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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56 : 고려의 역사 225 (고려 정치,사회,경제,문화,사상) 본문
한국의 역사 456 : 고려의 역사 225 (고려 정치,사회,경제,문화,사상)
고려의 건국과 정치사의 전개
9세기 말엽 신라의 사회모순이 격화되고 중앙집권력이 약화되어 전국 각지에서 호족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다. 호족들은 10세기 초에 이르러 견훤(甄萱)의 후백제와 궁예(弓裔)의 태봉(泰封)으로 통합되어 신라와 함께 후삼국으로 정립했다. 주로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개성 호족출신인 왕건은 궁예의 부하로 활동하며 커다란 군공을 세웠는데, 918년 궁예의 실정을 틈타 그를 축출하고 왕위에 올랐다.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여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수도를 자신의 근거지인 개성으로 옮기고 내치(內治)에 힘쓰는 한편 외교와 군사작전을 통해 신라·후백제와 대결했다. 후백제의 압력에 견디다 못한 신라 경순왕이 935년에 귀부해오고, 이듬해 내분을 이용하여 후백제를 멸망시켜 후삼국을 통일했다. 태조는 북진정책을 통해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려는 한편, 불교를 숭상하고 호족세력을 포섭하여 정치체제를 정비했다.
초기의 왕권은 강력한 호족과 개국공신이 있었기 때문에 무척 불안정했다. 945년(혜종 2) 왕규(王規)의 반란, 왕식렴(王式廉)의 군대를 이용한 정종의 즉위와 서경(西京)천도 추진 등은 왕권의 불안정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리하여 뒤를 이은 광종은 강력한 왕권확립을 위해 과거제도의 채용과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 실시, 공복(公服) 제정. 독자적인 연호의 사용, 훈신 숙청을 통하여 과감한 중앙집권정책을 추진했다.
경종대에는 광종의 왕권강화정책에 대한 반발이 있었으나, 전시과(田柴科)제도를 제정하여 관료의 경제기반을 마련하였다.
성종은 유학을 정치이념으로 활용하여 내외의 정치제도를 정비하였다. 중앙의 정치기구로 3성6부 체제를 마련했고, 지방에 처음으로 12목(牧)을 설치하여 지방관을 파견하고 향직을 개편하여 호족의 지위를 격하했다.
성종부터 현종에 이르는 사이 거란의 침입이 있었으나, 이를 격퇴하고 국가체제를 정비해나갔다.
현종대에는 군현제도와 군사제도의 골격을 마련했으며, 문종대에는 국가 통치체제의 정비를 마무리지었다. 이후 정비된 제도를 바탕으로 귀족문화가 크게 발달하여 숙종·예종·인종대까지 전성기를 맞이했다.
정비된 고려의 체제는 12세기에 들어서면서 변화되기 시작했다. 우선 정치 측면에서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문벌귀족 관료 사이의 균형이 깨어져 권력과 경제력의 독점현상이 나타났다. 권력 독점에 반발하는 신진관료의 대항으로 인해 이자겸(李資謙)의 난과 묘청(妙淸)의 난이 일어났다. 문벌귀족이 지배하던 사회는 위기에 처했고, 마침내 무인란(武人亂)으로 붕괴되었다.
1170년 정중부(鄭仲夫) 등이 주도한 무인란은 무반에 대한 차별과 군인의 불만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정변으로, 고려사회를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켰다 ( 정중부의 난). 권력을 장악한 무인들은 집권 문신들을 대거 숙청·살해하고, 왕의 폐립을 마음대로 했다.
정중부·경대승(慶大升)·이의민(李義旼)에 이어 집권한 최충헌(崔忠獻)은 과감한 전제정치로 정권을 안정시켜, 이후 4대 60년간의 최씨집정시대를 열었다.
무인정권기에 왕은 유명무실해지고, 집권무인이 정방(政房)·도방(都房)·교정도감(敎定都監)과 같은 기구를 통해 모든 권력을 행사했다. 또한 경제기반으로 대토지를 소유하여 사회경제적 모순을 격화시켰다.
한편 사회경제 측면에서는 권력집중에 따른 경제력의 집중을 가져와 토지의 겸병현상이 발생했고, 그 결과 전시과체제가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신분제도 해이해졌으며, 농민에 대한 수취는 더욱 가혹해져 토지로부터 유리하는 농민이 증가했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모순의 결과로 대규모 농민·천민의 항쟁이 발생하였다. 전국에 걸쳐 일어난 농민·천민의 난에는 농민, 향·소·부곡민, 노비 등이 참가하여 신분해방을 주장하는가 하면, 신라의 부흥을 표방하기도 했다. 무인정권이 민란을 진압하기는 했지만, 이들 난이 농민과 천민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1231년 몽골군이 침입하여 고려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몽골의 침략). 무인정권은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백성을 산성(山城)과 해도(海島)로 입보(入保)시키면서 전쟁을 수행했다. 농민은 각지에서 적극적으로 항쟁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7차에 걸친 몽골군의 침입으로 전국토는 황폐해지고 국고는 고갈되었다. 그러나 집권층은 계속하여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부처의 힘에 의지하여 몽골군을 물리치려고 대장경을 간행했다.
농민에 대한 수탈도 가혹하여 농민의 반발을 샀고, 일부는 몽골에 투항하기도 했다.
