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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의 겨울 16 : 그리스도교 탄생 역사 12 (그리스도교 부패와 종교 개혁 2) 본문
우면산의 겨울 16 : 그리스도교 탄생 역사 12 (그리스도교 부패와 종교 개혁 2)
종교 개혁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해 가장 자주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 중의 하나가 이른바 「면죄부」이다. 그러나 이는 심히 왜곡된 표현이며 사실은 「대사특전(indulgence)」을 지칭한다. 16세기초 독일에서 촉발된 대사 논쟁은 소위 종교개혁을 부른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독일 종교분열의 직접적 동기는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 건축을 위한 대사 설교에 있었다. 극도로 피상적이고 과장된 대사 설교를 통해 특히 당시 독일 교회는 부의 축적에 몰두한 듯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마그데부르크의 대주교 알브레히트는 교황청에 일정액을 그 조건으로 지불하기로 계약했으며 동시에 자기 교구 안에서 8년 동안 성 베드로 대성전 건축을 위한 대사 설교를 하도록 협약이 이뤄졌고 그 수익금의 반은 자신이 소유했다. 그는 대사 설교가들과 고해신부들을 임명하고 이들에게 설교에 대한 전체적 지침서를 주었다. 이 지침서는 돈을 많이 걷는 것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웅변적 과장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대사와 관련해 교리상의 잘못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루터의 주장처럼 대사를 통해 신자들의 미래의 죄까지 사해진다고 한 일은 없지만 고해성사표를 판매했고 이 표를 가지면 일생 중 언제라도 고해성사를 보면 교황이 보류한 죄까지 사해진다고 한 일은 있었다고 한다. 또 설교가들은 고해성사표를 사는 순간 교회의 영적 은혜를 얻기 때문에 통회가 필요없다는 식으로 설교를 했고 죽은 사람을 위해 대사를 얻을 때에도 고해성사를 보거나 통회할 필요 없이 돈만 주면 되도록 되어있었다.
작금의 대사 설교가 성실한 신앙생활을 위한 노력보다는 돈으로 자기 영혼을 구하려고 고심하고 순례와 같은 외적 행사에 더 신경을 쓰고 있는 현실을 개탄한 루터는 대주교에게 새 훈령을 통해 대사설교의 폐단을 없앨 것을 요구하고 신학자들이 대사 교리를 명확히 밝힐 것을 촉구하면서 작금의 대사 시행을 반박하는 신학 명제로서 대사 명제와 대사 논문을 첨부했다. 루터는 후에 자신이 95개 조문을 발표하게 된 동기는 바로 이 편지에 대해 주교들이 아무런 회답을 주지 않은데 있었다고 말했다. 이 95개 명제는 루터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출판업자들의 손에 들어가 1518년 95개 항목으로 정리돼 「95개조 명제」로 인쇄됐다.
1. 개요
중세 말기에 인문학자들은 교회의 부정과 부패를 풍자하며 도덕적인 개혁을 부르짖었지만 그것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런 가운데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회당 정문에 95개조에 달하는 반박문을 못 박은 사건은 로마 가톨릭의 유럽 지배 종식의 기점이 되었다. 물론 중세인들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신의 목소리를 듣기를 원했고, 인위적인 평안이 아닌 신이 직접 내리는 평안을 절실하게 요구하였다. 루터는 바로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켰다. 루터는 중세의 신비주의적 경건과 예리한 지성으로 중세교회의 부정과 인위적인 가면을 벗기고 복음의 실체를 값없이 모든 사람에게 선물했다.
독일에서 루터를 중심으로 개혁 운동이 일어남과 더불어 스위스에서는 칼뱅의 개혁운동이 꽃을 피우게 되었다. 개혁파의 신학은 점점 칼뱅의 신학으로 수렴되면서 칼뱅주의는 대륙 쪽 개혁파 신학의 주류가 되었다. 칼뱅의 제자였던 녹스는 영국으로 가서 개혁파 신학을 전하였다. 이렇게 16세기 유럽은 대변혁을 맞았다.
