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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51 : 고려의 역사 220 (제32대 우왕실록 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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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51 : 고려의 역사 220 (제32대 우왕실록 5)

두바퀴인생 2011. 12. 15. 12:39

 

 

 

 

한국의 역사 451 : 고려의 역사 220 (제32대 우왕실록 5)   

 

 

 

제32대 우왕실록

(1365~1389년, 재위 1374년 9월~1388년 6월, 13년 9개월)

3. 최영의 요동정벌 전쟁과 위화도 회군(계속) 

출병에 앞서 우왕은 서경으로 가서 각 도의 징병을 독촉하고 압록강에 배다리를 만들도록 하였다. 또 전국의 승려들을 징발하여 군대에 편입하고 경기도 병력을 양분하여 동강과 서강에 왜구를 방비토록 하였다. 그 외에 서경도원수 심덕부, 서경부원수 이무, 양광도도원수 왕안덕, 양광부원수 이승원, 경상도 상원수 박위, 전라도 부원수 최운해, 계림원수 경의, 안동원수 최단 등을 좌군에 속하게 하고 안주도 도원수 정지, 상원수 지용기, 부원수 화오림, 동북면 부원수 이빈, 강원도부원수 구성로 등을 우군에 배치하였다. 이 요동정벌에 출정한 출병한 병력 수는 좌.우군을 합쳐 총 5만여 명이었으며, 동원된 말은 2만 1,682필이었으나 적군의 사기를 죽이기 위해 10만 병력이라고 했다.

 

좌.우군은 배다리를 이용하여 압록강을 건너 하중도인 위화도에 머물렀다. 그리고 며칠 후 홍인계, 이의 등이 선발대로 요동에 침입하여 적진을 공략한 후 되돌아 왔다. 하지만 장마가 시작되는 바람에 압록강 물이 불어나기 시작하자 이성계와 조민수는 우왕에게 회군 명령을 내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우왕과 최영은 내시 김완에게 명령하여 금과 비단, 말 등을 위화도로 보내며 진군을 독촉했다.

 

이성계와 조민수는 다시 최영에게 사람을 보내 회군 명령을 요청하였지만 이번에도 역시 최영은 진군을 독촉하며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이성계와 조민수는 심각한 협의 끝에 회군하기로 결심하고 군사들을 인솔하여 위화도를 빠져 나왔다.

 

좌.우군이 모두 위화도에서 회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조전사 최유경은 급히 봉주에 머물러 있던 우왕에게 회군 사실을 알렸다. 우왕은 급히 말을 몰아 개경으로 가서 최영에게 좌.우군을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빈란군인 좌.우군과 후방에 남아 있던 중군이 대치하는 가운데 이성계와 조민수는 우왕에게 사람을 보내 최영을 제거하지 않으면 전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이에 우왕은 이성계와 조민수의 관직을 삭탈하고 최영을 문하시중으로, 우현보를 우시중, 송광미를 찬성사로 삼아 반란군 진압 명령을 하달하고 이성계와 조민수 등 회군 장수들을 붙잡아오는 사람에게 상과 직위를 주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우왕의 진압 의지가 확고한 것을 안 이성계는 지문하사 유만수로 하여금 숭인문, 좌군으로 하여금 선의문을 공격토록 하였다. 하지만 최영이 이끄는 중군의 역습을 받아 물러났고, 그 뒤에 다시 조민수가 우군을 이끌고 공격을 감행했으나 진압군인 중군에 밀려 역시 실패하였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회군 병력에게 기울져 가고 있었다. 최영 역시 그 같은 대세를 읽고 있었으므로 병사들을 우왕이 머물고 있던 화원으로 철수시켰다. 그러나 회군 병력은 곧 화원을 겹겹이 둘러싸고 항복을 요구하였으나 답이 없자 화원 담장을 무너뜨리고 안으로 밀어닥쳤다.

 

최영은 결국 곽충보 등 화원으로 뛰어든 몇 명의 반란군 장수들에게 붙잡혀 유배길에 올랐고, 한편 궁성을 장악한 조민수와 이성계는 우왕을 폐한 후 창왕을 세워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명나라의 연호는 물론 의관을 착용하도록 함으로써 명과의 싸움을 피했다.

 

이렇게 하여 최영과 우왕이 추진하려했던 요동정벌 계획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귀양길에 오른 최영은 고향인 고봉현(고양)에 머물러 있다가 다시 합포(마산)로 이배되었다. 그 뒤 다시 충주로 이배되었다가 1388년 12월 개경으로 압송되어 참수되었다.

 

최영의 요동정벌 계획이 실패로 끝난 것은 조민수, 이성계 등의 신군벌 세력의 동의를 얻어내지 못한 탓도 있지만 요동정벌 자체가 당시 고려의 군사력으로는 원나라를 막 밀어낸 강력한 신생 국가인 명나라 군사력과 대적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사실에서 그 원인을 찿아야 할 것이다.

