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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겨울 18 : 그리스도교 탄생 역사 14 (그리스도교 부패와 종교개혁 4)

두바퀴인생 2011. 12. 28. 03:57

 

 

 

우면산의 겨울 18 : 그리스도교 탄생 역사 14 (그리스도교 부패와 종교개혁 4)

 

 

 

 

5.영국의 종교개혁

독일 루터교회 예전학자 빌리암 나아겔(Wiliam Nagel)은 잉글랜드 종교개혁을 마르틴 루터등의 종교개혁자들의 영향으로 진행된 사건으로 이해한다. 그 근거로 빌리암 나아겔은 영국 그리스도인들은 1521년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을 받아들였는데,그들중에는 영국교회 예전을 개혁한 종교개혁자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가 있었다고 말한다. 즉, 성공회는 혼인무효라는 헨리 8세의 개인적 문제가 아닌,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적인 영향으로 등장한 교회라고 할 수 있다.

 

헨리 8세

리치몬드의 공작이었던 헨리 7세는 영국 내부의 결속을 어느 정도 다진 다음에 종주국이었던 에스파냐와의 우호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 에스파냐 왕 페르디난도와 이사벨라 사이의 셋째 딸인 캐서린을 맞이해서 큰아들 아더와 결혼시켰다. 1501년 11월 14일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으나 1502년 4월에 신랑이 사망하고 말았다. 그러자 이사벨라는 강력한 압력을 가해서 아더의 동생 헨리 8세와 재혼시킬 것을 요구했다. 만일 듣지 않으면 결혼 지참금을 회수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캐서린은 1509년 시동생인 헨리 8세와 결혼하였다. 철이 들면서 헨리 8세는 어쩔 수 없는 결혼이었지만 아들을 낳아서 왕위를 계승하려고 했으나 캐서린과의 사이에는 딸만 낳았고 그것도 다 죽고 오직 메리 튜더만 살아남았다. 왕자가 없이 딸만 있다는 것은 자칫 영국이 후계자 문제로 외세의 간섭을 받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과정에서 헨리 8세는 궁녀 앤 볼린과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아이를 갖고 만다. 그래서 자신과 캐서린의 결혼은 불법이므로 혼인을 무효화하고 앤과 결혼하기를 원했다. 월시 추기경은 이 일을 추진하기 위해 영국을 떠난다. 그러나 헨리 8세의 혼인무효 요청은 교황 클레멘스 7세의 불허로 거부되었다. 이에 월시는 그 책임을 물어 실각되고 그의 뒤를 이어 토마스 크랜머대주교가 영국의 실권자가 되었다.

 

토마스 크랜머는 헨리 8세의 요구에 따라 교황권 제한령과 사전 보호법을 발동시킨다. 이 두 가지 법으로 로마교회 지도자 교황의 권한이 영국 내에 들어오지 못하고 국왕의 허가 없이 교황에게 항소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헨리8 세와 앤과의 결혼이 적법하다고 공포되고 앤은 왕비가 되었다.

 

1533년 9월 앤이 공주 엘리자베스를 낳았으며, 1534년에는 수장령(Royal Supremacy, 왕위지상권)이 영국의회에서 통과되었다. 국가권력을 신성한 것으로 이해한 루터의 영향으로 등장한 수장령은 "신앙상의 권위 또는 영국 성공회 교구가 개혁 또는 수정을 시도할 경우, 그 과오, 이단. 죄악을 검열하고 개혁과 수정을 가하여 근절한다"는 권리가 왕권에 있다는 선언이며, 민주주의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현대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더구나 교회가 세속 정치권력을 갖고 있거나 정치인들과 곁탁한 당시 유럽교회에서 수장령은 전혀 이상한 게 아니었으므로, 민주주의에 익숙한 현대인의 관점에서 이를 비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1536년에는 부패의 온상이던 수도원을 해산시키는 수도원 해산법을 통과시킴으로써 6세기이후 로마교회의 지배를 받던 영국 성공회 로마교회에서 독립하였다. 이에 교황청은 격노하여 헨리 8세를 비롯해 앤 볼렌, 크랜머 등을 파문하였다. 앤의 두 번째 임신과 더불어서 왕위 계승법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은 누구든지 왕자를 낳으면 계승권을 가지고 그 다음으로는 메리, 그리고 그 다음에는 엘리자베스라고 명기하였다.

