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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40 : 고려의 역사 209 (제31대 공민왕실록 1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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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440 : 고려의 역사 209 (제31대 공민왕실록 12)

두바퀴인생 2011. 12. 4. 04:15

 

 

 

한국의 역사 440 : 고려의 역사 209 (제31대 공민왕실록 12)   

 

 

제31대 공민왕실록

(1330~1374년, 재위 1351년 10월~1374년 9월, 22년 11개월)

 

3. 공민왕시대의 반란사건들

 

김용의 난

김용은 안성 사람으로 성질이 음흉하고 능청스러워 속을 잘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었다. 또한 오만하고 가식이 많아 미워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피해를 주었고, 약한 사람은 업신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그가 출세하게 된 배경에는 공민왕이 왕자 신분으로 원나라에 입조하여 있을 때 시종으로 공민왕을 최측근에서 보필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일찍이 여러 고나직을 거치면서 대호군에 이르렀고, 공민왕이 즉위한 다음에는 응양군 상호군 벼슬에 올랐다. 이 무렵 원나라 승상 탈탈이 공민왕에게 사신을 보내 김용의 성품이 간사하고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벼술을 주지 말 것을 권고하였는데, 이 때 조일신과 최덕림이 사신을 매수하여 반주 김용과 승지 유숙, 김득배 등이 왕의 근신으로 국정을 능락한다고 말하도록 꾸몄다. 그 바람에 유숙과 김득배는 파면되었으나 정작 김용은 공민왕의 신망이 의지하여 파면되지 않았다.

 

그 후 김용은 시종공 1등에 올라 수춘분의공신 책록을 받았으며 토지와 노비를 지급받고 밀직부사에 올랐다. 1352년 조일신이 난을 일으켰을 때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당시 그는 내전에서 숙직을 한 덕분에 요행히 목숨을 건졌으며, 그 후에도 왕을 적극적으로 보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을 면하였다.

 

그러나 조일신의 난이 종결된 다음에 왕을 제대로 보필하지 않은 죄로 장형을 당하고 섬으로 유배되었다. 그 후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장서성을 토벌할 장수를 요구하자, 공민왕은 그를 유배지에서 소환하여 안성군에 봉하고 원나라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무사히 소임을 끝내고 김용이 귀국하자 도첨의사사의 벼슬을 내려 주었다. 

 

당시 김용은 정세운, 홍의, 김보 등과 함께 공민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서로 정권을 다투고 있었다. 그런데 김보가 모친상을 당하자 은밀히 행성도사 최개를 시켜 왕에게 조정 백관의 3년 거상제도를 실시하도록 청원하라고 했다. 이는 김보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급한 나머지 그는 미처 왕의 결재가 떨어지기도 전에 도평의사사에 압력을 가하여 3년 거상제도를 실시할 것을 명령했다. 얼마 뒤 공민왕이 그 사실을 알고 그를 제주도로 유배시키고 이 제도를 폐지하였다.

 

이처럼 그는 권력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교활한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공민왕은 끝내 그를 버리지 못하고 다시 소환하여 첨의평리로 삼았다가 이어 중서문하시랑평장사로 임명하였다.

 

이 떼 김용은 신귀의 처와 간통사건에 말려들어 곤욕을 치르고 있던 중이었다. 신귀의 처 강씨는 음탕하여 남편이 지방관으로 강직당한 틈을 이용하여 많은 조정 대신들을 상대로 간통하였는데, 김용도 그 대열에 끼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강씨의 시어머니가 어사대에 며느리를 고발하자 강씨는 국문을 당하고 많은 대신들이 간음죄로 처벌되었다. 하지만 김용은 권세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파직 위기는 면할 수 있었다.

 

이외에도 김용은 살인사건에도 가담했는데, 오래 전부터 자신과 왕의 총애를 다투던 정세운이 안우, 김득배, 이방실  등과 함께 홍건적을 크게 무찌찔러 공을 세우자 이를 시기한 김용은 왕의 편지를 위조하여 안우, 김득배, 이방실 등으로 하여금 정세운을 살해토록 했건 것이다. 그 후에 김용은 안우, 김득배, 이방실에게 다시 살인죄를 뒤집어씌어 안우는 수하를 시켜 망치로 때려죽였으며, 김득배와 이방실도 살인죄로 붙잡아 죽여 버렸다.

 

이렇듯 권력을 위해서는 살인도 서슴치 않앗던 김용은 급기야 절대권력을 누리기 위해 공민왕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1363년 윤 3월 초하룻날 밤 그는 자신의 수하들과 함께 북면을 하고 당시 홍건적의 침공으로 안동으로 피난하였다가 올라오는 중 흥왕사에서 행궁을 차리고 있던 공민왕의 처소를 급습한다. 이 때  호위 인원은 모두 달아나고 첨의평리 왕자문, 판전교사 김한룡을 비롯한 10여 명이 죽음을 당하였지만 공민왕은 내시 이강달의 도움으로 간신히 태후의 밀실에 숨어 목숨을 건진다. 그리고 공민왕의 침소에는 공민왕과 닮은 환자 안도적이 대신 공민왕의 복장을 하고 누워 있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김용은 자신의 도당들을 시켜 궁중의 모든 일을 관장토록 하고 주방에 명령하여 왕의 밥상을 차리라고 하였다. 그것은 공민왕을 안심시켜 스스로 나오게 함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개경에 머물고 있던 재상들을 살해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때마침 재상들이 묘련사에 모여 왕의 복을 비는 행사에 참가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왕의 사변 소식을 듣고 순군들을 소집하여 반란 세력을 토벌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김용이 그곳에 능청을 떨며 나타나 유탁에게 반란 소식을 전하고 최영, 오인택 등과 함게 순군들을 몰고 가 자신의 수하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유탁은 역모사건이 김용의 소행임을 알고 있으면서 추이를 지켜보기 위해 그의 행동을 방관하고 있었다.

 

반란군이 완전히 진압된 후 김용은 반란사건에 대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었다. 하지만 흥왕사에 침입한 잔당 90여 명이 체포되면서 김용은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체포된 잔당들을 심문도 하지 않던 김용의 행동을 수상히 여긴 대신들의 의심을 받고 밀양으로 유배되었다.

 

그가 조정에서 사라진 후 사건의 진상을 밝혀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자 공민왕은 대호군 임견미와 호군 김두를 보내 김용을 경주로 이배시켜 안렴사 이보림으로 하여금 국문토록 했다. 이 때 김용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또 거짓말을 하다가 임견미의 끈질긴 추궁끝에 자백을 하게 되고 결국 사형틀에 올라 사지가 찢겨져 전국에 흩어지고 머리는 개경으로 보내져 저자에 효수되었다.