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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겨울 15 : 그리스도교 탄생 역사 11 (그리스도교 부패와 종교 개혁 1)

두바퀴인생 2011. 12. 27. 03:25

 

 

 

우면산의 겨울 15 : 그리스도교 탄생 역사 11 (그리스도교 부패와 종교 개혁 1)

 

그리스도교의 부패와 종교 개혁

 

어쩌면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들추기 싫은 대목이 그리스도교의 부패와 종교개혁인지도 모른다.

 

장기권력이나 절대권력이 반드시 부패하듯이 종교도 마찬가지로 부패하게 되었다. 종교가 갖는 속성이 사상이 갖는 속성과 마찬가지로 지구상의 인간들의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명목으로 처음에는 출발하지만 결국은 변화된 사회에서 그들 무리들끼리 권력을 잡고 통치하다보면 인간의 속성상 권력과 재물은 반드시 부패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나라들이 명멸한 것도 마찬가지로 영원한 절대권력이나 절대사상은 없다는 이야기다. 그리스도교는 한마디로 로마제국에 의해서 공인되었고 세계화되어 전파되어 나갔다. 오늘날 유럽이나 러시아, 중남미, 미국이 바로 그들의 영향권 아래 구축된 사회이다. 중동 지역은 그리스도교를 몰아내고 일어선 마호메트가 창설한 이슬람교도 마찬가지로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한 이슬람 국가들의 영토 확장 정책과 같이 확산된 것도 사실이다. 이처럼 종교나 사상은 힘을 타고 확산되는 것이며 그 힘의 지배를 받는 종속된 민중들은 개종하거나 고유한 자신들의 신앙이나 종교를 버리고 힘을 갖고 나타난 종교에 굴종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의 탄생과 죽음은 유태민족에게 엄청난 재앙을 초래하였다. 그의 제자들에 의해 중동과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그리스도교는 수많은 박해와 멸시를 받으면서 확산되어 나갔다. 

 

유태인들은 처음에는 예수를 그냥 유태교의 유능한 랍비 정도로 생각하였고 그가 민중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킬 인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혼란했던 유태인 사회에 메시아처럼 나타나 기적을 보여주며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던 그에게 민중들이 모여들자 재사장들과 헤롯왕은 예수를 십자가에 메달아 처형하게 된다.

 

예수의 처형은 유태인들에게 민족의 분열을 가져 왔으며, 종교적으로 분리되었고, 메시아를 기대하던 유태민족은 상층부의 친로마제국파를 제외하고는 엄청난 고통을 받으며 지내면서 새로운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고대하였다. 그런가운데 많으 불만 세력이 등장하면서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는 가운데 결국 극단주의자들이 지배자인 로마에 항거함으로써 오랫동안 저항전쟁을 치루다가 실패함으로써 로마제국에 의해 그들이 살던 땅에서 영원히 추방되는 비운을 겪게되면서 유태교는 음지로 빠져들었지만 그리스도교는 음지에서 무수한 박해와 고통을 이겨내면서 결국에는 로마 제국의 공인을 받고 양지로 나아가는 길을 걷게 된다.

 

 

그들의 저항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면, 기원 후 70년 유태민족은 로마의 철저한 지배속에 고통스럽게 삶을 살아가다가 유태민족 중 과격단체들이 나타나면서 유태민족은 로마에 항거하기 시작하였다. 로마 병영을 공격하여 로마병사를 살육하고 병영을 불태우는 등 게릴라 전술로 이스라엘 각지에서 봉기하자 로마군은 시리아 지역에 주둔하던 로마군단을 보내 대거 진압에 나서면서 유대전쟁이 시작되었다. 로마는 약속을 저버리거나 반항하는 민족이나 도시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학살하고 도시 전체를 파괴하고 불태우고 땅을 갈아 소금을 뿌리는 징벌을 가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지방의 저항군이 차례로 진압되자 저항군은 예루살렘으로 대거 유입되면서 예루살렘 공방전이 수 년간 계속되었다. 로마군 8만이 공격하는 예루살렘에는 약 2~3만명의 유태인들이 저항하고 있었다. 결국 치열한 공방전을 거쳐 예루살렘은 점령되고 저항군들은 무참하게 살륙되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노예로 전락되거나 추방되었다.

