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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50 : 고려의 역사 219 (제32대 우왕실록 4) 본문
한국의 역사 450 : 고려의 역사 219 (제32대 우왕실록 4)
제32대 우왕실록
(1365~1389년, 재위 1374년 9월~1388년 6월, 13년 9개월)
3. 최영의 요동정벌 전쟁과 위화도 회군
우왕시대를 통털어 가장 큰 사건은 요동정벌이다. 명나라의 영토침입을 저지하기 위해 감행한 이 일은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고 고구려의 고토를 되찿으려는 의지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요동정벌 전쟁을 위해 출동한 이성계의 출정군은 4대 불가론을 내세우며 우왕에게 철군을 청원하였으나 거부당하자 조민수와 협의 후 심각한 고심 끝에 결국 철군을 결심하고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최영의 진압군을 물리치고 개경을 점령 후, 우왕을 폐위하고 숙적 최영 일파를 제거함으로써 정권의 권력을 잡게 되고 창왕, 공양왕을 거쳐 고려가 결국 이성계에게 왕위를 양도하는 방식으로 고려가 멸망하고 이성계의 이씨 조선이 태동하는 계기가 되었던 사건으로 우리 역사에서 본다면 역사의 큰 변곡점을 이룬 크나큰 사건이다.
사실 요동정벌을 주도한 인물은 최영이었다. 그는 1316년 사헌규정 최원직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기골이 장대하고 용맹이 뛰어났다. 장성한 뒤에 양광도 도순문사 휘하에서 왜구 토벌에 많은 공을 세웠다. 1352년 조일신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호군이 되었고, 1354년에 대호군으로 진급하였다.
1355년 서북면 병마사에 임명되어 인당의 수하로 참가하여 원나라에 속했던 서쪽 지역을 공격하여 파사부 등 세 곳을 격파하였다. 또 1357년 양광전라도왜구체복사로 왜구 토벌에 나서 오예포에서 왜선 4백 척을 궤멸시켰으며, 1359년 홍건적 4만이 침공하여 서경을 함락시키자 이를 수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 덕분에 이듬해엔 서북면도순찰사에 오르고, 1361년 홍건적 10만이 개경을 함락시키자 안우, 이방실 등과 함께 이를 격퇴하여 일등공신에 책록되고 전리판서에 올랐다. 이외에도 1363년에는 김용의 난을 평정하였고, 이듬해에는 원나라 기왕후가 동생 기철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최유로 하여금 군사 1만으로 고려를 침공하였을 때 이를 물리침으로써 최유의 난을 평정하였다.
이처럼 전장을 누비면서 출세가도를 달리던 최영은 1356년 강화도에 침범한 왜구를 막던 중에 신돈의 참소로 인해 경주윤으로 좌천되었다가 유배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1371년 신돈이 숙청되면서 다시 소환되어 육도도순찰사에 올라 70세 이상 되는 장정에게는 군역 대신 쌀을 거두어들이는 등 무리한 군수 보충으로 백성들의 원성을 듣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대사헌 김속명 등의 탄핵을 받았으나 오히려 김속명이 유배됨으로써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1374년 9월, 공민왕이 살해되고 이인임의 보필을 받은 우왕이 즉위하면서 조정은 이인임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권력을 쥔 이인임이 친원정책을 실시하다가 김구용, 이승인, 정도전, 권근 등의 탄핵을 받게 되자 최영은 지윤 등과 합심하여 이인임을 편들어 김구용, 정몽주, 이승인 등을 귀양보내고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게 된다.
그 후 그는 1375년 판삼사사가 되었고, 1380년에는 왜구를 무찌른 공을 인정받아 해도도통사에 오른다. 하지만 이 때 병을 얻어 개경으로 돌아와 요양을 하던 중에 수시중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중앙의 중책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1384년에 마침내 재상직인 영삼사사가 되었고 곧 문하시중에 올랐다.
문하시중에 오른 그는 한동안 판문하부사로 이전하였다가 1388년에 다시 문하시중이 되어 그동안 이인임과 함게 정권을 농단하던 염흥방, 임견비 등을 숙청했다. 이 때 이인임은 정계에서 물러난 상태였기 때문에 경원부에 정배되었다가 최영의 배려로 풀려난다.
이 무렵 명나라에서 고려의 철령 이북 땅을 자신들의 요동부에 예속시키겠다는 통보를 해오면서 고려와 명나라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명나라가 요동부의 관리를 보내 철령위를 설치하고 그 지역을 자신들의 영토로 굳히려 하자, 최영은 우왕에게 주장하여 요동정벌을 계획한다.
최영은 요동정벌론을 받아들인 우왕은 전국 5도에 명령하여 각 성에 성을 수축토록 하였고 군사를 서북방면에 집중 배치하여 명나라의 급습에 대비했다. 또한 개경의 방리군을 동원하여 한양의 중흥성을 축조하였다. 이는 전쟁 상황에서 왕족들을 중흥성에 이주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던 우왕은 최영을 자신의 측근으로 확정하기 위해 최영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그의 딸을 맞아들여 영비로 삼는다. 이 때 우왕은 "나의 아버지가 밤에 잠을 자다가 해를 당했는데, 나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을 한 것으로 보아 최영과 혼인관계를 맺어 자신의 안정을 보장받으려고 했던 것 같다.
최영은 전쟁준비를 하면서 요동정발에 강하게 반대해왔던 공산부원군 이자송을 죽여버린다. 그 무렵 서북면 도안무사 최원지가 명나라 요동도사가 보낸 지휘관 2명이 병력 1천을 거느리고 철령위를 접수하기 위해 오고 있다는 보고를 하였다. 그리고 며칠 후 명나라 후군도독부에서 요동백호 왕득병을 보내 철령위 설치를 통고하였다. 이에 우왕은 문하찬성사 우현보에게 명령하여 개경을 지키게 하고 5부의 장정들을 징발하여 군대를 편성하도록 한 후 자신은 서해도로 가서 요동 진격을 준비했다. 이 때 세자 창과 정비 및 근비, 그 외 왕비들을 모두 한양산성으로 옮겨가도록 하였다.
개경을 떠난 우왕은 곧 봉주에 도착하여 최영과 이성계를 불러 요동 공략을 명령했다. 그러자 이성계는 요동 공략에 반대하며 이른바 '4불가론'으로 일컫어지는 다음의 네 가지 이유를 댔다.
첯째는 소국이 대국을 거역하는 것은 불가한 일이고,
둘째는 여름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농사에 지장을 초래하니 불가한 일이고,
셋째는 원정을 틈타 왜적이 침범할 우려가 있으니 불가한 일이고,
넷째는 장마로 인해 활에 먹인 아교가 풀릴 염려가 있고 군사들이 병에 걸릴 우려가 있으니 불가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왕과 최영은 출병을 강행하려는 고집을 꺽지 않았다. 이에 다시 이성계는 군대를 서경에 머물게 하였다가 가을에 출병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지만 우왕과 최영은 이 의견을 수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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