자가 상징자원을 갱신해야 한다. 적어도 김정일은 주체사상 수립 과정에서 노회한 혁명세대와 상징자원을 공유했다. 외모 외에는 주체사상과 하등 연관이 없는 신인류 김정은이 혁명을 운운한다고 해서 감동받을 일은 없다. 아버지 김정일은 '상징정치'가 하강하고 '현실정치'가 상승하는 교차로에 이 준비 안 된 아들을 몰아넣었다.
상징정치가 그나마 작동하려면 땔감과 식량조달이 선결과제다. 카다피는 석유로, 카스트로는 사탕수수와 바나나로 국민을 먹였다. 곡물생산이 조금 늘었지만 600만 명이 배를 곯고, 북한의 민둥산은 풀 한 포기 틔우기를 포기한 지 오래다. 핵이 남았다. 군부의 손에 말이다. 핵을 둘러싼 그 복잡한 방정식을 김정은 자신과 정치적 멘토들이 풀어내야 한다. 험악한 권력투쟁의 장에 내동댕이쳐지기 전에. 올겨울 그가 가장 먼저 착수해야 할 일이 핵정치에 관한 공부다. 핵공학보다 더 어려운 핵정치, 27세 청년에게 아버지의 유산은 험난하다. 여행은 시작되고 길은 없다. 지천명 나이까지 20여년, 그의 위태로운 곡예비행은 도대체 얼마나 갈까?
北 권력의 향배는
黨조직지도부 김경옥·황병서, 軍인사·감찰권 가져 핵심으로… 이들이 김정은에 충성할지 장성택과 협력할지는 미지수
軍실력자 리영호는 김정은 편
김정은은 1년여간의 후계 수업기간 동안 대부분을 군과 보안기관 장악에 투자했다. 하지만 대북 소식통은 "김정은의 입지가 약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라며 "김정은으로선 군 장악을 위해 당 실세들과 일종의 집단 영도 체제를 구축하려할 것"이라고 했다.
작년 9월 28일 44년 만에 열린 당대표자회를 통해 노동당의 기능과 위상을 어느 정도 회복시킨 것도 김정은의 군 장악을 수월하게 해주기 위한 김정일의 배려란 분석이 많다. 당시 북한은 당 규약 개정을 통해 "조선인민군은 당의 군대"임을 천명했었다. 현재 당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인 김정은이 김정일 사망으로 공석이 된 당중앙군사위원장이 되면 '당 총비서는 당중앙군사위원장이 된다'(22조)는 조항에 따라 당권도 장악할 근거가 생긴다. 이렇게 되면 당 조직지도부를 통해 군을 통제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조직지도부의 제1부부장인 김경옥과 부부장인 황병서는 모든 인민군 조직에 대한 감찰, 인사권을 갖는 막강한 인물들이다. 이들이 김정은에게 충성할지, 아니면 장성택 행정부장 등과 집단지도체제를 형성하려 할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우리 합동참모본부에 해당하는 총참모부는 전시(戰時) 지휘계통상 최고사령관의 직접 지시를 받아 북한군의 작전을 총지휘하는 기구다. 9개 정규 군단, 2개 기계화 군단, 평양방어사령부, 해군사령부, 공군사령부 등 실제 전쟁을 수행하는 육·해·공군 조직을 예하에 두고 있다. 안보부서 당국자는 "리영호가 지금처럼 김정은 편에 서 있는 한 쿠데타는 상상하기 어렵다"면서도 "김정은이 앞으로 얼마나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했다.
김일성 시절 군부 최고 권력기구였던 인민무력부는 총참모부의 급부상에 따라 최근 위상이 크게 꺾였다. 무력 동원 기능은 없고 군수, 행정, 외사 기능에 한정된 조직이 됐다. 김영춘(75) 인민무력부장(차수)은 1995년 '6군단 반란 사건'을 성공적으로 진압해 '김정일의 남자'로 한 시대를 풍미한 인물이다. 하지만 늙고 병든 그는 구시대 인물로 분류된다.
