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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55 : 고려의 역사 224 (제34대 마지막 공양왕실록 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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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55 : 고려의 역사 224 (제34대 마지막 공양왕실록 2)

두바퀴인생 2011. 12. 19. 10:26

 

 

 

한국의 역사 455 : 고려의 역사 224 (제34대 마지막 공양왕실록 2)   

 

 

 

 

제34대 공양왕실록

(1345~1394년, 재위 1389년 11월~1392년 7월, 2년 8개월)

 

3. 충절의 대명사 정몽주와 두문동 72현 

공양왕 즉위 후 조정은, 그를 옹립한 이성계, 심덕부, 지용기, 정몽주, 설장수, 성석린, 조준, 박위, 정도전 등 9명의 공신들이 장악한다. 공신들 중 이성계, 박위, 지용기 등 3명의 무장을 제외한 나머지 6명 모두 신진유학자들이다. 이들 개혁 세력들은 다시 온건파와 급진파, 중도파 등으로 구분된다. 온건파는 고려왕조를 유지하면서 서서히 개혁을 완성해가자는 지용기, 설장수, 정몽주 등이었고, 급진파는 역성혁명을 감행하여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열자는 이성계, 조준, 정도전, 박위 등이었다. 그리고 심덕부와 성석린 등은 중도파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온건파와 급진파의 힘싸움이 전개되는 가운데 중도파였던 성석린과 심덕부가 역성혁명파(급진파)에 가담함으로써 고려개혁파(온건파)의 힘이 약해진다. 하지만 고려개혁파를 이끌고 있던 정몽주가 이색의 문하생들을 모두 끌어안음으로써 양 세력은 대등해진다. 그러나 1391년 고려개혁파에서 유일하게 무력적 기반이 있던 지용기가 처의 재종 왕익부의 역모사건에 휘말려 유배되히면서 힘의 균형은 깨진다.  역성혁명파에는 이성계라는 거목이 강력한 무력적 기반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고려개혁파는 오로지 문신관료들만 남게 된 것이다.

 

하지만 정몽주는 이 같은 상황속에서도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하여 역성혁명파의 핵심 인물인 조준, 남은, 정도전 등을 제거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중 1392년 3월 명나라에 갔다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하기 위해 황주로 나갔던 이성계가 잠시 틈을 내어 사냥을 하다가 낙마하여 크게 다치는 바람에 한동안 등청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공양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던 정몽주는 이성계가 없는 틈을 타서 측근들과 함께 역성헉명파의 핵심세력인 정도전, 남은, 조준 등과 그들의 측근 윤소종, 남재, 조박 등을 탄핵하여 유배시켜 버렸다.

 

황주에서 이 소식을 접한 이성계는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한밤중에 부랴부랴 가마에 몸을 싣고 개경으로 향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태였다. 불편한 몸으로 입궐할 수도 없는 입장인 데다가, 설사 입궐한다고 해도 측근 핵심들이 모두 유배된 상황에서 정몽주를 당할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이 때 그는 무장 출신답게 과감한 결심을 하였고, 이성게의 마음을 읽은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수하 조영규를 시켜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피살하게 된다.

 

이방원은 정몽주를 살해하기 전에 그를 찿아가 몇 번이나 자신들과 함께 새로운 왕조를 주창할 것을 권유했지만 정몽주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이방원은 정몽주가 버티고 있는 한 역성혁명을 이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살해하기로 결심하였던 것이다.

 

이성계가 피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대의 어느 누구도 정몽주의 정치력을 능가할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 같은 대단한 그의 정치력은 그의 지난한 삶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정몽주는 영일 정씨 습명의 후손 운관의 아들로 1337년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몽란 또는 몽룡, 호는 포은이다. 성인이 된 뒤에는 몽주로 개칭하고 1357년 21세의 나이로 감시에 합격한 후 1360년에 과거에 응시하여 문과에 장원하였다.

 

1362년 예문관검열을 시작으로 관직에 올라 1363년에는 정4품의 합문지후, 동북면도지휘사종사관 등을 거쳐 1367년에는 예조정랑으로 성균관박사가 되었고, 이 무렵 주자학에 대한 뛰어난 강설을 펼쳐 이색으로부터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는 극찬을 받는다.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태상소경과 성균관 사예, 직강, 사성 등의 학문직에 종사하면서 사상의 폭을 넓혔다. 그리고 1372년에는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는데, 이 때 풍랑을 만나 일행 중 열 두사람이 죽었지만 그는 13일 동안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간신히 명나라 해군에 구조되었다. 귀국 후에는 경상도 안렴사. 우사의대부 등을 거쳐 1376년에는 학문직으로는 최고의 영예인 성균관 대사성에 올랐다. 하지만 이 해에 이인임, 지윤 등이 중심이 된 배명친원 정책을 반대하다가 언양에 유배되는 어려움을 겪는다. 이듬해 풀려난 그는 다시 정계에 복귀하였다.