이렇게 유럽이 점차적으로 교황청의 억압으로부터 서서히 벗어나면서 인문주의도 더 활발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훗날 문예부흥을 불러왔다. 신학의 시녀로서 빛을 보지 못했던 철학이 과학적인 방법의 도입과 더불어서 독자적인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연과학의 발달과 더불어서 무조건적인 신앙의 강요가 호소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신대륙의 발견과 더불어서 박해받던 유럽의 개신교 신자들에게 탈출의 기회가 마련되었으며, 지금까지 억압받던 노동자와 농민들이 제 몫을 찾기 위해서 조용한 시위를 일으키는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새로운 양상의 변화가 일어났다.
공격을 받은 로마 가톨릭 내부에서는 조용하게 자신들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서 개신교에 반격할 수 있는 철갑을 더욱 단단히 함으로써 내부 개혁을 실시해 쇄신하였으며, 다른 한쪽에서는 그리스도교 내부의 개혁과 함께 해외 선교에 힘을 쏟는 예수회가 시대적 필요에 부응해서 창설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로 기독교는 수백개의 여러 종파로 분열되었고, 그로 인해 기독교 종파 간 갈등을 가중시켜 신앙상 혼란을 일으켰다는 비판을 종교개혁파에게 내리는 사람들도 있다.
개혁자들의 사상
개혁자들의 신학적 사상은 소위 다섯 Solas(Five Solas)로 요약된다:
- Sola Scriptura (오직 성서) : 진리냐 아니냐의 최종 권위는 오직 성서에 있다는 뜻으로 로마 가톨릭의 교권주의에 저항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즉, 진리의 판단기준은 성서이지, 교회가 아니라고 해석한 것이다.
-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고, 오직 십자가에서 억조창생의 죄값을 다 받고 하느님의 의를 완전히 이룬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덧입는 것뿐이라는 뜻이다.
- Sola Gratia (오직 은혜) : 구원에 필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공효를 덧입는 것은 전적인 하느님의 선물로써 하느님이 인간 쪽에 아무런 조건을 찾지 않는다는 뜻이다. "믿음" 역시 하느님의 선물이며, 믿음은 구원의 은혜를 받는 '통로' 역할을 할 뿐이며 그것의 '대가'로 구원을 받지는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 교리는 인간의 종교적 행위를 강조하는 업적의를 비판하는 데 목적이 있다.
- Sola Fide (오직 믿음) : 하느님이 내리시는 은혜는 오직 믿음을 통하여 받을 뿐이지 다른 어떤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Soli Deo Gloria (오직 주만 영광 받으심) : 구원은 하느님이 시작하고 완성하시는 일이며 거기에 인간이 참여하는 부분은 없기 때문에 모든 영광을 하느님이 받으신다는 내용이다.
2. 종교개혁의 요인
종교개혁은 그리스도교 내부의 부정과 부패를 개혁하여 초대교회의 원형으로 회복하려는 운동이었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의 모습을 보면 루터만이 아니라 그 이전 사람들이 있었다. 영국의 존 위클리프나 보헤미아의 얀 후스는 사상적인 개혁자들이었고 사보나롤라 같은 이는 도덕적인 개혁자였고 버나드나 타울러나 엑카르트는 신비적인 개혁자들이었다. 이들에 의하여 준비된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에 반대하기 위하여 성서의 유일한 권위를 강조하고, 오직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교리, 그리고 모든 신자의 제사장직을 기본 원리로 하여 그리스도교의 변화를 추구하였다. 루터나 칼뱅은 이러한 운동을 보다 더 효과 있고 광범하게 전개하였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을 불러온 요인은 3가지 정도로 말할 수 있다.
도덕적 요인
교회가 신령한 축복을 돈 받고 파는 장사를 하면서도 그것을 합리화 시키려 할 때 루터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그 외에도 성직매매가 성행 했다. 그리고 신부는 문란한 생활과 사회의 지탄을 받는 생활을 했다. 이러한 도덕적 타락은 일부 주교들이 교회 개혁을 교황 바오로 3세에게 정식으로 건의하기에 이르기까지 했다.
