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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겨울 14 : 그리스도교 탄생 역사 10 (그리스도교 전파와 박해) 본문
우면산의 겨울 14 : 그리스도교 탄생 역사 10 (그리스도교 전파와 박해)
기독교의 전파와 박해
기독교의 전파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전에, 그의 가르침을 통하여 그 정신적인 기반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이 종교적 단체로 형성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정확히는 오순절(성령강림절)의 성령 체험 이후 신앙심이 굳어진 사도들이 각지에서 전도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리스도교는 역사적으로 변천을 겪는 동안 크게 보아 로마가톨릭교회·동방정교회(正敎會)·프로테스탄트교회의 세 갈래로 갈라졌으며, 이 밖에도 동방정교회 내의 몇몇 독립적인 교회들과 프로테스탄트교회 내의 수많은 종파들이 세계 곳곳에 퍼져 있다.
하느님으로서 인성(人性)을 취한 예수는 신적(神的) 사랑의 극치를 보이는 죽음을 당하지만, 하느님 나라의 승리를 증거하고 구원 사업을 완수하기 위해 다시 살아나 제자들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 이 부활신앙은 예수의 탄생·죽음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교의(敎義)가 되어 있다.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로서 이 세상의 구원자임을 확실히 믿게 되었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근거지였던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어, 사마리아에서 시리아·남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예수의 사도로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파하였다. 12사도 중 요한은 에페소에 정착하여 초대 교회를 이끌었고, 마르코는 알렉산드리아에 교회를 세웠다. 마침내 사도 바울로가 그들에게 합세하면서부터는 지중해 연안 여러 지방에 그리스도교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리스도교를 유대교에서 결정적으로 분리시켜, 인종과 지역을 초월한 세계종교로 발전시킨 것은 사도 바울로의 선교활동이었다. 바울로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엄격한 유대교도로서, 처음에는 그리스도교 박해의 선두에서 활약하였으나, 마침내 결정적 계기에 의해 그리스도교 신앙에로 회심(回心)한 이후 열렬한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의 전도 대상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여러 이방인도 포함하였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는 유대민족의 범주를 벗어나 지중해 연안과 유럽 지역으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사도시대로부터 바울로의 이방인 선교시대를 ‘원시 그리스도교 시대’라 하는데, 이 시기에 초대교회가 형성되었다. 초대교회는 유대교와 로마정부 쌍방으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는 가운데 형성되었지만, 개인의 집이나 카타콤 같은 데서 비밀집회를 가지면서 그 조직을 이끌어 나갔다. 바울로가 초대교회에 보낸 서신들에 의하면, 그 무렵에 이미 사제(司祭)로서의 감독(監督) ·장로(長老), 부제(副祭)로서의 집사(執事) 등의 교직이 정해져 있었다. 이 시대는 또한 신약성서(新約聖書)가 쓰여진 시대로서, 그리스도교 신학의 기초가 확립된 때이기도 하다.
로마가톨릭교회 (Roman Catholic Church)
사도(使徒) 베드로의 후계자로서의 교황을 세계 교회의 최고 지배자로 받들고 그 통솔 밑에 있는 그리스도교의 교파. 단순히 가톨릭이라고 할 때에는 동방정교회(東方正敎會:그리스 정교회)까지를 포함하여 지칭하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최고의 직위가 로마 교황인 정통 가톨릭교회를 이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로마가톨릭이라고 한다. ‘가톨릭(카톨릭)’이라는 말은 원래 그리스어로 ‘보편적’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2세기 무렵부터 교회를 나타내는 말로 쓰이기 시작했다. 또 4세기에 이르러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의 두 공의회(公議會)가 그 신앙선언 속에서 ‘가톨릭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그 이후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역사
가톨릭교회는 나사렛 예수라고 불리는 유대인의 가르침에 의해 창립되어, 이 예수를 그리스도(구세주)라고 믿는 사람들이 이 교회에 속하였다. 예수는 제자 중에서 12명을 선정하여 그 장(長)에 베드로를 임명하고 그에게 전체 교회를 통치하는 권위를 부여하였다(마태 16:18∼19).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다음 제자들은 그의 가르침과 성령(聖靈)에 의해 신앙이 강화되었으며, 예수의 가르침을 널리 폈다. 사도의 장(長)인 베드로도 예루살렘을 떠나 먼저 안티오키아에, 그리고 로마에 사도의 자리를 정착시켰다.