 

당시 고려는 전국이 왜구의 침입으로 항상 전쟁의 불안한 상황에 놓여 있었고, 그로 말미암아 백성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져 있었다. 또 만일 일시적으로 요동정벌에 성공하였다 손 치더라도 막강한 기세로 일어난 명의 반격을 막아낼 역량은 부족하였다는 판단이다. 때문에 명의 철령위 설치에 대한 충분한 외교적 노력을 지속시키며 좀더 시간을 끌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최영은 고려 국력을 과신하고 무모할 정도로 급하게 요동정벌 전쟁에 임했던 것이 무리였으며 이러한 무모한 행동이 결국 조민수와 이성계가 이끄는 신군벌 세력에게 날개를 달아준 꼴이 되고 말았고 회군의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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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마지막 용틀임의 숨결, 최영 장군

 

최영은 고려 무장으로 이성계와 동시대에 고려를 위기에서 구하면서 성장하였고 성격이 곧고 청빈하였으며 고려의 마지막 충신으로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는 왜 요동정벌을 무리하게 추진하려 하였는지 오늘날 까지도 의문이다. 당시 명나라는 원나라를 밀어내고 중원을 차지하면서 고려에 철령위를 돌려받으려고 고려에 압력을 가하고 있던 중이었다.

 

고려는 국호처럼 태조 왕건 이래로 서경을 건설하는 등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한다는 명목하에 북벌을 꾸준히 준비하여 왔으나 호족세력과 왕권의 대립, 외척세력의 준동, 거란족의 3차에 이르는 침공, 무신정권 80년, 묘청의 서경천도 실패와 반란, 7차에 걸친 대몽항쟁 30년, 충렬왕 이후 몽고 부마국 시대를 겪으면서 단지 윤관의 동북 9성 개척 후 여진의 반발과 반환요청, 관리의 어려움 등으로 결국 여진에게 다시 돌려준 상황을 고려할 때 고구려의 고토회복은 구호에 불과하였고 실제로 국력이나 군사력이 미흡하여 실현하지 못했다. 최영이 원명 교체기를 이용하여 요동을 정벌하여 고구려 고토를 회복하려 했던 최영의 의지는 충분히 인정되나 당시의 군사력이나 국력, 국제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무모한 시도가 아니었나 판단된다.

 

당시 고려의 주민수는 대략 600~1000만 명, 군사력은 대략 15만 명(비전투원 포함 37만 4천) 수준 정도였다. 이러한 국력과 군사력으로 명나라를 상대로 요동을 정벌하려 했다는 것이 전략상 과연 가능한 일이었는지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고려의 군사편제와 군사력은 사서에 의하면 중앙군 전투병 4만 5천, 비전투원 2만7천 도합 7만 2천 명, 서경군 전투/비전투 도합 1만 2천, 북계 주진군 3만 8천, 동계 주진군 1만 3천,  수군 전함 150척과 병력 4천 5백, 각도 주현군 4만 5천 정도로 실제 전투가능한 병력은 2군 6위 4만 5천, 서경 2천, 북계 주진군 4만 1천, 동계 주진군 1만 3천, 주현군 4만 5천, 수군 4천 5백 등 도합 약 15만 병력이었다. 전쟁를 지원하는 비전투원까지 합하면 37만 4천 정도였다.

 

고려군의 전술은 좌군이 주력으로 중앙에서 쇠뇌부대와 기병으로 편성하여 적을 공격,방어하면서 공격시에는 쇠뇌부대 엄호하에 기병이 돌격하는 형태로 진행하였으며, 초군/정용이 경무장기병으로 편성되어 적군의 측.후방을 공격하며, 우군은 기병과 노병으로 편성되어 조공역활을 하면서 공격하였고, 보창병은 후방 예비대로 편성되어 임무를 수행하였다. 후방의 백정군은 군수지원부대로 전투원 1인당 2명씩 의.식.주를 보좌하는 역활을 하였다. 한마디로 전투원과 지원군 비율이 1:2 정도 되었다.