1258년 최의(崔竩)가 김준(金俊)·임연(林衍) 등에 의해 제거되고 왕과 문신들에 의해 몽골과 화의가 이루어져 환도하는 과정에서 무인정권은 임유무(林惟茂)를 마지막으로 붕괴되었다. 화의에 끝까지 반대한 삼별초(三別抄)는 진도(珍島)를 거점으로 저항했으나, 고려와 몽골 연합군에 의해 격파되었다.
그리하여 고려는 왕정을 복고했지만, 원(元)의 간섭을 받게 되어 자주성을 크게 제약당했다.
한편 토지 겸병으로 대변되는 12세기 이후의 사회경제적 모순은 원간섭기에 이르러 더욱 심화되었다. 원에 의한 공물 수탈과 일본정복 과정에서의 가혹한 수취, 원을 오가는 데 사용하는 비용의 마련, 원이 설치한 응방(鷹坊) 등의 각종 기관과 권문세족의 농장 확대 등으로 고려사회는 국가재정이 궁핍해지고 농민은 몰락하는 이중의 모순에 처했다. 심각해진 사회경제적 모순을 극복하려는 시도가 충선왕·충목왕을 중심으로 신진관료들에 의해 추진되었으나, 원의 간섭이라는 기본제약과 집권세족의 이해관계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
내외의 모순이 중첩되어 있었던 고려의 현실은 공민왕의 반원개혁정책으로 해결의 계기를 마련했다. 원이 쇠퇴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공민왕은 기황후(奇皇后) 일족을 비롯한 부원세력(附元勢力)을 제거하고, 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를 혁파하는 한편 군대를 동원하여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공격하고, 관제를 복구하는 등 반원정책을 수행했다. 또한 신돈(辛旽)을 등용하고 전민변정사업(田民辨整事業)을 전개하여 사회모순을 척결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추진세력의 미약함과 권문세족의 반대, 계속된 왜적과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사회경제 기반이 파괴되어 개혁은 성공하지 못하고, 공민왕마저 살해되었다. 그러나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여 집요하게 사회모순의 개혁을 요구하는 신진사대부, 반원(反元)전쟁과 왜구·홍건적과의 전쟁을 통해 성장한 무장이 정치세력으로 등장하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공민왕 이후 다시 권력을 장악한 권문세족은 사회경제적 모순의 해결에 소극적 자세를 가져 개혁세력과 보수세력 간에 갈등이 심해졌다.
그러다가 1388년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여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대세는 개혁파에게 돌아갔다. 이성계는 공양왕을 세우고, 사회모순의 척결을 꾸준히 주장해 온 정도전(鄭道傳)·조준(趙浚) 등 신흥사대부들과 연결하여 과전법(科田法)을 제정함으로써 사전(私田)의 폐단을 극복하는 동시에 새로운 국가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했다. 마침내 개혁론자들이 이성계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자 고려는 멸망했다.
고려의 정치제도
3공 3사
태위.사도.사공 등 3공과 태사.태부.태보 등 3사는 정1품 벼술로 행정권과는 별도로 주어진 명에직이다. 이것이 언재부터 주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문종 대에 정착되었다. 3공3사는 각 1인으로 하고 정1품 벼술을 받았으며 왕의 고문 구실을 하였으며 국가 최고 명예직이었다. 일반적으로 적격자가 없으면 비워두는 것이 관레였고, 왕족에게도 수여되었다.
고려는 봉작을 상속시키지 않았는데, 모든 공.후.백의 아들과 사위에게는 봉작 대신 최고 관직인 사도.사공이 명예직으로 수여되었다. 또한 일반 신하들에게는 명예직인 검교직이 내려졌다.
3공 3사는 사공-사도-태위-태부-태보-태사 순으로 진급하였으나 품계는 모두 정1품으로 동일하였다. 하지만 이 순서는 3공보다 3사가 상위에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3성(三省)
건국 당시의 중앙 정치기구는 태봉의 관제를 이어받아 광평성(廣評省)·내봉성(內奉省)·순군부(徇軍部)·병부(兵部)가 중심이었으나, 982년 성종 때 내문하성과 어사도성 및 어사 6관(선.병.민.형.예.공관 등으로 후에 6부로 개편됨)을 설치하여 3성 6부의 체제로 정비했다. 995년 어사도성이 상서도성으로 개편됨으로써 고려의 3성체제는 골격을 완성하게 된다. 3성은 중서성.문하성.상서성을 통칭한 것이며, 당나라 제도를 모방하였다. 그려는 이 제도를 변형하여 중서성과 문하성을 합쳐 중서문하성과 상서성 양성체제였다고 할 수 있다. 최고 정무기관인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은 백규서무(百揆庶務)를 관장하는 재신(宰臣)과 간쟁(諫諍)·봉박(封駁)·서경(署經)을 담당하는 낭사(郞舍)로 구성되었고, 그 장관인 문하시중이 수상이 되었다.
상서성(尙書省)은 중서문하성에서 결정한 정책을 집행했으며, 이·호·예·병·형·공(吏戶禮兵刑工)의 6부를 거느렸다. 그러나 실제 행정은 6부가 직접 국왕의 명을 받아 시행하는 체제여서 상서성의 기능은 극히 제한되었다.
중서문하성과 함께 중요한 정치기구였던 중추원(中樞院)은 군국(軍國)의 기무(機務)를 담당하는 추신(樞臣)과 왕명 출납을 담당하는 승선(承宣)으로 구성되었다. 그밖에 전곡의 출납과 회계를 담당한 3사(三司), 시정을 논집(論執)하고 백관을 탄핵·규찰하며 서경권을 가진 어사대(御史臺), 시정을 기록하는 사관(史館)을 비롯한 여러 기관이 업무를 나누어 맡았다.