 

1536년 앤이 두 번째도 아들을 낳지 못하자 헨리 8세는 간통죄를 적용해서 처형시키고 그의 눈길은 세 번째 여인인 제인 시무어에게로 향했다. 그는 아들 에드워드 6세를 낳고서 죽고 만다. 그 후 헨리 8세는 클리브즈의 앤과 결혼하였으나 이혼한다. 그러자 보수파에서 캐서린 하워즈를 왕비로 내세우면서 로마 가톨릭 6개 조항을 발표시켰다. 그러나 보수파도 얼마가지 못하여 헨리 8세는 캐서린 하워즈를 간통 혐의로 처형하고서 마지막이자 여섯 번째 부인인 캐서린 파아와 결혼하였다. 1547년 헨리 8세가 죽음으로써 에드워드 6세가 왕위에 오른다.

 

헨리 8세는 6번을 결혼하면서 각 권력의 암투에 휘말리면서 개혁보다는 권력 유지에 부심했다. 즉 개혁을 향한 의지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어느 쪽에 치우치지 않고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해서 독립을 유지하였다. 그래서 영국 성공회는 종교적 극단을 피하는중용(Via Media) 입장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지금도 성공회는 종교적 극단을 피하는 중용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에드워드 6세

에드워드 6세는 너무도 어린 나이인 10세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래서 자연히 외척이 힘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삼촌이었던 헤르포드의 백작은 섭정으로 선출됨과 동시에 서머셋 공작으로 승진 하여서 국가의 총사령관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실권을 장악한 서머셋은 개신교 추종자였다. 따라서 영국성공회는 개신교 사상에 따라 영국 종교개혁을 진행하였는데, 당시 개혁방향은 다음과 같다.

  • 로마 가톨릭 6개 조항을 파기시킴과 더불어서 로마 가톨릭과 관련된 모든 법을 파기시켰다.
  • 국회 성만찬 집전시 보혈과 성체(聖體)의 분배를 허용하였으며, 성직자의 결혼을 금하는 법령을 무효화 시켰다.
  • 에드워드 제1기도서가 작성되었다.
  • 영문성서의 출판과 판매의 자유가 허락되었다.
  • 에드워드 제2기 도서가 마련되었다.
  • 영국 성공회의 대헌장이라고 할 수 있는 42개 조항이 발표되었다. 이 헌장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시절에 영국 성공회 39개조 신조로 대체되기는 하였으나, 영국 성공회의 근본적인 신앙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 새로운 헌금법을 발동하여서 모든 헌금을 국왕의 수입으로 하여 교황청의 재정을 압박하였다.

이상과 같은 변화가 영국에서 일어나자 유럽으로 피난 갔던 개혁추진파들이 급거 귀국하였으며 동시에 유럽으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영국으로 망명 오는 사람들로 있었다. 이렇게 해서 대륙으로 피난하였던 사람들이 새로운 학문과 개혁적 전통을 영국 교회에 소개하기 시작함으로써 영국의 대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메리 1세
의 반동

에드워드 6세의 사망은 영국의 왕위 계승 문제를 야기시켰다. 영국인들은 메리에게 눈길을 돌렸으며 왕위에 오른 메리는 자연스럽게 영국의 로마 가톨릭화를 추진하였다. 메리 1세는 한 많은 어린 시절을 보냈었다. 그래서 그녀는 헨리 8세의 시절과 에드워드 6세의 시절 법령을 상당 수 번복하였다.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결혼은 적법한 것이었으며, 메리 자신은 적법한 왕위 계승자라고 선포하였다. 에드워드의 6세의 모든 종교적인 법안을 폐기시켰으며, 헨리 8세 시절의 반-교황적인 법을 무효화 시켰다. 영국 교회의 수장으로서 메리 1세는 중세적인 예전을 그대로 복구하였으며, 성공회 감사성찬례가 아닌 로마 가톨릭 미사를 다시금 실시하였다.

 

메리 1세는 에스파냐 펠리페 2세와 결혼하였다. 그와 동시에 로마교회 성직자들이 속속 복귀하였으며, 교황청 사절이 공식적으로 다시 파견되었다. 교황청 사절은 순종법을 발동시킴과 동시에 이단 규제법도 발동시켰다. 이때부터 개신교신자와 성공회 신자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메리 1세는 피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많은 개신교 지도자들과 토머스 크랜머 대주교,휴 래티머 주교 등의 성공회 성직자들을 처형하였다.역사학자 앙드레 모로아의 《영국사》에 따르면, 휴 래티머 주교는 순교를 앞두고 "오늘 영국은 하느님의 빛, 영원히 꺼지지 않을 영원한 빛으로 밝게 될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1세
의 수습

엘리자베스 1세(1559년- 1603년)의 즉위 이전부터 영국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개신교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1559년 1월 15일 대관식을 거행하고서 왕위에 올랐으며, 1603년에 이르기까지 영국과 영국 성공회를 개신교 쪽으로 이끌어 갔으나 어느 한 쪽으로도 과도하게 흐르지 않았다. 종교 개혁 이후의 종교대립을 막기 위해 엘리자베스 1세는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간의 극단을 피하는 중용노선(Via Media)을 걷기 시작했으며, 이에 반발한 청교도들이 발생했다. 여기서 청교도들은 장 깔뱅 종교개혁 사상을 따르는 개신교 신자들을 말한다.

