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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54 : 고려의 역사 223 (제34대 마지막 공양왕실록 1) 본문
한국의 역사 454 : 고려의 역사 223 (제34대 마지막 공양왕실록 1)
제34대 공양왕
공양왕(恭讓王, 1345년~1394년. 4월 17일, 재위: 1389년~1392년)은 고려의 마지막 왕으로, 고려의 제20대 국왕인 신종(神宗)의 둘째 아들 양양공의 6대손이며 정원부원군 왕균과 충렬왕의 서장자 강양공 자(滋)의 손녀 국대비 왕씨(國大妃 王氏)의 차남이다.
휘는 요(瑤)이며, 시호는 폐위되어서 시호가 없이 공양군(恭讓君)으로 불렸다가, 조선 태종이 그를 왕으로 추봉하면서 시호가 올려져 시호는 공양대왕(恭讓大王)이다.
폐위 후 처음에는 강원도 원주로 유배되었다가 간성으로 유배지가 옮겨졌고, 다시 삼척으로 옮겨진 뒤에 그 곳에서 사사되었다. 이로 인해 간성왕(杆城王)이라는 호가 붙여졌다.
생애
휘는 요(瑤)이다. 정원부원군인 균(鈞)의 둘째 아들로서, 왕후는 교하(交河) 사람인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 노진의 여식인 근비 노씨이다. 어려서 정창군(定昌君)에 봉해졌고, 그의 형 정양군 왕우의 딸이 이성계와 신덕왕후의 아들 방번과 결혼하여 사돈인 관계로 이성계 일파의 추대를 받아 폐가입진(廢假入眞)이라는 명분으로 왕위 계승자로 천거되었다.
친명(親明)의 이성계와 그 일당이 1389(창왕 1년)년에 창왕을 폐위시킨 직후에 그를 옹립하였다. 정몽주(鄭夢周) 등의 고려의 충신들은 국왕을 보필하며 고려를 재건하려는 필사의 노력을 하였으나, 이성계의 5남인 태종 이방원(李芳遠)에게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살육당하자, 고려의 신료들의 응집력이 약화되어 조정은 와해되었다.
그리고 1392년(공양왕 4년) 이성계와 이방원, 정도전(鄭道傳) 등은 공양왕을 폐하고 왕위를 찬탈하여, 고려는 사실상 멸망하였다. 그리고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봉(降封)되었으며, 7월 11일에 폐위된 공양왕은 원주로 유배되었다가, 8월에 공양군으로 강등돼 강원도 간성으로 쫓겨났다.
폐위 후
공양왕은 강원도 간성에 머무르다가 1394년(태조 3년) 3월 14일에 삼척 궁촌리로 유배지가 옮겨진다. 4월 17일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고돌산의 살해재에서 왕태자 석(奭), 우(瑀)와 함께 교살되었다.
1416년에 조선 태종은 공양왕(恭讓王)으로 추봉을 하고, 사신을 보내 그의 능에 제사를 지내었다.
두 개의 능묘
공양왕의 능으로 전하는 묘소는 두 개가 있다. 공양왕의 능은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와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두 곳에 있다. 삼척 묘는 처음 묻힌 곳이고, 고양에 위치한 묘는 조선 왕실에서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불러 올린 뒤에 묻은 곳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왕비인 순비 노씨(順妃 盧氏)와 합장되어 있으며 조선 태조의 재위 3년 만인 1394년에 고릉(高陵)의 능호가 붙여졌다.
고려의 역대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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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대 공양왕실록
(1345~1394년, 재위 1389년 11월~1392년 7월, 2년 8개월)
1.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과 고려왕조의 최후
1389년 11월에 발생한 우왕 복위사건 이후 이성계 일파는 정몽주 등과 결탁하여 '폐가입진'의 명분으로 창왕을 폐위하고 정창군 왕요를 옹립한다. 이로써 조정은 이성계 일파에 의해서 왕전히 장악되고 급기야 그들은 역성혁명을 노리게 된다.
공양왕은 제20대 왕 신종의 6대 손으로 정원부원군 왕균과 그의 정실부인 왕씨 사이에서 1345년 2월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요다. 처음에 정창부원군에 봉해졌다가 다시 정창군으로 개봉되었으며, 1389년 11월 이성계, 정몽주, 조준, 정도전 등의 추대를 받아 고려 제34대 왕에 즉위하였다. 이 때 그이 나이 이미 불혹을 넘긴 45세였다.