정치권력은 왕과 중서문하성, 중추원의 고위관료인 재추(宰樞)에게 집중되었다. 왕은 6부에게 직접 명령하고 상주를 받았으며, 재추는 도병마사(都兵馬使)와 식목도감(式目都監)에서 합좌(合坐)하여 중요한 국사를 논의·결정했을 뿐 아니라 6부의 판사를 겸직하여 집행권도 장악했다. 그러나 낭사와 어사대는 이들을 견제하는 기능을 수행하여 정치권력의 균형을 유지했다.
3사(三司)
전곡의 출납과 회계 및 조세를 관장하며 백관의 녹봉을 지급하던 기구로 중서문하성, 중추원과 함께 중요한 권력기구를 이루었다. 이 제도는 원래 송나라에서 유래한 것으로 성종 대에 설치되었다.
3사는 형식적으로 국가의 전곡 출납을 총괄하는 기관이었지만 재정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재정에 대한 권한은 호부에 더 많이 주어져 있었다. 따라서 3사의 기능은 주로 국가의 세입과 세무, 녹봉 관리에 한정되어 있었다.
중추원
군사기무와 왕명 출납 및 숙위를 담당하던 중앙관부로 중서문하성과 더불어 양부라고 불렀다.
중추원은 성종 10년인 991년에 한언공의 건의에 따라 송나라의 추밀원을 모방하여 설치되었다. 그 후 현종 대에 중대성으로 개칭되었다가 1011년에 다시 중추원으로 환원되었다. 그리고 문종 대에 직제가 정비되어 종2품의 판원사, 원사, 지원사, 동지원사 등 정3품과 지주사, 좌우승선, 좌우부승선 등 정7품 등을 두었고 주사.시별가.영사.기관.통인 등 이속 36인을 두었다. 1095년 추밀원, 1257년에는 원나라 압력으로 밀직사로 개편되었다가 공민왕의 반원정책으로 다시 추밀원으로 환원되었다가 1362년에 다시 친원정책이 실시되면서 밀직사로 다시 개편되었다.
어사대-사헌부
법을 통하여 시정을 논하고 풍속 교정, 백관규찰, 탄핵 등의 일을 맡아보던 사정기관으로 신라 진흥왕 대인 544년에 처음 설치되었다. 하지만 고려는 신라의 제도와 중국의 당.송 제도를 융합하여 고려의 실정에 맞게 이를 개편했다.
태조 대에는 사헌대라고 하던 것이 성종 대에는 어사대로 개칭되었고, 현종 대에는 최질 등의 난으로 금오대로 일시 변경되었다 하지만 그 이듬해에 다시 사헌대로 개칭하였고 충렬왕 대에는 사헌부, 공민왕 대에는 감찰대와 사헌부 등으로 불리었다.
어시대는 독자적인 활동보다는 중서문하성의 간관인 낭사와 함께 간쟁 및 시정논집 등의 임무를 주로 수행하였고 이를 위하여 불체포, 불징계 등의 특권이 주어졌다.
한림원
왕의 칙명과 조서를 기록하고 정리하는 곳으로 주로 학자들이 재직했다.
한림원은 충렬왕 대에 시림원으로 개칭되었다가 충선왕 대에 사관과 병합되어 예문춘추관이 되었다. 그 후 충숙왕 대에 예문관으로 독립하였다가 공민왕 대에 한림원으로 복구되었다 그러나 공양왕 대에 다시 사관과 병합되어 예문춘추관이라 하였다.
사관
시정의 기록을 담당하는 사관들이 주로 실록 및 역사서를 편찬하던 기관이다
기타 기관으로 국자감(국립대학), 비사성(경전이나 축문을 맡아보던 곳), 합문(조회와 의례 등의 의전 주관), 위위시(의장 즉 의식에 쓰이는 그릇이나 기구를 관장하던 곳), 전농사(국가의 큰 제사에 사용될 곡식을 맡아보던 곳), 사천대(천문당당기관) 등이 있었다.
교육·과거제도
관리가 되는 길은 일반적으로 과거와 음서(蔭敍)의 두 가지가 있었다. 과거는 제술과(製述科)·명경과(明經科)·잡과(雜科)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3년마다 1회씩 실시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예종 때 일시적으로 무과를 실시했으나 곧 폐지하고, 공양왕 때 다시 실시하려고 했지만 시행되지는 못했다. 양인이면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으나, 실제로 과거를 통하여 관리가 되는 것은 관료나 향리의 자제들이었다.
음서는 부조(父祖)의 음덕으로 관리가 되는 방법으로, 5품 이상 관원의 아들 1명은 관리가 될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관원은 종1품에서 종9품까지 29단계의 문산계(文散階)를 띠었고, 규정에 따라 승진했다.
과거로 관리를 선발하기 위해서는 교육을 실시해야 했다. 이미 태조 때 개경과 서경에 학교를 세웠고, 992년에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개경에 국자감(國子監)을 세운 데 이어 지방에도 주학(州學)을 두어 교육을 담당케 했다. 이러한 관학(官學) 외에 개경의 12공도(十二公徒)와 같은 사학(私學)도 발달했다. 이들 학교에서는 유학과 기술학을 가르쳤다.