김정일 시대에 활약했던 군부 인사들은 대부분 60대 전후의 신군부 인맥으로 교체된 상태다. 남아있는 인사들은 주로 국방위원회에 포진하고 있다. 부위원장인 오극렬(80) 대장과 리용무(86) 차수, 국장인 현철해(77) 대장 등이 대표적이다. 대부분 고령인 이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정리될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통일부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NKSIS)에서 게시한 최이민, 이준운씨의 북한의 미래에 대한 분석 글이다.
북한의 미래에 대한 분석
우상화된 절대권력자 공백으로 인한 혼란한 북한
1994년 김일성의 사망 당시 김정일은 즉시 내부적으로 우선 보안 기구에 전시상태를 선포하고 장의위원회를 소집했었다. 그리고 7월 9일 12:00시 공식적으로 "7월 8일 새벽 2시 김일성이 급성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고 알렸다. 하지만 사실 일반에 알려진 것과 달리 김일성은 7월 7일 12:00~14:00사이에 낮잠을 자던 중 숨졌다. 이를 감안하면 김정일은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공식적 사망 시각보다는 34시간 늦게, 실제 사망 시각보다는 46~48시간이나 늦게 발표한 셈이다.
이번 김정일의 사망에 대해서도 북한은 "겹쌓인 정신 육체적 과로로 인한 중증급성 심장경색과 심장쇼크 합병으로 12월 17일 오전 8시 30분 사망"했다고 12월 19일 12시에 발표하였다. 과연 김정일이 12월 17일 죽었을까? 본지의 견해에 의하면 아마도 김정은도 김정일처럼 그렇게 빨리 발표하려고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현실적으로 현재 북한 김정은은 이전 김정일에 비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즉 김일성이 사망하였던 7월 9일 이전에 김정일은 국가보위부와 사회안전부(현재 인민보안성) 같은 보안 기구를 동원하여 모든 외부통신을 일체 절단하였었다.
그러나 현재 단동이나 심양에서는 평양까지 공식적인 통화를 살펴보면 김정은이 현재 아버지 김정일처럼 주도 세밀하게 북한의 안보기구를 장악하지 못하거나 컨트롤하지 못하는 것으로 확대 분석될 수 있는 명백한 증거를 발견할 수 있다.
북한 김정일이 사망함에 따라 국제적 시각이 3대 권력세습 후계자 김정은에게 쏠리고 있다. 즉 김정은이 김일성과 김정은으로 이어진 60여년 이상의 1인 독재 권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것인가에 대하여 관심이 극대화 되고 있다. 현재 북한 주민들의 슬픔은 김일성이 사망하였을 때보다 훨씬 적다고 한다.
또 김정은이 후계자로서의 ‘충성의 귀감’으로서 아버지 김정일이 할아버지 김일성에게 하였듯이 3년 상을 치루며 북한 내부 주민들에 대한 내부통제를 훨씬 더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북한주민들은 김정일이 김일성이 사망한 이후 내부단속을 위해 실시하였던 것처럼 ‘고난의 행군’(1994~1997)에 이어 ‘고난의 강행군’(1998~2000)을 거치면서 정권의 압제와 통제에 대하여 면역이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쉽게 말하여 지난 1990년대처럼 북한의 주민들은 또다시 어려운 ‘고난의 강강 행군’을 용납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럴수록 김정은은 내부의 반체제적인 경향과 반발을 억제하거나 외부로 돌리기 위하여 대남 및 대미 압박과 도발을 감행할 여지가 충분하다. 동시에 김정은은 아직도 김정일의 권력을 100%(김정은은 70% 이관됨) 이관 받지 못하였다. 아직 국정운영에 대한 경험이 지난 김정일의 방중과 방러 시기 도합 1달도 되지 않는 초짜로서 아직은 ‘지도자’로서 신뢰가 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반면에 북한은 2012년 강성대국을 선포하는 해로서 김일성의 생일 2012년 4월 15일을 최대 명절로 지금까지 고난의 행군을 거쳐 고생한 북한 주민들에게 물질적으로 무엇인가 확실하게 보여 주여야 하는 부담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2012년 전 세계적으로 경제적 환경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중국, 미국, 한국, 일본, 러시아 등 대부분의 리더십이 교체되는 전환점이다. 따라서 북한으로서는 그 어느 나라에게서도 확실한 경제적 지원을 받을 만한 담보가 없다. 최소한 북한 주민들의 동요를 막기 위하여 필요한 북한 파워엘리트와 중하위급 엘리트의 김정은에 대한 절대적 충성심을 유도하여야 할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그러나 김정은이 가지고 있는 카드는 제한되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중국이다. 중국과 김정은 주위 장성택 측근들과 군부엘리트들이 어떻게 변할지, 가장 중요하게는 군부의 세력이 어떤 선택을 할지가 주목되는 이유이다. 여기서 내부의 동요를 막고 주의를 외부로 돌리기 위해 북한의 도발이 예상되는 이유이다.
