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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47 : 고려의 역사 216 (제32대 우왕실록 1) 본문
한국의 역사 447 : 고려의 역사 216 (제32대 우왕실록 1)
제32대 우왕
우왕(禑王, 1365년~1389년)은 고려 제32대 국왕(재위: 1374년~1388년)이다. 우왕인 휘인 우(禑)에, 임금을 뜻하는 왕(王)을 붙여 부른 명칭으로, 당대의 시호는 없다. 고려사에는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며 "가짜를 내쫓고 진짜를 세운다(廢假立眞)"고 주장하여 신돈의 자손으로 기록되었으나 이는 모략으로 간주된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이후 폐위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여주로 유배된 뒤 강릉으로 이배되었다가 살해된다. 고려 멸망 후 태종 때에 그에게 여흥왕(驪興王)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는 그의 귀양지가 경기도 여흥인 것에서 기인한다.
잠저(潛邸)
우왕의 아명은 모니노(牟尼奴)이다. 부왕은 공민왕(恭愍王)이고, 모친은 신돈(辛旽)의 시녀였던 반야(盤若)이다.
공민왕이 신돈의 집에 미행하여 반야와 관계하여 낳았다고 하며 신돈이 처형된 다음인 1371년(공민왕 20년)에 비로소 입궐하여 '우(禑)'라는 이름을 하사받았고, 강령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봉작되었다. 왕실에서는 그의 혈통이 미천하여 등위에서 대신들의 방해를 받을까하여 이미 사망한 궁인 한씨의 소생이라고 포고했다.
궁에서 출생하지 않은 데다가 가뜩이나 불명확한 출생에 대해서도 처음에 거짓으로 발표되었던 이유로 좋지 않은 풍문이 많았다. 이는 나중에 이성계 일파가 그가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빌미가 되었다.
1374년에 공민왕이 시해당하자, 10세의 나이로 훗날 이성계의 정적이 되는 이인임(李仁任)의 후원을 받고 등위하게 되었다. 즉위한 우왕은 궁인 한씨의 3대를 추증하였다.
치세(治世)
처음에는 경연(經筵)을 열어 학문을 닦기에 힘썼고, 명덕태후의 훈계를 받아 몸가짐을 바로하여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태후가 승하한 다음 주색잡기에 빠져 고려의 국력과 명운을 쇠진하게 된 원인을 제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려말기 기록의 사실성은 논란이 많다.
우왕의 근신(近臣)인 이인임이 국왕의 총애를 바탕으로 횡행하다가 당시, 고려의 최고 실력자였던, 최영과 이성계의 눈밖에 나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우왕은 조정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결국 1388년(우왕 15년) 6월에 위화도 회군으로 권신이 된 이성계는 우왕을 퇴위시키고, 아들인 창(昌)을 왕위에 올렸다.
복위운동과 최후
우왕 복위 사건
우왕 복위 사건 또는 우왕 복위 미수 사건은 1389년 창왕과 김저, 정득후 등이 폐위된 우왕을 복위시키려다가 이성계, 정도전 등의 신진사대부에 의해 발각된 사건이다. 이 사건을 빌미로 창왕은 폐위되었고, 우왕과 함께 살해당하게 된다.
신진사대부들은 자신들이 우왕을 폐했기 때문에 언젠가는 창왕이 자신들을 척결하려 할 것이라는 판단에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후손으로 규정하려 하였다.
1388년 창왕은 전왕인 우왕을 강화도에서 여흥군(驪興郡, 현재의 여주군)으로 옮겼으며, 위화도회군 후 체포된 최영(崔瑩)을 충주로 귀양보냈다가 이성계 일파가 최영의 사형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마지못해 승인하게 된다. 그러나 우왕을 이배하는 과정에서 그가 부왕인 우왕과 자주 내통하는 것과, 부왕 우왕을 다시 복위시키려는 계획에 가담한 것이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탄로나게 된다.
1389년 김저와 정득후 등은 이성계를 죽이고 우왕을 복위시키려다가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대호군(大護軍)을 지낸 김저는 부령을 지낸 정득후와 모의하고 예의판서 곽충보를 매수하여 이성계, 정도전 일파의 정보를 입수한 뒤, 거사 계획을 세워 이들을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곽충보가 정득후 등의 말을 듣고 이성계에게 찾아가 고변하는 바람에 계획은 탄로나고 김저는 체포되었으며 정득후는 자살한다. 그리고 김저를 국문(鞠問)한 결과 변안열, 이림, 우현보, 우인열, 왕안덕, 우홍수 등이 공모, 동조했다는 자백을 받아내고는 그들을 모두 숙청, 삭탈하고 유배보낸다.