군제
군사조직은 중앙의 경군(京軍)과 지방의 주현군(州縣軍)으로 구성되었다. 경군은 2군 6위로 편성되어 2군은 응양군과 용호군으로 이뤄진 국왕 친위대로 왕의 호위, 개경과 국경의 경비를 담당했으며, 6위는 좌우위, 신호위, 흫위위, 금오위, 천우위, 감문위 등을 일컫는 것으로 지휘관은 정3품의 상장군, 종3품의 대장군, 정4품의 장군, 정5품의 중량장, 정6품의 낭장, 정7품의 별장, 정9품의 위, 종9품의 대정 등으로 이뤄져 있었다. 그리고 상장군과 대장군은 각 군과 위마다 1명씩 포진하였으며, 장군 이하는 군사 숫자에 따라 각각 다르게 배치되었다.
중앙군을 이루고 있는 2군 6위를 합쳐 흔히 경군 또는 8위라고 불렀으며 병종에 따라 정용(精勇)·보승(保勝) 등으로 구분된 1,000명 규모의 영(領)이 부대편성의 단위였고, 경군은 모두 45개 영으로 이루어졌다.
2군은 응양군이 1령으로 1천 명이었으며, 용호군은 2령으로 2천 명이었다. 또한 6위는 좌우위가 1만 3천(13령), 신호위가 7천, 흫위위가 1만 2천, 금오위가 7천, 천우위가 2천, 감문위가 1천이었다. 이들 중 죄우위, 신호위, 흫위위 등은 개경과 변방의 방위를 맡았다. 또한 금오위는 경찰 업무를, 천위위는 의장 담당, 감문위는 궁성의 수비를 맡았다.
군인은 초기에는 군반씨족(軍班氏族) 출신의 전문군인이었으나, 곧 농민 가운데서 뽑았다. 군인은 군인전을 지급받아 생활기반으로 삼았다.
지방의 주현군은 남부의 서해도, 교주도, 양광도, 전라도, 경상도 등 5도와 북부의 양계가 서로 다른 형태를 띠고 있었다. 5도의 주현군은 주로 수령의 지휘 아래 치안과 방수 및 공역의 임무를 담당하엿는데, 이들은 평시에는 농사에 종사하면서 동시에 군역을 치렀다. 따라서 주현군은 일종의 예비군 개념이었다. 주현군은 정용·보승·일품군으로 구분되었다. 국경지대인 양계(兩界)의 주진(州鎭)에는 초군.좌군.우군을 중심으로 상비군인 주진군(州鎭軍)을 배치했다.
지방제도
지방은 군현제도로 편성하여 중앙집권적 방식으로 통치했다. 전국을 5도와 양계로 구분하고, 경(京)·도호부(都護府)·목(牧)·군(郡)·현(縣)과 특수행정구역인 향(鄕)·소(所)·부곡(部曲)을 두었다.
또한 군사상의 요지에는 진(鎭)을, 교통상의 요지에는 진(津)·관(館)·역(驛)을 설치했다. 군현 이상에는 지방관을 파견했으나, 지방관을 파견하지 못한 군현이 훨씬 많았다. 군현에는 호장(戶長)·부호장(副戶長) 등의 향리가 지방관을 보좌해 실무를 보았다.
고려의 사회경제구조
고려는 엄격한 신분제사회였다. 신분은 크게 양인과 천인으로 구분되었다. 양인에는 관직을 가진 양반관료와 향리·서리·기술관·군인 등의 하급관리, 그리고 일반민이 속했고, 천인에는 노비와 화척(禾尺) 등이 속했다. 양반관료의 일부는 고위의 관직을 대대로 차지하여 문벌귀족으로 되었으며, 이들이 실제로 정치권력을 장악했다.
문벌귀족은 그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음서제도, 공음전시(功蔭田柴) 같은 장치를 마련했다. 하급관리와 서리·향리는 행정 실무를 담당했으며, 지배층의 일부를 이루었다.
양인의 대부분은 농업 중심의 생산활동에 종사했으며, 국가에 조세·공물·역역(力役)을 납부할 의무가 있었다. 백정이라 불린 농민 이외에 상인과 수공업자도 양인에 속했고, 군현민과 차별을 받는 향·소·부곡 등의 특수행정구역민이 양인의 최하층이었다.
천인의 주류는 노비였다. 이들은 매매와 상속의 대상이 되는 비인격적 존재였으며, 전 인구의 상당 비율이 노비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노비는 소유처에 따라 공노비와 사노비로, 거주형태에 따라 솔거노비와 외거노비로 구분되었다. 신분은 세습되었으며, 특히 양인과 천인의 구분은 엄격하여 천인이 양인으로 되는 것을 철저하게 금지했다.
그러나 향리의 자제가 과거를 통해 관료로 진출하는 것처럼 양인 내부에서의 개인 지위 상승은 법제적으로 보장되었고, 실제로 빈번히 일어났다. 또한 무인정권 이후에는 천인 출신으로 고위 관료가 되는가 하면 궁핍해진 국가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시행한 납속보관제(納粟補官制)를 통해서 신분 상승이 일어나고, 농장의 발달로 양인이 천인으로 되는 현상도 광범위하게 발생하여 신분제가 상당히 변화했다.
사회경제 생활의 기본단위인 가족은 보통 소가족 중심이었다. 호구의 상태는 호적제도로 파악했다. 신분을 증명하고 각종 역을 부과하는 기본 자료로 호적을 사용했다. 여성에 대한 사회차별이 적어 개가(改嫁)는 제한받지 않았고, 재산의 상속에서도 아들과 딸은 동등한 권리를 가졌다.
