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마을
우면산의 겨울 17 : 그리스도교 탄생 역사 13 (그리스도교 부패와 종교개혁 3) 본문
우면산의 겨울 17 : 그리스도교 탄생 역사 13 (그리스도교 부패와 종교개혁 3)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95개조 명제 발표까지
종교개혁의 기폭제는 대사(大赦, 면죄부라는 말은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오역된 단어임.)였다. 대사는 사도 시대 이래로 인간 구원 과정에서 보조 수단으로 교회가 간직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혈 공로와 성인들의 보속 공로를 갖고서 신자가 현세에서 또는 죽은 다음에 연옥에서 받아야 하는 죄의 잠벌을 없애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죄를 범한 신자가 고해성사를 통해서 죄의 잘못을 용서받고 영벌에서 벗어났지만 자기 죄 때문에 생긴 벌을 받아야 하는데 이러한 죄벌은 먼저 고해 신부가 부과하는 보속의 실천을 통해서 덜어질 수 있다. 아울러 보속하지 못한 잠벌은 대사를 통해서 면제받고 영혼이 정화되어 구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
1513년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대사(大赦)를 반포하고 대사부 판매 촉진을 목적으로 대사 설교를 실시하였는데,문제가 된것은 독일의 대사 설교가 테쩰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대사발부의 지침을 어기고 자의적으로 대사를 홍보하였던 것이다.(훗날, 테쩰은 교회로부터 단죄받는다.) 이에 루터는 신자들이 대사의 참다운 의미와 가치를 망각하고 대사를 면죄부로 착각하여 남용하고 있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이 문제에 비판적인 자신의 견해를 95개조로 낱낱이 써서 발표하였고, 로마 교황이 파견한 특사 요한 에크와 논쟁한다. 루터는 에크와의 논쟁에서 교황권과 공의회가 한점 오류도 없다는 교황무류성을 거부하였다.
라이프치히 논쟁
1519년 엑크와 루터 사이에 라이프치히 신학 논쟁이 개최되었다. 이 논쟁에서 결국 엘리트 신학 코스를 받은 엑크가 이기게 되고, 루터는 우울하게 비텐베르크로 되돌아간다.
마침내 루터는 교황과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으며 교황에게 반감을 가진 독일의 기사 및 시민들이 그를 열렬히 지지하였다. 이날 이후로 루터는 확고한 신념으로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교황은 적 그리스도의 상징이며, 가장 악마적인 존재로 묘사되었다. 당시 독일의 정세는 루터의 개혁을 단순히 영적 차원에만 국한시키지는 않았던 것이다. 상황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보름스에서 소집한 제국 의회에 루터가 소환될 정도로 확대된다.
보름스회의
보름스회의로 추방령이 내려진 이후 루터는 작센의 제후 프리드리히의 보호로 바르트부르크 성에 은거해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에 임하며, 당시 그의 신약성서 번역은 독일 문학사와 특히 현대 독일어 발전에 주춧돌이 된다. 루터의 과격한 설교와 저서는 곧 독일 교회를 혼돈으로 빠뜨리게 된다.
농민봉기와 루터의 좌절
어떠한 일에든지 돌발적인 현상이 잠재적으로 내재해 있다가 시간이 되면 뜻밖의 현상인 것처럼 돌출하기 마련이다. 루터 개인이 보름스회의에 참석할 때까지만 해도 죽음을 각오하고 뒷일을 멜란히톤에게 위임했다. 그러나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 은신해 있는 사이에 비텐베르크의 분위기는 예상 밖에도 칼슈타트가 주도하면서 시위적 양상이 곁들어 들자 지금까지의 불만 세력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14세기부터 16세기의 대변혁기에 이르기까지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 농민들이 자신들의 권리 회복을 부르짖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들은 지배층의 착취를 언제나 언급하고 있다. 이들은 신분상 농노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다. 이러한 농민들의 불만이 루터의 힘을 얻고 1524년 터져 나왔다. 이 농민 소요는 더욱 거세게 몰아치면서 도시의 빈민층까지 가세하게 되었다.