 

이 무렵 왜구의 노략질이 극에 달하자 규수에 가서 일본 조정에 왜구의 단속을 요구하였다. 그의 일본행은 권신들이 그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음모로 추진되었지만, 정몽주는 오히려 뛰어난 논리와 답변으로 일본 조정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여 왜구에게 잡혀갔던 수백 명의 고려인들을 귀환시키는 등 대일외교에 큰 성과를 올렸다. 이 일 이후 정치적 입지가 강화되어 우산기상시, 전공사, 예의사, 전법사, 판도사 등의 판서직을 두루 역임하고 1382년에는 진공사와 청지사로 다시금 명을 다녀왔다. 1384년에 정당문학에 올라 또 한 번 명나라를 방문하여 악회일로에 있던 대명관계를 회복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하지만 1387년에 명의 무리한 조공요구와 최영의 대명강경책으로 여명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고려와 명의 이러한 관계로 인해 1388년 2월 우왕은 최영과 함께 요동정벌 전쟁을 감행하기 위해 군대를 출병시키게 된다. 하지만 이성계와 조민수 등이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최영 세력이 축출되고 조정은 친명 세력이 장악하게 된다. 그리고 친명정책의 기수였던 정몽주는 문하찬성사, 예문관 대제학 등을 역임하면서 이성계와 같이 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또한 1389년에는 폐가입진의 명분으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우게 된다.

 

이 같은 과정을 볼 때 정몽주는 이성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정몽주는 1380년 조전원수로 이성계와 함께 왜구토벌에 참여하였고, 1382년에도 동북면조전원수로 이성계와 함께 지내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이성계 스스로도 정몽주를 친구라고 부른곤 했다. 더구나 그들은 같은 친명 세력이었고, 또 개혁을 함께 주도하던 동지관계였다. 그런데도 이들이 서로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정몽주는 개혁을 통해 고려왕조의 발전을 기대했지만, 이성계는 혁명을 통해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려는 야망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정몽주는 이성계가 꿈꾸는 새로운 왕조 개창에는 커다란 걸림돌이었던 것이다.

 

정몽주와 이성계는 둘 다 유교적 왕도정치가 실현되는 새로운 사회를 꿈 꾸었다. 그러나 정몽주가 유교정치에 비중을 두었다면 이성계는 새로운 사회에 비중을 두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역성혁명을 통해서 이성계 자신이 직접 새 왕조를 여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교적 충절을 중시하던 정몽주는 혁명을 꿈꿀 수는 없었다. 이것이 바로 같은 꿈을 꾸던 이성계가 정몽주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하지만 이성계는 정몽주의 충절을 폄하시키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개창하는 유교사회가 신하의 충절을 기반으로 유지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정몽주를 살해한 이방원 역시 1405년에 그에게 대관보국승록대부 영의정부사 수문전대제학 감예문춘추관사 익양부원군을 추증하여 그의 충절을 높이 평가하였다. 또한 정몽주의 충절은 조선 선비들의 추앙을 받아 개성의 숭양서원 등 13개 서원에 제향되었으며, 그의 학문은 후일 김종직, 조광조 등의 사림파에 전승된다.

 

정몽주는 이처럼 고려왕조의 충절이었지만 오히려 조선의 선비들에게 충절의 대명사로 인식되어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정몽주 이외에도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을 버리지 않은 신하들이 많았다. 이른바 두문동 72현으로 대표되는 그들은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자 경기도 개풍군 광덕산 서쪽 기슭에 자리한 두문동으로 찿아들었다. 그들은 동네의 동서쪽에 문을 세워 걸어잠그고 일체 동네 밖으로 나오지 않아 '두문불출'이라는말이 생기기까지 하였다.

 

조선왕조의 어떠한 관직도 받지 않고 두문동에 묻혀 살던 72현에 대한 구체적임 면면은 잊혀지고 임선비, 조의생, 성사제, 박문수, 민안부, 김충한, 이의 등의 이름만 후대로 전해온다.

 

하지만 조선의 정조가 이 이야기를 전해듣고 1783년 성균관에 표절사를 세워 72현의 충절을 기리게 됨으로써 그들은 고려의 마지막 충신들로 남는다. 비록 고려왕조는 비참하게 막을 내렸지만 절의를 꺽지 않은 72현의 충성심 덕분에 그나마 찬란한 최후를 장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