토지는 개인의 소유권이 인정되어, 상속·매매·기진(寄進)·전당(典當)이 자유로웠다. 민전(民田)이라 불린 이러한 사적 소유지는 전국에 걸쳐 존재했다. 민전의 소유자는 귀족에서부터 노비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왕실도 사유지를 가졌다.
이러한 토지사유제 위에 국가적 토지분급제도로써 전시과제도를 운영했다. 역분전(役分田)을 계승하여 경종대에 처음으로 제정된 전시과(田柴科)는 문종 때에 이르러 제도적으로 완비되었다. 문무관료에서 군인·한인(閑人)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직역을 부담하는 자에게 모두 토지를 지급한다는 원칙 아래 제정된 전시과에서는 대상자를 관직에 따라 18과로 구분하여 일정액의 토지와 시지(柴地)를 지급했다. 그러나 실제의 내용은 토지에 대한 수조권(收租權) 지급이었다.
그밖에 관청에는 공해전시(公廨田柴), 왕실에는 장처전(莊處田)과 궁원전(宮院田), 사원에는 사원전을 주었고, 공훈이 있는 자에게는 공음전시, 6품 이하 관리의 자제에게는 한인전(閑人田), 자손이 없는 하급관리나 군인의 유족에게는 구분전(口分田)을 각기 지급했다.
이러한 전시과체제는 고려 후기에 변화되었다. 본래 세습될 수 없는 수조권을 실제로 문벌귀족들이 사적으로 계승했고, 이를 기반으로 대토지를 겸병하게 됨에 따라 전시과는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더욱이 몽고와의 전쟁으로 재정이 궁핍해져 관료의 녹봉도 지급하기 어려운 사정이 되자 녹봉을 대신하여 녹과전(祿科田)을 지급했다. 경기지방에 지급된 녹과전은 비록 액수는 적었지만, 전시과의 지급대상에 포함되었던 역 부담층이 제외되어 역과 토지가 유리되는 단서를 열어놓았다.
이러한 토지제도 변화의 밑바탕에는 농장(農莊)의 발달이라는 현상이 있었다. 12세기 이래 대부분의 권력자가 민전 등을 불법으로 탈점하여 농장을 형성하고, 몰락한 농민을 초집하여 농장을 경영하면서 국가에 조세를 납부하지 않았다. 조세를 납부해야 할 민전과 공민(公民)의 감소는 필연적으로 남아 있는 농민에게 과중한 부담을 지웠으며, 그에 따라 농촌의 피폐와 국가재정의 궁핍을 가져왔다. 정부는 여러 차례 전민변정(田民辨正) 사업을 통해 이를 해결하려 했지만, 권력을 장악한 층이 대농장주였다는 현실과 원의 간섭이라는 외적 모순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 사전의 폐단으로 나타난 사회경제 모순을 극복하고자 한 것은 신흥관료와 이성계의 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뒤에야 본격적으로 착수되었으며, 1391년에 과전법(科田法)이 제정되어 일단 해결되었다.
고려시대 산업의 기본은 농업이었다. 국가는 농업을 장려하고 농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진전(陳田) 개간을 통한 농경지 확대, 농우(農牛)와 종곡 대여, 조세감면법의 제정과 운용, 고리대 금지, 의창(義倉)과 상평창(常平倉)의 설치와 같은 정책을 실시했다. 고려시대에는 휴한법(休閑法)이 극복되어 빠른 속도로 상경화(常耕化)하는 추세에 있었고, 그에 따라 농업생산력은 발달했다.
농민은 수확량의 1/10을 전세(田稅)로 납부해야 했다. 이 민전의 전세가 국가재정의 기반이었다. 국가에 전세를 납부하는 민전은 성격상 공전(公田)으로, 수조권을 위임받은 관료에게 전세를 납부하는 민전은 사전(私田)으로 분류되었다. 전세 이외에 포(布)나 토산물을 납부하는 공부(貢賦)와 군역, 요역을 부담하고, 그나마 자기의 토지를 갖지 못해 남의 땅을 차경하는 경우 수확의 1/2을 지대로 지주에게 납부해야 했던 농민의 생활은 넉넉하지 못했다.
수공업은 공장(工匠)을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 소속시켜 일정 기간 동안 일하게 하는 관장제(官匠制) 수공업이 중심이었고, 소(所)제도를 이용한 수공업활동도 이루어졌다. 개성을 비롯한 주요도시에는 시장을 개설했으며, 국가는 성종대 이래 여러 차례 해동통보(海東通寶)·은병(銀甁) 등의 화폐를 주조하여 유통하려 했지만 여전히 쌀과 포가 화폐로 통용되었다.