결론적으로 단기적으로는 대남, 대외적으로 강경정책을 실시할 것이며 동시에 내부적으로는 엄청난 대민 통제 및 압박 정책을 실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잘못 가해진 압박은 일정한 내부 압력에 대한 잘못된 정보로 하여 자칫 터질 확률이 많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때문에 김정은은 현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장기적으로는 개혁개방정책을 실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를 예비하여야 한다. 중국과 손을 확실히 잡고 김정은을 압박하여 북한이 개혁개방의 길로 유도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혹시라도 아주 적지만 단기간에 북한이 무너질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불확실성과 불안정성
김정은 후계체제가 공고화되지 못한 상황에서 강성대국의 초입에 도달하기도 전 최고지도자의 사망 이후 북한 체제는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으로 싸여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많은 연구 및 분석, 예상 시나리오들이 제시되고 있다. 개괄적으로 종합하여 분류하면, 북한체제붕괴론과 김정은 유일영도체제 구도 유지의 양 갈래로 나뉘고 있다. 현재로선 후자의 각본이 우세하나 장기적으로 예상치 못한 변수들의 존재 때문에 각별한 조정과 관찰이 견지되어야 할 것이다. 적지 않은 언론, 및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김정일의 정확한 사망 시간 및 장소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분분하나 명명백백한 것은 절반의 한반도를 통치하던 절대 권력자 김정일은 사망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현 북한 체제에 대한 심층 분석과 북한을 둘러싼 전략적으로 중요한 관계들에 대한 최상의 시나리오가 구축되어야 한다. 가령 실례를 든다면 핵무기나 미사일, 생화학무기 같은 WMD시스템의 장악과 버튼관리는 누가 최종적으로 가지고 있는지, 또한 김정일이 마지막까지 가지고 넘기지 않았던 개인비밀서재나 비자금관리에는 누가 최종적으로 접근할 기회를 가지고 있었는지, 또 김정일과 강석주와의 직접적인 커넥션에 따라 움직이던 북미 회담라인에 대한 결정권을 김정은이 현재 직접 행사하고 있는지 등에 대한 전략정보를 종합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김 위원장의 사망 이후 펼쳐진 한반도의 ‘불확실성’의 현재 상황에서 예상되는 각본들을 검토하고 분석하여 최대한 ‘확실성’의 로드맵을 작성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과연 김정은의 3대 권력세습체제의 전망예상은 어떨까?
권력세습체제의 전망
기본적으로 김정은의 3대 권력세습체제는 단기간은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비록 김정일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후계 시스템이 롱런할 정도로 안정되지 않은 상황이지만, 권력 교체를 위한 대안세력이 아직 조직화되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앞으로 아직 완전히 정비되지 않은 김정은 최측근 신진세력들과 김정일 사망 직전 기존의 기득권 구세력들 사이에는 일종의 권력다툼이 권력물갈이와 숙청으로 표면화될 것이다. 실제로 2009년 김정은이 후계자로 내정된 후, 후계구도 공고화를 위한 숙청의 일환으로 고위급들의 잦은 교체가 있었다. 이 숙청의 배후에는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과 김 위원장, 김정은과 장성택과의 모종의 ‘의기투합’이 있었다.