그러나 개혁 운동에 농민들이 가담함으로써 가장 피해를 입은 사람은 다름 아닌 루터였다. 지금까지 루터가 교회 개혁을 주도하는 데에는 프리드리히의 막강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농민 편에서 프리드리히는 착취자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는 힘없는 농민들보다는 힘 있는 선제후들을 지지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는 지지자들을 잃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로마 가톨릭측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아우구스부르크 협상으로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주장이 여러 동조자들과 함께 수정되어서 제출되는 등 혼자의 힘으로 반가톨릭 운동을 이끌어 갈 수 없게 되었다.
소요한 농민들은 짧은 시일 내에 결성된 모임체였기 때문에 내부적인 결속력이 없었으며, 운동 자체나 외부의 대항 세력을 지속적으로 이끌어 갈 수 없었다. 농민들의 소요 사태는 독일 북부로부터 진압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1526년에 거의 진압이 되었다. 진압 과정에서 소요군의 사망 수는 100,000-150,000명에 이르렀다. 여기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은 루터였다. 루터는 농민들이 잠잠해짐으로써 원하는 독일교회의 개혁이 달성할 수 있었다. 그래서 루터는 소요 지역들을 찾아다니면서 농민 운동을 당장 그만두라고 하였다. 이것이 실패할 경우 자신의 반가톨릭 운동에 큰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설교 여행을 떠났으며, 이 기간 동안에 그토록 자신을 지지했던 프리드리히가 사망했다.
루터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 "농민들로 이루어진 살인과 도적 떼를 반대하며"라는 소책자를 발표했다. 심지어 루터는 이 책자에서 제후들이 농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가 자신에게 힘이 되었던 제후들, 특히 선제후 프리드리히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 선무 설교 여행까지 감행했던 것을 볼 때에 손을 씻은 빌라도를 연상케 된다. 아무튼 농민 소요가 루터에게 치명타를 가한 것은 사실이다.
'루터의 개혁' 평가
루터는 본래 로마 가톨릭을 개혁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교황청에 의해 등 떠밀리다시피 해서 하게 된 것이 종교개혁이다. 루터는 근본적으로 보수파였으며, 루터의 개신교는 보수적이고 소극적이었다. 어쨌든 루터의 종교 개혁은 종교를 탈피한 점에 특색이 있고, 그것으로 지도권을 행사해 온 로마 교황정청의 지적 문화에 대한 반발심에 불과하였다. 그리고 그 반발심에는 질투심이 내포되어 있었다.
덧붙여 당장 루터를 믿고 봉기에 나선 농민들에게 "인간은 신 앞에서는 평등하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는(현실에서 차별은 있다고 하는 의미) 고사에서 알 수 있듯이 루터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와 상관없이 귀족 기반의 개혁을 추진하게 된 관계로 일반 민중들에게 깊숙이 파고들지는 못했다.
4.스위스의 종교개혁
스위스는 역사적으로 유럽의 오지에 속하는 척박한 땅으로써 산업이 발달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렇지만 자유를 원하는 농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자주정신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다 각종 박해받던 신앙인들이 몰려들게 되었고, 어느 누구에게도 간섭을 받지 않고 1291년 연방체계로 발전하였다.