고려의 사상
고려 일대를 통해 지배적인 역할을 담당한 이데올로기는 불교였다. 불교는 왕실과 민간의 신앙 대상이었으며, 국가가 정책적으로 보호·육성했다. 당시의 불교는 교종과 선종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고려 건국과정에서는 호족세력과 연결된 선종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가 정비되면서 그에 적합한 교종 우위의 불교정책이 추진되고, 균여(均如) 등의 활약에 힘입어 화엄종·법상종을 비롯한 교종이 우세해졌다. 특히 문종의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義天)은 교관겸수(敎觀兼修)를 내세우며 천태종을 유포하여, 교종의 입장에서 교선의 일치를 추구했다. 그에 따라 선종은 약화되었다. 불교는 정치세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현실 정치에도 깊이 간여했다. 문벌귀족과 연결된 교종세력은 무인정권의 성립으로 정치정세가 일변하자 이에 격렬히 저항했으나 모두 진압되었다. 그에 따라 교종이 쇠퇴하고 다시 선종이 유행했다. 불교계 안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결사의 형태로 나타났다. 특히 수선사(修禪社)를 창건한 지눌(知訥)은 돈오점수(頓悟漸修)·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하며 선을 주로 하는 교선의 조화를 추구했는데, 그의 불교이론은 고려 불교가 도달한 최고의 수준이었다. 혜심(慧諶) 등이 계승한 결사운동은 조계종으로 발전했다. 한편 승려들은 승과를 거쳐 승계를 받았으며, 국사(國師)·왕사(王師)의 제도가 있어서 국가적인 대우를 받았다. 불교는 생활 습속에까지 깊숙이 침투되어 있었다. 향도(香徒) 조직, 장례에서의 화장 유행은 그러한 영향을 보여준다.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의 실현에 직접 이용한 이데올로기는 도덕적 합리주의에 입각한 유학이었다. 유학은 과거제도와 교육제도에 의해 장려되고 보장되었다. 성종 때의 최승로(崔承老)는 중앙집권적 정치체제 마련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고, 문종 때의 최충(崔冲)은 구재학당(九齋學堂)을 세워 유학의 이념을 널리 교육했다. 국가에서도 서적포(書籍舖)와 국학칠재(國學七齋), 양현고(養賢庫) 등을 설치하여 교육의 진흥을 꾀했다. 유학은 합리적인 사상체계로 정치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나, 고려 전기의 유학은 사장학(詞章學)·훈고학(訓詁學) 중심인데다 과거시험 준비에 치중하여 철학적 사상체계를 갖추는 방향으로 발전되지는 못했다. 후기에 신진사대부가 주자성리학(朱子性理學)을 도입하여 깊은 철학적 이해를 갖게 되면서 일대 전환을 하게 되었다. 안향(安珦)이 도입하고, 백이정(白頤正)·이제현(李齊賢) 등과 같은 사대부들이 발전시킨 성리학은 우주와 인간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해명하는 데 관심을 갖는 학문이었다. 고려가 수입한 성리학은 원이 관학화(官學化)한 것이어서 비록 이기론(理氣論)과 같은 사변적인 면보다는 실천적 기능을 강조했으나, 차츰 형이상학으로 발전했다. 그결과 불교의 교리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철학논쟁을 전개하고, 당시의 사회모순을 해결하려는 새로운 실천적 이념으로 기능하였다. 불교와 유학 이외에 풍수도참사상도 널리 퍼져 있었다. 일찍이 도선(道詵)의 풍수설을 따른 비보사찰(裨補寺刹) 건립과 서경(西京)의 중요성을 강조한 태조의 훈요십조에도 나타나는 풍수설은 도읍·궁궐·능묘에 알맞는 땅을 점치는 지상학(地相學)인데 도참사상과 결합하여 주로 연기비보설(延基裨補說)의 측면에서 정치에 이용되었다. 문종의 장원정(長源亭) 창건과 남경 설치, 숙종의 남경 건설과 예종의 서경 용덕궁(龍德宮) 창건, 명종의 삼소(三蘇)궁궐 창건과 고종의 백악궁 창건, 공민왕 이후의 계속적인 천도론 제기는 모두 그러한 예이다. 묘청의 난 때 서경의 지덕(地德)이 왕성하다고 주장한 것이나 삼별초가 용손십이진(龍孫十二盡) 참설에 고무된 것은 풍수도참을 반란에까지 이용한 예이다.
고려의 과학과 기술
농업기술은 고려 일대를 통하여 꾸준히 발전했다. 특히 시비법의 발달로 연작상경(連作常耕)이 가능해졌고, 수전농업의 비중이 점점 증가했으며, 연해의 해택지가 새로이 농지로 개간되었다. 양전기술도 발전하여 전품(田品)에 따른 조세 수취를 가능케 했다. 원나라의 농서인 〈농상집요〉의 간행에서 보듯이 농업기술의 향상에는 중국의 농서가 적절히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양잠기술도 발달했으며, 공민왕대 목면 도입은 의류생활과 상품작물 재배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과학기술이 거둔 성과로서 주목할 만한 것의 하나는 인쇄술이다. 대장경 등을 간행한 풍부한 목판인쇄 경험과 사회적 필요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이용한 활판인쇄를 가능케 했다. 1234년에 〈상정고금예문〉을 금속활자로 인쇄한 기록이 있고, 1377년에 간행한 〈직지심경〉이 현존하고 있다. 천문학은 서운관(書雲觀)에서 행한 천문관측 기록이 〈고려사〉 천문지에 수록되어 있고, 개성에 첨성대가 남아 있어 그 편린을 엿볼 수 있다. 의학에서도 괄목할 만한 발전이 있었다. 우리나라 약재를 다룬 〈향약구급방〉(1236)과 같은 의서를 편찬하여 중국 약재 대신 향약을 사용하게 되어 독자적인 의학 발전의 기초가 마련하였다. 그에 따라 왕실과 귀족층에 한정되었던 의료 혜택이 민간에까지 널리 확대되었다. 고려 말기에는 화약을 제조하여 왜구 격퇴에 이용했다.