 

극렬분자 960 여명이 갈릴리 호수 서편 난공불락의 '마사다 요새'에서 3년 가까이 저항하다가 결국 로마군에게 점령되면서 전원 옥새를 하므로 유태민족의 저항은 종말을 고했다. 그래서 유태민족은 팔레스타인 땅에서 영원히 쫒겨나게 되고 세계 각지로 흩어져 2000년 가까이 유랑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가 죽은 후에 수 많은 사제들에 의해서 교세가 확장되면서 복음 전파의 고초를 겪었다. 그런 가운데 그리스도 사제들이 무수하게 희생되었고 그런 가운데도 빈민층이나 가난한자를 대상으로 꾸준히 교세가 확장되었다. 결국에는 동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그리스도교가 공인되자 그리스도교는 급속하게 유럽지역까지 확산되면서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성장하면서 종교가 전세계를 지배하는 교황체제가 등장하고 종교전쟁, 십자군 전쟁이 발발하는 등 종교가 모든 정치권력을 지배하는 중세를 맞이하게 된다.

 

기독교인들은 정치권력을 이용하여 예수를 부정하며 죽음에 이르게 한 유태교도들을 철저하게 차별하면서 '가토'에 가두어 지내게 하였고 사회적으로 천민 대접을 하였다. 또 한편으로 마녀사냥식으로 타종교에 대한 탄압은 물론 특히 개종하지 않는 유태교인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종교가 정치권력화 하고 로마 교황이 등장하면서 각국의 왕을 통제하는 지위에 오르게 되자 정치권력과 밀착된 기독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부패하기 시작하였고 탐욕으로 가득찬 모습으로 변질되어 갔다. 어느 종교집단이나 권력집단이나 다 마찬가지로 인간들이기에 시간이 지날 수록 향략과 사치,부패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정치.사회.문화.사상의 모든 것이 종교적인 논리로만 해석되었고 모든 과학적인 사고는 부정되었다. 소위 중세를 암흑시대로 만들게 되고 모든 학문과 예술은 종교적인 해석과 표현에 집중되었다. 과학이나 인문,사회,문화의 발전은 퇴보하였고 급기야는 면죄부를 판매하면서 그리스도교는 종교개혁의 빌미를 제공하기에 이른다.

 

 

 

로마 교회의 기원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유태인 거주지역에서 시작됐다. 유태교의 입장에서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이단이며 분파로 이해됐고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 문제로 유태교와 늘 갈등과 마찰을 일으키고 있었다.

 

로마 제국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다음에 예루살렘은 더 이상 그리스도교의 중심지 역할을 할 수 없게 됐다. 이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이 제국의 수도인 로마로 자연스럽게 집중되게 됐다. 비록 예루살렘이 그리스도교의 발상지이지만 오히려 로마가 중심이 되었다는 사실은 당시의 정치 상황 등 복합적인 이유에 기인한다.

 

로마 교회가 언제 생겼는지, 즉 로마에 첫 그리스도인이 언제 정착했고 어떻게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형성됐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바오로의 로마 서간을 근거로 적어도 그 집필 연대인 58년 이전에 이미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로마에 존재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바오로는 59년에서 61년 사이에 로마에 도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베드로의 경우에는 로마 도착 사실이 명확하게 나타나있지 않다. 다만 클레멘스의 코린토 서간과 외경인 베드로 복음서, 베드로 행전이 베드로의 로마 체류 사실과 함께 그의 순교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64년 7월 19일 네로 황제가 로마에 불을 지르고 나서 여론이 좋지 않자 그리스도인들을 방화범으로 몰아 4년 동안 모질게 박해했는데 이 박해 때 베드로와 바오로가 순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주역이었던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의 순교지라는 특수한 의미와 배경으로 인해 지역교회를 넘어선 새롭고 확고한 위치를 차지한다. 따라서 로마 교회는 초기 교회의 다양한 문화적 배경 속에서 일차적인 기준이었고 가시적인 정점이었다. 이후 로마 주교는 스승처럼 다른 지역교회와 공동체의 문제에 가르침을 내린다. 클레멘스는 고린토 교회의 내부 분쟁에 직접 개입함으로써 로마 주교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알려준다. 당시 지역 공동체 지도자들은 로마를 방문해 로마 공동체와의 일치를 확인하고 보장받곤 했다.