당시 교회에는 유대교로부터의 개종자와 순수한 그리스도교도가 있어 이들 사이에 유대교의 율법을 준수할 것이냐 아니냐에 관한 논쟁이 일었다.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사도회의를 열고 그리스도교도가 유대교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결정하였다.
황제를 거부하는 교회에 대해서 불법으로 간주한 로마제국의 모진 박해 속에서 교회는 점차 조직을 강화해갔으나 전부터 로마제국에 있었던 이교(異敎)의 영향으로 교회내에서도 그노시스 ·몬타누스 ·마르키온 및 마니교(摩尼敎) 등의 이단(異端)이 생겼다. 이 이단에 대항하여 교부(敎父)라 불리는 뛰어난 교회사상가가 나타났는데, 그 중에서도 클레멘스, 오리게누스, 아우구스티누스 등이 특히 유명하다.
4세기에 이르러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를 인정하여 그리스도교에 자유를 부여하고 보호하였으며, 4세기 말에 황제 테오도시우스는 ‘그리스도교 국교령’을 발포하여 그리스도교 이외의 종교를 배척하였다. 한편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를 비롯한 중요한 공의회에서는 가톨릭의 교의를 명확하게 확정지었다.
중세에 이르러 처음 로마제국의 영향 밑에 있던 교회는 동(東)로마제국의 지배를 피해, 마침내 프랑크 왕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유럽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으나, 그 사이에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는 동방교회는 로마카톨릭 교회로부터 이탈하였다. 로마가톨릭은 신성(神聖) 로마제국의 속권(俗權)과 성직서임권(聖職敍任權)을 둘러싸고 논쟁을 거듭하여 마침내 ‘보름스 협약’에서 서임권을 획득하고 교권을 확립시켰다. 이리하여 교회는 강대한 힘을 가지게 되었고, 밖으로는 7회에 걸쳐 십자군을 파견하였으며, 안으로는 종교적인 학문과 문화향상에 힘을 기울였다.
15세기가 되자 유럽의 경제력은 증대하고 생활은 현저하게 향상되었으나, 반면 교회는 차차 세속주의에 빠져들면서 부패하기 시작하였고, 교회 지도자는 권력을 둘러싼 탐욕스런 싸움을 계속하여 분열을 일으켜 대립교황(對立敎皇)이 출현하였다. 또한 성직자나 수도자의 무지와 도덕성의 퇴폐도 심하여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게 되었고 M.루터의 등장으로 결정적 단계를 맞게 되어 가톨릭교가 분리되면서 프로테스탄트교회(개신교)가 성립하였다.
이에 대하여 가톨릭교회에서도 예수회 등의 신수도회에 의한 쇄신운동을 진행시켜 교회는 점차 새로운 힘을 회복시켜 해외 선교활동 등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16세기 이후 유럽 통일이 붕괴되면서 근대국가가 탄생하여 주권의 독립을 주장하게 되자 가톨릭교는 이들 국가와 정교조약(政敎條約)을 맺었다. 1929년에는 이탈리아 정부와 로마가톨릭 사이에 ‘라테란협정’이 체결되어 세계 최소의 독립국 바티칸시국(市國)이 승인되었다. 교황 요한 23세는 이와 같은 세계정세를 감안하여 제2바티칸 공의회를 열어 교회 쇄신에 착수하였다. 이 공의회는 교회의 현대화, 에큐메니즘(교회일치주의) 등 교의를 선언하였다.