또한 이후 국방위원회도 지난날 김일성의 주석부가 기능을 상실하고 유명무실 또는 아예 없어진 것처럼 점차적으로 김정은의 전면등장과 함께 핵심권력조직에서 사라질 것이다. 동시에 현존하는 파워풀한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 겸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의 자문 역할도 점차적으로 사라질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김정은 권력세습체제를 전망하는 원칙에서 김정일의 사망 이후 가장 우세하게 예상되는 북한 체제에 대한 시나리오는 첫째로 김정은 체제 구축과 안정, 둘째로 통치 권력투쟁과 내전 양상의 구도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첫째로, 김정은 통치체제로의 과도기적 정권이양의 각본은 이미 현재 진행형이고 본지 소식통에 의하면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진척된 상황이다. 북한은 지난 12월 22일 노동신문이나 중앙통신 공개방송에서 김정은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을 ‘혁명위업의 계승자인민의 영도자’라고 칭하며 김정은의 유일 권력세습을 명확히 했다. 사실상 김정은 체제의 출범이 국내외적으로 공식화한 것이다. 다 아는바와 같이 김정일의 사망은 갑작스러웠으나, 건강상의 문제는 오래전부터 제기되어왔다. 그렇기에 김정일의 후계자로 내정되었던 김정은은 사실상 권력승계를 위한 전철을 비록 급진적이었지만 순차적으로 한 단계, 한 단계 꾸준히 밟아 왔었다는 것을 지난 5월 및 8월 방중시기 중국 최고위급들에게 발설한바 있다. 즉 당시 김정일은 시진핑에게 김정은이 “나대신 국내 일을 맡아서 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때문에 김정일은 이미 자기가 언제든지 죽을 수 있으며 이를 대비하여 김정은의 권력승계를 가속화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지난 있었을 1년도 안되는 사이에 3번째의 방중은 시사하는바가 크다. 또 김정일 사망이후 추진타오를 비롯한 중국 최고위급의 행보는 특별히 의미가 있다. 여기에 미국이나 러시아 같은 한반도 주변 강대국들 역시 조기에 김정은 권력세습구도를(암암리에) 받아들이고 있다. 소위 김정일의 유훈을 이어받은 김정은 체제는 크게 혈족(장성택과 김경희, 김정철과 김여정 등), 군부세력(이영호와 김정각, 우동측과 김원홍, 김영철 등), 노동당(최룡해, 박도춘, 김평해, 김기남, 최태복 등)이란 3대 옹위세력에 의해 통치 권력을 단기간동안(2~3년)은 유지될 수 있도록 이미 ‘수령의 후계자론’에 의해 담보될 것이다. 이들 권력 세력들 사이에도 분명히 권력을 더 많이 혹은 유지하려는 암암리 ‘갈등’이 유발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둘째로, 일정한 기간에 피치못할 북한 기득권권력 투쟁은 내전으로 전환될 가능성이 아예 없지도 않다. 즉 이러한 경우 내부분열에 의한 ‘김정은 체제 조기붕괴론’이 근본적으로 배제되지 않는다. 이를 추인하는 기본요인은 김정은의 불완전한 기득권 장악력과 김정은 체제를 전복하기 위한 중하위 층 군부의 반란기도가 근본적으로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랜 기간 김일성 가계 중심의 유일체제를 김일성 시대에는 점차적으로 ‘종파의 숙청’을 통해서 기초를 다졌고, 김정일 시대에는 김일성(수령)의 ‘유일사상체제’와 김정일(수령후계자)의 ‘유일적 영도체계’로 북한 사회 의식화의 통념으로 자리 잡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김정일이 수령의 후계자로 내정된 1974년부터 김일성이 죽은 1994년까지 무려 30년 간 북한 사회는 소위 주체사상-김일성주의의 근간인 ‘혁명적 수령관’과 ‘수령의 후계자론’이 내면적으로 ‘초헌법적인 정신’으로 각인되었다. 그러나 김일성의 사망은 북한 사회 밑뿌리를 흔들었다. 동시에 들이닥친 식량난, 경제난은 ‘혁명적 수령관’, ‘수령의 후계자론’이 절대로 밥을 먹여줄 수 없다는 것을 북한 주민들이 스스로 깨닫게 된 계기가 되었다. 