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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43 : 고려의 역사 212 (제31대 공민왕실록 1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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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43 : 고려의 역사 212 (제31대 공민왕실록 15)

두바퀴인생 2011. 12. 7. 04:46

 

 

 

한국의 역사 443 : 고려의 역사 212 (제31대 공민왕실록 15)   

 

 

제31대 공민왕실록

(1330~1374년, 재위 1351년 10월~1374년 9월, 22년 11개월)

 

4. 공민왕의 개혁작업을 수행한 사람들

 

급진개혁론자에서 불청객으로 전락한 신돈(?~1371년)

 

이제현이 공민왕 초기에 개혁을 주도했다면 후기의 개혁을 주도한 사람은 신돈이다. 하지만 신돈은 그동안 개혁주의자로 인식되기 보다는 왕위를 찬탈한 반역자나 국정을 분란케 한 간신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는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후손으로 인식시켜 조선왕조의 성립을 합리화하려 했던 조선 개국 세력의 역사 왜곡작업에서 비롯된 일이다.

 

신돈의 부모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그의 어머니가 계성현 옥천사 노비였다는 이야기만 전해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아주 어린 시절에 절에 맡겨져 양육되었으며, 그것이 곧 출가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의 본관이 영산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아버지가 영산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출가 후 그는 '편조'라는 법명을 얻었고, '요공'이라는 자를 사용하였으며 공민왕을 만난 이후에는 '청한거사'라는 법호를 얻게 되었다.

 

그가 공민왕을 처음 만나는 시기는 1358년이다. 이 때 공민왕의 개혁을 주도하던 이제현이 사직을 청원하고 관직에서 물러난 상태였고, 공민왕은 신돈을 만나 불교에 심취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공민왕이 불교에 관심을 보인 것은 유학자 중심의 관료체제의 강한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말하자면 공민왕은 유학자 관료 집단의 힘이 너무 강성해지자 불교 세력을 통해 그들을 견제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는 문종을 비롯한 고려의 역대 임금들이 흔히 사용하던 정치적 방편이기도 했다.

 

공민왕에게 신돈을 소개한 사람은 왕의 측근이었던 김원명이었다. 신돈을 처음 만난 공민왕은 그에게 매료되었고, 그래서 곧잘 그를 찿곤 하였다. 이를 시기한 관료들은 "앞으로 나라를 어지럽힐 자는 반드시 중눔이 될 것이다."고 비난하는가 하면, 정세운 같은 무장들은 신돈을 요승이라하여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의 입장은 달랐다. 공민왕은 그를 통하여 개혁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엇던 것이다.

 

김용의 계략으로 정세운을 비롯한 왕의 많은 측근들이 정계에서 사라졌을 때 공민왕은 신돈을 다시 찿았다. 떠돌이 행각승으로 전국을 유람하던 신돈은 1364년 공민왕의 부름을 받고 입궐하여 공민왕의 개혁정책을 주도하게 된다.

 

신돈은 공민왕의 국정 자문역을 하면서 이인복, 최영, 이구수 등을 밀어내고 1365년부터 정계의 핵심 세력으로 떠오른다. 공민왕은 그가 다른 신하들과 달리 파당에 속해있지 않을 뿐 아니라 사리사욕이 없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전면에 내세우고 적극적인 개혁작업을 진행한다. 그래서 공민왕은 그해 7월 신돈에게 '진평후'라는 봉작을 내리고 '영도첨의사사사 판중감찰사사 취산부원군 제조승록사사 겸판서운관사'라는 복합적이면서 절대적인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관직을 내린다. 이에 따라 신돈은 인사권을 비롯한 내외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 후 승복을 벗고 '돈'이라는 속명을 사용한다. 그리고 강력한 개혁작업을 추진하게 된다.

 

신돈이 가장 중점을 두고 실시한 개혁정책은 '노비와 토지개혁'이었다. 이것은 권문세족들의 경제적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정책이자 민간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었다. 또한 그것은 결과적으로 권문세족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시키는 일이기도 하였다.

 

이 같은 신돈의 개혁정책은 '전민변정도감'의 설치로 구체화된다. 1366년 5월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부당하게 겸병당한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강압에 의해 노비로  전락한 사람들을 양민으로 환원하였다. 이는 흡사 광종 대의 '노비안건법' 실시와 맞먹는 급진적인 조치였다.

 

이에 따라 노비에서 풀려난 사람들은 "성인이 나타나셨다."고 찬양하였고, 반면에 노비와 토지를 잃은 양반들은 "중눔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1367년에는 숭문관 옛터에 성균관을 중영하고 "공자는 천하만세의 스승이다."고 하면서 유학의 발전을 적극 추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도선비기'를 근거로 천도할 것을 건의하고 평양의 지세를 살피기까지 하였으나 이일은 성사되지 않았다. 이러한 행동은 묘청과 비슷하며 불교 승려들이 풍수와 도선지기 등을 이용하여 혹세무민하고 왕을 현혹시키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나 신돈의 개혁정책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1367년 10월에는 오인태, 경천흥, 김원명 등이 신돈을 제거하기 위해 모의를 하다가 발각되어 유배된 사건이 있었고, 이듬해 10월에는 김정, 김흥조, 김제안 등이 신돈을 살해하려다가 계획이 누설되어 유배를 떠나던 중 살해되었다.

 

이들이 신돈을 살해하려 했던 것은 비단 그의 개혁정책 때문만은 아니었다. 신돈은 환속한 뒤에 한동안 기현의 집에 기거하였고, 그 뒤 1367년에 사택을 얻어 독립하면서부터 타락된 모습을 드러내보였다. 많은 첩을 거느리며 아이를 얻는가 하면, 주색에 빠져 있는 일이 잦아 조신들에게 비판의 별미를 제공했던 것이다. 거기다 1369년에는 스스로 5도의 도사심관이 되려고 사심관제도를 부활시키려다가 공민왕의 반대로 좌절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 때부터 공민왕과 사이가 벌어지게 되었고, 공민왕은 마침내 1370년 10월에 친정할 뜻을 밝히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미 지나치게 성장한 신돈의 세력은 공민왕의 친정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그래서 공민왕은 신돈을 제거하지 않으면 자신의 왕권이 흔들릴 것을 우려하여 고심하다가 그를 제거하기로 하고 함정을 만들어 1371년 마침내 마침내 그를 역모죄로 그를 수원에 유배시켜 죽여버렸다. 이 때 신돈과 함께 개혁을 추진하던 기현, 이춘부, 이운목 등도 함께 제거되었다.

 

신돈의 개혁당은 이렇게 집권 6년 만에 몰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설치한 '전민변정도감'을 통하여 많은 노비에서 양민으로 환원되었고, 권문세가들이 부당하게 빼앗은 토지의 상당 부분이 원주인에게 되돌려지거나 국가에 환속됨으로써 고려는 경제적인 안정을 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또한 '성균관'을 중영하여 유학자들이 대거 배출됨으로써 조선 개국에 중추적인 역활을 하게 되는 '신진사대부의 성장을 촉진'케 하였던 것이다.

 

'공민왕실록'은 1391년에 이색, 이승인 등에 의하여 편찬작업이 시작되었으나, 당시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으로 끝을 보니 못하다가 조선 건국 후인 1398년에 '공양왕실록'과 함께 비로소 편찬작업을 종결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