동시에 창왕이 유배된 아버지 우왕과 내통하려 한 것을 입수한 신진사대부들은 이성계, 정도전 등을 중심으로 1389년 이성계 일파는 그가 신돈의 자식이라고 주장하며 우왕과 그의 아들 창왕을 신돈의 아들과 손자로 몰아붙여 폐위시켰다.
결국 1389년(공양왕 1년) 11월에 김저(金佇)와 모의하여 이성계를 제거하려 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강릉으로 다시 옮겨졌으며, 다음달에 그곳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그래서 진짜 왕을 추대한다는 명분하에 신종의 7대손이며 충렬왕의 외증손인 정창군 요(공양왕)를 왕으로 추대한다.
가계
우왕은 구비삼옹주(九妃三翁主)라는 12명의 비빈을 두었다. 이는 조모인 명덕태후 홍씨가 죽은 뒤 주색잡기로 인한 결과이며 대부분 약탈하여 책봉하였다. 그러나 이성계 일파가 폐가입진을 내세워 우왕이 축출된 뒤 현비를 제외한 나머지 비빈들은 폐출 되었으며 우왕과 창왕은 신돈(辛旽)의 후손이라 하여 위조(僞朝)로 폄하됨에 따라 우왕은 반역열전에 수록되고 왕비들은 《고려사》 후비전에 입전되지 못하였다.
- 근비 이씨(謹妃 李氏, 생몰년 미상) - 고성 이림의 딸
- 아들: 창왕(昌王, 1380년~1389년,재위 1388년~1389년) - 고려 제 33대 왕
- 영비 최씨(寧妃 崔氏, 생몰년 미상) - 철원 최영의 딸
- 의비 노씨(毅妃 魯氏, 생몰년 미상) - 노영수의 딸
- 숙비 최씨(淑妃 崔氏, 생몰년 미상) - 최천검의 딸
- 안비 강씨(安妃 姜氏, 생몰년 미상) - 강인유의 딸
- 정비 신씨(正妃 申氏, 생몰년 미상) - 평산 신아의 딸
- 덕비 조씨(德妃 曺氏, 생몰년 미상) - 조영길의 딸이며 노비 출신
- 선비 왕씨(善妃 王氏, 생몰년 미상) - 왕흥의 딸
- 현비 안씨(賢妃 安氏, 생몰년 미상) - 죽성 안숙로의 딸이며 공민왕의 비인 정비 안씨의 조카.
- 화순옹주(和順翁主, 생몰년 미상) - 기생 출신이며 본명은 소매향(小梅香)
- 명순옹주(明順翁主, 생몰년 미상) - 기생 출신이며 본명은 연쌍비(燕雙飛)
- 영선옹주(寧善翁主, ?~1420년) - 기생 출신이며 본명은 칠점선(七點仙), 원래는 밀직(密直) 남질(南秩)의 첩(妾)이었다.
논란과 의혹
'왕우(王禑)'와 '신우(辛禑)'왕위에 오를 때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폐위 당할 때 그 이유 중 하나로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고 신돈의 아들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때문에 당대에 시호를 받지 못하였으며 고려사(高麗史)에서는 그를 이름으로만 적고 있고 게다가 그마저도 왕우(王禑)가 아닌 신우(辛禑)로 적고있다. 그가 실제로는 공민왕의 아들이 맞다는 학계의 유력한 주장이 있으나 현재로서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정몽주의 폐가입진 동조
이때 그의 폐위와 우왕, 창왕의 신씨설을 동조한 인물 중에는 정몽주도 있었다. 정몽주는 1392년의 고려 멸망과 역성혁명에는 반대하였으나 이성계, 정도전, 조준 등이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폐위하는 데 가담하였다. 이성계 일파의 주장은 고려사, 고려사절요에도 등재되어 신우, 신창으로 등재되었으나 근거가 희박하다.
이성계는 정몽주 등과 이른바 폐가입진, 즉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는 논리로 창왕을 폐위시키고, 제20대 왕인 신종의 7세손 정창군 요(공양왕)를 등극시킨다.