 

 

로마 제국의 박해

로마 제국의 박해는 대체로 10번에 걸쳐 일어났다고 하는데 그 성격은 3기에 걸쳐 뚜렷이 구분된다. 100년경 까지의 제1기는 교회에 호의적이다가, 로마시 대화재 사건으로 일어난 우발적이고 산발적인 박해기이며, 250년까지의 제2기는 교회를 반인류적 반국가적 금지된 종교로 규정하고 신자라는 이름만으로도 처벌의 대상이 되던 시기다. 가장 조직적이고 잔인하게 시행된 250년에서 313년까지의 제3기는 로마제국의 정치·사회적 혼란을 무마시키기 위해 일어난 박해시기였다. 이 400년여에 걸친 박해 때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도 순교했다.

 

박해가 일어나기 전까지 교회와 로마제국은 비록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서로 부딪힐 수밖에 없는 요인들을 안고 있었다.

 

먼저 로마인들은 병역을 노예나 무산자들에게는 부과 시키지 않을 만큼 시민의 권리요 의무라고 생각할 정도로 개인보다 국가를 절대시하는 성향이어서 하느님을 유일신으로 믿는 그리스도교와 상충될 수밖에 없다. 아울러 황제들은 로마제국의 정치·사회적 혼란기를 맞으면 종교적 기반에서 제국의 쇄신과 내적 강화를 꾀했는데 황제숭배 같은 국가종교 예배가 국가에 대한 충성의 시금석으로 강조될수록 이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은 국가의 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한 로마인들은 영적 세력이 인간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고 있었는데 타치우스나 아우렐리우스 같은 황제들의 재위기간에 전염병, 기근, 홍수, 야만족 침입 등의 재난이 발생하자 그리스도교 반대파들은 그리스도교 때문에 신들의 분노를 사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다며 군중들을 부추키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에 대한 무지도 박해의 한몫을 담당했는데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에 대해 신자들을 식인종으로, 형제자매로서의 친교생활에 대해 근친상간하는 야만인이라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300여년에 걸친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는 마침내 로마제국의 새로운 사회·통치 질서로 자리잡게 되는 승리를 거둔다.

 

 

제국 교회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12년 이탈리아로 출정해 막센티우스와 서로마제국의 패권을 두고 다투게 된다.

 

군사적으로 열세에 있던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의 티베르 강 밀비오 다리에서 결정적인 전투를 치르게 되는데 전투 전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인들의 신에게 기도하면서 도움을 청했을 때 공중에서 빛나는 십자가와 ‘이것을 가지고 승리하라’는 문구를 보았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어로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키(Χ)와 로(Ρ)로된 군기를 만들어 가지고 싸워 승리했다고 한다. 이 밀비오 전투의 승리로 콘스탄티누스는 서로마의 주인이 됐고 그리스도를 수호신으로 숭배하게 된다. 콘스탄티누스의 이러한 개종은 박해의 종식과 함께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는 길을 열어놓는 대전환점이 된다. 좀 황당한 이야기지만 그리스도교가 공인되게 된 이유치고는좀 그렇다.

 

313년 밀라노를 방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제국의 안정을 위해 동부지역의 황제 리치니우스와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논의하게 되고 그 중에서도 십자가 발현 체험을 한 콘스탄티누스는 종교문제, 특히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문제를 다루면서 로마 제국 내에서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자유를 허용한다는 포고형식의 영을 내리게 된다. 이를 밀라노 칙령 혹은 관용령이라 부른다.

 

밀라노 관용령은 내용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째는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하면서 그리스도인이나 비그리스도인을 막론하고 제국 내 모든 시민들에게 적용되는 종교자유의 원칙을 선포한 것이다. 둘째는 그리스도인들이 박해시대에 몰수당한 재산이나 팔린 재산까지도 교회에 반납하도록 명시한 것이다.

 

이 밀라노 관용령 자체가 그리스도교를 국교화 하거나 특권을 베푼 것이 아니라 타종교와 같이 신앙의 자유를 허용한 것뿐이지만 그리스도교가 제국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는 기초가 됐다. 밀라노 관용령 이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취한 여러 조치들은 대중의 대량 입교와 함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방면에 그리스도교 세력과 정신을 확산시키게 된다.