지적인 요인
르네상스는 유럽의 지적인 생활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고대 문학에로의 복귀, 개인주의적 각성, 지리상의 발견에 따라 동서 문화의 교류, 봉건 제도의 붕괴에 뒤따른 상업인구의 격증, 스콜라 철학의 퇴조와 함께 득세한 옥감주의의 득세, 이 모든 것들이 중세의 사상적 기초를 흔들었다. 북유럽에서는 인문주의가 대학가를 휩쓸었다. 르네상스에 뒤따른 새로운 학문열은 교부신학과 성서 원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 연구를 장려했으며 종교개혁의 사상적 배경을 제공하여 주었다. 중세의 지식사회는 성서적 인문주의의 세찬 도전을 받기에 이르렀다.
사회적 요인
십자군 이후 봉건 사회가 점차 무너지면서 상업의 발달로 농업 경제가 상업 경제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사회의 구조에 변화가 생겨졌다. 국가주의의 등장으로 스페인과 프랑스에서는 교회가 국가의 지배 아래 들어오게 되고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로 인한 교황권의 몰락은 교회 개혁을 가속화 했다. 교황청이 부과하는 조공의 상승과 지나친 사치는 백성들의 원망을 사게 했고 루터가 개혁의 봉화를 들자 독일의 농민들은 일제히 봉기했다.
3.독일의 종교개혁
독일의 종교개혁은 먼저 정치적 상황과 교회의 각종 모습을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루터의 외침이 독일인들, 그 중에서도 특히 세속 제후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교황청으로부터의 경제적·정치적 자유를 얻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 이전의 독일의 정치적 상황
종교개혁 이전의 독일의 상황은 다른 나라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이탈리아는 교황청이 위치한 나라로 십자군 전쟁 이후로 도시의 발달과 봉건 제도에 도전하는 단계에 있었다. 프랑스는 십자군 파견으로 전쟁 이후의 세력권에서 크게 부상하였다. 스페인은 1492년 이래로 통일 왕국 시대를 맞이해서 해상무역권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잉글랜드는 스페인의 위성 국가였으며,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의 위성국가로서 힘은 발휘하지 못했으나 지리적인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청의 힘이 가장 강력히 미칠 수 있었던 곳은 독일뿐이었다. 그리고 독일인들의 보수적인 기질마저 겹쳐져서 교황청의 시녀 노릇을 자처하였다. 각종 세금성 헌금을 바치는 등 독일은 교황청의 재정적 수입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통치 아래 대봉건 영주들의 총회의를 두고서 제국을 통치하였다. 공동의 주전법으로 화폐를 통일시키고 관세법을 통일시킴으로써 하나의 의회 아래에서 통일 국가의 형태를 가지고 운영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486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던 막시밀리안이 1519년 1월에 죽고 부르군디의 필리프의 아들이며, 스페인의 왕 페르디난도와 이사벨라의 손자인 카를 5세가 1519년 6월 선제후들의 손에 의해서 새로운 황제로 선출되었다. 카를 5세는 독일계 스페인 사람이었다.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교황청의 착취
문예부흥과 더불어서 각종 예술의 부흥이 유럽 전역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교회도 예술적인 감각을 도입하였다. 역대 교황들은 취임과 더불어서 자신의 임기 동안에 거대한 성당과 궁전을 짓고 그 곳을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치장하는 것을 일생의 보람과 업적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큰 사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하였다. 그 자금원은 광활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세속 제후들이었다.
루터가 그의 논문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글"을 통하여 독일 내에서 개혁되어야 할 폐단 27종류를 열거하였는데 이것은 모두 이러한 로마 교황청의 수탈과 관련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것으로 폐해가 컸던 첫 수입세, 팔리움, 보류권, 사라센세 등은 각종 공물 제도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 밖에도 조달비, 공석금, 기부금, 십자군 자금 등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교황청은 십일조를 강요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의 눈에는 이러한 광경이 신의 이름으로 개인의 호주머니를 털어가는 흡입기를 제도화 하고 있는 것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이때 건축되거나 제작된 작품 중 유명한 것은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 그림 등과 함께 로마 교황청의 베드로 대성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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