그를 왕으로 세우기 앞서 이성계, 심덕부, 지용기, 정몽주, 설장수, 성석린, 조준, 박위, 정도전 등은 흥국사에 모여 창왕을 폐위하고 종실에서 적당한 사람을 선택하여 새로운 왕으로 세울 것을 결의한다.
참석자들은 대부분 차기 왕으로 정창군 왕요를 지목하고 있었으나 이성계의 정치참모 역활을 하고 있던 조준은 강력하게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다. 조준은 왕요가 부귀한 환경에서 자라 가산을 다스릴 수 있을 지 몰라도 나라를 다스릴 인물은 못된다고 하였다. 이에 석성린이 나사서 왕을 세우는 데는 인물됨이 중요하지 촌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이렇게 되자 참석자들은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성석린의 주장대로 왕요를 포함한 종실 인물 중에서 몇 명을 선택하여 다시 의논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선택한 인물들을 놓고 표 대결을 벌인 결과 정창군 왕요가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아 차기 왕으로 결정되었다.
다음 날 이성계를 비롯한 아홉 명은 공민왕의 제3비 익비 한씨를 찿아가 창왕을 폐위하고 정창군을 차기 국왕으로 결정한다는 교지를 내림으로써 왕요는 드디어 국왕에 오르게 된다.
공양왕이 즉위하자 그를 옹립한 이성계 등의 아홉 대신들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때 일시적으로 이색이 판문하부사에 임명되어 정계에 복귀하였으나 대간에서 창왕의 즉위를 도운 일을 탄핵하는 바람에 복귀 한 달 만에 파직을 당하여 아들 이종학과 같이 유배길에 올랐다. 이 때 창왕 즉위에 공로가 컸던 조민수도 함께 탄핵되어 삼척으로 이배되었으며 이승인, 하륜, 권근 등도 유배길에 올랐다.
이색과 조민수 등 창왕 옹립 세력이 유배된 후 이성계는 우왕과 창왕을 죽여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공양왕은 몇 번이나 결정을 유보하다가 결국 이성계파의 강압에 못이겨 강화도에 대제학 유구를 보내 창왕을 죽이게 하고, 강릉에는 정당문학 서균형을 보내 우왕을 사사토록 하였다. 이 무렵 이성계는 문하시중의 직위에 올라 조정을 장악하였으며, 이성계를 포함하여 공양왕을 즉위시킨 아홉 대신들에게는 공신녹권이 주어졌다.
신진 유학 세력인 이들 아홉 공신은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전반에 걸쳐 과감한 유교 중심의 개혁 작업을 시도하였다. 우선 정치 발전을 위해 경연제를 도입하여 정치논쟁을 활성화시키고 과거에 무과를 신설하여 군대의 질을 높였다. 관제에서도 전리사, 판도사, 예의사, 군부사, 전공사 등의 명칭을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등의 6조로 개편함으로써 성종조에 확립된 6부제를 부활시켰다. 또한 유학의 진흥을 위해 개성의 오부와 동.서북면의 주.부에 유학교수관을 두었으며,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한다는 이념에 따라 주자가례를 시행하여 집집마다 가묘를 세우고 양반 출신 중에 출가한 자들은 환속시켜 본업에 종사토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불교의 경제적 기반을 없애기 위해 사찰의 재산을 몰수하여 국고로 환수하였으며, 오교양종을 해산하여 군대를 보충하였다.
경제개혁으로는 서강에 광흥창과 풍저창, 개성 오부에 의창을 세워 곡식을 비축하게 하였고, 조준의 주장에 바탕하여 현,전직 관리의 직급에 따라 토지를 지급하는 과전법을 실시하여 녹제와 전제를 대폭 개혁하였다. 그러나 천도로 말미암아 민심이 동요하자 이듬해 개경으로 다시 환도하였다.
신진 세력의 개혁정책은 이처럼 가속화되었지만 남은, 조준, 정조전 등의 급진 세력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역성혁명을 감행하여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고 철저한 유교사회를 건설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몽주, 이승인, 이종학 등의 온건개혁파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고려왕조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순차적으로 개혁을 실시하여 사회전반에 무리가 없도록 하는 것이 신하의 도리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역성혁명을 꿈꾸는 남은 등을 경계하며 제거할 기회를 노렸고, 1392년 3월 명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세자 왕석을 마중하러 갔던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낙상하여 등청하지 못하자 4월에 정몽주가 조준, 남은, 정도전, 남재, 조박, 오사충 등의 급진파를 탄핵하여 유배시켜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이성계는 아픈 몸으로 가마에 실려 부랴부랴 개경으로 되돌아와야 했고,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은 이들 온건개혁파의 실력행사에 위기감을 느끼고 조영규 등 수하들을 시켜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살해한다.