 

또 고려군의 전술이 당시 명나라 군대를 상대로 우월한 전투력을 가진 상태도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군사의 수가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전략전술과 전투력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북방 기마부대에 대한 고려군이 무력하게 무너졌던 3차에 걸친 거란족 침공이나 몽고 침공 30년 을 생각할 때 중국의 명나라 군대를 상대로 다져진 국력이나 우월한 군사력으로 전략전술을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이 구비되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고 판단된다. 물론 이성계의 뛰어난 능력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초전에는 고려군이 승리를 달성할지는 몰라도 차후 명의 대군이 요동을 탈환하기 위해 공격해올 경우 고려가 명군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현저하게 열등하였다는 점이다. 고대 카르타고와 로마가 '포에니 전쟁'에서 지중해의 패권을 다툴 때처럼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 같은 줄충한 장군이 나타나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고대 포에니 전쟁(3차 전쟁, 200년 가까이 진행) 당시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이 로마와 지중해 패권을 다툴 때 한니발이 당시 통치하던 카르타고 식민지인 에스파니아(스페인)에서 프랑스 남부 산림 지대를 지나 알프를 넘어 로마의 아탈리아 반도를 기습 침공하였다. 그는  그 후 16년 동안 이탈리아 반도를 종횡무진하면서 로마군을 가는 곳마다 격파하였는데 그가 즐겨 사용한 전술은 알렉산더 대왕이 개발한 전술로 바로 양익포위전술이었다.

 

한니발은 특히 강력한 기병을 잘 활용하였는데, 중앙의 주력이 로마군을 견제하는 동안 양측의 기병이 로마군 기병을 제압하고 로마군 측후방을 공격하는 전술이었다. 로마군의 전술은 항상 일정한 방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한니발에게는 더욱 좋은 상대가 되었으며 기만, 침투, 양동, 매복, 유인, 기습전술을 자유롭게 사용할 정도로 전술능력이 뛰어난 장군이었다.  한니발 병력은 약 5만 정도로 손실되는 병력은 현지에서 보충하였으며 모두 급료를 지급하는 용병이었다. 어느 부대나 측후방이 공격당하면 정면의 적과 동시에 측후방을 방어해야하므로 전열이 흩어지고 쉽게 무너지게 된다. 그래서 한니발은 로마군 약 7만 명을 거의 전멸시킨 '칸나전투'에서 처럼 중앙을 불록하게 배치하거나 오목하게 배치하여 적군을 견제하거나 끌어들인 다음 양측 기병 중 어느 한 쪽을 집중적으로 배치하여 어느 한 쪽의 로마군 기병을 무찌르면 나머지 로마군 주력에 대한 측후방 공격으로 쉽게 전열을 무너뜨렸던 것이다. 또 한니발의 기병은 북아프리카나 갈리아 민족 중에서 우수한 기병을 선발하였으며 그들은 로마 기병과 달리 태어날 때부터 말을 타고 생활하는 유목민족이었다. 또 한니발은 병사들과 동고동락을 하면서 병사들과 똑같이 잠을 자고 먹고 지냈으며 항상 말이 없이 과묵하면서도 치밀한 성격으로 병사들에게 존경을 한 몸에 받았으며 정찰병을 이용하여 지형을 충분히 연구하였고 적의 위치, 진로, 규모, 예상 진로, 예비대, 기후 등 적정에 대해서도 면밀히 정보를 입수하였다. 심지어 적장인 로마 집정관인 성격과 습관, 심리까지 꿰뚫고 있을 정도로 적을 알고 자신이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시간에 자신이 구상한 전술방식으로 로마군을 격멸시킨 것이다.

 

그러나 한니발은 로마군 지휘관인 집정관을 십여 명 이상이나 전사시키고 병력은 수도 없이 죽이고 포로로 잡아 팔고 하여도 로마군은 계속 보충되었던 것이다. 또 로마군은 한니발과 직접적인 대적은 항상 패배를 당해왔기 때문에 직접적인 전투를 회피하면서 지연전술을 전개하면서 로마연합 각 지역에서 끓임없이 보충되는 로마군의 저력에 결국 항복을 받아내지 못하고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이 북아프리카 카르타고 본국을 기습 침공하자 급히 이탈리아 반도에서 철수해야 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던 것이다. 

 

고려의 요동정벌 당시 명나라의 군대는 북원을 격멸시키기 위해 정신이 없을 시기였으나 요동정벌이 성공하더라도 차후에 명나라가 북원을 정벌하고 요동에 대한 공격을 할 것은 뻔한 일이었을 것이다. 또 당시 고려가 명나라 군대와 대적하여 요동을 방어할 수 있는 국력이나 군사력의 수준이 미흡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또 이성계를 포함한 신흥무장세력들이 요동침공 4대불가론을 출정전에 제기하였던 상태였고, 위화도에서 수 차에 걸쳐 회군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또 최영은 팔도도통사인 자신이 직접 현장에서 좌우군을 지휘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후방인 서경에 머물면서 좌우군을 지휘하면서 예비인 중앙군을 거느리고 대기하였다는 사실 또한 문제를 야기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우왕은 젊은 혈기로 국제정세도 어둡고 신돈의 자식이라는 소문이 만발하여 민심이 이반한 상태였고 그는 최영에만 의존하는 상태였던 것이다. 결국 최영의 무모한 요동정벌 전쟁이 고려의 국운을 멸망의 길로 가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고려왕실의 운명을 바꾼 위화도 회군 그리고 최영의 실각