 

엘리자베스 1세는 여러 번의 반대를 물리치고서 4월 29일 여왕의 영국 교회 지존법을 통과시켰다. 이렇게 해서 모든 성직은 여왕에 종속되었다. 이 권한을 바탕으로 영국 교회 통일법을 통과시켜, 사제 주교등의 영국 성공회 성직자들의 예복과 교회의 장식을 비롯한 모든 것을 통일시켰다. 엘리자베스 1세는 1563년 두 번째 의회 소집으로써 제2차 통일령을 통과시켰는데 이번에는 훨씬 더 종교 개혁을 강하게 추진하였으며, 많은 점에서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는 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1556년 매슈 파커캔터베리 대주교에 의해, 에드워드 6세의 42개 조항을 영국 성공회 39개조 신조로 개정하였는데, 개신교의 영향을 받아서 로마 가톨릭의 교리에 대해서 비판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영국 성공회 39개조 신조를 보면, 연옥, 면죄부, 성상 및 유물에 대한 예배와 숭배, 그리고 성인을 통한 기도에 관한 로마 교회의 교리는 어리석은 것이며 헛되게 발명된 것이고 성서에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적대하는 것이라며 로마 교회의 교리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1563년 두 번째 의회는 영국 성공회의 통일법을 놓고 분열을 초래하였으며, 청교도 측의 패배로 끝났다. 교황청은 엘리자베스 1세를 파문시켰으며 여기에 맞선 엘리자베스 1세는 반 교황법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1585년 예수회 사람들을 영국에서 강제로 추방하였다. 엘리자베스 1세는 1588년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무찌름으로써 교황권과 로마주의로부터 영국을 보호하였으며, 동시에 해상권을 장악함으로써 화려한 대영제국 건설의 기초를 마련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영국 종교 개혁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실천이었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영국 성공회는 신학적으로는 개신교의 영향을 받았으나, 예전과 신앙은 초대교회의 그것을 따르고 있다.

 

 

6.과격파 종교개혁

종교개혁은 루터교, 장로교, 그리고 성공회로 대별되는 3대 보수적 종교개혁과 재세례파, 성령주의파, 그리고 반 삼위일체파로 이어지는 3대 급진적 종교개혁이 있다. 후자에 속하는 종교개혁을 흔히 과격파 종교개혁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전자가 이룬 종교개혁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너무 기울어지며, 성서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이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뿐만 아니라 개신교 보수파들에게도 배척을 받았다. 그래서 이들은 한시적인 운동에 불과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들에게는 온건한 보수파들에게서 볼 수 없는 신선함이 있었고, 이들은 집단적인 공동체를 거점으로 해서 카리스마적인 권위를 가진 사람들의 운동이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7.로마 가톨릭교회의 대응

종교개혁은 단순하게 신앙적인 개혁에 그치지 않았다. 유럽의 문화와 문명을 온통 뒤바꿔 버린 분기점이었다. 유럽의 각 나라들이 로마 교황청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을 얻었으며, 예술에서도 인문주의와 더불어서 신앙적인 주제를 떠나서 인간을 중심으로 삼았으며, 과학에서도 신앙적인 면에서 벗어나서 합리적인 요구를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종교 개혁은 각 나라의 경제적 자립을 확보해 줌으로서 교황청의 재정적 압박과 더불어서 권위를 상실케 하였다.

 

교황청으로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잃어버린 권위를 회복해야만 했다. 이러한 절대적인 필요성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학적 입지를 확보하려는 트리엔트 공의회를 개최하였으며, 새롭게 조직된 예수회라는 종단의 창설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쇄신 운동은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시도에 그쳤다. 그것은 개혁을 주도해야 할 교황이 교회 문제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세속 문제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교황청은 오스만 제국 이슬람 세력의 유럽 침공에 반격하기 위해 십자군을 조직해야 했고 유럽 각 나라들의 정치적 분쟁에 일일이 개입하여 중재해야만 했다.

 

게다가 1572년 신성로마제국의 개신교를 신봉하는 용병들이 교황령에 쳐들어 와 로마를 약탈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등의 일로 가톨릭교회도 그에 따라 종교개혁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보다는 오히려 태도가 강경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가톨릭교회는 자유주의가 절정에 이르렀던 1869년-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더욱 더 보호망을 강하게 하였다가 1962년-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보호막을 벗어 버리고 개방을 허락함으로써 비로소 종교 개혁에 도전장을 던졌다고 말할 수 있다.