동방정교회 東方正敎會 (Eastern Orthodoxy)
사도시대부터 예루살렘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이집트 ·인도 ·그리스 ·동유럽 ·러시아 방면으로 발전하여 분포되고 오리엔트의 헬라문화권 안에서 성장한 그리스도교회의 총칭으로 서방(라틴) 교회의 상대적 의미로 동방교회라 호칭되지만 더 깊은 뜻은 죽음에서 부활한 빛인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빛나는 태양이 동방(東方)에서 떠오른다는 데 있다. 파스카(Πασχα)라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대축일을 서방에서는 아직도 ‘East Day’(동방의 날)라고 한다.
동방정교회라고 할 때 정(正:Orthodox)이란 사도전통 ·교부전통의 올바른 가르침, 올바른 믿음, 올바른 예배의 의미를 지닌다. 동방정교회는 보편적 신앙의 교회이므로, 그냥 정교회(Orthodox Church)라고 부르는 것이 정상이다. 정교회에서는 세계공의회(世界公議會:Ecumenical Council)를 최고의 권위로 인정한다. 주교들은 신앙의 문제를 결정할 때 전체교회의 승인과 동의를 받는 것이 필수조건이다. 그래야만 공의회가 성령의 인도를 받았다는 것이 확실히 인정되는 것이다.
기독교 박해
그리스도교도 박해 (persecution of Christians)
주로 국가권력의 힘을 빌려 정신적, 특히 육체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자에게 가하는 탄압. 그리스도교는 그 유일절대신관(唯一絶對神觀)의 고수와 타종교에 대한 비타협적 성격 때문에, 그리스도교를 인정하지 않는 국가권력에 의하여 초기에는 탄압과 박해를 수없이 받게 된다. 역사상 처음으로 대규모의 그리스도교도 박해가 행하여진 것은 고대 로마제국에서이다.
그리스도교는 일찍이 예수 그리스도가 유태교에 대한 이단이라는 종교적 이유로 같은 동포인 유대인에게 미움을 사, 반역이라는 죄명으로 총독 빌라도에게 제소되어 처형당함으로써 수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교시대, 사도 바울로의 이방(異邦)전도의 행정(行程)에서 그를 박해한 것은 주로 유대인이었고, 로마정부는 이것을 유대인 내부의 종파(宗派)싸움으로 여겨 관여하기를 꺼리고, 때로는 바울로를 유대인의 박해의 손길로부터 구출해낸 적도 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교가 차차 유대인의 민족적 기반을 떠나 지중해, 오리엔트, 유럽 지역으로 확산.발전하기에 이르면서 로마정부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로마정부는 대체로 외래종교에는 관대하였는데, 거기에는 로마의 국가 제의(祭儀), 특히 황제예배의 인정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똑같은 일신교(一神敎)인 유대교는 전적으로 민족종교였으므로 황제예배에 참여하지 않는 것도 원칙적으로 용인되어 있었으나,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는 이 같은 예외 조치가 인정되지 않았다.
초대교회의 박해 원인
1) 정치적 원인
로마 정부는 이방종교에 대하여 비교적 관대한 정책을 취했다. 기독교가 로마 정부 당국에 의하여 유대교의 한 분파로 생각되는 한 멸시와 미움을 받을지언정 고유한 민족 종교로서 합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로마 정부가 기독교의 실상을 분별할 수 있기 전에 제국의 주요 도시에 이미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기독교가 새로운 종교라는 사실을 밝혀지고 또 급속히 제국 내에 퍼지게 되자 불법 종교로 진압의 대상이 된 것이다. 특별히 로마정부는 기독교 박해 전에도 몇 가지 이유를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국가가 비기독교적이라고 생각하여 호의를 갖지 않았다. 그들은 그리스도편에 서지 않는 것은 악과 깊이 관련된 것으로 보아 기독교인과 로마제국내의 이교도와 큰 간격이 생기게 된 것이다. 또 유대인들의 로마 제국에 대하여 심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교회 안에도 이와 같은 유대적 요소가 있게 된 것이다. 한편 당시 기독교교인들은 황제숭배를 단호히 거절하였는데 이는 로마정부로부터 반역 행위의 혐의를 받았으며 기독교도는 국가 모반의 음모를 꾀하는 무리들로 간주되었다.