정몽주가 살해되자 조정은 다시 이성계파가 득세하였다. 그래서 온건 개혁파인 김진양, 이확, 이감, 권홍, 정희, 김묘, 서견, 이작, 이신, 이승인, 이종학, 조호 등이 대거 축출되어 유배길에 올랐다. 반면 유배중이던 조준이 정계에 복귀하여 이성계파를 결집시켰다.
이성계와 조준은 역성혁명에 걸림돌이 되는 나머지 세력들을 척결하는 작업에 돌입하여 이첨, 이사형, 설장수, 강희백, 유기, 최함 등을 차례로 제거하는 한편 6월에 남은과 정도전을 유배지에서 소환하여 중책에 앉혔다.
정도전이 정계에 복귀하면서 역성혁명은 구체화되었고, 마침내 한 달 뒤인 1392년 7월에 정도전, 남은, 조준, 배극렴 등은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들은 이를 위해 정비 안씨를 찿아가 공양왕의 폐위와 이성계의 옹위를 명령하는 교지를 요청하였고, 정비가 이를 수용함으로써 공양왕이 폐위되고 이성계가 고려 국왕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2월 이성계는 명나라의 동의를 받아 국호를 '조선'으로 정하여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이로써 고려왕조는 개국한 지 474년 만에 제34대 공양왕을 끝으로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졌다. 고려왕조를 멸망시킨 이성계는 정책적으로 왕족 출신들인 왕씨들을 모두 강화 앞바다에서 수장시켜 멸족시켜버린다. 그 바람에 왕씨들은 어머니 성을 따르거나 전, 옥, 용, 전씨 등으로 성을 바꾸고 살아야 했다.
한편 폐위된 공양왕은 공양군으로 강등되어 원주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간성으로 이배되었다. 그 후 다시 삼척으로 이배되었다가 이성계의 명령에 의해 1394년 4월 50세를 일기로 사사되었으며, 1416년 태종 16년에 공양왕으로 추봉되었다.
능은 경기도 원당과 사사지인 강원도 삼척 두 곳에 있다. 원당에 있는 고릉에는 '고려공양왕고릉'이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으나, 삼척에는 비석은 없고 공양왕릉이라는 말만 전하고 있을 뿐이다.
공양왕 실록은 1398년 조선왕조에 의해 공민왕실록과 함께 편찬되었다.
2. 공양왕의 가족들
공양왕은 순비 노씨에게서 세자 석과 숙녕, 정신, 경화궁주 등 1남 3녀를 얻었다.
순비 노씨는 교하 사람으로 창성군 노진의 딸이다. 공양왕이 정창군으로 있을 때 시집와, 1389년 11월 공양왕이 왕위에 오르자 순비에 책봉된다. 이 때 공양왕은 그녀를 위해 의덕부를 설치하고 관속을 두었다. 그러나 1392년 7월 공양왕이 이성계 일파에 의해 폐위되자 공양왕과 함께 원주에 유배되었고 그 후 공양왕이 고성, 삼척 등지로 이배됨에 따라 그녀도 유배지를 옮겼으며, 1394년 4월 공양왕이 사사될 때 함께 죽었다. 그녀의 능 역시 공양왕릉과 함께 경기도 원당과 강원도 삼척 두 곳에 있다.
세자 왕석은 공양왕의 장남이며 순비 노씨 소생으로 초명은 서이다. 처음에 정선군에 봉해졌다가 공양왕이 즉위하자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391년 이원굉의 딸을 맞아 세자비로 삼았다. 1391년 말에 공양왕을 대신하여 신년축하 하례차 명나라에 가서 이듬해 3월에 귀국하였다. 그는 조준, 서균형, 이지 등을 스승으로 삼아 학문을 배웠으나 1392년 7월 조준 등의 이성계 일파에 의해 공양왕이 폐위되자 부왕을 따라 원주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삼척에서 공양왕이 사사될 때 함께 사사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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