 

로마 가톨릭의 교황 바오로 6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막식에서 옵서버로 참석한 비가톨릭 종교자들에게 가톨릭이 그리스도교의 분열의 책임을 나누어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

1545년 12월 13일에 교회 개혁을 수행하려는 강한 의지를 지닌 교황 바오로 3세의 주최 아래 트리엔트에서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18년 동안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는 세 시기 즉, 교황 바오로 3세 치세에 속하는 제1기(1545년-1547년), 교황 율리오 3세가 속개한 제2기(1551년-1552년), 교황 비오 4세 치세 때 열린 제3기(1562년-1563년)로 구분된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목적은 개신교가 점차적으로 강성해 가는 것과 교회 내부의 부패상을 개혁하는 것이었다. 이런 것은 주교들의 태만으로부터 야기되었다고 밝히며 새로운 각성을 촉구하였다. 이들에 따르면 교회의 증가하는 부패는 영적 이상의 상실, 교리 문제에 관한 신학적인 불명확성, 그리고 교황청의 타락에 그 원인이 있었다. 따라서 회의에서 교회 개혁에 관한 중요 안건으로는 교회의 무능, 성직자 중임제, 그리고 감독 소홀 등이었다. 교리 문제에서는 불가타판 성경을 정경으로 재확인하였다.

 

그런데 1552년 1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주선으로 회의장에 도착한 개신교측 사절들은 새로운 공의회 소집, 이미 결의된 신앙 교리의 취소, 교황 수위권 거부, 공의회 우위사상의 인정과 같은 무리한 요구사항을 내놓았다. 게다가 루터교회를 신봉하는 독일인 기사들이 갑자기 회의장 안으로 난입해 난동을 일으키자 교황은 공의회를 서둘러 중단하였고 더 이상 로마 가톨릭 교회 개신교의 대화는 있을 수 없게 되었으며 기독교 세계의 분열만 두드러졌다.

 

예수회의 창설

이냐시오 데 로욜라 피레네 산맥에 접한 로욜라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문의 출세와 명예를 위하여 일찍부터 군대에 입대하였다. 그러나 전투에서 큰 부상을 당해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하고나서 그는 성경과 여러 성인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영적 지도자로서의 꿈을 끼웠다. 그리고 영성 훈련과 은둔 생활, 고행, 대학에서의 공부, 신학 공부를 하였다.

 

1541년 4월 14일 예수회는 이냐시오를 공식적인 대표자로 선출하고 4월 22일 새로운 수도회로 출발하였다. 예수회의 창설 목적은 분명했다. 헌장에서 밝히는 대로 종교 개혁으로 인해서 실추된 교황의 절대권 회복을 위해서 싸우는 군대 교단이 될 것과 해양 개척으로 인해서 발견된 신대륙에 그리스도의 진정한 복음을 전하는 선교 집단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붙인다면 학문을 발달시킴으로서 선교의 사명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이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서 군대적인 절대 복종이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었다.

 

예수회는 그 설립 목적과 부합되게 전세계에 선교 활동을 펴나갔다. 이제 로마 가톨릭교회는 유럽에서 개신교 성공회에게 빼앗긴 교회 영역을 유럽 밖의 선교에서 보충하였다. 특히 예수회는 신앙의 토착화라는 새로운 선교 방법을 개발하였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선교 지방의 관습과 생활을 이해하려고 부단히 노력하였고 원주민들과 의식주를 함께하면서 그들이 기독교 신앙을 올바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하여 그들의 언어로 교리서를 번역하거나 저술하였다.

 

종교재판

한때 중세 유럽에 유행했었던 종교재판을 16세기에 자신들의 전제적 통치에 일대 위협을 느낀 교황청이 강경일로로 돌아서서 개신교 박멸의 수단으로 부활시켰다. 용의자로 지목되기만 하면 교황청에서 파견된 심문관의 철저한 고문으로 강요한 고백이 강요된 후 정죄되면 세속 정권에 의하여 형이 집행되었다. 재산 몰수, 투옥, 유배 및 사형 등의 형이 내려졌다. 교황 바오로 4세의 영도 아래 소위 '거룩한 이단심문소(Sanctum Officium Sanctissimae)'라 불리는 악명 높은 신앙교리성성이 모든 나라들의 종교재판 중심기관으로 설립되어 수많은 이단심문관들을 양성하여 전 유럽의 개신교 탄압의 기수로 삼았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처럼 이단으로 지목되고 박멸의 대상으로 곤욕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개신교에서도 똑같이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들과 자체 내부를 향해 종교재판을 자행하였다. 개신교에서 자행한 종교재판에서 비롯된 각종 고문형과 마녀 사냥은 로마 가톨릭교회 이상으로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