2) 사회적 원인
사회적 문제도 박해의 한 요소가 되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사회의 하층 계급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당시 영향력있는 상층 귀족 계급의 무시와 증오를 받았다. 켈수스(Celsus)는 기독교인들을 무식한 대중들로 보았는데 오리겐은 '켈수스에 대항하여'(Against Celsus)라는 작품속에서 이 문제에 관하에 켈수스를 반박하지 못한 점은 실제로 초대 기독교신자들이 비천한 계층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인데 이들의 판단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실제 처음 3세기 동안 기독교 신자들의 다수가 사회 하류층 출신이었다는 증거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특히 복음서나 바울의 서신에 등장하는 신자들은 그것을 증거한다. 당시 이교 사회에서는 소수의 특권층이 다수의 하층계급의 사람들이나 노예들로부터 섬김을 받는 귀족적인 사회구조의 지속을 원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은 만인의 평등을 주장하였다. 나아가 기독교인들은 이교사원이나 극장, 오락장소 등에서의 모임에 참여하지 않고 당시에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사회관습들을 따르지 않아 미움을 받게 되었다. 사회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공동체적인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인류에 대한 증오를 가지고 있다고 로마인들은 인식하고 있었다.
3) 종교적 원인
기독교인들은 그들 자신이 섬기는 신 이외에는 다른 신들을 숭배하는 것을 전적으로 부인했기 때문에 이교도의 미움을 받았다. 즉 이교도의 분노를 산 것은 그들의 제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또 세신들을 숭배함으로 이교도들을 공평하게 대하는 것을 부정한 점이다. 그것은 곧 전통적 종교를 부정하는 것이며 이는 전반기 박해의 자극이 되었다. 또한 로마인들의 미신적 사상도 한 몫을 차지하였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이 이방의 신들을 노엽게 한 연고로 자신들에게 재해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4) 오해와 편견
기독교에 대한 일반적인 비난과 오해는 그리스도인의 관습과 신앙에 대한 풍문에서 나왔다. 기독교가 퍼지면서 그리스도교인들이 새벽이나 저녁에 자주 모임을 갖게 되자 그 모임의 내용을 잘 알지 못하는 이교도들이 질투와 의심에 사로잡혀 그들의 상상에서 나온 헛소문이 떠돌았다. 예를 들면, 기독교인들이 공동체적 생활을 하면서 새벽이나 저녁에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먹으며 행했던 성만찬 의식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밤중에 동굴에 모여 폭음, 폭식하고 자식을 죽여 인육을 먹고 교회지도자들의 성기를 경배하고 평화의 키스도 왜곡되어 건한 사회 습속을 해치는 근친상간을 하는 저속한 무리들로 비추어져 일반인들의 왜곡된 상상력을 자극하였고 이것의 박해의 명분을 찾던 로마제국에게 박해의 한 빌미를 제공하기에 충분하였다.
로마제국의 초대교회 박해과정 및 그 결과
기독교는 처음부터 핍박을 받고, 그 속에서 자랐을 뿐 아니라 그 역사를 순교의 피로 쓰기 시작했다. 예수의 탄생부터 시작된 박해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를 비롯해서 교회 역사에 끊임없이 크고 작은 핍박이 있어 왔다. 기독교 역사는 박해의 역사요 수난의 역사였다. 사실상 기독교 순교사는 기독교 자체의 역사인 것이다.
로마제국의 초대교회 박해 과정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제국과 갈등에 빠지게 된 것은 어떤 근본적인 원칙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우연에 의한 것이었다. 로마제국에 의한 박해는 주후 64년에 네로 황제에 의하여 처음 일어났다. 주후 64년 로마에는 대화재가 발생해 도시를 황폐화시켰다. 네로는 방화의 협의를 받을 정도로 인기가 없었으며, 그리스도인들을 속죄양으로 삼기로 결심했다. 이 네로 치하의 박해는 오래 계속된 것은 아니라 뒤에 따른 다른 박해의 전례가 되었다. 한편 네로는 68년 로마 원로원의 지원을 받은 반란에 의해 퇴위되어 스스로 자살의 길을 택하였다.
