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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48 : 고려의 역사 217 (제32대 우왕실록 2) 본문
한국의 역사 448 : 고려의 역사 217 (제32대 우왕실록 2)
제32대 우왕실록
(1365~1389년, 재위 1374년 9월~1388년 6월, 13년 9개월)
1.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우왕과 고려 조정의 혼란(계속)
왕우를 왕으로 세울 때 공민왕의 모후 명덕태후 홍씨는 이를 반대했다. 태후는 공민왕이 죽은 다음 날 경복흥과 함게 종친들 중에서 적당한 인물을 선택하여 왕으로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이인임은 우를 왕으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양 세력 간에 팽팽한 설전이 전개되었다. 그러자 판삼사사 이수산이 나서서 종실에 맡기자고 하였다. 하지만 영녕군 왕유와 밀직 왕안덕이 공민왕의 유지를 받들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여 결국 우를 왕으로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왕이 왕위에 오르자 그를 옹립했던 이인임이 정권을 장악하였고, 이인임의 신임을 받은 최영도 이 때부터 정계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게 된다.
한편 우왕이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북원에서는 심양왕 왕고의 손자 탈탈불화를 고려 국왕에 봉하게 된다. 이 때문에 원의 장수였다가 명나라에 투항한 나추하는 공민왕에게 아들이 없었는데 누가 왕위를 계승했느냐며 고려 조정을 힐난한다. 1375년 8월, 고려 국왕에 책봉된 심양왕 탈탈불화가 즉위식을 갖기 위해 고려로 오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온다. 이 때문에 고려 조정은 일시적으로 불안에 떨게 되지만 이인임 일파가 탈탈불화 일행의 고려 진입을 저지하여 이 문제는 더 이상 확대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1377년 북원이 결국 우왕을 정식으로 고려 국왕에 봉함으로써 왕위계승 문제도 해결된다.
이처럼 고려는 당시까지도 원과의 관계를 끓지 못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1378년에는 명나라에도 우왕의 왕위계승을 인정하는 교서를 내려줄 것을 요청하게 되는데, 이 같은 이중적인 외교관계 때문에 고려는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
이 무렵 전국 각지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가 부여와 공주를 침입하여 목사 김시혁을 패주시키고 공주를 점령한 사건이 벌어진다. 고려 조정은 군사를 총동원하여 왜구 소탕작전에 나서서 1376년에는 최영이 홍산(논산)에서 대승을 거두고, 1380년에는 나세, 최무선 등이 화약과 화포로 적선 5백여 척을 불사른다. 또한 이 해에 황산에서 이성계가 왜구를 대파하고, 1383년에는 정지가 서남해에서 수백 척의 적선을 궤멸시킨다.
고려 조정은 무력전 이외에도 외교책을 통해서도 왜구 퇴치작업을 병행했다. 1375년에 판전객시사 나홍유를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 조정에 왜구 토벌에 협조해줄 것을 요청했고, 1377년에는 대사성을 지낸 정몽주를 보내 규수와 아미카와에 붙잡혀 있던 고려인 수백 명을 귀환시켰다. 그리고 경상도와 전라도에 왜인 만호부를 두고 왜인들이 살도록 하는 등 유화책도 실시하였으나 이는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왜구에 대한 이러한 다방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왜구의 노략질은 끓이지 않았다.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점점 명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변방의 주민들은 불안에 떨고 있었다. 명나라는 고려가 북원과의 관계를 끓고 자신들을 상국으로 섬기며 조공할 것을 요구하였고, 고려는 북원과의 관계를 생각하여 이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1388년 2월 명나라는 일방적으로 철령 이북이 원나라에 속했으니 당연히 자신들이 차지해야 한다는 논리를 고려측에 일방적으로 통고하였다.
이렇게 되자 조정은 회의를 거듭한 끝에 우왕은 최영의 건의를 받아들여 요동을 정벌하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한편으론 개경의 방리군을 동원하여 한성의 중흥성을 수축하고 전쟁에 대비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밀직재학 박의중을 시켜 철령 이북 지역은 옛날부터 고려 영토였다는 편지를 명나라에 보냈다.
하지만 명나라는 요동도사로 하여금 2명의 지휘관에게 1천의 군사를 내주어 철령 이북 지역을 접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리고 곧 명나라의 후군도독부에서 요동백호 왕득명을 파견하여 철령위를 설치한다는 통고를 고려 조정에 보내왔다.
이에 우왕은 요동 진공 계획을 수립하고 8도에서 군사를 징집하였다. 또 세자와 왕족들은 모두 한성으로 피난시키고 우현보로 하여금 개경을 지키도록 하였으며, 자신은 최영과 함께 서해도로 가서 요동정벌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해 4월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삼고, 조민수와 이성계를 좌우도통사로 임명하여 출전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성계는 이른바 '4불가론'을 내세워 요동정벌의 무모함을 역설하며 우왕과 최영을 설득하려 하였다. 이성계는 식량이 풍부한 가을이 요동정벌의 적기라고 주장하면서 출병을 반대했지만, 최영의 반대로 하는 수 없이 출병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5월 출병한 이성계와 조민수는 5만 군사와 함께 압록강 중간에 있는 위화도에 머물렀다. 하지만 그들은 불어난 물 때문에 진군을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시일이 지나면서 점차 병사들이 지치기 시작하자 우왕에게 회군을 허락해달라는 요청을 하였지만 우왕과 최영은 여전히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이성계는 좌도통사 조민수와 협의한 끝에 군사를 돌려 결국 운명의 회군을 하게 된다.
좌우군이 회군한다는 소식을 들은 우왕은 머무르고 있던 봉주에서 급히 서경으로 돌아와 좌우군을 반란군으로 규정하는 한편 개경으로 가서 최영으로 하여금 반란군을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좌우군은 개경 근처에 도착하여 진군을 계속하다가 최영이 보낸 진압군의 급습을 받고 일시적으로 후퇴하였다. 하지만 진압군은 반란군에 비해 수적으로 너무 불리했을 뿐 아니라 이미 전의를 상실한 터라 좌우군을 이길 수 없었다. 6월 중순에 도성은 결국 이성계와 조민수의 좌우군에게 접수되고 최영과 그 측근들은 체포되어 유배지로 떠났으며, 우왕도 폐위되어 강화도에 유폐되었다가 다시 1389년 11월 강릉으로 이배되었다.
우왕이 폐위된 뒤에 그의 아들 창이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1년 5개월 만에 역시 폐위되었다. 그리고 1389년 12월 신종의 7세 손 공양왕이 즉위한 후 정당문학 서형균을 부내 우왕을 죽이도록 하였다. 이 때 우왕의 나이 불과 25세였다.
우왕은 신돈의 자식이라 하여 왕으로 인정받지 못하였고 그런 까닭에 능도 마련되지 않았으며 신록도 편찬되지 않았다. 조선의 개국 세력들은 우왕의 치세에 관한 기록을 '열전'의 '반역자' 편에 실었으며, <고려사> 편자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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