스위스는 남쪽으로는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았으며, 서쪽의 프랑스어 사용권 지역과 북쪽의 독일어 사용권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종교개혁 즈음에 이르러서는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의 박해를 피해서 많은 개신교도들이 피난 와서 슈트라스부르크를 중심으로 이민사회를 형성하기도 하였으며, 제네바도 이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산업의 발달이 거의 불가능한 지역이었으나, 지리적인 조건 아래에서 단련된 신체적 강인함으로 인해서 스위스인들은 오래 전부터 교황청의 용병으로 일해서 재정적 수입을 충당하였다. 이러한 전통적인 용병제도는 프랑스의 아비뇽 교황청 시절에 양쪽으로 용병이 팔려가는 바람에 민족 간에 편이 갈려 전투를 했던 고난을 겪었으며, 카를 5세와 프랑수아 1세 사이의 전투에 다시 한 번 용병으로 팔려가서 동족끼리 살상하는 모순을 겪었다. 그래서 스위스의 종교 개혁은 용병제도의 근절이라는 재정적 수입원의 차단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크게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츠빙글리의 개혁
츠빙글리는 독일의 개혁자 루터와는 많은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루터는 개인의 구원의 확신을 위한 영적 투쟁으로부터 출발해서 복음 안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진 다음에 로마 가톨릭의 부정과 부패를 발견하는 순서를 밟았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처음부터 교회의 부정과 부패를 발견하고서 이것들을 에라스무스적인 풍자와 학문적인 공격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츠빙글리는 개인의 구원과 말씀 안에서의 구원의 확신이 처음부터 약했다. 그렇지만 그는 나중에 목회자로서의 경륜이 쌓여감에 따라서 교회와 교인들의 요구 사항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으며, 본인도 점차적으로 복음의 진수를 깨닫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의 복음 이해는 인문주의적인 합리적 요소가 끝까지 있었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재세례파 사람들이 취리히를 중심으로 반기를 들면서 재세례를 베푸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츠빙글리는 과격 재세례파 사람들과도 싸워야 하는 이중 고통이 있었다.
츠빙글리의 개혁은 민족주의적인 요소가 루터보다 훨씬 강하였다. 그는 용병으로 벌어들이는 수입보다는 한 사람의 동족의 생명을 더욱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그의 개혁은 재정적 수입원의 차단이라는 고육책으로 모범을 보이는 데서 인정을 받았다. 츠빙글리는 루터만큼 활발한 저술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의 글은 개혁교회의 기초가 될 수 있는 복음 이해와 화체설에 반대하는 영성체 신학을 확립시켰다.
그러나 47세라는 인생의 황금기에 죽음으로 인해서 자신이 벌여 놓았던 많은 일과 사업의 뒷마무리를 후배인 칼맹에게 양보하고 말았다. 이러한 면에서 같은 인문주의자로 출발해서 개혁주의로 바뀌었던 칼뱅은 가장 적절한 후계자이며, 또한 완성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제네바의 개혁이 이루어지기까지
제네바는 1387년 이래로 도시의 군주로서 주교, 도시의 소유자로서 사보이 가문의 백작, 그리고 자유 시민들로 이루어진 3원 체제에 의해서 통치되어 오다가 1444년 이후로는 사보이 가문에서 주교까지 세습적으로 계승함으로써 자연히 자유 시민들의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네바의 시민들은 스위스의 자치주들과 동맹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프라이부르크와 제휴하였지만 베른은 이에 동의하지 않아서 적잖은 대결상태를 유지했다.
이렇게 변화하는 상황에서 제네바 시는 소의회와 대의회 제도로 바뀌었으며, 모든 중대사는 대의회에서 결정하였다. 베른은 제네바가 개혁되기를 바라는 눈치였으나, 공개적으로 요구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그 유명한 현수막 사건이 발생 했다. 현수막에는 "누구든지 자신이 죄를 회개하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진실하게 믿으면 모든 죄에 대한 완전 면죄부를 수여 받을 수 있다"라고 쓰여 있었다.
이로 인해서 1532년 가을에 제네바에 도착해서 조용하게 가정집에서 설교하던 파렐, 사우니어, 올리베탄은 추방당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파렐은 제네바를 포기할 수가 없어서 프로망을 불어선생의 자격으로 제네바에 잠입 시켜서 불어교습과 더불어서 개혁적 복음주의를 설교케 하였다. 그러다가 점점 수적 불어난 복음주의자들과 가톨릭주의자 사이에 시민전쟁을 방불케 하는 격렬한 몸싸움도 있었다. 여기에서 윌리라는 이름의 가톨릭 사제가 희생되었다.