이제 로마 정부는 그리스도인들이 고결한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로마의 옛 종교적 전통에 대해서는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적대적이며 그 일탈에 있어서 지나치게 완고하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서는 동정을 거두어들이고 관용을 배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스도교는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였으며, 2세기의 여러 사람들이 순교의 죽음을 당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 치하(81-96)에서 상황은 또다시 심각해졌다. 칼리굴라와 네로의 경우를 예외로 한다면, 황제들은 지나치게 열광적인 신민들이 황제에게 신적인 영예를 바치는 것을 전통적으로 금지시켜 왔었다. 도미티아누스는 이와는 정반대의 견해를 취했으며, 자신을 '주와 하나님'으로 부르게 하고, 이러한 황제숭배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자들은 반역의 혐의를 갖고 의심스럽게 여겼다.
1세기말 도미티아누스황제 치하에서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되어 로마와 소아시아에서의 박해가 잘 알려졌는데, 특히 소아시아의 경우 황제예배를 거부하여 순교한 사실이 신약성서 《요한의 묵시록》에 의해 입증되고 있다. 그러나 5현제시대(五賢帝時代:96∼180)에는 제국(帝國) 전반에 걸쳐 교도 박해가 심하지 않아 관헌들도 적극적으로 그리스도교도를 탄압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리스도교에 적의를 품은 민중의 소란이나 개별적 밀고에 의한 경우가 많았고, 배교(背敎)의사를 표명한 사람은 석방하였다.
트라야누스 황제(98-117)는 자신에 대한 숭배가 강제적인 충성 시험수단으로 상용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위기는 지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12년 소아시아 비두니아(Bithynia) 지방의 총독이던 소 플리니우스(Pliny the younger)는 그리스도인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황제에게 문의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교가 도시뿐만 아니라 시골에도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을 말해준다. 플리니우스는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지 않은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처형했고, 시민권을 가진 다른 사람들은 재판을 받도록 하기 위해 로마로 압송하기 위해 대기시켜 두었다. 플리니우스는 그리스도인들이 처형당한 선례를 알고 있었고 망설임 없이 이를 시행했던 것이다.
한편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는 모든 지방 총독들이 앞장서서 박해를 가하는 것을 만류했다. 몇몇의 지방 총독들은 실제로 교회를 보호하기도 했으며, 이에 고마움을 느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의 총독이 비록 이교를 신봉하기는 하지만 죽은 후에 상급을 받을 것이라고 믿기도 했다. 2세기 후반 무렵에 그리스도교는 사회의 상류층에 침투하고 있었으며, 많은 고위 인사들은 밤에 잠이 깼을 때 부인이 철야 기도에 참석하기 위해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당황스러워 하기도 했다. 코모두스(Commodus, 주후 80-92) 황제의 첩이었던 마르키아(Marcia)는 그리스도인이었으며, 로마교회를 위해 상당한 정도로 박해를 완화시켜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스토아 철인(哲人)이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그리스도교도를 가혹하게 학대하여 이 무렵부터 순교자도 점차 늘어났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도의 뿌린 피는 씨앗’이 되어 새로운 신자의 수효도 늘어났다. 그리스도교도에 대한 재판 책임자는 로마시(市)에서는 도장관(都長官), 속주(屬州)에서는 총독이었다. 재판 형식은 단순한 형사재판으로 보는 설과, 반역재판으로 보는 설이 있는데, 처벌은 신분이 낮은 사람은 화형(火刑) ·십자가형 ·맹수와의 격투형 ·광산노동형, 신분이 높은 사람은 참수형(斬首刑)이나 유형(流刑)에 처하였으며, 여자는 사창가(私娼家)에 넘겨지기도 하였다.
