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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42 : 고려의 역사 211 (제31대 공민왕실록 14) 본문
한국의 역사 442 : 고려의 역사 211 (제31대 공민왕실록 14)
제31대 공민왕실록
(1330~1374년, 재위 1351년 10월~1374년 9월, 22년 11개월)
4. 공민왕의 개혁작업을 수행한 사람들
현실주의적 개혁론자 이제현(1287~1367년)
이제현은 경주 사람으로 호는 익재, 영옹 등이며 1287년 이진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진은 신홍관료로 크게 출세하여 검교시중의 벼슬에 올랐으며, 그의 슬하에서 자란 이제현은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밝아 성리학을 고려에 처음들여온 백이정에게 배우고 당대의 대학자 권보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1301년 15세의 어린 나이로 성균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곧 과거에 급제하였다. 이 해에 자신의 스승인 권보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으며, 1303년에는 권무봉선고판관 벼슬에 올라 관직생활을 시작한다. 그 후 연경궁 녹사를 거쳐 1308년에는 예문춘추관에 선발되고 사헌규정, 전교시승, 심사판관, 서해도안렴사 등을 역임하게 된다.
1314년에는 당시 상왕으로 물러났던 충선왕의 부름을 받고 연경을 방문하여 충선왕이 세운 만권당에서 염복, 조맹부, 요수, 원명선 등의 한인 출신 대학자들과 학문을 논할 기회를 갖게 된다.
원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그는 1316년 충선왕을 대신하여 서촉의 명산 아미산을 찿아 3개월 동안 머무르기도 하였으며, 1319년에는 충선왕과 함께 절강의 보타사를 찿기도 한다. 그 후 1320년에 충선왕이 토번으로 유배되는 바람에 그는 귀국하였는데, 이 때 충선왕 방환운동을 적극 추진하여 유배지를 토번에서 감숙성의 타마사로 옮겨놓는 데 결정적인 역활을 한다.
그리고 1323년에는 유배된 충선왕을 만나기 위해 타마사를 방문해 또 한 번 중국의 외진 절경과 문화재를 둘러볼 기회를 갖게 된다. 이 같은 세 번에 걸친 중국에서의 여행은 그의 견문과 식견을 넓히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지밀사직을 거쳐 1324년에는 밀직사에 오르고, 이듬해에 첨의평리, 정당문학 등에 전임됨으로써 고려 조정의 중역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1339년 조적이 정란을 일으키고 충헤왕이 원나라에 붙잡혀가면서부터 이제현은 한동안 조적파의 힘에 밀려 정계에서 점차 멀어져갔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초야에 묻혀 <역옹패설>을 저술하게 된다.
그가 다시 정계에 복귀한 것은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하고 나서다. 그리고 1348년 충목왕이 죽자 강릉대군 왕기(공민왕)를 왕으로 추대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지만 원나라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1351년 그의 뜻대로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정승에 임명되자 공민왕의 개혁정책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1353년에는 지공거가 되어 이색 등 35인을 선발하고, 1356년 기철 등이 제거당하는 등 방원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자 사태수습에 나섰다가 뜻대로 되지 않아 1357년에 사임을 청하고 관직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그가 물러난 뒤에도 공민왕은 꾸준히 정치 전반에 대한 자문을 구하였고, 그는 적극적으로 자문에 응하였다. 하지만 정치 일선에는 나서지 않고 주로 학문에 열중하여 많은 책을 저술하였다. 또한 역사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며 민지와 <본조편년강목>을 중수하는 일을 맡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백문보, 이달충 등과 함께 흥건적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진 사료들을 보충하는 차원에서 역사서 <국사>를 집필하였다. 하지만 이 일을 완성하지 못하고 1367년 8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가 쓴 책들 중에 현존하는 것으로 <익재난고> 10권과 <역옹패설> 4권, 습유(빠진 글을 보충하는 것) 1권이 있으며, 이것을 합쳐 흔히 <익재집>이라고 한다.
이제현은 충렬, 충선, 충숙, 충혜, 충목, 충정, 공민왕 시대를 모두 거치며 관직생활을 하였으나 단 한 번도 유배된 적이 없는 대단한 정차가이기도 했다.
고려 성리학을 최초로 들여온 백이정에게 배우고 권보에게서 학문을 익혀 이곡과 이색 부자를 길러낸 대학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학문적으로는 성리학의 발전에 기여하면서 단순히 성리학에만 깊이 빠지지 않는 냉철함을 유지했고, 정치적으로는 원나라의 부마국이라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꾸준히 고려의 자주성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햇던, 현실적이면서도 지조 있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고려사>에는 그의 <국사>에 실린 사론이 종종 인용되곤 하는데, 이 글들을 부면 철저하게 객관적이면서 대의 명분과 자주성을 잃지 않는 냉철한 필치를 유지하고 있다. 이는 이제현이 일시적인 감정이나 사리사욕에 연연하지 않는 대범하고 주관이 뚜렸하며 절도 있는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 같은 그의 인품은 공민왕 초기의 개혁을 원만하게 이끌어가는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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