결국 이러한 이데올로기적인 북한 사회의 통념들은 ‘시장의존필생법칙’으로 자연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것을 억제하기 위해 김정일은 강압적인 통제정책의 일환인 ‘선군정치’를 시도하고 강화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북한 주민들의 격앙된 생활궁핍을 전제로 일정한 수준에서 이완과 통제 정책을 유연하게 실시하였다. 하여 2002년 7월 1일 경제조치와 2009년 11월 ‘화폐개혁’(김일성이 죽은 후 꼭 15년 이후)을 북한 정권은 주도하였다. 결과 북한 주민들은 이젠 지난 김정일 시대처럼 생활난을 유지하면서까지 결코 현 김정은 체제를 인정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북한 사회가 당장 새로운 변화의 정점에 서있다는 것은 아니다. 사회나 그 어떤 체제 같은 시스템은 자기 본연의 내구력을 유지하려는 관성을 가지고 있다. 즉 1994년까지 30년 동안 유일지도체제에 의하여 공고화된 북한 사회체제의 내구력은 단순 산법으로 붕괴되는데 최소한 30년은 걸릴 것이다. 즉 붕괴시점은 대략 2024년 좌우로 가능해 질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중요하게는 시스템의 전환은 기존의 기득권 세력을 근본적으로 바꿀 새로운 대안세력의 존재유무와 관련된다. 지금 북한 내에는 아직 세습적 통치 권력에 대한 반대세력이 조직화되어 있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오히려 그 대안세력의 핵심이 될 북한 중하위급 군부 및 엘리트 세력이 각각 서로 갈라져 현 기득권 세력에 아부아첨하며 자기의 현 권력을 유지하면서 어부지리를 얻기 위한데 급급한 상황이다.
따라서 김정은의 3대 권력승계에 반기를 들고 내전으로 번질 조짐은 단기적으로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김정은이 일정하게 정비를 갖추고 단기적인 안정성을 유지하면서 중장기에도 유지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엇갈린다. 중요하게는 김경희는 건강상의 문제가 있고, 김정일 시대에 권력욕이 강했던 장성택 당 행정부장이 이제 갓 형성되어 권력의 정점자리에 올라 아직은 불안한 조카의 배후에서 2인자 혹은 3인자로 만족할 것인지 의문이다. 의외의 변수가 존재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북한 군부의 권력자들이 어떻게 나올지에 대한 분석 자료들이 많지 않다. 전망 분석도 가지각색이다.
한마디로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이 팽배한 북한의 현 정세는 앞으로 북한 내부의 기존 권력핵심세력과 김정은의 새 권력세력들 간의 균형과 관련이 높은데, 이에 북한의 가장 강력한 권력조직인 군부의 김정은 세습통치 권력에 대한 인정 및 찬반지지 여부가 큰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적으로 김 위원장 사망 이후 김정은 체제는 마치도 김정일의 사망이 이미 예정한 듯 별로 흔들림 없이 진척시키는 듯하다. 따라서 김정은의 권력이양의 구체적 모양새에 대한 우리의 민첩한 대응과 관계모색이 필요하다. 특히 북-중 관계를 심도 있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비록 북-중 혈맹관계가 어느 정도의 수준인가가 문제지만 북-중 양국 1961년의 우호동맹조약은 여전히 유효하다. 중국은 이미 남북통일이 자국에게는 큰 손실이자 새로운 갈등임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당분간은 한반도 분리정책을 유지할 것임을 이번에 김정일 사망이후 행동으로 공공연히 표현하였다.
따라서 중국과의 관계 형성을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불가능해도 중국과 우리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그만큼 북한은 양쪽에서 압박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북한과 중국 양 국 사이 균열을 이용할 필요가 있다. 그 균열은 북한의 대(對)중 요구와 중국의 대북 요구가 서로 정확히 일치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지난 화폐개혁시기 김정일은 중국의 경제적 지원에 대하여 많이 화가 나있었다.