가톨릭 측은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하려고 하였으나 베른은 복음주의자 편에 서서 옹호하고 나섰다. 프로망의 활동으로 가톨릭 수도자와 공개 토론회가 실시되었으며 파렐은 공개 토론회 참가자로서 1532년 12월20일 에 다시금 제네바에 발을 딛을 수 있었다. 그래서 1533년 2월에는 최초의 복음주의식 세례를 베풀었으며, 3월1일부터는 공개적으로 복음주의식 예배를 드렸으며, 수도원의 교회를 빌려서 사오천 명씩 한꺼번에 예배를 드렸다.
이렇게 제네바시는 기사도 정신에 뛰어난 프랑스인 파렐을 맞이해서 개혁을 이끌어 갈 준비를 마쳤다. 이제는 길이 닦인 도로 위에 복음주의 마차를 이끌어갈 마부가 필요하였다. 바로 이러한 요구 조건을 충족시켜 준 사람이 바로 칼뱅이었다.
칼뱅의 개혁
시작
1537년 1월에 칼뱅은 제네바의 대의회 앞에서 자신의 개혁안이 담긴 비망록을 전달하였다. 성만찬, 공중 예배에서의 찬양, 어린이의 종교 교육, 결혼 등 4가지였다. 성만찬은 가급적으로 자주 집행하는 것이 좋으나 현재적인 형편으로는 한 달에 한 번씩 행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리고 불합당한 자는 주님의 몸을 오염시키지 못하도록 출교에 관한 치리를 제정해서 참여치 못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회중에게는 시편찬송을 적극적으로 권장함과 동시에 가르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어린이들에게 순수한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간략한 신앙고백이나 요리문답을 작성해서 목회자가 직접 가르치도록 했다. 결혼은 지금까지 악하고 비성경적인 교황청의 법에 의해서 이루어 졌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새로운 규정을 제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칼뱅의 새로운 제안은 교회의 행정에 관한 조항으로서 소의회와 대의회를 통과하였다. 성만찬은 일 년에 4차례 집행하며, 결혼광고는 예식거행에 앞서서 3주 동안 광고하여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제네바시는 칼뱅과 그의 동료 파렐의 가르침에 따라서 종교 개혁을 추진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다 같이 개혁에 찬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1538년 1월에 시의회는 원치 않는 사람에게는 성만찬을 베풀지 않는다고 결정하였으며, 2월의 시의회 선거에서는 칼뱅과 파렐을 반대하는 4사람이 특별 평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른시의 간섭과 더불어 개혁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재세례파와 손을 잡았으며, 파렐과 칼뱅은 아리우스주의자 이며, 자유방임주의자라고 비난하였다. 베른 의회는 제네바를 위시한 전지역을 그들의 손에 넣으려고 하였으며,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연약한 제네바 시의회는 3월에 이르러서 베른의 예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사태변화 가운데서 코로우, 파렐, 칼뱅은 제네바시를 떠날 것을 명받았다.
파렐과 칼뱅은 제네바를 떠났으며, 칼뱅은 허탈감에 빠져서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연구에 전념하기로 하였다. 그간 파렐과 더불어서 3년 동안 개혁을 시도 하였던 모든 일이 허사로 끝난데 대한 분노와 갈등을 이겨 내면서 연구와 동시에 프랑스 난민들을 돌보는 목회일에 전념하였다.