최영의 보호를 받고 있던 우왕은 최영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그가 자신의 곁을 떠나는 것은 원치 않았다. 결국 최영은 우왕과 함께 평양에 남고 이성계와 조민수에게 군대를 내주어 요동정벌 길에 나서도록 하였다. 그러나 최영이 이성계에게 군대를 내어준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전을 내준 것과 진배없었다. 명나라를 치기 위해 북쪽으로 가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장마를 만나 섬에 갇히게 되고 군대를 이상 전진시킬 수 없게 되자 여러 차례 회군의사를 고려조정에 아뢰었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은 이성계의 회군을 허락하지 않았다. 애초에 원치 않는 전쟁 길에 올랐던 이성계는 왕명을 거역하고 결국 군대를 회군시켰다. 이것이 바로 고려와 최영의 운명을 완전히 침몰시킨 위화도회군 사건이다. 위화도회군이란 용어는 조선의 사관들이 반역이란 말을 사용하기에는 양심이 찔리는 용어이기에 당위성을 내세우며 만들어낸 용어에 불과하다. 결국은 고려 조정에 대한 반역이었으며 친위쿠테타였다.

 

왕명을 거역하고 군대를 돌린 이성계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쿠데타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신진 사대부와 신흥 무장 세력들로부터 신망을 얻고 있던 이성계는 그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결국 개경으로 들어와 무력시위 후 정권을 탈취하였다. 돌연한 사태 변화에 최영은 급히 평양에서 개경으로 돌아와 회군해오는 이성계의 군대와 싸우려 하였으나, 이미 대부분의 군을 이성계의 요동정벌군에 내어준 상황에서 최영은 에비인 중앙군으로 맞섰지만 이성계의 좌우군을 당할 수가 없었다. 결국 중앙군이 무너지자 최영이 보호하던 우왕은 폐위되어 강화도로 쫓겨났고 항복한 최영은 고봉현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최영은 합포로 옮겨졌다가 결국 개경으로 다시 압송되어 참형 되었다. 최영이 죽은 뒤 4년 후 1392년 이성계는 조선을 개창하였고 그로부터 4년 후에는 최영에게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풀이 나지 않는 무덤의 주인공

 유배지에서 개경으로 불러온 최영에게 ‘무리하게 요동을 정벌하려고 계획하고 왕의 말을 우습게 여기고 권세를 탐한 죄’를 들어 참형에 처하려 하자, 최영은 평생에 있어서 탐욕이 있었다면 자신의 무덤에 풀이 자랄 것이고 결백하다면 무덤에 풀이 자라지 않을 것이라고 유언을 하고 최후를 맞이하였다.

 

군의 묘에는 고인의 말처럼 오랜 세월 동안 풀이 나지 않다가 1976년 무렵 부터 풀이 돋기 시작하여 지금은 무성하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이는 최영이 남긴 말로 유명하다. 원래 이 말은 최영의 아버지 최원직이 최영이 16세 경에 죽으면서 남긴 유언이었다고 한다. 원래 성품이 강직하고 올곧았던 최영은 아버지의 말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아 이 글귀를 써서 곁에 두고 항상 되새겼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는 고위관직에 있을 때도 별다른 청탁이나 뇌물 사건에 휩쓸리지 않았다. 외적을 막고 고려왕실을 보호하며 청렴하기까지 했던 최영은 그래서 온 나라의 백성으로부터 매우 존경을 받았다. 그가 오늘날까지도 우리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범인들이 감히 견디기 힘든 재물이라는 탐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세와 태도를 평생 견지했었다는 첨렴성에 있을 것이다.

 

이성계가 권력을 잡고 나서 존경하는 선배 무장이었고 싸움터에서는 전우이며 그를 장군의 자리로 이끌어준 것과 다름없는 최영을 결국 참형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의 이러한 국민적 인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민간의 무속 신앙으로 자리 잡은 최영장군

고려 말기 명장인 최영의 전 국가적 인기는 고려가 멸망한 후 민간의 무속 신앙으로 변모하였다. 무속에서 ‘최영장군’은 수명장수, 안과태평의 신으로, 무에서 가장 많이 모셔지는 신령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외적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한 최영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민초는 최영을 장군신으로 다시 부활시키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최영장군’ 신은 조선시대부터 한반도 중부지방을 중심으로 널리 숭배받는 신이 되었고, 지금도 한반도 최고의 장군신으로 군림하고 있다. 매년 음력 5월 단오날에 부산 자성대에 있는 사당에서 '최영장군제'가 열리고 있고 전국 곳곳에 최영장군을 모시는 굿당과 사당이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