갈 길이 급한 북한은 2012년 4월 15일 당장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훈인 ‘강성대국’의 원년으로 선포하는 동시에 북한 주민들에게 물질적으로 삶의 질을 높일만한 가시적인 무엇인가를 해결해주어야 한다. 한마디로 북한으로서는 당장 돈이 필요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 북한의 적지 않은 외화창구의 하나이었던 우리와 중동(리비아, 시리아, 이집트 등)의 대북지원이 사실상 결단난 판이다. 시간은 북한에게 유리하지는 않다. 그렇다고 북한의 현 경제가 갑자기 지난 1980년대 이전 수준처럼 회복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우리에게도 그렇게 시간이 많지는 않다.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협력과 한반도 평화를 유지하면서도 북한 민주화를 위한 종합적인 정세판단과 중장기적인 비전에 기초한 실제적이며 결정적인 노력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 핵무기를 최대의 치적을 내세우며 체제유지 빨치산 추도가’를 편곡한 북한식 장송곡과 ‘김정일 장군의 노래’가 북한의 군악대에 의해 반복되어 연주되었던 지난 2011년 12월 28일,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김정일 사망관련 영결식을 맞이하여 ‘김정일 동지의 혁명유산’이란 제목의 정론을 내놓았다. 왜 영결식을 맞으며 하필 이 정론을 내놓았을까?
일반적으로 이러한 비중이 큰 노동신문의 정론은 김정일이 살아생전에 반드시 철저한 검열을 거쳐 먼저 본 이후 발표하게 된다. 아마도 김정은이 김정일처럼 하루 전에 보고 발표허가사인을 해놓았을 것이다. 이렇게 발표된 정론은 김정일의 3대 혁명유산으로 핵과 위성(대륙간탄도로켓), 새 세기 산업혁명, 민족의 정신력을 꼽았다. 그 중에서도 북한은 김정일 위원장이 남긴 최대의 업적은 역시 핵무장임을 치켜세웠다. 핵 개발과 위성발사가 “대국들 틈에서 한(恨) 많던 약소민족의 가슴을 당당히 펴도록 해주었다”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산은 "핵과 위성"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나섰다.
이는 단지 김정일에 대한 우상화, 칭송을 넘어 핵무장을 김 위원장의 최대 치적(治績)으로 천명하며 ‘핵보유국’으로서의 지위를 대내외에 홍보하기 위한 행보를 공식화하기 위한 첫 걸음이다. 따라서 이는 김정일 사망 후에도 핵 실험 지속에 대한 의지가 있으며 핵개발은 김정은이 김정일의 유훈을 받들고 나갈 가장 중요한 전략임을 공표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위험한 혁명유산’은 김정은으로 대표되는 북한 체제에 되물려졌고 또 김정은도 핵개발의 완성을 위해 매진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관련 전문가들은 북한이 보유한 핵물질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 위력의 약 15배쯤으로 추측하며 당장 사용할 수 있는 다량의 핵폭탄과 핵무기 소용화도 일정한 진전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해 국제사회는 암암리에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하고 있기도 하다. 참으로 ‘거대하고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혁명유산’이 29세의 아들에게 어떤 수수료도 없이 상속된 것이다. 젊은 아들의 지도 체제가 공고화되지 못한 상황에서 김씨 독재일가 혈통의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유산은 김정은에게 매우 중요하다. 핵이라는 막강한 유산은 이를 뒤에 업고 자신의 체제구축과 국제관계에 ‘활용’이 가능한 아주 위험하고도 비장한 카드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북한의 핵 포기 여부는 포기 자체가 어려워질 뿐 아니라 북핵 문제 해결 가능성을 타진하는 제6자회담의 구도 형성 자체가 어려워진다. 이러한 까닭에, 기반위에 있는 북한 핵문제가 과연 6자회담이나 북미회담 같은 외교적 관계로 과연 해결 될 것인지가 주목된다. 한마디로 북한의 핵포기 가능성은 사실 완전히 제로라고 보아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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