다시 돌아온 칼뱅과 그의 개혁
파렐과 칼뱅이 떠난 제네바의 상황은 예전보다 좋아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악화되는 것 같았다. 새로 부임한 목회자를 특별평의원들은 자기의 종같이 부렸으며, 모든 가장들에게 교회에 참석토록 하는 의무규정을 부과 하였으며, 주의 만찬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으며, 도시의 도덕적 수준은 날로 저하되어 갔다. 이렇게 해서 평의원들은 인기가 떨어지고 다음해 선거에서 재당선하지 못했다. 이때로부터 칼뱅을 다시 초청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1539년 10월 대의회에서 대표자를 보내 뜻을 전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칼뱅은 보름스의회에 참석 중이었기 때문에 답장을 유보한 채 번민에 있었다. 이 때 파렐의 충고가 크게 작용하였다. 파렐은 제네바가 차지하는 지역적인 중요성을 들어서 제네바가 개혁되면 인근 이탈리아, 프랑스, 스위스의 복음화가 가속화 된다고 강력하게 설득하였다. 칼뱅은 3년여 동안 제네바를 떠나 있다가 1541년 9월 13일 다시금 제네바로 돌아왔다. 그리고 제네바 교회규범을 제정해서 의회에서 통과 시켰다. 이제는 개혁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엄격한 훈련과 경건생활 실천을 위한 각종제도와 이단을 색출해서 처리하는 데 이르기까지 칼뱅은 정열적으로 개혁을 추진하였다.
제네바의 개혁 추진과 칼뱅의 신학
칼뱅은 제네바에서 소위 말하는 외국인이었다. 이런 그가 제네바에서 세력을 얻어 확장시키기까지의 과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들었다. 다시 돌아온 칼뱅과 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마찰이 끊임없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칼뱅의 사상을 율법적인 독선이라고 비난하였다. 마치 루터에게 농민전쟁이 예기치 않는 결과를 초래하였듯이 칼뱅도 이들을 맞이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제네바의 현지인과 자유주의자.
칼뱅의 개혁은 이단을 색출하고 처단하는 데에서 다른 사람과 특이한 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단성이 있는 것은 정죄하였으며, 자유주의자들을 맞이해서는 전통신앙과 신학을 고수함으로써 조금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칼뱅의 신학
칼뱅 역시 기독교 본래의 모습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많은 부분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미사를 폐지하였고, 교계제도를 장로제도로 바꾸었으며, 교회의 성 미술을 우상이라며 배척하고 파괴하였다. 그의 신학은 저서 《기독교강요》에 잘 나타나고 있다. 칼뱅과 그의 《기독교강요》 만큼 기독교 신학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예는 드물다. 종교개혁이 유럽 전역으로 퍼지면서 개신교회의 신학은 점차 칼뱅 쪽으로 수렴되었고, 지금도 종교 개혁의 전통을 고수하는 신학적 유파를 가리키는 개혁주의라는 말은 ‘칼빈주의’라는 말과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 칼빈주의의 핵심 주장은 '칼빈주의 5대 강령'이라는 다섯 가지 요점으로 요약된다. 이것은 칼뱅이 만든 것은 아니고 훗날 개혁주의에 반대하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의 이론에 반박하기 위해 도르트 총회에서 정해진 것이다. 하지만 칼빈주의의 사상을 잘 요약하고 있다.
- 이 부분의 본문은 칼빈주의 5대 강령입니다.
- 전적 타락 : 육체적인 생명만 갖고 있는 모든 자연인은 그 본성이 타락하여 구원에 필요한 믿음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믿음을 갖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믿음은 그 질(質)이 달라서 그 중에는 구원 받을 수 있는 참 믿음도 있고 받을 수 없는 유(類)의 믿음도 있는데, 다른 종류의 믿음은 사람이 스스로 발휘할 수 있으되 구원에 필요한 믿음은 사람이 스스로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주장을 '전적 무능력'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주의할 것은 그 '무능력'이라고 함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기능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 타락하여 참된 믿음을 갖기 싫어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로 보건대 하나님이 참된 믿음을 주시기 전에는 아무도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되게 못 믿는다는 것이다.
- 무조건적 선택 : 앞의 '전적 타락'설에 의하면 참된 믿음은 하나님이 주셔야만 얻게 되는 것인데, 누구에게 참된 믿음을 줄 것인지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는 것이다.