3세기 전반의 세웰스 시대에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정책이 상당히 완화되어 궁정 안에서도 교도를 찾아볼 수 있게 되었으며, 3세기 후반에 이르러 그리스도교의 발전과는 반대로 로마제국은 쇠퇴하기 시작하여, 국력 재건의 기초로서 로마의 신(神)들에 대한 예배를 강화하였다. 따라서 데키우스, 발레리아누스 두 황제에 의하여 종래의 국지적(局地的) ·우발적 박해와는 달리 제국(帝國) 전체에 걸친 조직적인 박해가 단행되었다. 이 박해로 카르타고의 주교 키프리아누스를 비롯한 많은 순교자가 나왔고, 교회 건물과 토지도 몰수당하였으며, 따라서 배교자도 많이 발생하였다.
그 후 261년 갈리에누스 황제 시대 이후 약 40년 동안 그리스도교는 사실상 묵인되었으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말년인 303년부터 최후이자 최대의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박멸의 목적을 이룰 수는 없었고, 305년 황제의 퇴위 무렵부터 차차 박해가 완화되어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 리키니우스 두 황제의 밀라노 칙령(勅令) 발포(發布), 나아가서 32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전제국(全帝國)을 지배하면서 그리스도교를 로마제국의 공인 종교로 인정함으로써 박해도 종결되었다. 로마제국에 의한 그리스도교 박해를 기록한 사서(史書)로는 유세비우스의 《교회사》가 유명하고, 근대의 문학작품에는 폴란드의 H.시엔키예비치의 《쿠오바디스》가 잘 알려져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을 비롯하여 순교자를 대상으로 한 미술작품인 성화도 많다. 한국의 그리스도교 박해의 역사도 두드러진다.
3세기 이전에는 로마 정부가 그리스도교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인해 교회는 활동 공간을 넓혀가고, 내적인 비판적 문제들에 대처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초기교회의 박해 결과
배교자의 등장
로마제국의 박해기간동안 많은 사람들이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배교했다. 후에 이들 가운데 다수가 그 죄를 뉘우치고 교회로 돌아오고자 하여 자연히 이들을 용납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는 교회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다.
순교자와 변증가의 등장
로마제국의 박해로 말미암아 순교자와 변증가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택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헤르마스(Hermas),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서머나의 폴리갑(Polycarp)이 있다.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시리아지방 안디옥의 감독으로 주후 30-35년경에 태어났다. 그의칠십여 평생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의해 잉태된 자'라는 별명으로 불려졌다. 그에 대한 전설에 의하면, 복음서에서 예수께서 무릎에 앉히고 축복하셨던 그 어린아이가 바로 이그나티우스였다고 한다. 2세기 기독교 사회에서 이그나티우스에 대한 존경과 신망이 얼마나 두터웠는가를 짐작케 하는 이야기이다. 폴리갑, 이레니우스, 유세비우스 그리고 제롬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주후 108년경 트라얀황제의 치세에 로마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는 콜롯세움으로 알려진 격투기장에 끌려오게 되었다. 이곳은 대형 원형 경기장으로 약 45,000명의 관중으로 수용하는 곳으로 기독교 순교자들의 죽음을 구경하는 것은 당시 로마인들에게 큰 즐거움이 되었다. 이그나티우스는 순교직전 최후의 감사를 드린 후 사자들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였다. 사자들이 그를 덮친 후 남은 것이라고는 몇 개의 뼈들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한편 폴리갑(Polycarp)은 사도 요한의 제자로 주님의 제자들의 뒤를 바로 있는 사도라는 면에서 '속사도 교부'(Apostolic Father)라고 불려지는데, 그는 2세기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순교자였다. 86세에 체포되어 처형된 폴리갑이 순교한 연도는 확실하지 않지만, 다만 그는 155-160년이나(트라얀 황제의 통치기) 161-180년(우리에게 '명상록'으로 잘 알려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통치기)중의 어느 해, 2월 22-23일에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장한 병사들이 한 노예 소년을 앞세우고 폴리갑을 체포하러 왔을 때, 폴리갑은 그들이 먹고 마실 식탁을 준비하게 하였다. 순교의 제물을 앞에 두고 그들이 먹고 마시는 동안 폴리갑은 한 시간의 기도시간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거의 두 시간을 향해 가고 있는 그의 기도는 아무도 제지하지 못했다. 이윽고, 기도를 마치자 압송되어 경기장에 들어서게 되었다. 폴리갑의 명성과 고령을 생각한 지방총독이 말하였다. "맹세하라. 그러면 내가 너를 석방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욕하라!" 죽음을 벗어나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절대절명의 순간에 폴리갑의 입이 열렸다. "86년 동안 나는 그의 종이었습니다. 그 동안 그분은 나에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나를 구원하신 왕을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 로마의 신(神), 가이사에게 맹세할 것을 요구하는 추상같은 명령 앞에서 폴리갑의 무릎은 결코 굽혀지지 않았고 기둥에 묶인채 마침내 그는 화형을 당했다.