우왕 복위 사건은 주모자로 거론된 사람과 처리 과정 등을 볼 때 다소 의문이 남기는 하지만, 정몽주는 이성계와 뜻을 같이하여 공양왕을 세운 것은 물론이고, '폐가입진'(廢假立眞)을 내세우면서 우왕과 창왕을 왕씨가 아닌 신돈의 자손으로 모는 작업에도 동참하였다.
우왕과 창왕이 왕위에 오를 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이성계 일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정치적 필요에 의하여 그들을 신돈의 자손으로 내몰아 결국 죽였는데, 자신들이 이전에 인정하였던 왕들을 죽인 작업에 정몽주 역시 동의하였던 것이다. 정몽주 역시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자손이라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으며, 아니라는 반론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고려의 역대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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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대 우왕실록
(1365~1389년, 재위 1374년 9월~1388년 6월, 13년 9개월)
1.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우왕과 고려 조정의 혼란
공민왕이 살해당하자 어린 우왕을 즉위시킨 이인임 일파가 정권을 장악한다. 한편 명나라의 개국으로 북원과 명나라 사이에서 고려는 외교적 난관에 부딪혀 명나라와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는 처지가 되었고, 끓임없이 이어지는 왜구의 노략질로 민심은 동요하여 민간경제가 극도로 피폐해진다.
우왕은 공민왕의 장남이자 시비 반야의 소생으로 1365년에 태어났으며, 아명은 모니노, 이름은 우이다.
그는 어린 시절을 신돈의 집에서 보내야 했다. 공민왕은 원래 자식이 없어 고민하고 있었는데, 신돈이 자신의 여종 반야를 바쳐 아이를 얻으라고 권유하였다. 이에 공민왕은 반야와 동침하였고 얼마 뒤 그녀가 아이를 잉태했다. 반야가 만삭이 되자 신돈은 자신의 친구인 승려 능우의 어머니에게 반야를 맡겼다.
능우의 어머니 집에서 아이를 출산한 반야는 1년 뒤에 신돈의 집에 가서 기거하였다. 신돈은 동지밀직 김횡이 보낸 여종 김장을 유모로 삼아 아이를 돌보게 했는데, 1371년 신돈이 역모죄로 몰려 수원으로 유배되자 공민왕은 자신에게 아들이 있음을 백관들에게 밝히고 반야의 아들 모니노를 궁궐로 데려오라고 하였다.
공민왕은 당시 수시중으로 있던 이인임에게 "신돈의 집에 아름다운 여자가 있어 가까이 하였더니 아들을 얻었다."면서 왕우를 지켜줄 것을 부탁했다.
궁궐에 들어온 모니노는 명덕태후 홍씨에게 맡겨졌다. 이 때 공민왕은 문신들을 모아 모니노의 이름을 고칠 것을 명령하여 '우'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시중 경복흥, 밀직제학 염흥방, 정당문학 백운보 등을 불러 의논한 후 왕우에게 강녕대원군이라는 봉작을 내리고 백문보, 전녹생, 정추 등으로 하여금 우에게 학문을 가르치도록 했다.
그런데 공민왕은 자신이 살해당하던 달인 1374년 9월에, 이미 사망하고 없는 궁인 한씨를 왕우의 생모라고 말한 다음 한씨의 조상 3대와 그녀의 외조에게 벼슬을 추증한다. 또한 우왕 즉위 후에 한씨에게는 순정왕후라는 시호가 내려진다. 그러나 정작 우왕의 친모인 반야는 우왕 2년에 자신이 왕의 친조모라고 주장하다가 이인임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임진강에 수장되고 만다.
공민왕이 우왕의 친모를 궁인 한씨라고 한 것은 반야가 신돈의 여종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반야가 자신을 우왕의 친모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우왕을 공민왕의 아들이 아닌 신돈의 아들이라고 믿을 것이고, 따라서 이를 염려한 공민왕은 이미 죽고 없는 궁인 한씨를 우왕의 친모라고 꾸며서 말했던 것 같다.
사실 우왕이 폐위된 뒤에 이성계를 비롯한 조선 개국 세력들은 반야가 낳은 아들은 공민왕의 씨앗이 아니라 신돈의 씨앗이라고 주장하면서 우왕의 아들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운다.
어쨌던 1374년 9월 공민왕이 최만생, 홍륜 등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되자 살인범을 체포하고 권력을 장악한 이인임 등은 우를 고려 제32대 왕으로 옹립하였는데 이 때 우왕의 나이 불과 10세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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