 

324년 콘스탄티누스는 반 교회적 정책을 시행한 리치니우스를 물리치고 전 로마의 유일한 통치자가 됨으로써 그리스도교 정책은 더욱 강화된다. 뿐만 아니라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이은 아들들은 콘스탄티누스의 친 교회 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비록 율리아누스 황제 때 반 교회 정책이 시행되긴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결국 테오도시우스 1세 때인 380년 2월에 '가톨릭 신앙에 대한 칙령'(De fide catholica)의 반포와 함께 그리스도교가 제국의 공인 종교가 됐다. 이로써 300년 간의 혹독한 박해를 이겨낸 그리스도교는 제국교회, 국가교회가 됐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을 단초로 제국의 공인교회가 된 그리스도교는 박해받는 교회에서 특권의 교회로, 순교자의 교회에서 국가교회로 전환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화는 광범위한 복음전파와 함께 대중의 대량 입교로 인해 양적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교회가 국가 교회가 됨으로써 국가권력과 너무 밀착되어 부와 권력을 누리면서 세속화되어 갔다. 이를 우려한 인물들 중 몇몇은 교회 복음화와 내적 쇄신 그리고 신앙생활의 심화를 위해 사막으로 은거하기도 해 초기 수도원 운동의 시초가 되기도 했다.

 

 

십자군 전쟁

11세기 서유럽은 클뤼니 수도회와 그레고리오 개혁 등에 의해 수도원 문화가 확산되었고 종교적 열성이 고양된 상태였으며 새로운 공동체 의식이 생겨났다. 그리스도교 정신은 사회전반에 걸친 기본 토대였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협하는 요소는 전체 사회구조를 위협하는 위험으로 간주되어 척결의 대상이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상업의 발달 등으로 봉건지배 체제가 해체되고 자치도시의 독립이 진행되는 시기로 무역세계의 확대가 당면과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층민과 농민들의 생활 수준은 열악하여 생활수준이나 사회신분의 향상을 바라는 욕구나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심이 날로 점증되어갔다.

 

십자군 전쟁의 또 다른 중요한 배경은 기사계급의 동요였다. 끊이지 않던 제후들간의 세력다툼이 11세기 이후 사회의 안정과 함께 점차 소멸되었으며 교회도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교회 안에 유입된 호전성을 순화시키기 위해 「하느님의 평화」(Pax Dei)와 「하느님의 휴전」(Tregua Dei)이란 제도를 만들어 많은 전투 행위를 금지 시켰다. 이렇게 되자 기사들은 전투정신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고 신분마저 위태로워졌다.

 

서유럽과 동로마 제국, 이슬람으로 삼분되어있던 국제정세 또한 셀주크 투르크족의 발흥으로 균형이 깨지고 동로마 제국이 교황을 비롯한 서유럽 사회에 구원을 요청하게 됐다. 637년부터 팔레스티나 지역은 이슬람의 세력아래 들어가 있었지만 성지순례와 그 지역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셀주크 투르크족이 점령한 이후부터는 성지순례가 어려워졌고 심한 박해를 받았다.

 

이리하여 11세기말부터 13세기까지 근 200여년 동안 8차례에 걸쳐 원정이 이루어졌다. 농민십자군에 이어 기사들과 귀족들로 이뤄진 제1차 십자군이 1099년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세우기도 했으나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십자군 원정이 거듭될수록 그 순수성도 잃어버리게 되는데 4차 원정에서는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놀아나 성지회복이 아니라 오히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해 라틴제국을 세움으로써 동서 교회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키고 회복할 수 없게 만들기도 했다. 이처럼 십자군 운동은 원정이 거듭될수록 신앙의 순수한 열정이 퇴색되고 변질된 채 엄청난 희생에도 불구하고 군사적으로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교황의 주도로 이뤄진 십자군은 초기에는 교황권의 신장을 가져왔지만 궁극적으로 십자군이 실패함으로써 교황권이 쇠퇴의 길로 들어서는 동시에 유럽의 종교적 열정도 식었다. 또한 영주들이 십자군 원정에 나선 후 영지관리를 소홀히 하게 되고 경제적으로 쇠퇴하자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왕권이 절대화하는 한편 공동체의식이 강화돼 민족의식 내지는 국민의식이 싹트기 시작함으로써 서유럽사회가 근대로 넘어가는 계기가 마련됐다. 또한 동방과 이슬람 문화와의 접촉은 학문을 증진시켜 스콜라학의 발전을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