고려의 문학과 예술
초기에는 신라시대를 이어 향가작품과 〈가락국기〉와 같은 설화문학 작품을 창작하기도 했으나, 유학의 발달과 관련하여 한문학 특히 한시가 유행했다. 후기에는 신흥관료들이 〈한림별곡〉·〈관동별곡〉과 같은 경기체가와 어부가를 발달시켰다. 한편으로 〈청산별곡〉·〈정읍사〉와 같이 민중의 감정과 생활모습을 자유분방하게 표현한 장가(長歌)도 유행했다. 또한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 최자(崔滋)의 〈보한집〉과 같은 수필형식의 패관문학과 임춘(林椿)의 〈국순전〉, 이규보(李奎報)의 〈국선생전〉과 같이 사물을 의인화한 가전체문학이 발달했다. 음악은 신라 이래의 고유한 음악인 향악과 송나라의 대성악을 수입한 아악이 발달했다. 향악에는 〈동동〉·〈예성강〉 등 24곡이 있고, 가야금·비파·장고 등의 악기를 사용했다. 아악에는 태묘악장(太廟樂章)을 비롯한 10여 편의 악장이 있고, 금종(金鐘)·옥경(玉磬) 등의 악기를 사용했다. 예술작품은 귀족적 사회풍조와 불교의 영향을 받아 화려하고 세련된 작품이 많이 만들어졌다 ( 불교미술). 아름다운 색깔과 다양한 모양, 뛰어난 문양으로 세련미를 자랑하는 청자는 그 대표적 작품이다. 석탑으로는 고려의 독특한 양식을 보여주는 현화사7층석탑(玄化寺七層石塔)과 송의 영향을 받은 월정사9층석탑(月精寺九層石塔)이 있고, 부도(浮屠)로는 고달사지부도(高達寺址浮屠)와 홍법국사 실상탑(弘法國師實相塔)이 뛰어나다. 화가로는 〈예성강도 禮成江圖〉를 그린 이영(李寧)과 그의 아들 이광필(李光弼)이 저명하다. 서예는 간결한 구양순체(歐陽詢體)가 유행했으며, 유신(柳伸)과 탄연(坦然), 최우(崔瑀)가 유명하다. 후기에는 원의 영향, 문벌귀족의 몰락과 신흥사대부의 대두, 그리고 선종의 유행으로 양식과 형태에 변화가 있었다. 회화에서는 시화일치론이 주장되는 등 문학화·낭만화하여 묵죽이 유행했고, 신륵사(神勒寺)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鐘)에서 보듯 화려하던 부도는 석종 모양으로 바뀌었다. 경천사10층석탑(敬天寺十層石塔)은 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서예는 우아한 송설체(松雪體)가 유행했으며, 대표적인 목조건축물로 부석사 무량수전이 현존하고 있다.
고려의 습속과 신앙
초기에는 근친혼이 성행했으나 차츰 사라져갔고, 데릴사위와 민며느리제도가 있었다. 장례는 상류층은 석실 목관에 많은 명기(明器)를 부장했고 석실의 벽과 천장에는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도 유행했으며, 대개 백일복(百日服)을 입었다. 민간신앙으로 무격신앙이 성행했으며, 송산신사(崧山神祠)·동신사(東神祠)를 비롯한 산신당과 성황당이 있었다. 국가에서는 명산의 산신에 봉작하고 제사를 지냈으며, 필요에 따라 기우제·기청제, 혹은 도교식의 초(醮) 등을 지냈다. 국가 행사로는 매년 11월에 개경과 서경에서 개최되던 팔관회와 2월에 개경을 비롯한 각 지방에서 열리는 연등회 등을 들 수 있다. 원정(元正)·한식·단오·추석·중구(重九)·동지 등의 명절에는 각기 독특한 풍속이 있었고, 격구·씨름·수박희(手搏戱)·석전(石戰) 등의 경기와 바둑·장기·투호(投壺)·윷놀이·처용희(處容戱) 등의 오락을 행했다. 관인의 의관은 중국의 제도를 따랐으며, 일반민은 백저포(白紵袍)에 검은 건(巾)을 썼다. 여자들은 홍(紅)·황(黃) 등의 색깔있는 옷을 입었고, 귀부인은 외출시 비단 너울에 입자(笠子)를 쓰고 말을 탔다.
고려의 대외관계
중국대륙 및 북방의 여러 민족과 외교관계를 맺은 고려는 중국의 오대(五代)와 그를 통일한 송(宋)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문물을 수입했다. 그러나 국경을 마주한 북방민족과는 대체로 갈등관계를 유지했다. 10~11세기에는 고려-요(遼)-송이 정립한 상태에서 동북아시아의 질서가 유지되었다. 고려는 송과 우호관계를 유지하여 문화를 수입한 반면, 고구려의 옛 영토 회복이라는 태조 이래의 북진정책을 추구하며 발해를 멸망시킨 요와 대립했다. 그결과 성종에서 현종에 이르는 시기에 3차례에 걸쳐 거란의 침입을 받았으나, 모두 격퇴하고 오히려 영토를 압록강까지 확장했다.
12세기초 여진의 등장으로 동북아시아의 질서는 변화했다. 1107년 윤관(尹瓘)이 정벌했던 여진은 완옌부[完顔部]를 중심으로 1115년에 금(金)을 건국하고, 1125년에는 요를 멸망시키고 고려에 군신관계를 요구했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이자겸은 금의 요구를 받아들여 충돌을 피했다. 이후 금이 북송지역을 점령함으로써 고려-금-남송의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었다.