박해와 순교를 통해 세계화
배교자와는 달리 순교자, 변증자, 호교론자들은 이교 세계에까지 큰 영향력을 끼치면서 교회사상 특히 사상사적인 면에서 볼 때 최초의 기독교 신학의 기초를 놓은 자들이란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예수 그리스도는 공생애 중에 그를 따르는 자들이 세상에서 박해를 받을 것을 말씀하셨다(마 10:16-23; 마 24:9-13). 초기 교회의 확장 과정에서 그 예언의 말씀은 사실로 나타났다. 기독교가 그 종교적 진리를 위하여 재래 종교와는 다른 비타협적인 자세를 취하자 로마제국의 권력과 충돌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후 313년 로마제국에서 완전한 종교적 자유가 허용되었고 로마제국의 박해는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즉 박해란 시련을 통하여 기독교는 더 정화되었고 4세기 이후에는 로마 제국의 지배적 종교가 되었으며 그 이후 서양문명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초기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박해를 이기고 오히려 로마제국을 기독교화 함으로 현대 문명의 주류를 이룬 서양 문명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기독교는 많은 핍박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가 되어 교회는 꾸준하게 성장하였다. 핍박이라는 기독교 장애물이 오히려 기독교를 성장시키는 수단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이상에서 로마제국의 초대교회 박해의 원인 및 과정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하여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복음전파가 현대의 기독교가 세계화하가 가능하기까지는 초대교회의 순교를 통하여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곧 초대 1세기와 2세기의 박해 그리고 수세기 동안 온 세계를 돌면서 복음은 수많은 순교자를 만들었고 그 결과 오늘날의 기독교 세력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한국에서 기독교 박해
한국의 그리스도교(가톨릭)는 조선 중기에 한국에 전래되어 천주교(天主敎)라 불리었는데, 이 새로운 종교의 윤리사상은 오랫동안 유학(儒學)에 지배되어 오던 기존의 가치관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정의 유신(儒臣)들 사이에서는 그리스도교가 우리의 충효(忠孝)사상에 어긋나고 군신(君臣)의 도(道)를 어지럽게 하여 사회윤리를 파괴한다는 논란이 일어났으며,
결국 1791년(정조 15)에 신해사옥(辛亥邪獄), 1801년(순조 1)에 신유사옥(辛酉邪獄:신유박해)을 일으켜 대대적으로 천주교도를 박해하였다. 신유사옥은 천주교 전래 이후 최대의 박해로서, 천주교도 색출방법으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이 시행되었고, 순교자의 수가 300명을 넘었다. 그 뒤로도 박해는 계속되어, 1839년(헌종 5)에는 다시 수많은 순교자를 낸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일어났다.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때는 당시 밀려들어오기 시작한 외세와의 대항이라는 정치정세와 관련하여 천주교도 박해가 더욱 심해져서, 1866년(고종 3)에는 프랑스 선교사들을 비롯한 천주교인 수천 명이 학살된 병인대박해(丙寅大迫害)가 있었다. 그러다가 1882년(고종 19) 미국과의 수호조약 체결을 계기로 천주교 박해는 끝이 났다. 그 후 1886년(고종 23) 프랑스와의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천주교는 완전히 신교(信敎)의 자유를 보장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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