- 제한 속죄 : 앞의 '무조건적 선택'을 받은 사람이 결국 '구속에 언약' 또는 '은혜의 언약'에서 그리스도의 백성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실효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내용이다.
- 불가항력적 은혜 :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로 보건대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사람이 그리스도를 아니 믿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속의 언약'과도 연관이 있다.
- 성도의 견인 :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로 보건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자리로 결코 떨어지지 않고 구원이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구속의 언약'과 연관이 있다.
이들 주장은 개혁주의를 반대하는 많은 개신교 종파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 또 칼뱅은 세르베투스를 신학적 관점 차이로 처형시켰다는 오해로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세르베투스는 칼빈을 만나기 전 이미 스페인과 프랑스의 로마교회 종교재판소로부터 공석 상태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이로 인해 칼뱅이 있던 제네바에서 체포되었으나 제나바 시의회의 재판을 다시 받게 된다. 프랑스인으로서 시민권이 없던 칼뱅은 종교회의(종교재판은 아님)에서 세르베투스의 이단성을 증명하는 것 외에는 재판에 다른 영향력이 없었다. 결국 제네바 시의회는 세르베투스를 이단자라는 명목으로 화형에 처했고, 이리하여 세르베투스는 칼뱅 생전에 제네바에서 종교적인 이유로 사형 당한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칼뱅과 신정정치
제네바는 본래적으로 자유스러운 분위기였고 자유가 강조되는 도시였다. 그러나 칼뱅은 타락한 사람들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강력한 생활규범과 훈련이 필요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부임하자마자 4가지 개혁안을 부르짖었으며, 그는 신학이 사회권력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사상은 제네바 행정 사법에 영향을 주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춤, 도박, 주정, 술집 출입의 횟수, 방종, 사치, 접대 행위,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분수에 넘치는 의복 착용, 음란하거나 비신앙적인 노래 등에 금지, 혹은 비난, 구금형을 가하였다. 심지어는 잔치집의 접시까지 세며 규제했다. 주민들의 교회 참석 여부를 감독하는 사람이 파견되었으며, 교회법원의 사람들이 가정을 1년에 한 차례씩 찾아가서 신앙상태를 점검 하였으며, 심지어는 길거리에서 무심코 뱉은 말까지도 책임져야 했다. 이상과 같은 엄격한 규율은 네덜란드와 스코틀랜드, 그리고 영국의 청교도에 이르기까지 개혁교회의 주된 윤리가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칼뱅의 개혁' 평가
칼뱅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 되는 것은 종교 개혁 운동의 신학이 사상적 체계를 잡는 데 그가 미친 영향이다. 이것은 그의 저서 《기독교강요》가 갖는 의미라 해도 무방하다. 종교 개혁을 이끈 많은 인물들이 있었지만 결국 개혁교회의 신학은 점차 칼빈 쪽으로 수렴되었고, 지금도 종교 개혁의 전통을 고수하는 개혁주의 신학은 칼뱅주의라는 별명으로도 불리고 있다.
칼뱅에 대한 비난 중엔 그가 자신과 이념을 달리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종교적인 비관용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루터와 칼뱅이 신학적으로 차이가 있었음에도 서로 비난하지 않았다는 점을 내세운다.
'시대의 흐름과 변화 > 생각의 쉼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면산의 겨울 19 : 그리스도교 탄생 역사 15 (그리스도교 분파) (0) | 2011.12.28 |
---|---|
우면산의 겨울 18 : 그리스도교 탄생 역사 14 (그리스도교 부패와 종교개혁 4) (0) | 2011.12.28 |
우면산의 겨울 16 : 그리스도교 탄생 역사 12 (그리스도교 부패와 종교 개혁 2) (0) | 2011.12.27 |
우면산의 겨울 15 : 그리스도교 탄생 역사 11 (그리스도교 부패와 종교 개혁 1) (0) | 2011.12.27 |
우면산의 겨울 14 : 그리스도교 탄생 역사 10 (그리스도교 전파와 박해) (0) | 2011.1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