13세기초 몽골의 등장으로 동북아시아의 질서는 재편되었다. 고려는 1219년 몽골군과 합동으로 강동성(江東城)에 웅거한 거란족을 격파하면서 처음으로 몽골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몽골은 고려에 막대한 공물을 요구했다. 그뒤 사신 피살을 구실로 1231년 처음 침입하여 서북면에 다루가치[達魯花赤]를 설치하고 퇴군했다. 최우(崔瑀)정권이 서울을 강화도로 옮기며 전쟁 태세를 갖추자 몽골군이 다시 침입했으나, 사령관인 살리타이[撒禮塔]가 처인성(處仁城:지금의 龍仁)에서 김윤후(金允侯)에게 사살되자 철군했다 (몽골의 침략). 이후에도 몽골군은 4차례에 걸쳐 대규모로 침입했으나, 고려는 강력한 저항으로 이를 격퇴했다.
1258년 최의정권이 붕괴되자 왕정복고를 추진했던 왕과 문신세력은 몽골과 강화를 추진했다. 원종은 태자의 신분으로 몽골에 가서 헌종의 사망으로 왕위계승 다툼을 벌이던 세조를 만나 화의를 성립시키고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다. 새로이 무인집정이 된 김준(金俊)과 그를 이은 임연(林衍)은 강화를 반대했다. 그러나 몽골의 지원을 통해 왕권을 회복하려는 원종의 입장과, 실권한 왕을 지원하여 무인정권을 붕괴시키고 고려를 지배하려는 원의 정책이 맞아떨어져 무인정권은 점차 고립되었다. 이에 원종을 폐위시키고 전쟁을 계속하려 했으나, 몽골의 압력으로 원종은 복위되었다. 임연을 이은 집정 임유무(林惟茂)는 출륙(出陸)을 거부하고 항전을 추진했으나, 오히려 살해당했다. 그리하여 무인정권은 완전히 몰락하고 고려정부는 개경으로 환도했다.
이후 고려는 원에 예속되어 심한 간섭을 받았다. 충렬왕 이후로 왕은 원의 공주와 결혼하여 원 왕실의 부마가 되고, 관제와 왕실 관계의 용어는 제후국 수준으로 격하되었다. 원은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설치하여 일본정복에 고려군과 물자를 동원했다. 그뒤에도 정동행성을 존속시켜 정치에 간섭했다. 또한 쌍성총관부와 동녕부,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철령과 자비령 이북, 제주도를 직할령으로 삼았으며, 만주 일대의 고려민을 관장하는 심양왕(瀋陽王)을 두어 고려왕과 대립시키는 분열통치책을 쓰기도 했다. 심지어 고려라는 국호를 폐지하고 성(省)을 세워 원의 직할령으로 삼으려는 입성책동(立省策動)도 있었으나, 고려측의 강력한 반대로 실패했다.
14세기 중반 원이 쇠미해지고 한인(漢人)의 반란이 각지에서 일어나자, 공민왕은 친원세력을 제거하고 쌍성총관부와 압록강 유역의 실지를 회복함으로써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원의 세력이 강력했기 때문에 반원정책을 일관성있게 추진하지는 못했다. 홍건적의 침입으로 원의 세력이 약해졌음을 확인하고 1368년 명(明)이 건국되자, 원과 단교하고 명과 통교했다. 1370년(공민왕 19)에는 명의 연호를 사용하기에 이르렀으나, 명나라가 북원(北元)을 압박하여 요동에 세력을 확장하면서 고려에 억압적 태도를 취하고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자 명에 대한 반발이 커졌다. 당시 외교정책을 둘러싼 대립은 각 정치세력의 이해관계나 정치적 입지와 밀접히 관련되어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최영(崔瑩) 등 권문(權門)은 친원(親元)을, 정도전(鄭道傳)·박상충(朴尙衷) 등 신진세력은 친명(親明)을 주장했다.
정치세력들의 갈등이 심해지는 가운데 공민왕과 명 사신이 피살되자 고려와 명의 관계는 악화되고, 우왕 초기에 정권을 장악한 이인임(李仁任)은 친원정책을 추구하여 원과 국교를 회복했다. 그러나 정도전 등 신진세력의 압력으로 차츰 친명정책으로 전환하는 가운데, 1388년 명이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겠다고 통고하자 집권자였던 최영은 요동정벌을 추진했다. 신흥사대부들과 연결하여 친명의 입장에 섰던 이성계일파는 이에 반대하여 위화도에서 회군하고 최영 등을 축출한 뒤 정권을 장악했다. 이로써 외교관계를 둘러싼 정치세력간의 갈등은 끝을 맺었다.
대륙의 국가들 이외에 일본과도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일본은 조공무역의 형태로 고려의 문물을 수입해갔는데, 일본이 남북조의 전란기에 들어서면서 중앙통제력이 약해지고 정상적인 통교의 길이 막히자 왜구가 출현하여 고려의 각지를 침입했다. 14세기 중반부터 본격화된 왜구의 침입은 연안지역을 황폐시키고, 조운(漕運)을 어렵게 하여 국가재정을 곤란하게 했다. 고려는 왜구를 회유하거나 일본정부에 사신을 파견하여 왜구 단속을 요청하기도 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각도에 장수를 파견하여 토벌하는 한편, 수군 확장, 전함 건조, 화포 제조 등 군비를 강화하여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1389년(창왕 1)에는 박위(朴葳)가 대마도를 정벌하기도 했으나 왜구를 근절시키지는 못했다.
安秉佑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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